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렴으로 사망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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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렴으로 사망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워싱턴


2017. 9. 7.

조지 워싱턴
세계사에 등장한 최초의 대통령, 미국의 초대 대통령, 미국 최초이자 최후의 선거 군주.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 



다만 President라는 단어는 1775년 대륙 의회 의장(President of the Continental Congress)들이 최초로 썼다. 며칠만 하다 관둔 의장들을 제외한 사실상의 초대의장은 4대 의장이자 독립선언문에 최초로 서명을 했던 존 핸콕이었다. 이 직위는 핸콕 이후 12년간 11명에게 돌아가다가 그 이후에야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이 되었다. 대개 1년 임기로, 독립이 인정된 1783년 이후로는 7명이 있었기 때문에 총 16대 15명. 지금의 미국에서도 President는 연방 대통령과 연방 의회의 상원 의장 두 명이 사용하는 호칭이다.

<1달러 지폐에 삽입된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출생

버지니아의 나름대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인 존 워싱턴(John Washington)은 영국의 설그레이브(Sulgrave)로부터 1656년 미국 버지니아로 이민하였으며, 조부인 로렌스 워싱턴(Lawrence Washington)을 거쳐 아버지인 오거스틴 워싱턴(Augustine Washinton) 대에 이르렀을 때, 담배를 주로 경작하는 큰 농장과 상당수의 노예를 보유하고 있는 버지니아의 상류 층에서 중간 급의 위치를 차지하는 가문이 되었다. 워싱턴의 아버지인 오거스틴 워싱턴은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의 판사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워싱턴이 11살일 때 아버지가 질병으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이복 형인 Lawrence가 가장이 되었다. 워싱턴은 버지니아 민병대의 지휘자였던 이 이복형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군인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해군에 지원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그는 대신 버지니아 민병대로 지원, 대령의 계급으로 근무했다.

측량사 자격 취득

광활한 토지에 대한 측량 업무가 중요하던 그 시절, 워싱턴도 일찍부터 측량 기술을 익혀 17살이던 1749년 정식으로 전문 측량사 업무를 개시하였으며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College of William and Mary)으로부터 측량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 후 시간이 있을 때마다 워싱턴은 측량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전쟁 참여

1754년 워싱턴은 7년 전쟁 (Seven Years' War, 1756–63)의 전초적 전쟁이었던 French and Indian War(1754–62)에 참전하였다. 1755년 워싱턴은 영국 에드워드 브래드덕(Edward Braddock) 장군의 미국 측 자문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에 미국 최초의 정규 민병대인 버지니아 연대의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0개월 동안 인디언과 벌어진 20번의 전투에서 연대 병력의 1/3을 잃는 등 격렬한 전쟁을 지휘하였으며 1758년 퇴임하였다. 워싱턴이 그 후 독립 전쟁에서 발휘한 군 지휘관 및 정치가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은 이 참전을 통해 얻게 되었다. 그는 영국군의 군사 전술과 영국군의 장점과 약점을 훤히 꿰뚫게 되었으며, 군 조직, 군사 교육 및 훈련, 군수의 중요성 등을 이 기회를 통해 파악했던 것이다. 지휘관으로서의 워싱턴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앞장 서는, 타고난 지휘관이라는 믿음을 부하들에게 심어 주는 존재였다.

결혼

1759년 워싱턴은 마사 커스티스(Martha Custis)라는 과부(3000명이 넘는 노예와 1만 7000에이커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와 결혼, 당대의 미국 최대 갑부(결혼 후 워싱턴의 토지는 2만 2000에이커가 됨. 워싱턴 자신의 상속재산 포함이다)중 한 명이 되었다. 마사는 매우 지적이고 우아한 태도를 가진 여자로서 광대한 농장의 관리에도 뛰어난 재원이었으며 둘의 결혼 생활은 워싱턴이 사망할 때까지 원만하게 지속된다. 처가 전 결혼에서 출산경험이 있음에도 결혼에서 아이가 없었다. 그리고 처가 사별한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자 입양한 아들인 존 커스티스가 사망하자, 존 커스티스의 아들이자 자신의 외손자 조지 워싱턴 파크스 커스티스를 입양해서 아내의 전 남편의 후손이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참고로 조지 워싱턴 파크스 커스티스는 장성한 자녀가 딸 한명이라서 딸과 사위에게 모든 재산이 돌아갔는데 그 사위가 바로 로버트 E. 리 장군이다. 그리고 조지 워싱턴은 자신의 재산중에 원래 워싱턴 가문의 재산이었던 유산은 조카 부시로드 워싱턴에게 상속한다. 그런가 하면 당시 법적으로 금지된 지역을 개척해 재산을 불렸다는 흑역사도 존재한다. 이 당시 영국 측은 13개 식민지(미국)가 끊임없이 땅을 개척하도록 놔두면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사사건건 부딪히고, 그 세력이 본국에서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개척에 상당한 제약을 가했고 심지어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는 가지도 못하게 법으로 금할 정도였다.

