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새로운 차르 블라디미르 푸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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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새로운 차르 블라디미르 푸틴


2017. 9. 2.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연방의 전·현직 대통령이자 총리. 1999년 12월 31일 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한 이래 2017년에 이른 현재까지 총 18년에 달하는 기간동안 집권하고 있는 독재자이다. 정식으로 연방 대통령을 맡은 뒤 3선 연임이 금지된 헌법을 피해 부총리였던 메드베데프를 대통령에 앉혀놓고 자신은 총리직에 취임하여 여전히 실권을 장악했고, 3선 개헌을 한 뒤 다시 대통령이 되었으므로(메드베데프는 총리로 다시 옮겨갔다.) 앞으로 두 번 더 선출될 수 있다. 2016년 총선에서 그의 정당인 통합 러시아당이 의석을 과반수 차지 함으로써 그의 영향력이 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통합 러시아당의 실질적 당수이기도 하다. 물론 통합 러시아당의 법적 당수는 메드베데프이지만, 사실 메드베데프가 당수인 이유는 당정분리를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에 불과하다. 현재는 파나마 페이퍼즈 사건으로 인하여 그의 최측근인 세르게이 롤두긴과 아르카디 로텐베르크가 파나마의 서류상 회사인 페이퍼 컴퍼니를 세워 돈세탁을 했다는 혐의가 있음에도 그와 최측근은 부인하고 있으며 블라디미르 푸틴은 CNN의 인터뷰에서 "저는 부인하고 있지만 이것은 서방 (미국과 서유럽을 포함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잘못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본인의 세계적 영향력이 강한 것도 있고, 상대에게 자극을 주는 성격이라 일부러 다른 나라 높으신 분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중요 자리에도 수시로 늦는 등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예의 없는 행동들을 한다. 12월에는 일본 아베 총리와 만남을 앞뒀으면서 2시간을 지각했고 과거 일본이 선물로 보내준 대형견을 데리고 나왔다. 일본 기자는 요시히데 관방장관에게 "일본에 압박을 가한 행위냐"고 묻자 "절대 아니다"라고 되려 푸틴을 변호했다. 과거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만날때도 대형견을 데리고 나와 비판이 있었다.

이런 성격 때문에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호불호가 갈린다. 그러나 러시아의 국민 대다수는 이런 강경하고 거친 모습의 푸틴을 좋아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에 호구 취급 받지 않고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푸틴에 대한 지지는 대단히 높은 편이다. 여담으로 푸틴은 도널드 트럼프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외 러시아 국민들도 트럼프를 지지하고, 러시아 정치 전문가들도 트럼프를 지지했다. 이에 푸틴과 트럼프는 미국과 러시아의 강력한 동맹을 촉구하며 신흥강자인 중국을 견제할 생각이며, 그러면 북한 또한 난처해진다. 여하튼 직접 동구권의 붕괴를 지켜본것도 있고 해서 우파성향이라고는 하지만 그런것 치고는 사람 사귈때 이념은 가리지 않는 모양인지 의외로 좌파에서부터 우파에 이르는 인사들까지 다양한 인사들과 친분관계가 있는 편으로 니콜라스 마두로에서부터 슈뢰더, 프랑수아 피용등이

푸틴과 친분이 있는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사실 러시아에서도 푸틴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성향을 봐도 소련에 대한 향수가 강한 노년층에서부터 극우인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을 포괄한다.


2013년~2016년 4년 연속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름이 길어서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 다소 논란이 있는데, 일단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이라고 표기하면 되고, 러시아어 발음은 구개음화와 강세로 인한 모음 약화로 인해 '블라지미르 블라지미라비치 뿌찐'이 된다.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그의 아버지 이름 또한 블라디미르다. 푸틴 집안의 블라디미르의 아들 블라디미르인 것.

어린 시절

부모가 모두 독소전쟁의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아버지는 소련 해군 수병 출신으로 NKVD에서 근무하다 레닌그라드에서 중상을 입은 상이군인이며, 어머니 역시 친정 식구들이 전쟁통에 모두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참극을 겪었다. 이들이 가진 첫째 아이는 어릴 적에 일찍 죽었고, 둘째 아이는 레닌그라드 봉쇄 중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그렇게 폐인이 된 30대 부부만이 살아남아 전쟁 후에 마흔이 넘어 가까스로 낳은 아들이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좀 이색적인 가족력으로는, 친할아버지가 한때 공산당 최고 고위층(즉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 등)의 요리사였다 카더라.



1952년 10월 7일 소련 레닌그라드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쥐들이 지나다니는 소련 노동자들의 낡고 허름한 공동 주택에서 자랐다.

그는 일찍부터 첩보원을 동경하였고, 레닌그라드국립대학 법학부 졸업과 동시에 1975년 KGB 요원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동독의 드레스덴 KGB 지부로 파견 근무를 명받았다.

KGB

"There is no such thing as a former KGB man."
"세상에 전직 KGB 요원이란 건 없습니다."

전직 KGB 요원으로 첩보 활동에 대한 세간의 환상이 있고 실제로 해외에 파견되기도 했지만 업무는 연락 등에 그쳤다고 한다. 007로 대표되는 자극적인 첩보원과는 거리가 있는 셈. 그래도 첩보원이므로 연락의 내용은 충분히 위험할 수 있다.


2009년 3월 16일에 로널드 레이건의 전속 사진가 피트 수자가 푸틴의 젊은 시절(36세)이라고 공개한 사진. 관광객인 척 위장하고 근무했던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알려져 있다시피 푸틴은 드레스덴에서 산업 스파이와 스파이 모집을 하였기에, 당시 모스크바에 있는 것은 말이 안된다. 고로 저 사진 속 인물은 푸틴이 아니라 닮은 인물인 셈. 주한 러시아 대사관도 이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푸틴에 대한 영웅주의와 함께 널리 퍼진 오해.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러시아 TV와의 인터뷰에선 "성난 동독 사람들이 슈타지(동독 비밀경찰) 건물로 몰려들 때 나는 그곳에 있었고 '난 통역'이라고 말해서 위기를 넘겼다"라고 말했다. 긴급상황이라 KGB의 명령을 기다리기 위해 모스크바 본부에 연락을 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동독 파견 도중 동독 공산당과 호네커의 몰락,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본 푸틴은 자본주의의 필요성과 소련의 몰락에 염증을 느끼던 중 큰 꿈이었던 KGB를 그만 둘 결심을 하게 된다. 아나톨리 소브차크를 만나면서 자신의 과거(KGB)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 그를 따르기로 하고 KGB에 사표를 제출한 뒤 출근도 안 했지만 정작 본부에서는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시장으로 재임했고, KGB는 사표를 수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8월 쿠데타가 일어나 보수파 측은 KGB인 그에게 동참을 권유했으나 푸틴은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푸틴은 이미 동독에서 공산주의가 망하는 과정을 보고 왔기에 보수파의 허황된 쿠데타는 실패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사표가 수리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크루치초프 KGB 국장과 그의 부서 부장에게 사표를 수리해 달라고 요청 하여 KGB를 나오게 된다. 부시장으로 있던 푸틴이 일하는 건물에 공산주의자들이 함부로 들어와서 신경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공산당의 상징인 적기를 공산주의자들이 게양하자마자 푸틴은 전기톱을 가지고 와서 적기가 걸린 깃대를 아예 잘라버렸다고 한다. 부시장 재임 직후, 아나톨리 소브차크 시장이 시장 선거에서 패배하자 부시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시기에는 은근히 푸틴에게 불행한 일이 많았다. 아내인 류드밀라가 교통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었고 새로 지은 집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 불행을 겪던 중 소브차크 대신 당선된 새 시장이 자신의 휘하로 일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KGB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보안국의 장관으로 재직하였다. 재직한 연도는 1998년. 1999년 8월 보리스 옐친에 의해 총리로 깜짝 발탁되었다.

