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 조작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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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 조작 음모론


2018. 4. 19.

1987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여객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실종된 사건이 일어났다. KAL기 (폭파) 사건이라고 하면 보통 이 사건을 의미한다. 사건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 지령에 의한 공중폭발'로 결론 짓고 사건 조사를 마쳤다. 이후 참여정부의 과거사 위원회도 동일한 결론을 내렸으며, 사망자 시신 미발견 등의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고 국가안전기획부가 대선을 앞두고 특정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잘못된 일을 저지른 것은 있지만, 북한 공작원 김현희가 지령을 받아 액체폭탄으로 비행기를 폭파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영화 마유미에 나온 폭파 재현사진>


또한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에서 선정한 7가지 사건 중 유일하게 북한과 직접 연관되었음이 확정된 사건이기도 하다. 무조건적으로 북한 소행이라고 밀어붙이던 과거사 진실위원회에서도 폭파 자체는 북한의 소행으로 결론지었다.

사건의 발생 1987년 11월 12일 북한요원 두 명은 평양을 떠나 소련 모스크바로 이동했고, 모스크바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이동하게 된다. 이후 헝가리에 주재한 다른 북한요원의 집에서 6일간 머물게 되고, 11월 18일에 자동차를 이용하여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동한다. 이때 헝가리에 있었던 안내요원이 국경을 넘으며 일본위조여권 두 장을 넘겨준다. 이후 빈에서 호텔에 약 9일간 머물게 되며 그 동안 오스트리아 항공을 이용하여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바그다드, 아부다비를 거쳐 바레인으로 가는 티켓을 구매한다. 그리고 아부다비에서 로마로 가는 또 다른 티켓 한 장을 도피용으로 구매한다. 그리고 11월 27일 다른 북한요원이 이들에게 액체 폭발물과 기폭장치 등을 건네주었고, 다음 날 바그다드 공항으로 떠났으며, 바그다드에서 아부다비로 가는 비행기에 밤 11시 30분 경 탑승한다. 이후 자신들이 앉은 7B, 7C 부근에 폭탄을 설치하고, 테러요원들은 아부다비에서 내려 도피계획을 세운다.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 국제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의 보잉 707 기종의 KE858편(HL7406)이 UAE의 아부다비 국제공항을 거쳐 서울(김포)로 오기 전의 마지막 중간 기착지인 방콕 돈므앙 국제공항으로 비행하던 도중, 인도양 상공에서 교신이 두절되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초기에는 단순 기체 고장 및 돌풍 같은 갑작스런 기상 악화 가능성이 제기되었는데, 특히 이 중에 기체 고장의 가능성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사고기인 HL7406은 10년 전인 1977년 9월 13일에는 부산을 떠나 김포로 착륙하던 중 유압장치가 고장이 나 동체 착륙한 전력이 있었고, 1987년 9월 2일 김포를 떠나 제주로 향하던 기체가 랜딩 기어 앞바퀴가 나오지 않아 비상 동체 착륙을 하는 등의 기체 결함으로 인한 사고 전력이 있었고, 수리한 후 첫 출항하여 김포국제공항으로 귀국하는 항공편이 바로 858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사고기의 고장 전력은 폭파 사건 음모론의 중요한 정황 증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보통 주변 공항 관제탑이나 공용 통신망으로 구조요청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 여러모로 의아한 사건이었기에 이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은 테러에 의한 공중폭발. 물론 TWA 800편 추락 사고처럼 전기 합선 등의 원인으로 폭발하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폭탄처럼 갑자기 뻥! 하는 건 힘들다.

대선 전날에 대한민국에 도착한 김현희. 자살을 막기 위해 재갈을 물리고 그 위에 테이프를 붙여 놓은 상태다.