미국의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유럽에서 7년 전쟁이 벌어지자, 신대륙에도 그 영향이 미쳐 프랑스-인디언 전쟁(전역)이 발발, 조지 워싱턴은 다른 영국계 식민지 유지들과 함께 영국군을 지원하는 식민지 의용군에 가담 나름의 공로를 세우나, 식민지 전쟁에 많은 예산과 국력을 소모한 영국 정부가 이 빵구를 매꾸려고 식민지에 세금을 늘리고, 새로 편입된 식민지의 원주민을 다독이기 위해 식민지인의 구 프랑스 식민지 지역으로의 개척을 금지시키자, 이런 불만들이 쌓여서 독립전쟁이 발발한다. 전의 전쟁에서 인망을 보인 워싱턴은 식민지군(Continental Army)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초반에는 영국군에게 연전연패했고, 이후 영국에게 이를 갈고 있었던 프랑스, 네덜란드 등으로부터의 지원에 힘입어 영국군을 소모전의 늪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토벌군은 소모전에 승리를 했음에도 계속 끌려다가 마지막 요크타운 전투에서 패해서 항복, 그길로 식민지에서 손을 뗀다.


워싱턴이 없었으면 미국 독립전쟁은 얼마 안가서 끝났을 것이란 것이 중론이다. 일단 당시 왕당파에 비해 독립파 자체가 지지율이 그다지 높지도 않았고(현재 연구로는 지지율은 거의 비슷했다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인망이 없는 사람이 독립파를 지휘했으면 바로 민중의 지지를 잃고 독립파는 망할 판이었다. 또한 당시 미국군을 지휘할만한 역량을 가진 인물은 극도로 부족했는데, 그 이유는 영국군의 보조병격이었던 식민지군 출신들은 원주민 또는 (비슷한 처지의) 프랑스 식민지군이나 상대해 본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영국군 같이 고도화된 유럽의 선진군대와 싸운바는 없었기 때문이다. 초기의 영웅이자 후반의 배신자인 베네딕트 아놀드나 대니얼 모건, 너대니엘 그린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중에 총사령관이 가능한 인물은 베네딕트 아놀드 정도. 반면에 호레이쇼 게이츠를 비롯해서 한 줌되지 않는 군대를 말아먹을 인물은 고위층에 많았다. 더구나 워싱턴은 미국 독립전쟁을 소모전으로 규정하여 전개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모습은 베트남 전쟁 시기의 호치민이나 보응우옌잡과 상당히 유사하다. 전술적 능력은 부족했지만 대전략을 진행하는데 구심점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어쨌든 전술적으로는 대단한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인품과 친화력, 그리고 리더쉽으로 말 많은 13개 주를 단합시켜 끝내 독립을 쟁취한 것은 그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승리 후 그는 미련없이 군권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다른 사람들의 추대로 결국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만장일치로 결정된 대통령직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으로써의 평가 또한 성공적이다. 그는 왕이 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지라 임기를 2번 치르고 물러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당시 정당간의 극심한 대립을 어느정도 통솔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 밖에도 내각(cabinet) 시스템, 국가 은행 등, 헌법에 기술되지 않은 대통령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그 후 2번의 임기가 끝나자 워싱턴은 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미국 법 어디에도 대통령직은 2번까지만이라는 말이 없었지만, 워싱턴이 2번만 하고 물러난 뒤로 다른 사람들도 2번 넘게 대통령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4회 연임을 한 뒤에 1951년에야 법으로 4년 중임제가 명시되었다.

