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농구의 전설 현주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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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구의 전설 현주엽


2017. 4. 21.

한국의 前 농구 선수, 현 농구해설자.

전성기 때는 한국의 찰스 바클리로 불렸고, KBL에서 포인트 포워드라는 포지션을 정립한 사나이. 그러나 부상과 불운으로 인해 제 기량을 다 펴지 못하고 은퇴한 선수다. 별명은 매직 히포.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했어요"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의 포워드 이승현>

어머니는 국가대표로 한 시대를 풍미한 여자 농구 선수인 홍성화. 정작 현주엽은 이 사실을 처음 농구에 입문한 중학교 1학년 때 알았다고 한다. 즉, 농구선수의 피를 타고는 났지만 시작은 늦은 편. 거기다 당시에는 살이 많이 쪘던 상태라 휘문중학교 1, 2학년때는 존재감 없이 팀내에서 연습만 하고 있었다. 이때 현주엽과 같이 구석에서 연습만 하던 1년 선배가 바로 위장 전학야구를 하다가 농구선수로 갓 전향한 서장훈이었다. 이 둘은 농구선수로 기본기를 다지고 폭풍성장하면서 동시에 잠재력이 폭발했고 휘문고는 무적이 되었다. 서장훈이 졸업한 후에도 현주엽은 휘문고를 혼자 이끌며 전성기를 이어갔다.


두 사람이 절친한 사이이기는 하지만, 선수로서 서로간의 라이벌 의식은 정말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려대의 현주엽 영입 과정은 정말 간단했다. "너, 연대가면 서장훈 그늘에 가린다." 이 말 한 마디에 현주엽은 고려대 진학을 결정했고, 이후 둘은 대학 시절 내내 치열하게 격돌했다. 그러나 승자는 간발의 차이로 항상 우승을 차지했던 서장훈이었다. 서장훈은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문경은, 우지원, 이상민 등과 호흡을 맞추어서 두 차례 농구대잔치 우승에 성공하지만, 현주엽과 전희철, 양희승, 신기성, 김병철이 포진한 고려대는 끝내 농구대잔치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한다.


문제가 된 것은 1998년. 1997년 한국프로농구가 출범하면서 드래프트 원칙이 세워졌는데, 1993년 입학인 서장훈은 1년 유학이라는 공백기가 있는 관계로 졸업 시기는 같았지만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계약할 수 있었고, 현주엽은 드래프트 제도에 묶여 자기 마음대로 팀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현주엽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결국은 제도에 수긍하고 그를 지명한 청주 SK 나이츠에 입단하여 서장훈과 같은 팀이 되었다. 그러나 드래프트 현장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어쨌든 대학 무대를 평정한 슈퍼루키 두 명을 동시에 보유하게 된 SK 나이츠는 단숨에 우승 후보로까지 거론되었지만, 정작 시즌이 시작되고 보니 두 사람의 시너지 효과는 제로였다. 개인 스탯만 놓고 보면 현주엽이나 서장훈 모두 평균득점 20점을 상회할 정도로 준수했지만, 둘의 호흡 자체는 생각만큼 맞지 않았고 팀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휘문고때 검증되었던 서-현 조합이 왜 실패했을까? 이는 현주엽이 휘문고 시절과 달리 대학 진학 후 빅맨으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휘문중-고시절 현주엽은 고려대 시절에 비해 가벼운 몸이었고 진짜 윤대협의 재림처럼 전천후 스윙맨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센터였던 서장훈과 활동범위가 겹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대학교 진학 후에 팀 사정상 몸을 불리고 센터로 전향하게 된다. 당시 현주엽 입학 전까지 고려대에는 연세대의 서장훈을 막을 빅맨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8cm의 전희철은 원래 현주엽과 비슷한 타입의 전천후 포워드에 몸싸움이 약해서 서장훈과의 매치업이 안됐고, 당시 고려대 최장신이었던 2m의 유학생 박재헌은 부상 등을 이유로 많이 출장을 못했다. 이 때문에 키는 (서장훈에 비해서) 작지만 힘과 투쟁심을 갖췄고, 골밑 플레이가 가능했던 현주엽이 서장훈과 매치업하는 빅맨으로 낙점된 것이다. 때문에 현주엽은 대학시절 4년동안 센터가 되었고, 프로에서 재결합했을 땐 이미 둘의 포지션, 레인지가 완전히 겹쳐버렸다.


