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룡의 어린 시절부터 감독이 되기까지
본문 바로가기

성룡의 어린 시절부터 감독이 되기까지


2017. 2. 7.

홍콩 출신의 액션 영화 배우. 표준중국어로는 청룽, 광동어로는 싱룽, 서양에서는 Jackie Chan이라고 부른다. 한국 기자들은 신해혁명 이후의 중국인은 모두 표준중국어 발음을 따라 쓰도록 되어 있는 외래어 표기법 때문에 '청룽'이라고 표기하는데, 성룡 본인은 그냥 재키 챈으로 불러달라든지 아니면 한국 발음인 성룡으로 써달라고 한 바 있다. 성룡을 성룡이라 부르지 못하고 서양식 성 Chan은 후술할 진항생에서 陳씨의 광동어 발음. 재미있는 사실은 버파의 잭키 브라이언트의 초기 이름이 jackie였다.


다른 액션배우들에 비해 연기력이 상당히 출중한 편이다. 슬픔에 괴로워하는 연기에 특히나 강한데, 그런 성룡의 연기력을 제대로 맛 볼 수 있는 영화가 홍금보가 바보 형으로, 성룡이 경찰 동생으로 나오는 《용적심》과, 부하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빠진 진국영 반장 역을 맡았던 《뉴 폴리스 스토리》이다. 그 외에도, 《러시아워 3》의 마지막 에펠탑 결투 등, 눈물을 머금고 소리치는 장면은 성룡만의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코믹 무술 이미지가 커서인지, 진지하게 나온 영화들은 해외 흥행이 신통치 않다. 《중안조(1993)》라든지, 《뉴 폴리스 스토리》, 《신주쿠 사건》 같은 영화들은 평은 괜찮을지언정, 해외 흥행은 참혹했다. 홍콩 흥행도 마찬가지로 그다지 안 좋았다. 《중안조》로 대만 금마장 영화제 및 홍콩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수상한 거와 대조적이다.


물론 액션배우인만큼 전문적인 파이터나 무술가들만큼 뛰어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무술 실력이 제법 강하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워낙 이미지가 코믹하다보니 되려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뛰어난 운동신경과 무술실력이 있기에 액션배우로 이렇게까지 활약하는게 가능하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 몸이 엄청난 강골인데 안그랬으면 후술할 사고를 당했을 때 이미 목숨을 잃었다. 촬영을 하면서 큼지막한 사고들을 많이 당하고도 살아남을 정도로 강하다.

본명은 천강성(陳港生, 한국어로 진항생, 광둥어로 찬공쌍)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은 '방사룡(房仕龍)'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국민당군의 스파이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명을 숨기고 '진' 씨로 가장했다고. 그래서 성룡의 아들은 후명인 '방조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90년대 대한민국에서 추석, 설날 명절 때마다 만나는 반가운 스타이기도 했다. 명절 특선영화 단골손님이었기 때문. 같은 사정의 외국인 배우로는 미스터 빈을 연기한 로언 앳킨슨이 있지만, 이쪽은 성룡과 달리 배우보다 캐릭터 자체가 더 유명한 편. 2000년대 와서는 많이 잊히고 있다. 

소림사에서 영화를 찍기도 해서 흔히 불교도로 잘못 알고들 있지만, 사실 본인은 정작 무종교이다. 진짜배기 불교도는 이연걸로 정확히는 티베트 불교 신자인데 이연걸은 베이징과 만주 출신이고, 이들 지역은 몽골인의 영향으로 티베트 불교세가 절대 강세이다. 청나라의 만주족 황족들도 몽골계 종족답게 티베트 불교를 믿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굉장한 인기를 누렸고, 인기에 힘입어 일본에서 일본어로 부른 음반도 출시해 활동한 적이 있다. 실제로 80년대 일본에서는 성룡 인기의 영향으로 과감한 스턴트 액션 영화가 여려편 만들어졌다. 사나다 히로유키 같은 배우도 이 붐에 편승해 무술신과 스턴트신을 직접 해내는 영화에 자주 출연했다. 일본에 방문도 자주 했으며 우리나라처럼 일본도 성룡에게 상당한 친숙함을 느낀다. 