이 사실이 얼마나 대단하냐하면, 권력을 잡았다가 놓기란 정말 쉽지 않다. 특히 조지 워싱턴은 2번의 임기후에 워낙 미국을 잘 이끌어서, 미국 온 국민에게서 추앙받았었다. 하지만, 그는 본인이 2번 넘게 집권하게 되면 왕권이 된다는 생각에 후회없이 내려오는 어마어마한 일을 했고, 시작을 정말 잘 끊은 것이 지금 바로 미국의 민주주의와 대통령제가 문제없이 돌아가는 이유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이 그가 보여준 이 모범적인 행동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워싱턴은 독재자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상기했듯 민중의 지지도 있었고 정부권력을 확고히 쥐고 있었으며, 미약하긴 해도 군대마저 그의 통솔 하에 있었던데다 본인이 군인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대통령의 개념이 잡히지 않았을 시기라 마음만 먹었다면 종신집권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유혹을 이겨냈다. 그 때문인지 아직까지도 미국에서 최고의 대통령을 뽑으라면 여론에서 톱 5안에 거의 반드시 들 정도로 미국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사망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지 2년후인 1799년 12월 14일에 사망했다. 워싱턴의 공식 사인은 '무리한 과다출혈'이다. 워싱턴은 눈내리는 날 무리하게 말을 타고 산책하다가 폐렴에 걸렸고, 치료를 하기 위해 무리하다고 생각될 만큼 많은 피를 뽑았다.(당시 서양에서는 그때까지도 병이 나면 무작정 피를 뽑는 '사혈치료'가 유행했다.) 결국 5파인트(약 2.35리터)나 되는 피를 뽑은 워싱턴은 폐렴에 걸린 지 3일만에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업적

미국이 개국이래 독재자 없이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펼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의 역할이 가장 컸다. 당시 미국이 강대국이 아니었고 그와 같이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나름대로 자부심이 쩌는 관료들과 좁아터진 백악관에서 미래가 불안한 신생국가의 미래를 도모하며 사느니 316명(워싱턴이 사망할 때의 기준)에 달하는 노예를 부리며 자신의 별장에서 한가로이 사는 것이 그에게 더 나았기에 대통령직에 집착하지 않았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권력욕을 과소평가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개발되지 않은 광대한 영토와 자원을 관리하기 위해 무수한 관리의 등용을 실시하고 법률의 제정, 시행을 시작한 신생 독립국의 체계와 국력을 개인의 재산과 비교하여 미약하다고 할 수는 없다. 거기다 당시에는 왕이나 황제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지도자 역할이였으며, 21세기에서도 형식상 민주국가에서 왕처럼 행동하는 지도자가 상당수라는 것을 보면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스스로 물러난 워싱턴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 수 있으며 박수칠 때 떠난 대표적인 사례로 나오기도 한다. 애초에 초기 미국의 먼지만큼도 안 되는 권력과 권한을 차지하려고 아귀다툼하는 무수한 사람들을 어디서든 쉽게 찾을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6.25로 나라 콩가루 된 상태에서도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어땠는지 보자.

워싱턴이 권력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당한 영토를 보유한 한 나라의 시조가 되어 평생, 자손 대대로 왕이 되거나 로마의 종신 독재관처럼 권력을 사용할 기회를 버렸다는 점에서 워싱턴이 미국과 민주주의에 기여한 바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워싱턴은 진정한 힘은 그 힘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워싱턴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시절에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역시나 왕이라는 생각 때문에 조지 워싱턴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2번의 임기를 마치고 스스로 마운트 버논(Mount Vernon)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으며 이를 통하여 최고의 권력이 의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도 미국 국회의사당에 가면 정중앙 돔의 천정에는 조지 워싱턴이 당시 주 갯수였던 13명의 천사에 둘러 싸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조지 워싱턴을 신격화 한 것이다. 원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처럼 국회 의사당의 지하에 조지 워싱턴의 관을 안치하려고 했지만 미망인 마사는 이를 거부했고 워싱턴의 관은 생전에 살았던 마운트 버논에 만들어진 개인 영묘에 안치된다. 초대 대통령이 국회 의사당 지하에 마련된 묘실을 이용하지 않자 이후에 어느 누구도 이 자리를 이용할 수 없었고 현재는 "워싱턴을 안장하려 했던 자리"로 팻말만 붙어 있고 비어있는 상태다.


일각에서 흑인 노예랑 불륜을 저질렀고, 한겨울 엄동설한에 자신이 사랑하던 흑인 노예를 만나러 가다가 폐렴에 걸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워싱턴은 천하의 바람둥이이자 호색한이란 주장이 있긴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폐렴에 걸려 죽은 건 맞지만 흑인 노예와의 불륜설은 증거가 없다. 흑인 노예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던 미국의 국부는 토머스 제퍼슨이다.