조사 과정에서, 중간 기항지였던 아부다비 국제공항에서 내린 일본인 남녀 승객 2명이 출국을 시도하다 위조여권 사용으로 검거되었다는 정보를 입수 하였고, 즉시 이들이 검거되었다. 검거된 남성의 신원은 70세의 노인 하치야 신이치(蜂谷真一, 본명은 김승일(金勝一)), 여성은 25세의 하치야 마유미였다. 이들은 부녀지간으로 위장하고 있었는데 검거 후 담배갑에 숨겨두었던 청산가리 앰플을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하치야 신이치는 사망했으나 하치야 마유미는 앰플을 깨물기는 했지만 재빨리 빼앗기는 바람에 자살에 실패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위조된 일본 여권을 사용했기 때문에 일본으로 송환되어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대한민국 정부에서 청산가리 앰플을 깨물어 자살하는 것은 북한의 수법이라는 주장을 제기하여 하치야 마유미를 최대한 빨리 국내로 압송할 수 있었다. 사건 수사를 담당한 안기부는 1988 서울 올림픽 방해를 위한 북한의 테러로 결론짓고, 추가 조사를 벌여 하치야 마유미로부터 본명은 김현희이며 북한 조선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의 공작원으로서 지령을 받고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했다는 자백을 받아내었다. 또한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비롯하여 김현희가 대한항공 858편에 잠입하기 위해 경유한 나라들에서 정보를 받은 결과 북한의 중앙통신의 베오그라드 지부에서 김현희를 목격한 정보도 확인했다.


수법은 시한폭탄과 액체 폭발물을 승무원들이 발견하기 어려운 곳에 몰래 두고 중간에 내리는 수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들이 내린 이후 해당 비행기는 시한폭탄에 맞춰진 시간에 도달한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했다.

북한에 남아있던 김현희의 가족들은 김현희가 자살에 실패하자 김정일의 지시로 모두 요덕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는 1995년 성혜랑이 아들 이한영과의 전화 통화에서 얘기했던 내용이라고 한다. 또한 김정일은 자살에 실패하고 남한 당국에 붙잡힌 김현희 소식을 듣고 "여자는 요물이다" 는 독설과 함께 김현희가 속해있던 대외정보조사부(35호실)에서 여성 공작원들을 모두 방출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규정했고 김현희는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추후 음모론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막고자 일종의 살아있는 증거로 남겨 두려는 목적,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과 관련된 정보를 조금이라도 김현희로부터 더 캐내야 하는 차원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재량으로 전격 사면을 받았으며, 이후 본인의 회고록을 저술하기도 하고 가끔씩 안보 강연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등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 가고 있다. 그리고 2013년 1월 15일에는 MBC에도 출연했다.

이 사건 후, 수뇌부에서 특전사, 707특임대를 북한에 침투시켜서 북한의 핵심 표적에 대해 응징하는 보복작전을 계획했었다. 하지만 결국 작전 계획이 실제로 실시되진 못했다.

테러의 목적 정설은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테러라는 것이다. 당시에 확증은 없었지만 사건 발생 1년 전인 1986년에 발생한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을 방해하기 위한 북한의 소행으로 잠정 결론이 내려진 상황이었고, 서울 올림픽 유치 직후부터 북한은 올림픽 경기 일부를 할당해 달라는 개드립을 치고 있었으니 말 다했다. 게다가 우연하게도 KE858기는 폭파 당시 올림픽 특수 도장을 하고 있었다.


특히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자유진영이 참가하지 않았고, 1984 LA 올림픽에는 공산진영이 보이콧해 반쪽 대회로 전락해 버렸다. 1988 서울 올림픽에 북한의 우방국이었던 중국과 소련이 참가하기로 결정하면서, 다급했던 북한은 공산 진영의 참가를 막기 위해 테러를 감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 인해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직전에도 북한이 잇따라 탄도미사일을 갖고 도발한 일이 있고 해서, 유사 테러가 발생할 가능성을 생각해 인천국제공항이나 외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들어오는 국적기에 대한 보안과 경계를 임시로 강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다행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한민국과 북한이 같이 올림픽에 출전하여 평화 올림픽으로 남게 됐다.