재밌는 것은 성룡은 한국에서 표준중국어(보통화)를 쓰지만 일본에서는 광동어(홍콩어)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이건 중국 영화의 더빙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홍콩 영화가 개봉될 때 한국에서는 주로 보통화 버전으로, 일본에서는 광동어 버전으로 개봉했기 때문. 그래서 양국에서 각각 익숙한 이미지의 언어로 말하는듯 하다.


[성룡의 어린시절]

파란만장한 유년기를 보낸 인물로, 집안이 가난해서 정규교육도 받지 못해 문맹이 되었고, 그로 인해 성룡은 대본을 읽지 못하여 동료가 대신 읽어주는 대사를 외워 연기를 하는 등 많은 고난을 겪었다. 80년대 성룡이 대스타가 된 이후에도 이것이 걸림돌이 되어, 자신은 사인회에서 팬의 이름을 써주지 못하는 것을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고백하였다. 부인인 임봉교는 그에게 대본을 읽어주다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물론 후에 문맹에서 벗어났고, 영어도 구사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로 용의 흔적: 성룡과 그의 잊혀진 가족이 있다.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

부모님이 오스트레일리아로 모두 돈을 벌러 떠나고 혼자 남겨진 성룡은 우점원(于占元) 희극학교(경극 학교)에 들어가 10년 동안 연기와 무술 훈련을 받았는데, 이때 훈련이 어찌나 혹독했던지 성룡은 고문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패왕별희》를 보면 경극학교가 얼마나 혹독한지 알 수 있다. 구타는 기본이고, 고문에 가까운 벌도 많다.

희극학교 4년 선배가 홍금보고 4년 후배가 원표로, 이들은 훗날 '칠소복'으로 이름을 떨친다. 1988년에 나온 유가위가 감독하고 홍금보가 주연한 영화 《칠소복》이 바로 이 시절을 그린 영화이다. 우점원(于占元)의 이름 끝 글자 원(元)을 성으로 삼아 이름을 만들었고 홍금보는 '원룡' 성룡은 '원루'란 이름으로 이 시절 불리었으나 이후 독립하면서 각자의 이름을 만들게 된다. 홍금보와 성룡과 달리 원표, 원덕, 원태 등은 그 시절 그대로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경극 학교를 졸업한 성룡은 홍콩과 한국을 오고가면서 여러 무협 영화들에서 엑스트라를 연기하면서 연기자의 길로 나서게 된다. 이때 성룡은 그야말로 온갖 엑스트라 및 조연을 맡았는데, 심지어 1974년에는 에로틱 영화인 《금병매》에서 조연으로 나오기까지 했다. 이때 출연한 《여경찰(女警察:영어 제목은 Police Woman)》 같은 경우는 훗날 국내에서 《성룡의 영 타이거》라는 제목으로 비디오로 출시되었는데, 제목도 그렇고 마치 성룡이 주연인양 나와서 멋모르고 빌려보던 이들이 성룡이 얼굴에 점을 붙이고 찌질이 악당 졸개로 나와 주인공인 택시기사(배우는 대만 출신 배우인 친샹린.)에게 맞아 뻗는 모습에 놀란 추억을 겪기도 했다.  

성룡이 찌질이 악당 졸개로 나오는 《성룡의 영 타이거》(1973) 국내 비디오 표지. 엉뚱한 사진을 박아놓아 이것만 보면 전혀 예측을 할 수 없다. 그나마 엑스트라치곤 좀 비중이 높긴 하지만, 주인공에게 맞다가 애원하며 빌고 주인공이 그냥 가자 뒤에서 비겁하게 반격하다가 맞아 나가떨어지며 퇴장한다. 

미국발매판 DVD도 성룡을 주연인양 세우고 전혀 다른 사진을 갖다붙였으니 다를 거 없다.

영 타이거 장면.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왼쪽 턱 근처에 큼직한 점을 붙이고 나오는데 정말 악당 그 자체로서 나와 여자도 가차 없이 죽인다. 밑 사진은 주인공에게 맞아 뻗고 빌면서 애원하던 장면. 성룡의 얼굴이 뭔가 낯설다면 쌍수 전이기 때문이다.


