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관우의 청룡언월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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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관우의 청룡언월도 진실


2017. 3. 21.

삼국지연의의 관우가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월도. 냉염거란 별명이 있다. 한자로 쓰면 冷艶鋸. 설원에서 계속되는 전투로, 붉은 피가 얼어 톱날같은 막이 생긴 것에서 유래한 별명이다.

정확히는 폭이 넓은 박도인 청룡도를 언월도 형태로 만든 물건. 


삼국지연의에서는 도원결의 직후 의용병을 일으킬 때 동네 대장간에서 쌍고검, 장팔사모와 함께 만든 무기이며 무게는 82근, 냉염거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작중 내내 관우가 사용했으며, 작중에서는 관우가 죽은 후 오나라의 장수 반장이 사용하다가, 관우의 차남 관흥이 반장을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청룡언월도를 되찾아 사용하게 된다. 관흥이 죽은 후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원작에서 82근이라는 어마어마한 무게를 제외하면, 딱히 청룡언월도에 대한 별다른 설정 같은 게 없다. 굉장히 강한 무기라는 언급도 없고, 그 모양새도 우리가 흔히 아는, 용의 입에서 칼이 뻗어나온 간지나는 모양이라고 언급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원작에서의 비중은 '관우가 들고 다니는 되게 무거운 칼' 정도가 전부다.

"사실 '한나라 시대의 '근' 단위는 현대의 기준보다 가볍기 때문에 당시의 기준이라면 청룡언월도의 무게는 약 18kg 수준'이다"라고 삼국지가 울고있네란 책에서 주장하기도 했는데, 설득력은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첫째, 나관중은 원말명초의 사람이다. 저 무게는 명대 단위로 환산하는 것이 나관중의 서술 의도에 합치하는 것이다.

  • 둘째, 나관중이 한말의 도량형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었더라도 인터넷도 없는 시대의 독자들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천년 전의 도량형에 맞춰서 이해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셋째, 아래에서 서술하지만 애초에 청룡언월도 자체가 한나라시절에 있었던 적이 없는데 당시 기준을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다.

송나라 시절 도량형이 1근에 680g이 된 이후 현대까지 꾸준히 중량이 감소되어 현대의 600g으로 이어졌으므로 위의 49.2kg 쪽이 더 설득력 있다.