덕분에 이 둘을 조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안준호 감독은 중간에 짤렸고, 새로 부임한 최인선 감독은 이 둘을 조화시키겠다는 생각을 포기한다. 평균 20득점 가깝게 올리는 선수지만, 어차피 외국인 선수도 있는 상황에서 역할이 중복된다고 보고, 현주엽을 트레이드 카드로 쓴 것. 마침 단장이 고대 출신인 이인표이기도 했고, 스타가 필요했던 광주 골드뱅크 클리커스에서 현주엽을 원했고, 그렇게 1999년 12월 24일, 일명 '크리스마스 이브의 빅딜'을 통해 조상현과 현금을 얹어 골드뱅크는 현주엽을 영입했다.

골드뱅크에서 팀의 에이스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였다. 이 때 처음으로 어시스트에 눈을 떠서 평균 어시스트가 거의 포인트 가드에 맞먹는 7.6개, 5.0개를 기록할 정도. 만능 포워드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면서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그도 신체 강건한 남자로 군대는 피해갈 수 없었다. 당시 신체검사에서 196cm가 넘으면 군면제였지만, 공식 프로필과 달리 실제 신장은 이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가면 가는 거라서 수긍하고 갔나 싶었는데, 문제는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남자 농구가 금메달을 딴 것이다! 당시 상무 소속으로 국가대표팀에서 뛰었던 현주엽은 4Q 막판 동점 슛을 성공시키면서 맹활약하며 한국 남자 농구가 20년만의 아시안 게임 우승을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군 복무중인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바로 병역특례를 적용하여 전역시키는 제도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상무에 남아 군복무를 마쳐야 했다. 

전역 후에는 모기업이 바뀐 부산 KTF로 돌아가서 역시 '포인트 포워드'로 활약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이미 현주엽의 무릎 상태는 좋지 않아 이미 연골이 닳아버린 상황이었고, 외국인 선수들과 부대껴야 하는 4번 자리에서 투쟁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시스트에 주력하는 포인트포워드는 좋게 말하면 다재다능함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어정쩡함이었다. 그리고 현주엽은 불행히도 점차 어정쩡함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FA로 풀리기 직전인 2004-05 시즌 평균 14.2득점, 어시스트 7.8개를 기록하며 맹활약하고, PO에서도 평균 23점을 넣으며 분전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어시스트와 PO 활약에 주목했지 점점 줄어드는 평균 득점에는 주목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런 활약으로 현주엽의 FA 가치는 높아졌고, 이를 주목한 것은 포워드에 환장하던 신선우 감독이었다. 즉시 FA로 질러서 현주엽을 영입했는데, 결국 무릎이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 젊은 때처럼 힘과 탄력으로 외국인 선수들과 맞짱을 뜰 수도 없었고, 패스에 주력하기에는 그의 무릎 역시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냉정하게 말해 LG에서 먹튀로 전락했다. 보상 선수로 KTF로 간 송영진이 알에서 껍질을 깨면서 성장한 것에 비하면 LG의 손해. 

그래도 LG의 전력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팀에 있던 첫 해를 빼고 나머지 3년 동안 모두 PO에 올랐다. 가장 전력이 좋았던 것은 2006-07 시즌. 그러나 이 해 KTF와의 PO에서 센터 파스코의 폭력 사태로 파스코가 영구제명되면서 외국인 선수가 한 명 부족하게 되어 결국 KTF에 패하고 만다. 현주엽이 가장 챔피언 결정전에 가까웠던 순간이었다. 현주엽은 끝내 은퇴할 때까지 프로와 아마가 함께 뒤던 시절의 농구대잔치와 프로농구를 통틀어서 챔피언결정전 무대를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하고 은퇴했다. 

무릎이 좋지 않던 현주엽은 2009년 무릎 수술을 받았지만, 재활 도중 결국 선수 생활을 포기한다. 그래서 2009년 6월 24일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화려했던 현주엽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끝맺음이 너무도 허망했다.

선수 생활 당시에도 여러 염문이 많았다. 연예인과의 염문 자체는 상관없는데, 이게 자기 관리 소홀로 빚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다. 관심있는 사람들은 검색창에 현주엽을 치면 알아서 알게 된다. 어쨌든 결혼이 또래에 비해 좀 늦은 편이었고, 자칫 잘못하다가 은퇴하기 전에도 결혼은 못하는 건 아닌가 걱정하던 팬들도 있었다.