[스턴트맨 시절]

이후 경극 학교 선배인 홍금보의 추천으로, 이소룡 영화 《정무문》과 《용쟁호투》에서 스턴트맨으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정무문》에서 성룡은 이소룡에게 맞고 날아가 죽는 일본인 관장의 스턴트를 했었는데, 당시 한 사람이 장비 없이 날아간 거리로는 최고였고 《용쟁호투》에서는 이소룡에게 당하는 장면에서는 이소룡의 실수로 실제로 너무 세게 맞아서 부상까지 입자 이소룡이 사과의 의미로 다음 영화에서는 성룡을 꼭 조연이라도 영화에 출연 시켜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을 정도로 성룡은 뛰어난 실력의 스턴트맨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그러나 《용쟁호투》를 완성한 직후 그만 이소룡이 사망했다.

다만 성룡 본인은 이때 이소룡에게 진심으로 감동받았는지 이후에도 한번씩 이 일화를 회상하곤 한다. 이후 인터뷰 자리나 사석에서 맞은 부위가 하필이면 코라서 지금 코가 이렇게 크다며 본인도 우스갯소리로 그때의 일을 가끔씩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우스개소리이다. 성룡의, 코는 이후 《소림목인항》, 《신 정무문》 등에서 봐도 그 당시와 별 변함이 없다. 영화촬영 중 코뼈가 몇 번 부러졌는데, 이로 인해 치료를 받다보니 커진 것이다.)

결국, 1975년에는 가장 어려운 시절이었고, 이 해 《花飛滿城春(화비만성춘)》이라는 에로물에 출연하여 베드신 연기를 한 흑역사도 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스로 배우로서 성공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일을 접고 부모님이 살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게 된다. 그러나 1년이 채 안 되어, 이소룡의 홍콩 영화 데뷔작인 《당산대형》과 《정무문》의 감독 나유(羅維, 로웨이) 감독이 《정무문》 촬영 중, 이소룡과 불화가 생긴 이래로 이소룡을 대체할 만한 배우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스턴트맨이 아닌 주연으로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는 생각에 홍콩으로 돌아온다. 오디션에 합격한 성룡은 나유 감독과 함께 《신정무문》부터 전형적인 이소룡식 비장함과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작품에 줄기차게 출연하기 시작한다. 1977년작, 《풍우쌍류성》(한국 제목 : 유성검의 대결) 때부터는 쌍꺼풀 수술을 하여 외모도 배우로서 손색이 없이 호남형으로 바뀐다. 성룡이란 예명도 새끼 용(소룡)을 뛰어넘는 어른 용(성룡)이 되라는 뜻으로 나유가 지어줬다. 하지만 당시 쿵후영화는 그야말로 '마구 찍어낸 공장제 쌈마이 영화'였고, 특히 나유와 노예계약에 가까운 조건으로 고만고만한 영화를 찍던 성룡은 회의를 품게 되고 점차 나유와 사이가 벌어진다.
쌍꺼풀 수술 전 《신정무문》에서의 성룡 추성훈? 양동근? 누구세요????
쌍꺼풀 수술 후 《풍우쌍류성(유성검의 대결)》에서의 달라진 모습의 성룡

[코믹 무술 영화로 성공]

그러다가 성룡의 커리어를 역전시킨 일이 발생한다. 1978년 당시 액션연기 뿐만 아니라 서구형 외모에 개구장이 + 훈남 인상으로 홍콩에서 대스타였던 배우 부성이 스케줄 문제로 원화평 감독의 《사형도수》(1978) 주연에서 하차하자, 나유가 원화평과 오사원에 대한 의리로 사원영화사에 잠시 성룡을 대여해 준 것. 《사형도수》(1978)가 히트하자 곧바로 제작된 《취권》(1978)에서 원화평은 성룡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였고, 《취권》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성룡의 인지도는 수직상승하게 된다.