이상의 설명대로라면 길이의 단위에도 마찬가지로 명대의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데 관우의 9척은 명대 기준으로 280cm를 넘을 뿐더러 삼국연의에 신장이 기재된 인물은 대다수가 7척 이상으로 명대 기준을 적용할 경우 210cm가 넘어간다. 별다른 기재가 없다고 해서 원명대 기준으로 해석한다면 전투에서 이렇다 할 활약이 없는 조조조차도 210cm가 넘는 거구가 되며 키가 작은 것으로 설정된 장송도 5척 미만은 명대 기준으로 155cm 미만으로 평균 미만인 정도이다. 이것은 정사 삼국지에서 신장이 기재된 인물들이 대부분 8척이었기 때문에(당시 기준으로 190cm 정도) 나관중이 고대의 인물은 현대보다 거인이라고 생각한게 아니라면 캐릭터성을 부여하기 위해 9척은 굉장히 큰 키, 8척은 상당히 큰키, 7척은 보통이거나 약간 큰 정도의 신장으로 생각하고 신장을 책정한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묘사는 수호전에서도 동일하게 서술되어 키가 묘사된 경우 보통 7척이 넘으며 성인으로 최단신인 무대랑(장송과 동일하게 5척미만)을 제외하면 모두 6척(명대 기준으로 본다면 약186cm) 이상으로 서술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사 삼국지에서 전위가 80근의 쌍극을 사용했다는 기록을 보고 무장이 들 수 있는 가장 무거운 무기를 80근으로 이해하고, 그보다 약간 더 무거운 무기를 관우에게 부여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신장의 경우, 실제 비교 대상이 주위에 있어서 차이점을 알 수 있는데 비해 무기의 경우 최상급의 무인이 사용 가능한 무게를 일반인이 알기 어렵기 때문에 명대와 삼국시기의 도량형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설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수호전에서도 노지심이 62근 선장을 주문해서 들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냥 고전소설에 나오는 호걸들의 무지막지한 힘을 나타내기 위한 소설적 묘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설령 18kg이 맞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휘두르고" 다닐만한 무기의 중량은 절대로 아니지만 말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근육을 기른 보디 빌더들도 몇 번 못 휘두를 무게. 실제로 무겁기로 악명높은 총기인 M60 기관총의 무게조차 고작? 10.5kg에 불과한데 이걸로 총검술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병영생활방침에도 M60 기관총으로 총검술을 시키는 것을 가혹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저런 무게의 검은 실전에서 절대 쓸 수가 없으며 실전에서 쓰려고 하면 민첩성이 후달려서 되려 허약하다. 중세 실전용 양손검도 끽해야 1~2킬로그램이 고작이고 언월도 같은 폴암류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도의 무게이니 고전소설의 뻥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다. 다만 관우와 동시대 인물인 전위는 실제로 80근의 쌍극을 들었다는 기록이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데 이것만 봐선 당대에 명성을 떨칠 정도의 장사라면 저 정도 무기를 들 수는 있었던 거 같다. 여기에도 단순히 들어올리기만 한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 다루기까지 했는지의 논쟁이 생기지만 18kg 정도라면 일반 성인 남성도 문제없이 들어올릴 수 있는 무게이므로 최소한 퍼포먼스 용으로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의 도검 중 가장 무거운 도검은 전투용 창검이 아니다. 바로 사형집행을 할때나 쓰는 참수검이 인류가 만든 도검중에서 장식용이 아닌 실제 썰기 위해 만든 도검 중 제일 무겁다. 참수검은 굳이 뛰어다니면서 휘두를 필요도 없거니와 무게가 나가야 참수할 때 목이 단번에 깨끗하게 썰리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후대에 등장한 단두대의 날이 어마무지하게 무거운 이유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만약 청룡언월도를 관우가 연의에서 다른 장수들을 벨 때 설정된 것처럼 말 위에서 빙빙 휘두를 수 있다면 관우는 무려 성인 남성 평균의 수십 배의 힘을 가진 괴물이 된다. 또한 그렇게 무거운것을 휘둘러야 하니 몸무게도 엄청나게 나갔어야 했을것이다. 그나마 말이 되는 수준은 3.5배인 '두 손으로 가운데를 잡고 빙빙 돌리는' 수준. 하지만 이건 우리가 생각하는 "휘두르다"와는 좀 거리가 있다.

관우나 장비의 체구에 대한 묘사 역시 당시의 기준을 적용한다해도 엄청난 거한이니만큼 뻥이 좀 들어갔을 것이다.

실제의 관우는 당대의 다른 기병들과 동일하게 모(矛)를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안량을 끔살시킨 정사 삼국지의 열전 기록에서 '안량을 찌르고(刺) 목을 베어 돌아왔다'라는 내용을 통해 모를 사용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 밖에 태평어람 등에는 관우가 쌍도(雙刀)를 썼다는 기록과 검의 이름이 남아 있지만 태평어람이 삼국시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후대의 기록이고 인용된 기록 가운데 유실된 기록도 있어서 정말 그런 무기를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지집해에는 도검록의 기록에 따라 이 쌍도에 대해서 주석을 달았는데 '관우가 도산(都山)의 쇠를 채취하여 도 두 자루를 만들어, 만인적(萬人敵)이라고 새겼다. 더불어 관우가 패해, 관우는 도를 아깝게 여기다, 이를 물 속으로 던졌다.'라는 기록이다.

언월도란 무기의 기원은 전한시대에서 당송 시대까지의 무기인 참마도라 할 수 있다. 참마도는 참마검(斬馬劍)이라고도 불렸는데 이것은 양날검에 긴 자루를 붙인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언월도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이것이 시대가 바뀌면서 모습이 변해 당나라 때 이르러 오늘날 볼 수 있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언월도는 중국에서는 명나라 때까지 사용되었다. 따라서 관우가 살아있던 시절엔 지금과 같은 형태의 언월도 같은 건 없었다. 이 때문에 삼국시대의 역사상의 관우가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언월도를 사용한다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말에 탔을 때 발을 고정하는 등자가 제대로 발달하기 전의 삼국시대에 청룡언월도 같이 무거운 무기를 다룰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현실성이 떨어진다. 등자가 아예 없던 건 아니었지만 성능은 영...

다른 창작물에서는 원래 무기로 쓰려고 만든 게 아니라 장식으로 쓰려고 만든 거라서 일부러 크고 아름답게 제작한 것을 관우가 발견하고 그 대장간 주인에게 돈을 달라는 대로 쥐어준 뒤 그 장식의 날만 세워서 사용했다는 묘사도 있다.