총리 취임 초기에는 옐친처럼 냉소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체첸 전쟁에서 반군들에게 강경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동안 졸전에 지친 러시아 국민의 지지가 급상승하여 12월 총선에서 예상을 깨고 친 옐친 정당이 총선에서 선전을 거두는 데 일조하였고 그 공로로 차기 대권 주자 자리를 확보한다. 그리고 12월 31일 보리스 옐친이 건강 문제로 사퇴하면서 푸틴에게 직위를 넘겨주어 2000년 5월까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으며 2000년 3월 대선에서 53.9%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고 정식으로 대통령직에 오른다. 옐친이 건강이 좋지 않았던것도 사실이지만 옐친이 12월에 조기 퇴진한 이유는 차기 대선 후보로 내정된 푸틴의 압박 때문이다. 당시 푸틴은 체첸 반군과의 싸움을 빠르게 끝내야만 했다. 당시 러시아군은 푸틴의 무리한 공격 요구에 많은 피해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푸틴은 12월에 전쟁을 끝내면서 자신의 지지율이 높을 때에 대통령이 되고자 옐친을 반강제적으로 밀어내고 대통령이 된다. 다만 옐친은 어차피 몇 달 더 재임해봐야 푸틴의 지지율이 떨어져서 공산당 대선후보인 주가노프가 대통령이 되어서 자신이 깜빵에 보내지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사임안을 받아들였다. 그 대신 물러나는 조건으로 퇴임 후에도 자신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푸틴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옐친에게 퇴임 후에도 면책 특권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옐친과 푸틴의 사이는 그런대로 괜찮았고, 장례식도 꽤 성대하게 치러졌다. 다만 푸틴 초창기에 총리를 지내다가 2004년 대선을 앞두고 총리직에서 해임 당한 뒤,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한 카시아노프에 의하면 말년의 흐루쇼프처럼 풍족하지만 도청장치가 설치되어있어서 전화도 맘대로 못하는 불편한 삶을 살았다고 하고 옐친도 사석에서 은근히 푸틴을 까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개적으로 푸틴에게 비토를 날린건 아니며, 소련 붕괴 이후로 쭈욱- 푸대접을 받는 고르바초프에 비하면 월등히 나은 대우를 받은 건 물론이고 대통령 시절의 행적과 평판을 고려해보았을때 과분한 우대를 받은것도 사실은 사실이기에 즉, 애증관계라고 보면된다.

역시 KGB 출신이라 그런지 사격 자세도 장난 아니다.


여담이지만, 그가 동독 지부에 있으면서 세계의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며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제력, 기술력 격차로 개혁의 불가피성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1급 정보를 KGB 본부에 보냈지만 그 정보를 경제력의 약화로 기술을 구현하지 못해 폐기 처분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미지 구축을 위해 자주 이런 쪽으로의 이미지를 어필하는 홍보 사진이나 영상물을 간간이 공개하고 있다. 야외에서 웃통 까고 캠핑하는 모습이라든지, 아래의 비행기 조종이나 무술 등등. 지난 대선 때는 폭주족처럼 오토바이를 끌고 오는 퍼포먼스를 하였는데, 당시 언론보도에 의하면 이젠 좀 식상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러시아인들도 상당수.

집권 0, 1, 2기

1999년 12월 31일, 전임 보리스 옐친이 2대 대통령 임기를 수행하던 중 건강 악화로 사임함에 따라 당시 총리였던 푸틴이 대통령 권한 대행을 수행하며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2000년 실시된 대선에서 53.44%를 득표, 제3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 1기를 보냈던 2000년대 초반에는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총리의 노선을 이어받아 서방국가와 등거리 외교를 맺으면서도 서방 여러 지도자들과 순수 친분관계를 맺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올리가르히(олигарх)들을 척결하였고, 석유와 천연가스 가격 상승을 기회로 삼아 옐친 시절 막장화 되었던 경제와 사회복지제도를 재건하면서 소련시절을 그리워하던 러시아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2003년 총선과 2004년 대선에서 인권탄압과 언론통제에 대한 비판에도 연달아 압승을 거두며 재선하였다. 그리고 대통령 2기 집권기 들면서 이라크 전쟁으로 쩔쩔매던 미국에게 군사력으로 으름장을 놓고, 반미 성향의 국가들과도 손을 잡으며 미국과 외교적으로 대립하기도 했다. 현재 목표는 냉전 시기의 소련의 위상으로 러시아를 돌려놓는 것. 보리스 옐친의 집권 기간 동안 많이 피폐해진 러시아의 정치, 군사, 경제면을 다시 안정기로 돌려놓았으며, 그래서 한편으로는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집권 3기

대통령직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올려두고 자신은 총리로 재임하기도 했지만, 메드베데프는 순전히 푸틴이 대통령 자리를 불가피하게(3선 금지) 비워야 할 때 잠시 대통령 자리를 맡아두고 있는 허수아비나 다름이 없고, 심지어 푸틴이 휴양지에서 마신 커피 값을 대신 내기까지 하는 등 직책에 관계 없이 푸틴이 여전히 권좌를 차지하고 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국가 긴급상황시에는 여차하면 대통령이 내려오고 푸틴이 집권하는 것도 가능하였다고. 독재국가의 최고권력자는 독재자 그 자신임을 보여주는 예. 무아마르 알 카다피 치하의 리비아만 하더라도 카다피 본인이 공식적인 직책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과 비슷하다. 