《취권》이 성공하자 나유와 계속 영화를 찍다간 평생 소모품으로 살다 끝나리란 절망감에 빠진 성룡은 야반도주를 하려다가, 나유 부인에게 들키게 된다. 자초지종을 들은 나유 부인은 '그럼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고 성룡에게 물었고, 성룡은 이에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나유는 성룡의 요청을 흔쾌히 허락했고, 성룡의 첫 감독작인 《소권괴초》(1979)가 제작된다. 《소권괴초》에서 그는 《취권》과 마찬가지로 코믹함을 가미한 액션을 내세웠고, 《소권괴초》도 괜찮은 흥행성적을 올린다.

그러나 여기서 성룡은 세상물정을 잘 모르던 어릴 때여서 그랬는지 실수를 한다. 나유 감독과의 계약도 있는데, 다른 영화사와 계약서에도 서명해버린 것이다. 몰랐다고는 해도 잘못이긴 했다. 이에 두 영화사는 성룡을 사이에 놓고 대립했고, 관련된 삼합회까지 개입하면서 일이 커진다. 나유 감독은 이에 성룡을 데리고 외국으로 도망가 버린다. 이것이 이른바 “성룡납치사건”으로, 당시 홍콩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다. 이때 삼합회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고, 홍콩의 액션배우, 무술배우 등도 눈치를 보던 왕우(王羽)가 개입하여 이를 해결해준다.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성룡은 왕우가 제작하거나 관계한 영화들에 배역은 거의 상관 않고 출연해주는 것으로 답례를 했는데, 《미니 특공대》(대복성이란 제목으로 개봉하고 비디오 출시, 더빙 방영했다.), 《화소도》 등이 그 예이다.

덕분에 성룡은 골든하베스트로 이적하게 되고, 여기서 내놓은 첫 작품이 《사제출마》(1980)다. 《사제출마》는 이전까지의 홍콩영화의 액션연출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며, 홍콩의 영화흥행기록도 경신하는 대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에 등장한 무시무시한 악역은 바로 우리나라의 합기도 원로 황인식이다.. 사제출마의 성공 이후, 성룡은 이소룡처럼 할리우드에 진출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고, 때마침 골든하베스트사에서도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배틀 크리크》(1980)를 시작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성룡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고, 워낙에 완벽주의와 자유로운 스타일을 중시하는 그에게 헐리웃의 액션 영화의 제작 과정 또한 너무나도 답답한 방식이었다. 결국, 성룡의 첫번째 할리우드 진출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1차 할리우드 진출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성룡은 홍금보 감독의 《오복성》(1983)에 출연하면서 홍콩으로 복귀, 골든하베스트의 흥행 삼총사 가화삼보의 중심이 되어 성공적으로 재기하였고 《프로젝트A》(1984)부터는 스스로 감독, 주연을 맡아서 할리우드 체류(滯留) 시절 주변에서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다며 권하기에 접했던 버스터 키튼의 영향을 받은, 과격한 아크로바틱 묘기와 좋은 유머 감각을 결합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성룡이 홍콩으로 복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은 영화는 《프로텍터》 (1984)라는 작품으로 홍콩 자본으로 만들고, 미국인 감독 제임스 글릭켄하우스가 감독한 작품이다. 참고로 성룡은 역동적이지 못한 액션에 선정적인 장면까지 들어간 미국 편집판을 보고 경악해서 엔딩이나 주요 액션 장면들을 재촬영하고, 자신이 직접 편집한 홍콩판 버전을 따로 만들어서 개봉했다. 이 재편집판 평이 압도적으로 좋은 편이다.

이 당시 성룡은 경극단 시절부터의 사형제지간이었던 홍금보와 원표와 같은 영화에 출연한 경우가 굉장히 많다. 때문에 이 당시 3명을 합쳐서 가화삼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다만, 이들의 영화를 그저 '세명의 합작품'으로 도매금 취급해버리는 것은 좀 부당한 대우라고 봐야한다. 물론, 어릴적부터 절친한 사이였으니 서로가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을 수는 있다. 하지만 80년대 초중반 가화삼보의 전성기에도 이들 셋은 영화, 액션에 대해 추구하던 방향성이 꽤 달랐다. 특히 각자 자신이 주연 내지는 감독의 타이틀을 건 영화의 경우는 각자의 색이 매우 뚜렷했다. 가령 똑같이 가화삼보가 출연한 프로젝트A(성룡 감독)와 오복성(홍금보 감독)을 비교해봐도 색이 굉장히 다르다는게 눈에 띈다. 아예 비룡맹장 같은 경우는 액션씬에서 성룡은 성가반하고만, 홍금보는 홍가반 하고만 놀고 있는게 눈에 확 띈다.