사건 2년 뒤인 1989년에 국내 사회과학출판사 '도서출판 힘'에서 반미청년회 자주언론팀 수집 자료를 토대로 낸 책 <의혹 속의 KAL기 폭파사건>을 필두로 하여 이후 딴지일보 기사로도 다뤄진 적 있으며, 가톨릭계 뉴스인 '지금여기'에서는 안기부 소행이란 제목으로 기사가 다뤄지기도 했다.


하필이면 대선 직전의 민감한 시기에 터진 테러라서, 여당의 승리를 위한 한국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이 많이 퍼졌다. 실제 선거 승리를 위해 자작테러를 벌이는 짓은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사례가 목격되고 있으니 가능성 자체야 충분하고 시민을 상대로 계엄군 투입을 염두하던 전두환의 성격을 고려하면 인명 피해도 개의치 않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정황상 그럴 가능성은 낮다.

초기 음모론은 단순 사고로 실종된 대한항공기를 남한 정부에서 북한의 소행으로 밀었다... 는 단순한 이야기였는데, 점차 음모론이 정교해져서 사실은 남한에서 일부러 폭파시켰다로 확대되었다.

실제로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에서 새롭게 조사에 착수했을 때 이런 류의 음모론 소설이 난무했는데, 실제로 이 음모론을 밝히려고 직장까지도 포기하고 전 재산 날리신 분도 있다. 국민의 정부 당시 월간 인물과 사상에 글 올린 전직 공무원 아저씨 등 일부 유족들은 지금도 '김현희를 자신에게 직접 넘기면 진상을 밝히겠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 유족들 앞에 나타난 이철승이 대놓고 빨갱이 드립을 날리다가 스스로 욕처먹을 일거리만 늘려버린 적이 있다.

음모론의 핵심은 대한항공 858기의 탑승자 시신이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고, 블랙박스도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좌우지간 증거가 개인의 증언 뿐인데, 은폐를 위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 그러나 비단 공중 폭발이 아니더라도 망망대해에 떨어진 항공기는 파편이라도 발견하면 다행인 경우가 많다. 

또다른 의문점은 김현희의 폭약의 양에 대한 증언 신빙성이다. 범인 당사자의 증언으론 컴포지트 250g이라 했는데, 사실 이 250g이 문제가 되는 것은 폭파 효과가 아니라 은닉 수단이었다. 이 폭파 과정에서 언급된 양은 C4 350g을 파나소닉 휴대용 라디오에 숨기고, 액체폭탄인 PLX 700cc는 술로 위장했다고 언급을 했다. 그런데 C4 350g이면 파나소닉 라디오의 내부를 텅 비워야 간신히 들어갔는데, 김현희는 라디오가 정상 작동했다고 증언한 것이다. 그래서 C4 350g 설이 파기되고 250g으로 줄어들어서 다시 발표되었다. 나중에 이 분량이 안기부 추정치로 드러나기도 했는데 정형근 당시 수사본부장에 의하면, 김현희에게 들은 것은 '라디오에 고체폭약을, 그리고 술병에 액체폭약을 넣었다라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발언을 듣고 그럼 고체는 C4이고 액체는 PLX로 결정짓고, 이 정도 폭발이 되려면 얼마나 필요한가를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추정해서 용량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즉, 비행기가 터질 만한 용량을 설정한 것이 초기의 350g, 700cc였다는 것이고, 350g이 라디오에 은닉이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라디오가 정상 작동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용량이 250g이 다시 설정된 것이다.

이 폭약량의 변화에 대해서는 이후 청문회에서 다시 언급할 정도로 논란의 핵심에 서 있었다. 다만 고성능 폭약이라면 250g으로도 항공기 대파가 가능하다는 반론도 있으며 대파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치명적이기 때문에 이 점도 고려해야 한다. 순항고도에 오른 항공기는 작은 동체 균열로도 충분히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이 여러 항공사고로 증명되었고, 여압이 깨진 것만으로 조종사가 기절하여 추락한 사고도 있었기에 350g든 250g든 항공기 폭파라는 사실 자체가 뒤집힐 정도의 오류는 아니다.

