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길 포기한 살인마 '지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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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길 포기한 살인마 '지존파'


2017. 2. 1.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살인마들 지존파]

원래 이름은 지존파가 아니라 야망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마스칸. 지존파라는 이름은 이들을 검거한 고병천 수사과장이 지어준 이름이다. '지존파'라는 이름은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훈련을 할 때 이마에 지존(至尊)이라고 쓰인 두건을 두르고 훈련을 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고반장이 조직원들과 합의 하에 지었다.



일반적으로 연쇄 살인자는 단독으로 활동하는 사례가 많으며 두 명 이상이 개입된다고 해도 서로 부부나 연인, 혈연인 경우가 많은 것과 비해 약간의 인연만 있던 타인들이 오직 살인을 위해서, 그것도 6명이라는 대규모 집단을 조직한 것은 세계적으로 상당히 특수한 사례에 속한다. 이들이 준 충격은 가히 엄청났으며 천하의 공영방송 앵커들조차 이들의 범죄를 전하면서 말을 더듬으며 차마 전할 수 없다는 표현을 반복할 정도였다. 범죄 내용도 내용이지만 하필 사건이 공개된 시기가 추석 연휴여서 그 충격은 더 컸다. 지금이야 그보다 더한 흉악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세상 어디서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유형의 범죄였기에 당시엔 임팩트가 상당히 강했고, 2010년대 기준으로 다시 봐도 발상 자체가 상당히 엽기적인 범죄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사람들에게 최악의 범죄/살인사건을 꼽으라면 종종 거론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범행 동기를 불평등한 사회 구조로 돌렸는데, 개인이 아닌 사회를 대상으로 한 보복성 살인이라는 것에 사회 전반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후에 아류인 막가파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행동강령도 있었는데 이 내용을 보자면 더욱 답이 없다.

  • 돈이 많은 자를 증오한다.
  • 10억을 모을 때까지 범행을 계속한다.
  • 배신자는 죽인다.
  •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

[지존파 결성]

결성 계기는 대학입시부정사건에 분노하여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들을 벌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허나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지존파는 두 번 결성되었다.

1992년 말, 김기환은 고소득자들의 돈을 갈취하고 살해하는 범죄조직을 조직할 계획을 세울 결심을 하고, 탄광 일을 할 때 알게 된 조 모 씨에게 살인을 제외한 범죄 계획을 알려주며 설득에 나섰다. 평소 조 모 씨의 경제적 여건과 성정을 알고 있던 김기환은 설득에 성공했고, 조 모 씨의 친구, 도박을 하며 알게 된 사람 세 명을 포섭해 조직을 결성했다. 그러나 그 범죄 계획에 살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조직원들이 이를 꺼려 결국 해체되었다.

1차 조직 결성 실패 후 1993년 초, 갈 곳이 없어진 김기환은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탈퇴한 전 멤버 이주현 씨의 소개로 '가희산장'이라는 비밀 도박장에서 도박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김기환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더 못배우고 부자에 대한 증오심이 훨씬 강한 자들을 포섭하려 했고, 실패 요인을 없애기 위해 대화술 관련 서적을 읽으며 더 철저하고 견고한 조직을 만들 계획을 세운다. 그 해 3월, 고향 후배인 강동은과 접촉해 그들에게 범죄 계획의 일부를 조금씩 흘려가며 차분히 설득에 나섰다. 자기 의지로 가담할 수 있게 1개월이라는 유예기간도 줬다. 강동은이 적극적으로 찬성을 외치자 강동은의 교도소 동기인 문상록, 후배 송봉은도 동의하여 세 사람은 조직에 가입하게 된다.

김기환 외 세 명은 전주로 이동해 함께 생활하며 조직 결성과 범죄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강동은이 교도소 동기였던 백병옥을 떠올렸고 당시 천안에서 막노동을 하던 백병옥을 합류시켰으며 문상록은 같은 곳에서 일했던 강문섭을 강동은에게 소개해 포섭했다. 이주현 씨는 같은 해 6월, 평소 "은행강도가 되고 싶다."던 김현양을 김기환에게 소개해 조직에 합류토록 했다.

이렇게 조직은 김기환을 중심으로 강동은,김현양,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송봉은으로 조직되었다.

