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 참가한 이학영
본문 바로가기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 참가한 이학영


2017. 11. 22.

이학영
순창농림고등학교, 전남대학교 졸업.


학창시절에는 516장학재단의 장학금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시절까지는 사실 자신에게 장학금을 준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던 소년이었다고 한다.

원래 어릴적 꿈은 시인이었다가 고교시절에 공무원이나 군인이 되어 가족들을 부양하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게 되었다고 하는데, 결국은 대학에 가서 3학년때 학생회장이 되고 학생운동을 하게 되다가 국가권력에 핍박받게 되면서 그뒤로 계속 운동권 인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학생운동은 의도치 않은 계기에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평소 데모같은 것에도 별 관심도 없이 학교를 다녔다가 학생운동을 하는 친구를 잘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안기부에서 억울하게 붙잡혀서 고문을 당한 것이 학생운동에 입문하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서 공무원을 꿈꾸면서 학생운동을 멀리했던 시절, 다른 남학생들이 죄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학생회장을 떠맡았는데, 이 때문에 수사관에 잡혀가 각목으로 구타를 당하고 손발과 손가락을 묶고 얼굴에 수건을 씌워서 물고문을 당하고 구속까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풀려난 후 국가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에 혼자 통곡했던 경험을 필리버스터 정국 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받는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약칭 남민전)에도 가담하여 70년대 말 민투위 강도 사건의 주범중 한 명이 되었는데, 당시 남민전은 '민주화 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자택에서 절도를 시도하였다. 27세였던 이학영은 당시 25세였던 차성환과 절도 선두대였는데, 차성환의 회고 인터뷰에 의하면 현관문을 열자 제지하는 경비원을 차성환 자신이 과도로 찔렀고 곧 경찰이 출동하였지만 본인은 도주에 성공하고 이학영만 현장에서 붙잡혀 본인의 몫까지 이학영이 옥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단 남조선민족해방전선 활동이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받는 것이지, 강도 상해 행위를 민주화 운동으로 본 것이 아니다.

198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하였다. 당시도 사회운동 중이라서 조카의 이름으로 등단했다고 한다.


저서

마음을 비추는 달(1994)

눈물도 아름다운 나이(1998)

사람의 바다(2002)

강(2003)

꿈꾸지 않는 날들의 슬픔(2009)

세계가 만약 하나의 집이라면(2011)

이학영, 세상을 사랑하였네(2015)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우리의 주인 되신 분들이 와서 앉아 계십니다. 그분들은 세금을 낸 주인들이십니다. 방호과 직원 여러분, 여러분은 주인을 모시고 있는 겁니다."
"신체에 해를 가하지 마세요''

"인생에 한 번뿐입니다."



2016년 2월 28일 12:22부터 국민의당 권은희의원에 이어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 45번째 토론자로 참가, 2016년 2월 28일 10시 55분, 10시간 33분에 걸친 필리버스터를 종료하고 같은 당 홍종학 의원에게 차례를 넘겼다.

과거 이야기를 하며 젊었을 때 유신정권에 의해 억울하게 죄도 없이 끌려가 고문을 받은 일과 민투위 강도 사건등 젊은 날의 우여곡절을 이야기 했는데, 내용이 꽤 자세하다.

여러 편의 시를 낭송하고 이에 대한 해석을 활용하여 여당의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을 비판해 화제가 됐는데, 이는 그의 전공이 국어국문학과였고, 문학계에 등단한 시인이라서 그랬다고 한다.
여담

2016년 6월 17일 전남 무안에서 발생한 경비행기 사고로 아들을 잃었다.

더불어민주당의 당내 상설위원회인 을지로위원회의 우원식 위원장이 위원장직을 인계함으로써 2대 위원장이 되었다. 19대 국회 당시 김기식 의원과 함께 정무위의 저승사자로 불렸던 만큼 재벌대기업으로부터 유리한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