폭파 지점에서 좀 먼 곳의 승객은 시신이 온전할 가능성은 있지만, 폭발 지점은 뱅골만 한복판으로 한국의 서해, 동해, 남해 면적을 합친 거보다 더 넓은 바다에서, 게다가 정확히 어디서 폭파되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신을 1구라도 찾으면 그게 더 용하다. 블랙박스 역시 마찬가지. 처음에는 태국-버마 국경 카렌족(람보4의 그 카렌족이 맞다)의 추락 목격 신고에 따라 육지 수색에만 전념하느라 7일을 허비했다. 이후 생각을 바꿔 해상 수색으로 전환하지만 3일만에 포기한다. 이유는 수심이 너무 깊고 유속이 빨라 정확한 위치를 추정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블랙박스를 찾기가 어렵고 상어 등에 의해 이미 훼손되었을 테니 시신을 찾을 가능성도 거의 없을 거라서. 물론 이 시기에 조사 내용들은 아직 노태우도 대통령이 되기 전의 정부에서 한 내용이라 100%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점이 있긴 하지만...겨우 불확실한 제보로 정글을 해맨 것은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또한 합동조사단에는 항공기 사고 조사를 담당하는 교통국의 직원들은 없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처음부터 결론을 내리고 수사한 것이라는 의심은 나올 수 있다. 
또한 문제가 되었던 것이 유류물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비행기 폭파는 확실했고, 김현희도 잡아놨는데 폭파된 비행기의 파편이 발견되지 않으니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 선거가 코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민정당의 똥줄이 타들어가는 상황, 이때 증거물 2가지가 발견되는데 이건 천안함 1번 어뢰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논란을 일으켰다.


첫 번째는 한국 배 다곤 1호에서 발견한 구명보트였다. 여기서 발견한 배의 국적을 왜 강조하느냐면 당시 버마 정부는 사고 해역에 선박 1400여 척, 쾌속정 4척, 전투기 28대, 민간 비행기 8대, 경비행기 1대를 동원해서 수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최초 발견자는 지나가던 한국 선박, 그것도 느려터진 화물선이었으니...

당시 가장 유력한 유류품이라고 발견된 이 노란색 구명보트는 인조피혁으로 제조된 것이었는데, 개어진 형태였으며 내부의 49가지 물품도 멀쩡하게 발견되었으나, 공중 폭발 시의 파편이 공기압축펌프만 파손시킨 상태였다. 당시 유일한 증거품으로 제시된 이 구명보트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유류품은 사건 이후 2년이 지난 상황에서 발견되었다. 이번 발견품은 기체 파편. 가장 발견 확률이 낮은 기체 파편, 그것도 정확하게 증거가 되는 자료만 딱 발견된 것이다. 일본 아사히 TV에서 미국 MIT 대학 항국우주학과 존 한스만 박사는 이 파편에 대해서 폭발로 인한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이 자료는 서둘러 폐기해버려서 또 한 번 의구심을 모았다.