그리고 2011년 9월,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 전당대회에서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푸틴을 2012년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천했고, 푸틴은 이를 받아들였다. 
푸틴이 총리 자리로 물러난 이후에도 여전히 60% 이상의 지지도를 가지고 있고, 사실상 그의 카리스마나 인기에 대적할 야권 후보가 나오지 못해서 그의 당선이 유력시되었다.

2011년 러시아 총선에서 무려 140%가 넘는 투표율이 나오자 그 배후인물로 거론되며 서구권에서 온갖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2012년 3월 5일 대선에서 60%가 넘는 득표율을 보이며 당선되었다. 그의 독재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았지만, 그의 대항마가 될 수 있는 확실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 당선의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그리고 이론상으로는, 그리고 별 탈이 없다면 푸틴은 2024년까지 대통령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새로운 인물이 나오지 않는 이상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시 푸틴의 승리 연설이다. 참고로 영어 자막이 달려있다.

그런데 체첸에서 푸틴의 득표율이 107%인 지역이 나왔다 뉴욕타임즈의 보도로는 해당 지역의 유권자는 1389명인데 푸틴의 득표는 1482표. 덧붙여 겐다니 쥬가노프가 한 표를 받았다. 같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여러 투표소를 돌아다니며 표를 넣었다고 한다. 또 부정선거


결국 2012년 5월 7일, 푸틴은 대통령직에 복위(개헌으로 임기 6년에 연임 가능)를 하였다. 그리고 전임 대통령인 메드베데프를 총리로 내정하고 의회의 인준을 기다렸다가 하루 만인 5월 8일에 인준이 승인되고 푸틴의 3기 행정부가 구성되었다.

최근 러시아 '여론 재단'이 '오는 일요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면 누구에게 투표하겠는가'라는 질문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5%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링크, 러시아인 10명 중 7명 "다음 대선에 푸틴에 투표하겠다". 그리고 경제난에서도 차기 지지율 83%를 차지했다.

2017년 6월 29일에 푸틴은 잠재적인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더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과의 관계

그 밖에 외교적으로 부시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였다. 공식 석상에서 부시는 자주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우려하는 발언을 했는데, 거기까지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 부시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푸틴에게 추천하였고, 푸틴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이라크 꼴이 되고 싶지 않다고 너스레를 떨어 기자들이 폭소하는 등, 부시를 공개적으로 망신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시와 아주 불편한 축까지는 아니고 사실 2004년 대선때는 이라크 테러범과 맞서기 위해서는 부시를 지지해야된다며 부시를 지지한 전적도 있기도 했다.

존 매케인은 푸틴에 대해 "나는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세 글자를 보았다. K, G, B"라고 평한 적이 있는데, 푸틴의 행적을 보면 이걸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과거 KGB 고위 관계자들은 현재 푸틴의 측근들로 활동하고 있다. 애당초 존 매케인의 발언은 푸틴의 경력을 비꼰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과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하고 나서는, 미국은 유럽 연합과 함께 푸틴과 그의 측근들을 공략한 경제 제재를 도입했다. 미국의 셰일가스 혁명 이후로는 사우디의 석유 경쟁으로 유가가 폭락하면서 러시아의 경제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설상가상으로 2016년 미국 대선에 러시아 개입이 수면 위로 올라오자, 오바마 대통령과 상원 모두 러시아의 선거 개입 조사를 명령했고, CIA는 2008년부터 러시아의 선거 개입이 있었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에 오바마는 36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시켰고, 러시아 첩보의 중심지로 의심되는 두 개의 영사관을 폐쇄시켰으며, 경제 제재를 확대시켜 푸틴 관련자들 전체를 압박했다.

예외적으로 제45대 미국 대통령 당선인인 도널드 트럼프와는 서로 우호적인 사이다. 트럼프는 줄곧 푸틴 대통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앞선 28일에는 "푸틴이 나보다 훌륭하다."고 말했다고 AP는 전했다. 트럼프는 또 "지도력에 관해 푸틴 대통령은 'A'지만 우리 오바마 대통령은 그렇지 못하다."고 비교했다. 그러자 푸틴은 2015년 12월 17일 모스크바 연말 기자회견에서 그는 아주 뛰어나고 의심의 여지 없이 유능한 사람이다. 라고 화답했고,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바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대선 개입의 물증이 하나씩 나오자, 2017년 6월 미국 상원은 러시아 경제 제재 확대를 97:2로 통과시켰다.


외환위기

이렇게 부시가 일으킨 중동전쟁 때문에 고유가가 한동안 지속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는 서방에 맞설 수 있었으나, 2014년 후반기부터 몰아친 저유가 때문에 유가 수입의 50%로 정부 재정을 꾸려온 심각한 경제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일부 논자들은 이런 저유가가 크림 반도를 꿀꺽한 러시아를 길들이기 위한 미국의 음모라는 설을 내놓고 있다. 약간 설득력이 있긴 하지만, 딱히 러시아를 겨냥했다기보다는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고유가 극복 및 신성장 동력 개발을 위해 미국이 전략적으로 육성한 셰일가스에 사우디를 비롯한 OPEC 국가들이 증산으로 대응한 것이 근본 원인. 특히 2014년 상반기에 실시된 러시아 경제 제재가 효과를 못 보다가 저유가가 지속되면서 약효가 갑자기 세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사우디의 대응이 셰일가스 채산성 이하로 유가를 하락시켜 셰일가스 산업을 고사시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셰일가스 산업은 미국의 원유 수입 대체와 국내의 내수를 노리는 산업이고, 대부분이 미국 내에서 소모된다. 따라서 높은 채굴 비용과는 반대로 운송비가 훨씬 적게 들어 수입 원유보다 싸다. 실제 유가가 40달러 후반에서 노는 2015년 1월 기준으로도 셰일가스 산업을 고사시키는 것은 요원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 사우디의 의도는 셰일가스 산업의 억제 외에도 OPEC의 감산정책을 따르지 않고 이득을 얻던 무임승차 산유국들이 고꾸라지는 것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 목록의 맨 앞에는 베네수엘라 같은 상대적으로 작은 산유국이 있다. 물론 러시아도 덩치만 좀 클 뿐 이 목록에 올라 있다. 당연히 두 국가 모두 저유가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간혹 최대 경쟁자 중국이 저유가로 이득을 보기에 미국이 저유가를 의도한 것은 아니란 의견이 있는데, 의도한 것이 아니란 점은 맞을지 몰라도 미국이 경기 활성화로 얻는 이득이 더 크기 때문에 중국이 반사이익을 좀 봐도 미국으로선 나쁠 게 없다. 당장 2014년 3/4분기 미국 GDP 성장률이 5%였을 정도