이미 한 번의 실패경험이 있었기에 김기환은 조직의 유지에 굉장히 신경썼는데, 평소 "배신한 자는 반드시 처단한다.", "잘 때 내 가슴을 열어놓고 잘테니 나가고 싶다면 내 가슴에 칼을 꽂고 가라. 다만 그러지 못하면 지옥까지 쫓아가 죽일 것이다."라고 하는 등 조직의 기강을 흔드는 자에게 용서란 없으며 조직에 합류한 이상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했다.

후에 김기환의 수감 후 부두목이 된 강동은이 식사 준비와 잡일 등을 시킬 여성 조직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자신의 애인이자 영광의 J주점 종업원 이경숙을 합류시켰다. 하지만 이경숙이 가담한지 이틀만에 전원 검거되어, 그녀는 살인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아지트 건설]
대전직할시 둔산신도시 건설공사 막노동(노가다)으로 돈을 모은 다음 한적한 농촌에 농장을 구입하여 아지트로 삼았다. 명목상으로는 "어머니를 모신다" 고 하였다. 나중에 기자들이 이 집은 무슨 돈으로 지었는가? 어머니를 모시려고 지었다는데 사실인가? 등을 묻자 피식 웃으면서 "아냐 이거 할라고 지었지" 라고 대답했다. 이어 기자가 어머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묻자 "내 손으로 못 죽여 한이다." 라고 위의 사진에 남은 말을 하여 그야말로 국민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였다. 지하실에는 경찰서 유치장을 본뜬 철창이 달린 감옥과 화장을 하기 위한 아궁이도 만들어놓았다.



[범죄 행각]

1993년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나타내자며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1993년 7월 충청남도논산시 두계역(現 계룡시 계룡역) 부근에서 퇴근을 하던 은행직원 23세 여성 최미자 씨를 납치하여 윤간 이후, 연습삼아 살해하여 암매장하였다. 첫 범죄부터 결성 이유와 어긋났다. 한달 후인 1993년 8월엔 전 조직원이었던 송봉은을 살해 후 시체를 불태워서 암매장하였다. 이유는 18세에 불과한 송봉은이 자신의 나이를 23세로 속여서 형님 대접을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조직원들이 모아놓은 돈을 인출하여 달아나려는 것이 적발되었기 때문이었다. 살해방법도 잔인했는데 김현양이 보신탕이나 먹자고 송봉은을 산으로 불러낸 다음에 다른 조직원과 얘기하고 있던 송봉은을 김현양이 돌을 가져와 후려쳐 죽이고 1미터나 되는 구덩이를 파서 묻고 근처에 불을 질러 냄새까지 지웠다. 그 뒤에 그들은 1년간 공백기를 가졌다.

두목 김기환이 학교 선배의 집에서 보일러 수리를 하러 가서 선배의 조카를 강간하다가 들켜 강간치사죄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자 당황한 조직원들은 우왕좌왕 하다, 강동은을 부두목으로 삼은뒤 모든지시를 면회중 김기환에게 지시를 받는다. 그리고 1994년 9월 8일 36세의 악사 이종원(36세) 씨를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다시 살인을 시작했고 9월 15일까지 연쇄 살인을 벌이고 1994년 9월 21일 체포되었을 때까지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이들은 범행 대상을 물색하기 위하여 당시 백화점 신용판매부 직원이었던 김민경 씨로부터 백화점 고액 거래자 명단을 구입하였는데 물론 지존파가 살인극에 쓸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넘겨주지는 않았겠지만 개인 정보 유출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빚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최악의 사례이기도 하다. 그에 따라 주로 백화점에서 벤츠나 그랜저 등 고급차를 타고 나오는 복부인 등을 대상으로 하여 범행을 하려고 했으며 피해자들의 현금만 빼앗고 협박이나 어떠한 협상 없이 그 자리에서 토막 살인하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계획했다. 