늘 과격한 스턴트 액션을 선보였기 때문에, 영화를 촬영하면서 온몸에 부상을 입지 않은 곳이 없고 몇 번 죽을 뻔했다고 한다. 《프로젝트A》 (1984)부터 성룡은 고소공포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계탑에서 떨어지는 스턴트를 했고 《폴리스 스토리》(1985) 한 편 찍으며 척추 골절, 무릎 부상, 고관절 탈구의 부상을 입었다. 1986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용형호제》를 촬영하던 도중에는 성벽에서 뛰어서 건너가는 장면에서 잡았던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머리부터 추락, 두개골이 함몰되었다. 성룡은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오른쪽 청력을 잃었고, 머리를 35바늘이나 꿰매서 큰 흉터가 생겼다 한다. 이 사고 장면은 《용형호제》의 엔딩 크레딧에서 여과 없이 나온다. 부상을 치료한 후 성룡은 영화의 나머지 부분을 촬영하여 영화를 완성시켰는데, 부상 때문에 머리를 짧게 깍고 촬영했다. 성룡은 데뷔 이후부터 긴 머리를 고수해오던 편이었기 때문에 《용형호제》 도입부의 스포츠머리를 보고, 성룡이 머리를 깎았다며 놀라는 관객들이 많았다. 이후 골든 하베스트의 추문회 사장은 성룡의 머리모양을 장발로 유지하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예전처럼 장발보다는 단정한 커트 스타일을 유지 중. 1994년, 《홍번구》를 촬영할 때 다리에서 호버크래프트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 착지를 잘못해, 오른쪽 발목이 90도로 꺾이며 골절됐다. 깁스 자국을 가려야 했기에 운동화모양을 본떠서 만든 특수 양말을 신고 촬영을 마쳤다. 이 역시 엔딩 크레딧에서 확인 가능하다. 그야말로 불사신!

성룡의 영화에는 스턴트 중 사고, NG 등을 총집해서 올리는 전통이 있다. (이는 서구권에서 촬영된 영화에도 남아 있다.) 엔딩 크레딧 NG 영상을 보면 성룡이 NG를 내면서 촬영 스태프들과 성룡이 웃는 화기애애한 장면이 나오다가, 성룡이 스턴트를 하다가 다쳐서 고통스러워하거나, 촬영 스태프가 다치거나 심지어는 사망자가 아닌가 싶은 사람이 실려 나가는 아찔한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성룡은 이를 통해서 실생활에서는 위험하니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을 함부로 따라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성룡이 와이어나 대역을 쓰지 않는 것은 영화 마케팅 측면에서 과장한 수사일 뿐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룡이 잠시 다치기라도하면 영화 촬영 스케줄이 밀리는데, 이는 영화사 입장에서 엄청난 손해이며, 다른 배우들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줄 수가 있다. 그러니 대역 등을 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성룡은 가능한 한 절대 쓰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영화 《비룡맹장》(1988)의 후반부 발차기 장면은, 극장에서 본 관객도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식겁할 정도로 확 대역 티가 났다. 대역은 전가락이 했다. 그는 전소호의 동생이며 홍가반의 스턴트맨이자 액션배우다. 홍금보, 성룡, 원표가 서로 두들겨 패고 싸운 다음에 나오는 술집에서 엑스트라로도 나왔다.