어쨌든 러시아는 1998년에 이어 두번째 디폴트 선언을 눈앞에 두고 있고, 푸틴 치하 러시아가 호황을 맞았던 것은 푸틴이 잘해서가 아니라 기름 때문이라는 설을 이 저유가 사태가 반증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먼저 푸틴은 제조업 붕괴에 옐친보다 오히려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이다. 옐친이 말아먹은 1990년대 러시아 수출의 에너지 의존도는 40%대였으나 2013년 기준으로는 70%에 달하며, 푸틴 임기 전체에 걸쳐 에너지 산업에 대한 수출 의존도는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반면 제조업의 GDP 비중은 2007년 17%대에서 2013년 15%대로 소폭 하락하는 등 제조업 강화에는 실패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푸틴이 러시아 경제가 석유-가스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부 푸틴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의 경제 개발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제조업이라는 건 당장 돈 쓰고 발전시키겠다고 순식간에 발전이 되는 게 아니다. 원래부터 러시아는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부터 중공업에 몰빵하여 경공업을 등한시했으며, 국민들은 생필품 부족으로 항상 줄을 서도 제때 물자를 얻지 못하는 등, 체제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쌓여 있었다. 소련 시기 제조업 기반이라 해봐야 중공업을 제외하면 서방 국가에 비교가 안될 정도. 그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과감하게 개선해보고자 했으나, 급진책을 남발하고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지 못해 오히려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고, 설상가상으로 민영화라는 이름하에 국부를 부패세력이나 외세에 넘긴 옐친 임기에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러시아는 세계 제조업 비중에서 10위권 안에 들지만 아직도 러시아제 하면 무기밖에 떠오르는 게 없을 정도로 러시아의 제조업은 시궁창 상태이다. 거기에 소련의 영광을 말하며 집권한 푸틴이 제조업을 차근차근 키우는지 아니면 당장 자기 집권에 도움이 되고 돈이 들어오는 에너지 수출 기반으로 키우는지 생각해보면 이것을 무조건 푸틴의 책임으로 몰아버리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 즉, 소련 때부터 내려오는 문제에다가 고르바-옐친을 거치며 커진 문제를 푸틴이 임기 내에 완전히 해결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것.


물론 현재 상황에서 산업 구조를 푸틴이 바꾸지 못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실로비키들이 파이프라인 공사 대금 80%를 꿀꺽했는데도 별다른 조치가 없는 등 푸틴의 한계는 명백하다. 나중에 오점이 더 드러나리란 건 안 비밀.

두 의견을 종합해보자면 소련 시기부터 계속 내려왔던 문제점이 고르바-옐친 시대를 거치며 더 커졌으며, 위의 링크를 참조할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제조업을 육성하려는 노력 및 성과는 보이며 기초과학에도 투자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나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자원 채굴 및 판매에도 푸틴 정권이 관심을 기울이면서 제조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자원 수출량이 크게 증대함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오히려 더 자원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특히 이것이 집권 초기에서부터 두드러진 것에 반해 위의 노력 또한 집권 2기 중후반 이후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런 불균형 및 부정부패를 조기에 해소하지 못한 것이 현재까지 푸틴의 실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제조업에 관련된 2013년의 분석 보고서.

2015년 3월 말, 러시아의 재무 장관은 위기 종식을 선언했다. 모라토리엄을 눈 앞에 두고 있었으나, 유가가 소폭 반등하고, 고유가 시절 모아놓은 외환으로 때우면서 최악은 피한 듯하다. 하지만 일단 실물경제는 당분간 침체 전망이다.

한편 2014년 7월 푸틴은 아르헨티나를 방문했다. 그리고 이 방문에서 러시아와 아르헨티나는 핵에너지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아르헨티나는 2015년 1월 2일 러시아로부터 12대의 전투폭격기를 임차하기로 합의했다. 2015년 4월 23일 푸틴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끌어올리기로 합의했다. 푸틴은 "러시아는 말비나스 섬과 관련한 분쟁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영국과 양자 협상을 추진하려는 아르헨티나의 노력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시리아 내전

푸틴의 뜻에 따라 시리아에서 아사드를 도와 IS를 격퇴하는데 참여하게 되었다. 반군을 돕는 서방 국가와는 갈등이 있다. 2015 러시아 공군기 Su-24 격추사건으로 터키에 분노를 표했다.

독재

한국 인터넷에서야 푸짜르니 뭐니 농담하지만 이 사람의 행보를 보면 독재자가 맞다. 물론 러시아 민주주의는 과격한 자유지상주의자 옐친의 급속한 변혁 속에 1992년에 시작하자마자 고꾸라져 버렸지만 그나마 기신거리던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최종적으로 붕괴시켜 버린 사람은 결국 푸틴이다. 실제로 현 정부에게 문제를 제기하거나, 비판하거나, 기타 헐뜯는 일은 꿈도 못 꾸게 하며, 실제로 언론인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되는 사건마저 벌어지는 까닭에, 푸틴은 그만큼 민주주의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고 비판받는다.


예를 들어 체첸 전쟁에서 러시아군 전쟁 범죄를 고발하던 인권변호사가 대낮의 모스크바 시내에서 총격으로 살해당하고 반정부적 논조의 언론사 기자가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또한 폴로늄 홍차의 희생자로 유명한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는 마찬가지로 자택에서 암살당한 친구 노바야 가제타 기자 안나 폴릿콥스카야 살해 사건의 배후를 추적하기 위해 이탈리아 기자와 접선했다가 피살됐다고 한다. 2014년 4월 안나 폴릿콥스카야의 칼럼을 모은 책이 출간되었는데, 이 책의 부제가 압권. '러시아 민주주의의 실패와 냉소, 무기력에 관한 보고.' 그녀에 따르면 러시아 민주주의는 옐친 시대인 1996년에 이미 위기에 돌입했고, 2003년 12월 총선에서 통합러시아당이 승리하면서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꼭 암살 주도 의혹이 아니더라도 그 밖에 민주주의에 먹칠을 하는 일을 여럿 했다. 모스크바의 텔레비전 전파수신탑인 오스탄키노 탑에서 화재가 일어날 때(게임 메트로 2033을 플레이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화재가 일어나는 동안 모스크바에 있는 웬만한 TV는 다 먹통이 된 적이 있었다. 여기까지라면 그냥 원인 모를 화재에 가깝지만... 문제는 그때 여론이 체첸 전쟁과 푸틴 통치에 대하여 꽤나 안 좋았는데, 그 화재 즈음해서 반정부적인 언론사의 주요 문건을 압수한 일이 있었다. 게다가 방송국 전파가 하나둘 복구되는 가운데에도 반정부적인 방송국의 전파는 가장 늦게 복구되기도 했다.

