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상도동계 정치인 정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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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상도동계 정치인 정병국


2017. 11. 20.

정병국

현재 바른정당 자강파 의원 중 한 명.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바른정당의 초대 대표이다.


정치 입문 전


1958년 2월 10일,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당시는 여주군)에서 태어났다. 개군국민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서울로 전학을 갔고, 이후 서울 용문중학교, 서라벌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정병국은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공부하기를 희망하였으나, 개군국민학교에 재학 중이던 1969년에 교육제도가 바뀌게 되어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입학 1년 전부터 서울에 거주해야 하게 되었다. 이에 정병국은 서울로 이사가기를 원하였으나 아버지는 완강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정병국의 강한 의지를 꺾지 못하였고 마지막 날에 간신히 서류처리를 완료하게 된다.

1978년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입학 직후부터 학생운동을 하다가 경찰의 수배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이를 피해 포항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중 1979년 10.26 사건를 접하고, 곧바로 상경하여 다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특히 전국 총학생회 부활 준비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는데, 그의 의지대로 총학생회는 부활하고 있었지만 1980년 5·17 군사정변 직후 신군부에 검거되게 된다. 신군부에서는 군 입대 또는 투옥 중에 선택할 것을 강요했고, 정병국은 대한민국 해병대 입대를 선택, 헌병으로 사병복무를 하게 된다.

전역 후 복학하여 1984년에 성균관대를 졸업,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을 펼친다. 정병국은 수배를 받으면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세인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서울 지역 대학교 총학생회에서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인쇄물을 공급하였고, 군사 정권과 투쟁하는 학생들을 꾸준히 지원하였다. 1987년 6월에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검거되어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고문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6·29 선언이 일어났고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민추협) 소속 변호사들이 변론을 자청하며 도움을 받은 바 있다.




정계 입문 후

민추협과의 인연을 계기로 정병국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도우며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이후 1988년부터 1990년까지 통일민주당 총재비서관을,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민주자유당 대표비서관을 역임한다. 김영삼 정권 때는 청와대 제2부속실장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나이 36세로 당시 임명된 비서관 중 가장 젊은 나이였다. 

청와대 제2부속실 근무 중에 미국 국무부의 공식 초청으로 IVP (International Vistitors Programme)에 참가했다. 이 행사는 김대중, 김영삼, 김근태, 이부영 등 당대의 이름있는 정치인들도 참가한 것으로, 여러 나라에서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초청된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기도 양평군-가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남경필, 원희룡 등과 소장파의 대표격으로 활동하여 남-원-정 트리오로 이름붙여졌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며 친이계 정치인이 되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0년 초 한나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치러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부진한 결과를 얻자 사무총장직을 사임하였다. 2010년 제18대 국회 후반기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장에 선출되었다. 2011년 1월부터 같은 해 9월까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하였고, 재임 중에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한다. 또한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해 국보급 문화재인 외규장각 의궤를 환수받았으며, 한류의 확산을 촉진하기 위해 재외 한국문화원을 24개까지 신설하며 K-POP, 드라마 등 한류 확장을 꾀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경기도 여주군-양평군-가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선 후 2013년 새누리당 지역공약실천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역대정부 최초로 대통령의 공약에 대한 실천 로드맵을 구성하였다. 또한 여야 의원 56명이 가입된 국회 최대의 의원단체인 인성교육실천포럼의 상임대표를 역임하며 세계 최초로 인성교육을 법제화한 인성교육진흥법을 제정했다. 이어 국회 군 인권 개선 및 병영문화 혁신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관련예산의 증액을 주도했으며, 병영 독서운동의 확장을 위해 격오지 독서카페 나눔 운동을 주도하였다. 정병국은 19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으로 한국식 공공외교 확장에 앞장섰으며, 국회의원축구연맹 회장으로 한일 국회의원 축구대회를 개최하며 한일 정상회담 개최의 포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경기도 여주시-양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6년 8월에 예정된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경선에 출마를 선언했다. 김용태, 주호영 의원과 함께 비박계 주자로 나섰다가 7월 29일자로 김용태 의원과 단일화를 합의하여 비박계 후보는 정병국과 주호영 2명이 되었다. 8월 5일에는 주호영 의원과 단일화에 합의하여 사퇴하였고, 비박계 단일 후보로 주호영 의원이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주호영 의원도 이정현 의원에게 큰 표차로 패배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이를 수습하기 위한 새누리당 비박계 중진 의원들의 모임인 비상시국회의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결국 비박계를 포함한 새누리당 의원 35명은 탈당을 결정했고, 정병국은 바른정당(당시 가칭 개혁보수신당)의 창당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발기인 대회를 거쳐 창당준비위원장으로 공식 추대되었고 창당과 함께 초대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2017년 1월 11일, 이명박계 정당인 늘푸른한국당에 축하 인사 차 찾아와서, 이재오, 정운찬, 최병국에게 반갑게 인사한 다음, 이재오와의 인연을 언급하며 축사를 낭독했다.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된 가운데 분당 창당 탄핵까지 소임 다했다며 바른정당 당대표직에서 사퇴하였다. 따라서 주호영 원내대표가 대표권한대행을 겸하게 되었다. (이후 6월 26일 이혜훈이 새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수천만원 금품수수 의혹으로 낙마하고 다시 주호영 원내대표가 겸하게 되었다.)

기타

동안에 미중년이다. 2017년 현재 한국 나이로 60세인데, 젊어보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했던 연극 환생경제에 출연했던 인물 중 한 명이다. 깍뚜기(5000년 역사 바로 세우기 위원장)역이 바로 정병국이다.

19대 대선 이후 '나는 반성한다-다시 쓰는 개혁보수'라는 책을 냈다. 왜 보수정당과 보수 정치인이 몰락 하고 청년층에게 버림 받았는지에 대한 설명과 반성, 어떻게 보수가 다시 인정을 받을지에 대한 대안을 적은 참회록이다. 여담이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자유한국당에서는 이 책을 두고 카오스가 열렸다.

김현철의 장남(즉, 김영삼 전 대통령의 손자)이 얼마 전부터 그로부터 정치 수업을 받고 있다고 한다. 재밌는 건 정작 김현철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라는 점.

바른정당에서는 유승민, 남경필, 하태경, 지상욱 등과 함께 자강론자로 꼽힌다. 같은 친이계인 주호영은 통합론자였고, 결국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하게 되었다는 점을 보면 의외라면 의외겠지만, 애당초 정병국의 경우 친이계 내에서도 이질적인 인물이었다 보니 딱히 신기할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