현재 성룡의 스턴트팀 성가반은 홍금보의 홍가반, 원화평의 원가반과 함께 홍콩에서 손꼽히는 스턴트 그룹이며, 보험회사에서는 아직도 그를 요주의 인물로서 기피하며 블랙리스트 1순위라고 한다. 딴지일보에서는 그의 이러한 대인배 기질을 "내 몸이 특수효과" 정신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실제로 기네스북에도 현재 살아있는 연기자 중 가장 스턴트 액션을 많이 한 사람(Most stunts by a living actor)라는 제목으로 등재되어 있다. 

2012년 말에는 무려 22년만에 나오는 《용형호제》 3편인 《차이니즈 조디악》(중국명은 십이생초)에 나왔다. 왜 《용형호제 3》가 아닌가 하면, 1, 2 제작판권을 가진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가 문을 닫고 이 영화 판권이 미국 워너브라더스로 갔기 때문에 제목을 이렇게 지을 수가 없었다. 참고로 권상우가 조연으로 같이 나왔다. 가발을 쓰고 나온 이 영화에서 나이 예순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무척 힘들어하는데, 이것이 거의 사실상 액션 코미디물로선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말이 많았다. 사실 이 말은 스케일이 큰 '초대형' 액션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얘기였고, 액션은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고 본인이 직접 해명하였다. 현재 《폴리스 스토리》 후속작과 《익스펜더블》 속편도 찍는 중이라 한다. 더불어 《러시아워 4》라든지 여러 후속도 기획 중이라고 한다. 

2013년 2월에 개봉한 영화 《차이니즈 조디악》의 프로모션을 위해 한국을 찾아 《무릎팍 도사》와 《런닝맨》에 출연해서 아직 녹슬지 않은 그만의 재치와 인생이야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무릎팍도사》에서 강호동이 "왜 그렇게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연기하느냐"고 질문하자 성룡의 답변이 예술이었다. 예전에는 돈이 없어서 몸으로 때우려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위험한 연기를 해야만 했었지만, 이제는 어떻게 하면 팬들을 즐겁게 해주느냐가 관건이라고 한다. 물론 죽는 게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팬들이 즐거워하면 되니까 그냥 한다고.

[감독 및 제작자로서]

액션배우로 유명하지만, 그보다 더 높이 평가받아야할 것은 바로 감독으로서의 재능이다. 특히 성룡을 스타덤으로 올린 80년대 초중반 작품들은 모두 성룡이 스스로 감독을 맡은 작품이다. 그는 특히 첫번째 헐리우드 진출 시기에 접한 버스터 키튼의 영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키튼의 영향을 받기전 성룡의 액션이 단순히 쿵푸에 코믹성을 가미하는데 그쳤다면, 키튼의 영향을 받아 자신이 직접 감독을 맡은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정교하게 계산된 움직임과 과격한 스턴트는 보는 이들의 탄성을 절로 자아낸다. 일부 미국 평론가나 매니아들은 성룡의 영화를 보고 '버스터 키튼의 진정한 후계자는 미국이 아니라 홍콩에서 나타났다' 라는 평을 해주었을 정도.

하지만 성룡은 많은 거장들이 그렇듯이 지나치게 완벽주의를 추구했기에 제작기간은 갈수록 길어졌고 매해 홍콩영화의 최대제작비를 스스로 갱신할 정도로 자본도 엄청 쏟아부었다. 결국 80년대 후반 미라클의 흥행이 그저그런 수준으로 그치고 주윤발로 대표되는 홍콩느와르, 주성치로 대표되는 코믹물까지 대박을 터뜨리자 성룡의 행보는 다소 주춤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성룡이 한 인터뷰에서 "나는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져가면서 영화를 찍는데, 다른 배우들은 카메라 앞에서 농담 몇마디 하고서도 내 영화보다 훨씬 수익이 좋다"' 라며 한숨을 쉬었다는 루머가 거의 사실처럼 돌 정도. 게다가 용형호제 때의 부상으로 생명의 위험까지 겪었고 나이도 점점 들어가면서 90년대 이후 성룡 감독작은 드물어지고 전문적으로 영화를 공부한 다른 감독이 성룡의 영화를 감독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 구성이나 재미는 성룡 초기작에는 영 미치지 못한다.