이 모든 음모론의 중심에는 김현희 본인에 있었다. 김현희는 정말 그 철저하게 훈련받는 북한공작원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 오락가락하였고, 행적에 의문이 많았다. 앞서 언급한 폭탄 양에 대해서도 김현희의 입에서 나왔고, 김현희가 증언한 사소한 개인사는 모조리 거짓으로 밝혀졌다. 조작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 거짓으로 밝혀지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예를 들어서 북한 내 주소를 평양시 문수구 문수동이라고 했는데, 평양에는 문수구역이나 문수구, 문수동이 없었다. 부친의 직업을 앙골라 주재 북한무역대표부 수산대표라고 밝혔는데, 이 역시 북한에 없는 직책이었다. 가장 압권이 김현희 사진조작 사건이었다.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주장의 핵심은 북한에서 찍은 사진에 김현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때 증거로 나온 것이 사진 3장이고, 김현희는 자신이 4번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북한 출신인 정희선이 4번은 자신이고 3번은 김송희라고 밝히면서 거짓이 증명되어 버렸다. 이 후 이 사진 3가지는 변조다, 아니다, 누가 누구다 하고 말이 엄청나게 많았다. 현재는 김현희는 3번으로 추정되면서 김현희가 북한에 있었던 것은 맞는 것 같다라는 중간결론이 나왔다. 다만 당시 꽃을 받은 인물이 왜 이동복이었다가 장기영으로 바뀌어서 알려졌으며, 김현희는 왜 자기를 잘못 지목했는지, 그리고 진짜 저 3번째가 김현희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와 같이 굳이 속일 필요없는 것으로 보이는 자신의 유년 시절 및 가족 관계와 같은 정보의 진위성에 대한 의문으로 인해, 사건이 정부측에서 꾸민 것인지 여부와는 별개로, 일부에서는 김현희를 중심으로 한 사건 진상 재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한국의 자작극이라면 미국이 그렇게 쉽게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선정했을까? 당장 참여정부시절에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 조사결과 정치적으로 이용되긴 했지만 테러는 맞음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북한이 실수로나마 이 사건을 일으켰음을 시인했다고 한다. 내용인즉슨 북한의 리근 외무성 미국 국장이 우리 측 관계자와 사석에서 대화 중에 "우리는 KAL기 폭파사건 이후로 테러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라고 발언했다는 것인데, 잠깐. 그럼 KAL기 폭파 사건은 지들이 했다는 거 아냐?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 당시 고인드립 만평으로 물의를 빚었던 백무현 화백의 만화 전두환에서는 정권을 까기에 급급한 나머지 이 음모론을 완전히 역사적 사실인 마냥 그려놓고, 정작 테러 혐의와 관련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는 무책임함을 보였다. 그것도 버튼 한 번 누르니 원격으로 비행기가 폭발하는 완전 만화 같은 전개.

사실 이 음모론이 긴 생명력을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때마침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의 진실이 폭로되어 국정원의 신뢰도가 바닥을 기었던 것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무지개 공작"이라는 것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북한의 소행인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적극 활용하자라는 기획이 있었던 것. 그것으로 김현희를 대선 직전에 송환시킴으로서 불리한 대선형국을 뒤집었다는 것이다. 이는 국정원 진실조사 위원회의 재조사에서도 사실로 확인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을 추적한 일본 기자를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한국 입국을 막아버린 것도 음모론을 부채질했다는 지적이 있다. 그리고 김현희가 어린 시절 화동을 했다라고 했다가 논란을 일으킨 사진에 대해서 나중에서야 실수라고 번복했기에 음모론을 정부가 더 만들었다는 지적이 많다.

또한 김현희가 결혼한 상대가 사건 당시의 수사관인 것과, 항공기 폭파 사건을 일으킨 게 사실이라면 왜 사형 당하지 않았냐는 것, 그리고 그 당시 땡전뉴스이던 언론들이 김현희에게 묘하게 호의적이었다는 것도 있다.

당시 사건 담당 공안검사였던 이상형 변호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철저한 증거주의 및 논리에 입각하여 김현희의 선고가 이루어 진 것이며,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고 재판에서만 공개된 확실한 증거들은 훨씬 많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사진의 경우 문제가 있었던 건 맞지만 곧바로 제대로 된 다른 사진이 확보되어 실제 증거 확보에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음모론에서 자꾸 물고 늘어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며, 김현희 압송 시점 또한 대선을 하루 앞둔 것은 바레인 당국에서 압송 허가를 내줬을 때 시점이 하필이면 그때였고, 가뜩이나 어렵게 이뤄낸 허가인데 압송을 곧바로 진행하지 않았다간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다 보니, 국내 일정과는 관계 없이 가능한 대로 당장 데려오는 것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김현희를 압송해서 국내 공항에 도착하는 장면을, 그것도 선거 전 날에 공개적으로 생중계한 것을 볼 때 이 부분은 대통령 선거를 의식한 작전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리고 사형 당할 김현희가 갑작스레 사면된 이유는 그녀 자체를 살아있는 증거로 남기고자 했던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결단 때문이다. 김현희가 재판 받을 당시에 이미 안기부 측에서 일본 조총련과 연계된 좌파 운동권 계열을 중심으로 김현희는 가짜라는 내용을 필두로 하는 이 사건의 음모론이 시작되는 것을 감지했었으며, 이를 보고 받은 당시 대통령인 노태우는 추후 음모론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막고자 대통령의 재량으로 김현희를 사면시켜 안기부의 보호를 받으며 안보강연 등의 활동으로 살아가게 만든 것이다. 만약 정말 안기부가 그녀를 이용해서 조작을 했다고 친다면 차라리 사형 집행을 서둘러 하여 영원히 입막음하는 게 훨씬 더 완벽했다.