일반인과 2007년에 결혼했다. 슬하에 아들 둘을 두고 있다.

은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내외적으로 어수선했던 고려대 농구부 감독 취임설이 돌기도 했으나 일선 지도자에는 딱히 마음을 두지 않은 듯. 2010년 7월 스포츠의학, 재활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아마도 자신의 부상과 재활 실패가 정말로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문제는 은퇴하고 모아둔 돈을 펀드 매니저에게 모두 맡겼다가 이걸 다 날려먹는 피해를 입은 것. 그리고 이 때 날아간 돈이 무려 17억이다. 결국 주변과의 연락도 모두 끊어지고, 대외 활동도 전혀 하지 않았다. 두문불출 그 사이 열린 OB 고연전이나, KBL 15주년 기념 올스타에 모두 선정되었지만 전부 다 불참했다.

이후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2014-15시즌부터 MBC 스포츠플러스의 해설자로 복귀했다. 은퇴 이후로 처음으로 농구계에 발을 내딛게 된 것. 데뷔 무대는 2014년 9월 17일 열린 신인 드래프트 중계였다. 이후 10월 11일 개막전에서 모비스와 LG의 경기에 해설로서 한명재와 호흡을 맞췄는데, 첫 방송경기 해설이라 그런지 몰라도 재앙급의 해설을 쏟아내며 욕먹었다. 경기보는 눈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해설자임에도 도무지 말을 하려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한명재 캐스터가 중계 도중 "현주엽 위원님, 말씀이 너무 없으신 거 아니에요?" 라고 토로할 정도. 그러나 이후 몇 경기를 치르면서 점차 입이 터지기 시작했고 날이 갈 수록 부정적인 평가는 자연스레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용검 캐스터와 주로 호흡을 맞추고 있으며, 현역 해설자 중 현주엽이 최고다라는 여론도 많이 생길 정도로 호평을 받고 있다.

중계 도중 포인트 포워드(?)로 전향한 일화도 이야기를 해 줬는데 기량저하로 인해 득점하면서 팀을 캐리할 능력이 떨어져서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밝혔다.

그 탄력으로 서장훈과 함께 무한도전에도 출연하였고 석주일과 함께 2015년 설날 특집 아육대 농구 해설로도 출연하였다. 2015년 2월 20일 SK 대 KT의 경기를 서장훈, 정용검 캐스터와 세 명이서 중계하며 다채로운 썰들을 풀었다.

14-15 시즌 당시에는 샤킬 오닐이 진행하는 인기 프로인 Shaqtin' A Fool의 KBL판으로 보이는 현주엽의 보너스원샷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15-16 시즌에도 MBC스포츠플러스 프로농구 해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정용검-현주엽 콤비는 해설 내용면으로나 예능감으로나 호평을 받고 있는데, 특히 오심이나 플라핑에 있어서 속시원한 해설을 많이 해주는 편. 중계석 바로 정면에서 본 장면에 대해 멀리서 있던 심판이 어처구니없는 콜을 주자 "그게 보이나 봐요... 전 안보이는데"라며 극딜을 놓았다. 선수의 세세한 습관 등을 잡아내는 눈썰미도 보여주는 중.
15시즌 동부 홈경기에서 정용검이 댄스타임에 피자를 따내기 위해 춤을 추면서, 현주엽에게도 춤을 추라고 강요하자 몸을 움찔움찔하더니 정용검을 혼내려 들었다. 결국 따낸 피자를 현주엽이 가져가자 정용검이 자기가 딴 피잔데 왜 현주엽해설이 먹냐고 궁시렁. 그리고 그 피자는 이어진 작전타임 시간에 현주엽이 먹었다.

그 뒤에 KCC 홈경기에서는 치킨도 받았다.