그래도 일단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정적들을 사형시키지는 않으며과 정치범수용소를 따로 건설하지는 않는다. 이는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일당독재를 표방하는 중국과는 달리 대내외적으로 자국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표방하기 때문인데 푸틴에 반대하는 언론이나 국회의원들을 어느 정도 봐주는 이유는 자신이 자신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을 허용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외부에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엄연히 말하면 푸틴이 여태 권력자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는 게 진짜 국민들의 지지에 의한 선거 덕분이니... 물론 언제 돌변해서 국민들의 지지를 못 받는 진짜 독재자로 변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긴 하다.

그러나 보리스 옐친 시절의 다 망해가던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발전시킨 게 푸틴의 정치 능력이었다고 보면서 단순히 푸틴을 서구의 눈으로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우선 서구에서 가장 좋아했고, 민주주의의 화신이라고 칭송했던 보리스 옐친 시기의 러시아에는 실제로는 부정과 부패가 만연해 있었고 대표적으로 각종 이득을 독점해온 신흥재벌 올리가르히도 있었다. 게다가 친족들의 독점과 부패, 재벌과 마피아에 대한 견제 따위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1998년 당시 디폴트를 선언하며 대놓고 돈 없다며 배째라 전술로 비판받기도 했다.

반면 푸틴은 올리가르히를 제압하여 재벌의 독점을 막았고 레드 마피아도 쓸어내었으며 그 덕에 러시아는 오일머니로 중산층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게 푸틴의 강권통치를 옹호하는 이들의 주장이다. 이는 또한 푸틴의 경제 성장이 단순히 운이거나, 혹은 순전히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했다는 비판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막장 아랍 왕족들이 같은 오일머니로 중동 국가들의 왕족들이나 특권층에게만 엄청난 혜택이 쏟아부으며 개판으로 나라를 꾸려 나갔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강권 통치를 경제적으로 옹호하는 이들은 그 뿌리에 "민주주의를 실행할 내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서구 민주주의를 운용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의외로 이런 시각은 서구에서도 종종 있다. 인도와 중국의 차이를 두며 설명하기도 한다. 단적인 예로 인도는 불안정한 민주주의 국가이고 중국은 경제 성장이 큰 일당독재국가인 걸 보면 알 수 있다. 푸틴을 제외하면 그 다음으로 표를 얻고 있는 자들은 공산주의자들과 극우주의자들이며 그렇지 않으면 경제를 파탄낸 주범들인 올리가르히들의 귀환이다. 사실 러시아는 현 상태로는 푸틴 이외의 대안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민주주의 선거에서는 역시 최고가 아닌 차악을 뽑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그러나 푸틴의 경제적 업적에 대한 허점은 우선 그가 보여준 성과가 일시적 유가상승에 의한 복권 당첨이라는 비판도 많다. 제조업 같은 장기적 발전에 유리한 형태로 산업 구조를 전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흥재벌 올리가르히를 제압한 이후 새로 들어온 무리 역시 푸틴의 친구들이었다. 러시아 경제의 가장 큰 버팀목인 석유/천연가스 관련 기업들은 모두 푸틴과 연계된 이들이 장악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는 세계 최대 천연가스업체 가즈프롬으로 경영진이 전원 푸틴의 친구들과 KGB후배, 집권 통합 러시아당 출신 인사들, 그리고 피제르츠라고 불리는 동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인사들로 채워졌다. 이외에도 통신, 전력, 수송, 철도 등 주요 산업체는 모두 친푸틴인사들이 장악하였으며, 불투명한 회계처리로 막대한 돈이 사라지고 있다. 러시아 GDP의 대략 15%를 직접 통제하고 있다고 추측된다.

이로 인해 현재 천연가스 등에 편중되어 있는 러시아 경제는 체질 개선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에너지가격 변동에 울고 웃는 러시아 경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선 산업구조의 변화(경공업 등의 육성 등 다양화가 필요하다)가 필요한데, 푸틴과 그 측근들이 에너지 산업을 휘어잡고 있으니 에너지 산업의 비중을 줄이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할리가 없다. 또한 경제개혁에는 필연적으로 단기적인 진통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국민들의 부담은 클 수밖에 없다. 푸틴이 지지를 받는 가장 큰 이유가 에너지를 통해 다죽어가던 러시아의 경제를 그나마 살만하게 만들었다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푸틴이 비록 일시적인 것일 지라도 개혁에서 수반되는 진통을 감당하려 할지는 미지수.

하지만, 공과가 뚜렷하다고 할 수 있다. 일시적인 유가 상승이 있어도 자원의 저주에 걸리는 나라들이 수두룩하다. 반면에 엘친에 의해 완전히 망해버린 러시아를 지금의 러시아로 만든 업적은 인정해야 한다. 어찌 보면 콜럼버스의 달걀이다. 하지만 국민 중 16%인 2천만명이 빈곤층인 것을보면 국가 경제가 발전하더라도 국민 생활 수준이 쉽게 좋아지기는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미국과 유럽의 경제 제재가 실시되자 러시아 경제는 더욱 악화되어 2015년 1분기 물가 상승률은 16%를 기록했고 연간 실질임금은 5월 14%, 6월 7% 떨어졌다. 사실 빈곤율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통치했던 15년 동안 꾸준히 하락해 2014년에는 11%를 기록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다시 16%로 올라간 것이다. 사실 1996년에는 러시아 인구의 3분의 1이 빈곤층이었다.

예를 들어서 2010년 3월 29일 파르크 쿨투리 지하철역에서의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이 있었다. 적어도 30명이 죽은 큰 사건이었는데, 푸틴은 자신의 분노를 이렇게 남겼다. "테러리스트들은 박살날 것이다".

2011년 1월 26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도모데도보 국제공항에서의 자살폭탄 테러로 35명이 죽고 160여 명이 다치자, 푸틴은 "그게 누구였건 간에, 어떤 사정이 있었건 간에 그들은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강권통치 이외에도 독재를 위한 발판을 임기 내내 만들어갔다. 러시아 총선은 원래 선거구제와 정당명부제의 '50 대 50' 혼합제였는데, 이를 100% 정당명부제로 고쳤다. 이에 따라 7% 이상 득표할 때만 득표율대로 의석을 배정받고, 그 이하를 득표한 정당은 의회 진출이 불가능해졌다. 또한 대통령 후보를 등록할 때 하원의 추대 or 200만 명의 서명이 필요하게 만들도록 법을 고쳐버렸다. 푸틴측에서는 군소후보의 난립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게다가 직접선거식 지방자치제도 사실상 대통령임명제(지방자치 간선제)로 바꿔버렸다. 푸틴 이전만 해도 지방자치단체장은 직선제로 선출되었는데, 푸틴 집권 후 의회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이 적합한 후보 3명을 대통령에게 제출하면 대통령이 결정해서 단체장을 앉히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바지사장 메드베데프 집권시에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늘린 것도 유명한 일.