만약 당시 김현희가 곧바로 사형되었다면 음모론은 그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식으로 변형되어 퍼졌을 텐데, 오히려 이건 정말 음모론 중에서도 탄탄한 기초가 되기 때문에, 실체적 진실을 알지 못하는 미궁으로 빠지고 북한의 테러라고 믿는 쪽과 안기부의 조작이라고 믿는 쪽이 극심한 대립을 하며 사회 혼란만 가중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혼란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도 사건이 더더욱 입에 오르내리며 유가족들은 더더욱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물론 살아있는 증거로 남기고 싶었다면 굳이 사면이 아니더라도 특별감형으로 죄에 대한 대가는 치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음모론과는 별개로 '김현희 덕에 선거에서 이겼으니 고마워서 사면해준 것'이라고 비꼬는 의견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측면보다는 당시 상황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불가피성이 작용했음을 감안하는 편이 좋다. 사면 과정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김현희의 감형안도 거론되긴 했었으나, 수감 중 심경의 변화가 생길 수 있고 관리가 어려우며 감형 후 다시 사면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세 가지 이유로 사면이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사건은 조작되지 않았지만, 당시 안기부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불필요한 행동을 한 게 음모론을 부채질했다고 볼 수 있을듯하다.

노무현 정권 때 이미 '북한의 테러'라고 결론이 났기에 그 이후에는 정부의 음모론 같은 걸 믿는 사람은 진보진영에서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없다. 한겨레 같은 곳에서도 기사와 같이, 김현희 자체는 진짜임을 전제한다. 자주민보, 미디어오늘 같은 언론에서 항공기 테러 자체가 당시 안기부의 소행이라는 음모론이 나오긴 하나 믿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무고한 민간인들을 대량 살상한 테러범인데도 혼자 살아남아 반공의 투사이자 아이콘마냥 활동하는 김현희의 행동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김현희가 언급되면 사람을 그리 죽여놓고 정권의 비호하에 살아났으면 조용히 있으라는 말이나 리플이 수시로 나오는데, 어찌보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녀가 큰 죄를 저질렀음에도 살아남아서 얼굴을 내밀면서 욕을 먹는 것이 바로 평생의 업보이자 죄값을 치루는 셈이다. 

이런 비난의 여론도 다 업고 가면서도 그녀는 유족들에게 끊임없는 사죄를 하며 자신의 죄값을 치루는 행보를 이어왔으며, 특히 2000년대 초중반 음모론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까지 보내다 보니 얼마든지 자살을 생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고, 이후 외부와의 접촉을 재기하고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끝까지 살아남아있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죄값을 치루고 유족들을 위한 길이라 생각한다는 신념을 밝히기도 했다. 다만 아래 링크된 월간조선의 기사에서 보이듯, 엄연한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참여정부 등의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여론의 반감이 심한 편이다. 그리고 언론에 나타나서 국민과 유가족의 어그로를 끌지 말고 조용히 지내는 것이 진정한 사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듯.

이승복 어린이 사건의 경우도 이 KAL 858 사건과 상당히 흡사하다. 세세한 음모론에, 심지어 사건 자체에 대한 조작설이 난무하였으나 두 사건 모두 북한의 소행임이 명확하게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