성룡과 감독간의 트러블은 꾸준히 있었는데, 《폴리스 스토리 3》를 찍을 당시 당계레 감독과 성룡 사이에 갈등이 많아서, 당계레 감독은 당시 인터뷰에서 영화 3편을 찍으며 받는 스트레스를 이거 하나로 받는다고 투덜거렸고 《중안조》를 찍을 때는 황지강(黃志強) 감독과 의견충돌이 있었다. 《취권2》를 찍을 때는 무술 연출에 관해 의견이 갈려 유가량(劉家良) 감독과 대놓고 싸웠고 유가량이 빡쳐서 초반부 격투 장면만 완성시키고 이후 메가폰을 놔버렸다고 한다. 유가량은 홍콩 유명 무술가로 아버지인 유심(劉湛)은 황비홍의 제자였던 임세영(林世榮)의 제자였다고 한다. 거기에 의형제인 유가휘(劉家輝, 본명 승금희(冼錦熙))와 유가영(劉家榮)도 무술가로 유명하다. 유가량은 이 《취권2》의 흥행에 고춧가루를 뿌리고자 유덕화를 기용해 《취권3》를 찍어 동시기에 같은 제목의 영화가 나오게 된다. 그러나 되레 《취권3》가 발렸다. 

왕정 감독이 한창 전성기때 《성룡의 시티헌터》로 협업한 적이 있었지만 왕정이 너무 다작(多作)에 대충 찍어댄다는 이유로 성룡이 불만을 품어서 촬영시에 서로 사이가 무척 안좋았다. 왕정은 《성룡의 시티헌터》 이후로 소심한(?) 복수를 하게 되는데, 이연걸 주연의 《탈출(1995)》이란 영화에서 장학우가 맡은 역할인 룡위란 인물의 기믹을 외모는 이소룡 짝퉁이지만, 성격이나 사생활(주색잡기와 실제 무술실력이 별로라는 설정), 그리고 아버지와 매니저 진자강까지 모습을 흡사하게 설정해, 누가 봐도 성룡임을 알게끔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깠다. 한술 더 떠서 아예 스턴트를 직접 한다고 구라치고 대역을 쓰는 장면까지 있다. 그러나 이 룡위가 극중 후반에 아버지가 구타당하는걸 보고 분노하여 멋지게 테러리스트를 때려잡는 장면을 집어넣었다. 아마 소송 방지용인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서로 감정이 안 좋다고 해도, 상관도 없는 성룡 주변인들까지 희화화시킨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성룡의 썬더볼트 촬영 당시에도 진가상 감독과의 관계가 껄끄러웠는데 진가상이 기획한 시나리오를 성룡이 개입해서 시나리오를 수정한데다가 기껏 진가상 감독을 기용하고서 정작 레이싱 장면에는 진훈기와 당계레를 영입해서 촬영했고 무술장면은 홍금보 감독이 연출시키도록 했기 때문이다. 

전성기 시절 성룡은 홍콩 영화계에서도 감독이 함부로 터치 못하는 배우 중 하나일 정도로 파워가 강했고,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완벽주의를 갖고 있었다.(한 장면을 무려 1,000번을 반복하여 찍은 적도 있다.) 때문에 성룡이 출연한 영화의 도입부분에 成龍作品이란 자막이 뜨면, 감독들이 성룡과의 불화나 여러 사정으로 도중 하차하는 바람에 성룡이 이어서 연출한 작품이라 보면 된다.

참고로 성룡은 실베스타 스탤론만큼이나 각본 수정과 제작 과정에 개입을 많이 하는 편이다. 둘은 람보 4에 같이 나올 뻔 했는데 역시나 각본 문제로 엄청나게 다투다가 성룡이 나오길 거부했다. 원래 각본대로라면 성룡이 악당으로 나와서 람보 덕에 갱생하여 돕는다는 줄거리인데, 성룡은 이 각본을 보고 악역 아시아인이 백인 덕분에 갱생하는 것은 아시아에 대한 모독이라고 격분했다고. 그런데 어차피 각본을 바꿨어도, 각본이나 여러 제작을 두고 서로 굉장히 충돌했으리라는 전망이 압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