이젠 비판마저 듣지 않기 위해 중국처럼 검열제를 실시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중국과 손잡고 인터넷검열망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거기다 인터넷이 CIA의 프로젝트라는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고 있다.

2014년 유로마이단 관련 사건 이후 들어서는 이전엔 네티즌들이나 사용하던 '푸틀러'라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특히 모욕적인 별명을, 중앙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주요 언론에서 사용할 정도로 한국에서도 명실공히 독재자로서의 이미지를 굳혀가고 있다

종신 대통령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에게도, 러시아에게도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2018년 대선에 나갈 거냐는 질문에는 "러시아 사정과 자신의 기분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대답하며 출마를 기정 사실화했다. 

2015년 2월 27일에 푸틴을 비판하던 야당 정치인 보리스 넴초프(Борис Немцов)가 밤에 총탄 네 발을 맞고 사망하고 말았다. 푸틴은 공식적으론 넴초프의 살해를 비난했지만 경찰이 사건현장을 깨끗하게 물청소하는 걸로 볼 때 아마 제대로 된 수사결과를 기대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이걸 카디로프가 넴초프를 제멋대로 죽이고 푸틴은 이걸 눈 감아주는 상황이라고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카디로프는 명백히 푸틴의 후원으로 정권을 획득했고 유지하고 있다. 그런 카디로프가 딱히 이해관계도 없고, 푸틴 권력의 심장부인 모스크바에서 중앙정계의 정치인을 제멋대로 죽이고 다닌다는 건 전혀 설득력이 없다.

2016년에는 야당(우파 연합(2008년 해체)) 소속의 니키타 벨리크 키로프 주 주지사를 부패 혐의로 체포했는데 미리 짜인 각본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게다가 2017년에 가정폭력처벌을 완화시키는 법에도 서명을 했다.

2017년 3월 23일, 우크라이나로 망명 후 반 크렘린 발언을 하던 데니스 보로넨코프 전 러시아 연방 공산당 의원이 키예프 시내에서 총격을 당해 의문사했다.범인은 우크라이나 국가근위대 출신이라고 하는데 우크라이나 내무부에 따르면 FSB에 포섭된 인물이라고 한다.




자국 내 평가

2015년 10월 8일, 비정상회담에서 러시아 대표로 출연한 바 있는 일리야 벨랴코프가 JTBC 썰전에 출연하여 푸틴에 대한 러시아 내의 인식과 평가를 전한 바 있다. 하지만 일리야의 의견을 어느 정도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 일리야는 현재 러시아 국민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는 외국인 신분으로 한국 방송에서 자국에 대한 입장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중립성과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더구나 일리야는 주한 러시아 대사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일리야에 따르면 러시아 사람들도 90년대까지는 푸틴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 1999년 옐친 전 대통령이 후계자로 지목하면서 알려졌다고 한다. 또 푸틴이 KGB 출신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엇갈린다고 한다. 선거에 대해서는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고 한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도 하고 현재 러시아에서 푸틴을 대체할 후보, 푸틴의 카리스마를 능가하는 후보가 없기 때문에 푸틴이 계속해서 높은 지지율로 당선되는 것이라고 한다. 

인기 비결은 역시 경제. 푸틴이 집권하는 순간부터 경제가 살아나고 생활 수준이 높아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은 푸틴이 '독재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독재'가 아니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처럼 '장기집권' 하고 있는 정도로 생각한다고 북한이나 쿠바와 같은 국가는 명백한 독재국가라고 할 수 있지만, 러시아 내에서는 푸틴이 독재자라는 평가는 거의 받지 못한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러시아 내에서 푸틴의 평가는 대외적인 평가와 조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패널인 일리야의 개인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푸틴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생각을 쉽게 접할 수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 국민들의 생각을 조금은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다만 일리야 벨랴코프의 발언이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는 것이 2015년 10월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푸틴에 대한 지지율이 사상 최고치인 89.9%를 기록했다. 특히 2014년 3월 크림 반도 병합 이후부터는 줄곧 80%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을 보았을 때 러시아 국민들이 얼마나 푸틴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푸틴이 러시아 내에서 이렇게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요인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 그가 옐친 시대의 사회적 혼란을 비교적 잘 수습했다는 점이 있다. 실제로 옐친 집권기에는 신흥 재벌인 올리가르히들이 사회 전반에서 판을 치며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벌였다. 게다가 국가가 빚더미에 앉아 실업률이 굉장히 높아져 사회가 심하게 불안정했다. 오죽하면 러시아 여대생들이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갔을 정도. 게다가 1996년 체첸 전쟁에서도 사실상 패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면서 소련 시절의 위상은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인증하고야 말았다. 이는 한때 미국과 나란히 냉전의 양 축을 구성하던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상처로 다가왔고, 시간이 갈수록 러시아는 깊은 수렁으로 빠졌다. 그러나 2000년 집권한 푸틴은 올리가르히를 대대적으로 제거하며 긍정적 이미지 구축에 애를 썼고, 막장화되었던 경제도 (비록 석유와 천연가스 몰빵이라 단기 처방이긴하지만) 꽤나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여 나라를 구한 위인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바로 적수가 없다는 점이 있다. 현재 러시아는 푸틴이 소속된 통합 러시아당이 여당이며, 러시아 연방 공산당, 정의 러시아당, 러시아 자유민주당이 원내 야당으로 있다. 그런데 제1야당 공산당의 경우 과거 소련 공산당의 후신이고, 소련으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다. 제2야당 정의 러시아당은 통일된 당론이라는 것이 없는 데다가 당의 노선 자체도 딱히 반 푸틴 분위기가 아니다. 그리고 제3야당 자유민주당의 경우 정신 나간 극우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이다. 정의 러시아당도 딱히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때문에 러시아 국민들은 그나마 정상적인 푸틴에게 투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푸틴이 이미지를 착실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쌓아가는 와중에 야권은 삽질만 거듭한 나머지 여야간의 격차는 더욱 더 벌어져 2015년 현재 러시아 하원인 국가두마 의석 기준으로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과 제1야당 러시아 연방 공산당의 의석수는 무려 146석이나 벌어져 있다. 그야말로 독주 상태인 것이다. 그나마 정상적으로 보이는 친서방 민주주의계 인사들마저도 사실 전임자가 너무나도 큰 스케일로 나라를 말아먹은지라 원내 진입조차 못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에게는 저 말아먹은 전임자 때문에 친서방 민주주의계 인사들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않다. 게다가 이들 가운데에는 해외로 망명한 올리가르히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인사들이 많다. 왜냐하면 이들이 옐친 정권 인사들의 부패 눈감아주기로 성장하였다가 푸틴에 의해 쫓겨난 인물들이기 때문. 러시아 국민들 입장에서 국민들 등골을 빼먹은 올리가르히들이 달가울 리가 없기 때문에 이들에게 표를 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지막 요인으로는 러시아의 민주주의 경험 부재가 있다. 러시아는 서유럽 국가 대부분이 입헌군주제와 민주주의를 도입한 20세기 초반까지도 전제군주제로 남아있었다. 사실 1825년에 데카브리스트 난(12월 당원의 난)으로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처참히 묵살당하고 주동세력은 처형되었다. 1905년 국민의 저항을 받은 니콜라이 2세가 입헌군주제를 수용해 1906년부터 1917년까지 10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입헌 군주제 국가였던 시기가 있긴 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입헌 군주제는 선거권의 제한이 심했던데다가 지주와 도시민, 농민, 노동자들이 각각 행사하는 표의 가치가 달랐다. 국회인 두마가 개설되긴 했지만 차르가 두마 해산권과 법률 거부권, 내외정의 실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무늬만 입헌 군주제였던 시기였던 셈. 그 후 러시아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는 바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건국되었다. 결국 러시아 민주주의는 1990년대 초에 시작된 것이다. 그나마도 1960년대부터 지속적인 투쟁 끝에 6월 항쟁으로 1987년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대한민국이나 마찬가지로 1950년대부터 지속적인 투쟁 끝에 1989년 시민혁명으로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동유럽권 국가들과는 달리 러시아는 옐친의 쿠데타로 소련이 붕괴되어 민주주의가 도입된 것이었다. 당연히 러시아는 민주주의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고, 러시아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서방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들여온 옐친이 러시아를 모든 분야에서 거하게 말아먹는 바람에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여론이 좋을 리가 없다. 따라서 제정과 공산 독재가 전부였던 러시아인들에게는 민주주의가 생소했고 그나마 옐친이 망쳐서 푸틴을 독재자로 인식하지 않는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카리스마