흑인노예와는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염문설은 많다. 독립전쟁 때 자신의 부관에게 "애인을 기쁘게 하려면 열심히 자신의 무기를 갈고 닦아라"라는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노예 제도에 대한 평가

노예 제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스스로는 노예를 거느렸다. 한국에서 알려진 통설과는 달리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체로 노예제도에 비판적이었다. 다만 노예제도의 존폐를 헌법에 명시하면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북부와 찬성하는 남부의 연합이 균열되어 연방이 와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개별 주에 맡기는 정책을 썼다. 워싱턴, 제퍼슨, 매디슨은 노예제가 조만간 자연스레 폐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노예제 인식은 "필요악" 수준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많은 이론들이 나와서(ex:자본주의의 빈부격차에 의한 갈등을 완화시킨다-노예니까 가난해도 문제없음!) 정당화되었다.

워싱턴이 결혼과 함께 생활하고 항상 은퇴 후에 돌아갈 곳으로 생각했던 Mount Vernon은 결혼 당시에는 50명의 노예가 있었지만 사망 직전에는 300명이 넘는 숫자로 늘어났는데 운영했던 농장의 규모나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그 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워싱턴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아이돌이라 불리울 정도로 인기가 많았으며 워싱턴이 사망할 때까지 지냈던 Mount Vernon의 노예들은 단지 잡일의 역할이 아닌 대장장이나 천을 짜는 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특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워싱턴은 직접 작성한 유언장에 독립전쟁때부터 자신을 수행한 비서 흑인을 자신의 사후에 자유인으로 풀어주도록 했으며 Mount Vernon에 있는 나머지 노예들은 부인 Martha Washington이 사망한 후에 모두 자유인으로 풀어 주도록 하였다.

성격

초상화를 보면 상당히 무뚝뚝하고 권위적으로 생겼지만 그와는 달리 대단히 자유분방하고 쾌활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관저에서 카드놀이를 열광적으로 즐겼고, 무료하면 관저를 나서 여우 사냥에 심취했으며 다과회도 자주 열어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또한 미식가라서 음식에도 엄격했으며 특히 포도주에는 사족을 못 썼다고. 어렸을 때부터 말타기등을 즐겨해서 그런지 외모는 정말 장군감이었다고 한다. 어깨는 딱 벌어졌고, 키도 187cm로 매우 컸다.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아서 곰보였는데, 이오시프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초상화에는 이것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독립전쟁 이전부터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아메리카 대륙 버지니아 식민지 사교계에서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여담
오늘날 워싱턴의 얼굴은 1달러짜리 지폐에 새겨져 있으며 이유는 가능하면 많은 이들이 그를 보게 하기 위해서라고.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대통령의 권위를 확립한 성공적인 대통령으로서 워싱턴은 모든 미국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1달러 지폐에 실려있는 워싱턴의 입이 부풀려져 있는데, 틀니를 껴서 그런 것이다. 워싱턴은 양치를 꼼꼼히 하는 편이었으나 그 당시 치약은 재료부터가 병맛인지라(담배가루를 치약으로 썼다) 워싱턴은 젊은 나이에 이가 빠져 틀니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틀니는 성능이 안 좋아 항상 냄새가 났고 당시 의치 재료로 많이 사용한 것은 하마나 바다코끼리의 엄니였는데, 사용하다 보면 미세한 구멍에 찌꺼기가 끼어 아무리 닦아도 냄새가 났다. 밤이면 뽑아서 물에 담가 놓고 하루 여섯 번씩 닦아도 냄새가 났다고 한다. 워싱턴은 그 냄새가 역겨워 항상 입을 굳게 다물고 다녔다. 워싱턴의 초상화는 매우 다양한 버전으로 존재하는데 표정이 일그러져있는 그림도 다수 보이며 이는 새로 장착한 틀니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경우였다고 한다.

더불어 미군에서도 가장 높은 계급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그가 전역할 땐 중장(Lieutanant General)에 불과했지만 1976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그를 3계급 특진하여 대원수(General of the Armies)로 추서한 것.

워싱턴의 벚꽃나무 이야기가 유명한데, 그는 도끼로 아버지가 아끼는 벚꽃나무를 베었는데 그가 솔직하게 말하자 아버지가 용서해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