2015년 2월 21일 무한도전 설특집 무도큰잔치에도 서장훈과 함께 출연. 처음에는 서장훈에게 댄스 신고식 안 하는 방법 좀 알려달라는 등, 영 어색한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베개 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슈퍼 파워라고 답하며 슈퍼 파워란 별명을 얻었다. 그 뒤부터 배우 박혁권과 함께 예능 늦둥이로 맹활약하며 큰 웃음을 자아냈다. 베개 싸움 중 여자인 박슬기를 상대하게 되자, 여자라 어떻게 공격하냐고 공격하지 못 하자, 유재석이 현주엽이 지면 팀이 진다는 소리를 듣자 바로 공격을 하더니 나가라면서 박슬기를 그대로 한 손으로 내팽개쳤다!!! 게다가 서장훈을 일반인 잡듯이 때려잡고 단체전에서는 혼자서 5명을 이긴 박혁권을 어렵게 쓰러뜨리고는 그 역시 5명을 이기며 승승장구했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정준하를 상대하게 되었는데, 이 때를 두고 크게 지친 상황. 김영철의 이상한 로고송 때문에 힘이 빠지기도 했으나 어케 버텨내고는 이기는가 했으나, 정준하가 이겨버렸다. 덕분에 새로운 영웅을 기대한 사람들을 매우 허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예능 프로그램 특유의 분위기를 낯설어하며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5년 4월 14일과 4월 21일에는 우리동네 예체능에 출연했으며, 동년 5월 tvN 예능 프로그램 '촉촉한 오빠들'에도 출연. 이후 7월 26일 런닝맨 영웅전에 출연했다. 동년 9월부터 10월까지 정글의 법칙 니카라과 편에도 출연했고, KBS의 추석특집 예능 프로그램 '네 멋대로 해라'에도 출연. 동년 11월부터는 자녀들과 함께 MBC 예능 위대한 유산에 출연 중이다. 12월부터는 채널A의 예능 프로그램 부르면 갑니다, 머슴아들과 개밥 주는 남자에 출연했다. 머슴아들은 16화를 끝으로 폐지되었고 개밥 주는 남자는 15화에서 하차. 이 외에도 MBN 엄지의 제왕에도 패널로 출연 중이다.

2016년 5월 14일에 KBS 배틀트립에 출연해서 하하, 김승현과 함께 슬램덩크 성지순례를 컨셉으로 여행했는데, 여행 내내 슬램덩크 번역본 완전판을 손에 들고 다니면서 실제 배경과 비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걸 보고 다들 능력자들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진이 사퇴해 공석이던 창원 LG 세이커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코치직 경험도 거의 없는터라 팬들은 잘할 지 반신반의하는 중.

2013년 7월 10일, 음주운전으로 불구속 입건됐다.
은퇴하고 모아둔 돈을 중·고교 및 대학 동창인 황 모 씨로부터 소개받은 삼성선물의 펀드 매니저 이 모 씨에게 모두 맡겼다가 날려 먹었다. 지인 박 모 씨 소개로 돈을 투자했는데, 박씨와 이씨가 짜고 다른데 쓸 돈을 막기 위해서 현주엽을 이용했다고 한다.
2012년 5월 12일 삼성선물을 상대로 한 17억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삼성선물에서 8억 7천만원을 돌려받았다고 하나, 전 재산의 30%만 남기고 몽땅 날아간 상황.
위 손해배상 민사재판 과정에서 위증을 한 혐의로 박씨로부터 고소를 당해 2014년 10월 1심에서 벌금 150만원을 선고 받았으나, 2015년 12월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와 별도로 황씨에게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2014년 5월 패소했으며, 이로 인해 황씨로부터 무고 혐의로 고소를 당해 2015년 10월 22일 무고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았다.

현역 선수였던 2004년에는 당시 대통령인 노무현과 닮았다 하여 인터넷에서 노무현주엽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었다. 2014년부터 인기리에 방영중인 KBS 예능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고 있는 연기자 송일국의 셋째 아들 송만세의 닮은 꼴로 꼽히기도 했다. 무한도전에 출연했을 때에는 닌자 거북이와 비교당하기도. 그외에 트와이스 다현과도 상당히 닮았다. 큰입과 볼살이 닮은 편.
역대 KBL 포워드들 중 가장 높은 수치의 평균 어시스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평균 7개가 넘는 어시스트를 두 번이나 기록하였고 커리어 평균 어시스트 갯수는 5.21개로 이는 웬만한 포인트 가드들 보다도 높은 기록이다. 현주엽 보다 높은 평균 어시스트를 가진 선수들은 김승현(6.90), 강...(6.55), 크리스 윌리엄스(6.28), 이상민(6.17), 제럴드 워커(5.85), 주희정(5.57), 신기성(5.33), 김태술(5.39)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