그 유명한 밸브 잠궈라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푸틴이 부시 대통령에게  남오세티야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장면


체첸클리어를 보고난 후의 매우 분노한 모습. 
자국 군인이 무참히 살해당해 영상으로 찍혀 비웃음거리가 되는 상황이니 분노할 만 하다.


푸틴 대통령의 휴가당시 찍은 사진

러시아 국내의 재벌 총수들을 불러다가 서약시키는 장면. 
별명으로는 푸차르, 푸간지, 차르 푸틴, 등이 있다. 속칭 신 러시아 제국 제1대 차르. 양복 안에서 AKM을 뽑아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무서운 남자. 미국 측 외교 전문에서는 '알파 남(Alpha Male)'이라고 칭하는데 본래 동물 무리에서 리더가 되는 우두머리 수컷을 가리키는 용어로 1인자를 뜻한다.


전투기 조종


당시 KGB 요원은 각종 군사교육을 받았는데, 푸틴이 받은 군사교육에는 전투기 조종도 있었다. 체첸 전쟁 당시 대통령이었던 푸틴이 공군기지 시찰을 위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군기지에서는 높으신 분이 오시는 만큼 가열차게 사열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정된 시간에 Su-27 한대가 비행장에 도착하자 그들은 호위기가 먼저 착륙했구나 하고 생각을 했는데, 캐노피를 열고 나온 파일럿은 평범한 파일럿이 아니라 바로 그 푸틴... 긴장감이 돌던 비행장에 이런 예상치 못한 이벤트가 벌어졌으니 몇몇 파일럿들이 감격해서 울기 시작하고 이후엔 말할 필요도 없이 사기가 왕창 올라갔다는 후문.

2010년 8월에는 직접 Be-200를 타고 산불 진화에 나섰다. 항공기 비행 면장 없이 대형 항공기의 부조종석에 앉았다고 논란을 빚은 모양인데, 심지어는 조종석에서 직접 조종한 듯 보인다!

또 한 훈련에서는 친히 Tu-160 블랙잭 폭격기를 조종하며 당시에 개발 중이던 공중발사순항미사일(ALCM)인 KH-555를 직접 발사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한국과의 관계

한국에서 활동하거나 거주한 이력이 별로 없음에도 의외로 한국인들과의 인연이나 친분이 꽤 있는 편이다.

1980년대 후반 인기 여가수였던 양수경과의 두터운 친분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는 1994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된 '백야축제'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에 양수경은 한국 대표로 참가해 <혼자만의 슬픔>이란 곡으로 대상을 수상했고,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이었던 푸틴과 친분을 쌓게 된 것이다. 이들의 두터운 친분은 2001년 푸틴 대통령이 방한 때는 양수경이 청와대 만찬에 초대받는 것으로 이미 공식 인증된 바 있고, 2007년 양수경의 남편이 경영하는 예당 엔터테인먼트에서 러시아 유전 사업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는데, 성공의 계기가 바로 양수경이 푸틴에게 직접 부탁하여 물밑으로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2008년 4월 진행하던 유전 사업에서 대규모 석유 매장량을 확인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주식의 상한가로 대박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흠좀무. 당시에 한 달 사이 평가 수익률 300%가 올라, 34억 원의 차액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푸틴의 딸이 한국인과 결혼한다는 설이 알려졌으나 푸틴 대통령 최측근의 아들인 키릴 샤말로프와 약혼을 한 사실이 2015년 11월 11일 영국 더 타임스에서 보도되었고 한국에서도 조중동 등 여러 매체에서 이 사실이 기사화되었다.

그러나 푸틴이 딸들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나 사진도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푸틴의 별장도 한국 업체에서 인테리어를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쉽게도 한국에 빚이 조금 있어서 들리는 말로는 러시아 측에서는 대한민국에 빚을 갚으려고 하지만, 대한민국의 입장으로선 어떻게든 러시아 측으로부터 가능한 한 빚을 안 받고 그것으로 인해 최근 불곰사업 재개를 시작 했지만 나로호와 같이 핵심기술과 기술이전은 안 해주려는 듯하다. 

푸틴이 한국 정부에게 선물한 시베리아호랑이 수컷 '로스토프'와 암컷 '펜자', 한 쌍을 서울대공원에서 기르게 되었는데 순간의 미흡된 조치 때문에 사육사 한 명이 로스토프에게 물려서 중태에 빠졌다가 결국 숨지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이후부터 온라인에서는 '한국의 버림받는 능력자들을 잡아채가려는 매'의 이미지가 박혔다. 그도 그럴 게 빅토르 안의 귀화 이후로 보란 듯이 날개를 펼치는 그의 기록에, 그 동안의 대한빙상경기연맹의 비리까지 나노 단위로 까이며 줘도 자기네들 밥그릇 지키느라 선수에는 신경도 안 쓰던 그들의 모습과는 달리 그를 개인적으로도 총애하는 모습을 보이니 하필 소치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팀의 성적이 나빠서 푸틴의 이미지도 반비례로 상승한 효과가 컸다. 