신장 관우의 무기를 동네 대장간에서 만들었다는 묘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후대 사람들은 청룡언월도에 대한 전설을 붙이기도 했다. 진짜로 황하의 청룡이 변신해서 만들어진 무기라든가, 주인이 위험에 처하면 울음을 낸다든가, 기름으로 닦으면 불이 나니 안 되고 물로 닦아야 했다든가...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청룡언월도가 원래 장식용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절충하였다. 관우가 처음 청룡언월도를 주문하자 대장장이는 처음에 82근을 8.2근으로 알아듣고, 82근으로 정정하자 이걸 장식용으로 만들라는 건 줄 알고 날을 세우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만든 언월도를 관우가 가볍게 빙빙 휘두르자 대장장이가 "내가 쇠는 쇠인데 '솜'쇠로 저걸 만들었나?"라고 말하게 만든다. 한바탕 휘두른 후 관우가 면도가 가능할 정도로 날을 세워달라고 부탁하고, 이후 청룡언월도는 관우 손에서 사람 목을 수없이 떼게 되었다.

명나라 시절에도 기병들이 관우의 청룡언월도와 유사한 언월도를 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상대로 큰 효과를 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조선도 이 언월도를 군대에 도입하였다. 그럼에도 '언월도는 지나치게 무거워서 실력을 뽐내거나 훈련용으로만 쓸만하다.'라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전투용 언월도라기보다는 의장용 언월도나 말 그대로 '내 팔뚝 굵다.'라고 뽐내려고 무게를 어마무지 무겁게 만든 청룡언월도에 대해 한 말이다. 말 그대로 연의의 영향을 받은 물건.

조선의 경우에는 중국제 언월도보다 좀 더 작고 가벼우며 장식이 덜한 것을 사용했는데, 이편이 더 실용적이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청룡언월도 애호가는 효종임금이며, 상당히 무거운 언월도와 철퇴를 들고 말을 달리며 무예를 뽐내고는 했다. 사도세자 또한 효종의 언월도와 철퇴를 휘둘렀다는 기록도 있다.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된 언월도는 자루 길이가 6척 4촌(134cm), 칼날 길이가 2척 8촌(59cm), 무게는 3근 14냥(2.5kg)이라고 한다. 관우의 청룡언월도만은 못하지만 무척 무거운 무기인건 사실이며, 이 때문에 기병이 주로 쓰고 보병은 의장용으로나 썼다.

조선 후기로 가면 언월도는 주로 의장용 무기로 변모되며, 기병이고 보병이고 실전에서는 거의 쓰지 않게 되었다.

이영도는 <드래곤 라자>의 용어 해설 부분에서 오크들의 주 무장으로 묘사한 글레이브를 청룡언월도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사실 언월도라는 무구 자체가 칼자루가 붙어있어야 할 부분에 웬 봉이 떡하니 붙어있는 형태의 무기인 만큼 글레이브로 봐도 별로 이상할 거 없다.

뱀발로 중일전쟁때 국민당군 게릴라가 청룡도를 꼬나잡고 시가에서 기습을 하는 통에 일본군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도를 버리고 채용한 프랑스식 군도를 다시 일본도로 바꿨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다. 하지만 당대 국민당군이 사용했던 도검은 박도의 일종인 항일대도라는 무기로 청룡도와는 상이하다.

또한 일본군도의 경우 실제로는 개항 당시 서양식 사브르를 도입한 것이 사실이나, 한손검인 사브르를 다루는데 양손검에 익숙한 사무라이 출신의 일본장교들이 불편해 해서 결국 때려치고 일본도로 돌아간 것으로 그 변화 요인에 항일대도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애초에 중일전쟁 발발 시점은 이미 군도의 일본도화가 거의 끝나가는 시기였다.

실제로 국민당군 리인액트를 보면 중국제 kar98에 항일대도를 들쳐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걸 사람들이 청룡도로 잘못 받아들인 것.

이름의 유래는 청룡언월도를 만들던 중 청룡(푸른 용)이 왔는데 단번에 그 언월도로 베어 죽였다 하여 이름이 그렇게 지어지게 된 거라고도 한다.

차량정비, 건물철거, 금고해체 등의 작업에 이용되는 공구 '큰대꾸'를 달리 이르는 속칭으로 청룡언월도가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