그러나 피겨 스케이팅에서의 편파 판정으로 이미지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갔다. 푸틴이 직접 편파판정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욕을 먹고 있는 거냐는 주장도 있지만, 러시아 피겨계의 대모이며, CSKA Moscow 클럽이 주축이 된 모스크바 라인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타티아나 타라소바와 푸틴의 친분 관계는 피겨 팬들에게는 꽤 유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2013 피겨 스케이팅 세계선수권에서 러시아 대표들이 부진한 성적을 거두자, 푸틴은 바로 타라소바를 소환했다. 타티아나 타라소바는 미국에서 알렉세이 야구딘을 훈련시킬 때만 해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라인의 미신 코치에게 파벌 싸움에서 밀렸지만, 푸틴과도 친구 먹는 지금에 와서는 대략 흠좀무. 2013 세계선수권 직후 푸틴이 타라소바를 소환했을 때, 국내 피겨 팬들은 "닦달한다고 선수들이 갑자기 잘함? ㅉㅉ"이라는 반응들이었으나 그 후 1년도 안 되어 푸틴과 러시아 빙상연맹은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심을 가져 90년대 초 박정희와 관련된 책들은 많이 읽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웹상에서 푸틴의 롤모델이 박정희라는 루머가 사실처럼 퍼지고 있는데, 실제 푸틴의 롤모델은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유리 안드로포프이다.

KBS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한국을 공식적으로 처음 방문한 것은 1990년대 초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 재임 시절이라고 하며 서울과 부산, 남동임해공업지역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외교적 립서비스일 수도 있지만 그 당시 박정희의 경제 개발 정책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결과물을 보고 자신의 인상을 사실대로 말한 것일 수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한러 정상회담에서 특별선물로 박정희 대통령의 1979년 신년 휘호를 박근혜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한국에도 없던걸 러시아가 입수하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에도 러시아 사상 최초로 먼저 축화전화를 했다.

근데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면서 북핵을 옹호하는듯한 말을 했었다.

소련 부활?

미국을 보고 있는 관점이 다른 나라와는 다르다.
기자: 앞으로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어떻게 보십니까?
푸틴: 러시아와 미국은 1차, 2차 세계대전을 함께 한 동맹국입니다. 그런 만큼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객관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고 봅니다.
러시아는 미국에 전혀 꿀릴 게 없는 대등한 입장이란 말이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국방력이 약해졌기에, 비대칭 전력이자 정치적 협상무기로 강력한 핵무기 전력에 집중하고 있음을 자주 발표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대 미국 및 서유럽 기준. 남오세티야 전쟁을 보면 중앙유럽 정도는 쉽게 제압한다.

소련 붕괴 이후 군사력이 숫자 면에서 거의 2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버렸고, 고급 인재들도 돈도 안 되고 미래도 안 보이는 군대를 죄다 떠나버리면서 1990년대 러시아군은 소련군 시절의 위엄은 온데간데 없어져 버리고 전략전술의 기본도 모르는 오합지졸로 전락했다. 하지만 시베리아의 풍부한 천연자원으로 2000년 들어서 이러한 인력부족이나 전략전술은 대부분 해결했으며 세계 8위의 GDP를 달성했고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소련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던 과학기술로 지금은 미국과 비교해도 극단적으로 밀리지는 않는 군사력을 지녔다.

근데 독립한 소련의 위성국들이 미국과 가까워지고 있어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차에, 마침 조지아를 조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오자 그대로 조져버리면서 다른 나라들에 대한 무력시위를 했다. 바로 2008 베이징 올림픽 때 일어난 남오세티야 전쟁이다. 그리고 2014년 3월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서 떼어냈다.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대통령으로서의 견해, 그리고 핵 및 군사전략에 대한 견해를 밝혀달라는 두 개의 질문을 받았을 때는 이를 하나로 뭉뚱그려 "이들 두 주제는 러시아 연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러시아 연방의 전통적인 신앙과 러시아의 핵방패는 러시아란 국가를 강화하는 두 요소이며 이 나라의 내적, 외적 안보를 보장하는 필수조건을 구성하기 때문이다"라고 답한 바 있다. 정교회와 핵을 하나로 묶어 말한 것이다! 

공산주의 청년단체 콤소몰을 본따 '우리의'라는 뜻의 "나쉬(Наш)"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어 자신의 홍위병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단, 소련이 러시아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리즈시절이었다는 것은 긍정하는 이들이 많은 편이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 함께 전세계를 양분하는 대국이었고, 과학, 스포츠, 문화는 세계 정상급이었기 때문에 소련인들은 국가에 자부심을 느끼고 살았다. 게다가 복지 측면에서는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실시했고, 대외적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천조국과 제대로 맞장 뜰 수 있는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러시아 사회는 이런 것들이 무너져서 러시아 국민의 삶의 질이 소련 시절보다 훨씬 나쁘다. 2012년 현재 러시아에서 이유 없이 스탈린의 지지도가 60% 가까이 나오고, 괜히 러시아 사람들이 고르바초프 욕하는 게 아니다. 물론 소련의 각종 복지 정책은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 제한하는 대신 당근을 주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긴 하겠지만.

참고로 소련 체제를 두고 명언이 있다.
"소련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은 가슴이 없는 사람이다. 소련 체제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은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원래는 칼 포퍼의 말을 살짝 바꾼 것이다.

사실 이런 류의 도치는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이오시포브나도 "책으로 공산주의를 배운 사람은 공산주의자가 되고, 몸으로 공산주의를 배운 사람은 반공주의자가 된다."는 말을 한 적 있다.

기본적으로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유럽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서방주의자와 러시아 독자노선을 걸어야 한다는 러시아주의자들이 대립했다. 제정이 무너지고 공산체제가 성립된 이후에도 두 노선은 계속 대립했다. 결국 이오시프 스탈린으로 상징되는 러시아주의자가 유럽지향의 트로츠키를 비롯한 서방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여 독자 노선을 걸었고, 결국 이는 천조국과 어깨를 겨루던 초강대국 소련을 만들어냈다. 소련 말기의 고르바초프나 옐친은 서방화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 러시아는 폭삭 망해버렸고, 푸틴은 서방과 거리를 두고 러시아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주의의 관점에서 푸틴은 스탈린과 같은 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스탈린 체제의 부활이라고 보이는 듯하다.

일단 극좌라고 불리는 소련과 달리 푸틴은 우파쪽 시장경제 통합 러시아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