어처구니 없는 점은 지존자에게 살해 당한 피해자들은 전 조직원인 송봉은 씨를 제외하고는 상류층이나 재벌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였다. 사실 이전에 연습삼아 살해했던 최미자 씨도 그냥 평범한 여성이였고, 이들이 9월 8일에 살해한 이종원 씨도 부유층과는 거리가 먼 밤무대 악사였으며 이 밤무대 악사는 차를타고 이 씨(26세)와 이동중에 지존파에게 포착되어 이 씨와 함께 납치되었다. 살해 이유는 단지 타고 가던 차가 고급차인 그랜저라서 돈이 많은 사람이거나 상류층으로 착각한 것이 범행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그랜저 승용차는 무리해서 중고로 구입한 중고차 였으며 몸값을 받아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는 것이 밝혀지자 이 씨는 조직 내에서 살려두자는 의견과 죽여야한다는 의견 충돌이 있었으나 결국 살려주고 살인에 가담 시키기로 하였으며 밤무대 악사 이종원씨는 검은비닐로 질식사 시키고 이 과정에서 이 씨에게 참여할 것을 지시했다. 지존파들은 시신을 희생자 이종원씨의 차에 태워 차를 절벽에서 밀어서 떨어뜨려 완벽하게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위장했다. 위장을 위해 사전 답사는 물론 스키드마크까지 남기는 치밀함을 보였다.

불과 4일 후인 추석 전날 9월 12일에 벌초를 하다 경기도 성남시 남서울묘지에서 납치되어 살해당한 울산삼정기계(주) 사장 소윤오, 박미자 씨 부부는 돈이 많은 사람이기는 하였으나 졸부나 방탕한 상류층이 아니라 공고를 나와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빚 내어 새로 공장 인수한 건실한 사업가였다. 소윤오, 박미자 씨 부부 또한 범행 대상이 된 이유는 타고 나왔던 차가 고급차인 그랜저라는 이유 때문이였다. 지존파가 납치해서 살려둔 이 씨를 차에 태우고 남서울묘지를 다니다 주차 되어있던 그랜저 차량을 발견한후 본인들의 차에서 내려 그랜저 차량을 보고 경남 넘버이며 3000cc라 돈이 많은 사람이 타는 차인것 같다고 한후 해당 차량의 주인을 찾았는데 위에서 벌초를 하던 소윤오,박미자 씨 부부였다. 납치 당한 소윤오, 박미자 씨 부부에게는 1억원을 주면 살려서 돌려 보내주겠다고 말을 하여 총무과장 심성수(당시나이 37세),직원 안종환 씨에게 광산버스터미널 앞에서 돈을 달라고 말한다. 그런데 막상 돈을 다 받았는데도 1억을 달라고 하는데 8,000만원을 줬다는 이유로 소윤오, 박미자 씨 부부에게 술을 먹인뒤 소 사장은 공기총으로 부인은 칼과 도끼로 살해 하였다. 회사를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던 시기에 납치, 살해당해서 회사 직원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납치당했을 당시에도 지존파가 돈이 궁해서 저지른 범죄로 생각하고 자신도 어려운 시절을 보내서 이해한다면서 무사히 보내주면 신고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어린 자녀들도 있는 상태에서 참변을 당했다. 지존파는 사장 부부에게서 자그마치 8천만 원을 강탈했다. 8천만원은 지금도 큰 돈이지만, 당시에는 정말 큰 돈이었다. 1993년 당시 쏘나타 최고급형이 1,500만원쯤 하였는데, 2017년 기준으로 쏘나타 최고급형은 3,400만원이다. 즉 지금의 1억원대 중반 이상의 가치가 있는 돈인 셈이다.

이들은 최후에 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들을 죽이고 총기를 탈취하여 MBC를 습격할 계획을 꾸몄으나 그 전에 검거되어 다행히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현양은 인터뷰에서 "더 죽이고 싶었는데 지금 못 죽여서 한이 맺힌다. 내가 MBC 한번 가보려고 했는데 못 가게 되었다." 라고 말했다.


[체포]

양수리 부근에서 세 번째 희생자 이종원씨와 드라이브를 하다 함께 납치된 카페 여종업원 이 모 씨(당시 27세)의 극적인 탈출로 인해 지존파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씨는 납치되었을 당시 지존파의 아지트에 감금된 후 살려달라 애원해도 살려주지 않을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현양이 이씨에게 연정을 품게 되어 이 씨를 죽이려는 조직원들을 설득시키면서 그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목숨은 부지하게 됐으나 입막음용으로 살인에 가담할 것을 강요받은 이씨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지인이었던 이종원씨, 중소기업 사장 소윤오, 박미자 씨를 죽이는 데에 동참하여 두 건의 살인 행위에 가담하게 된다. 두 차례의 범행 가담으로 문상록을 제외한 지존파 조직원들에게 얼추 신임을 얻었으나 그녀를 끝까지 믿지 못했던 문상록이 김현양과 심하게 갈등을 빚으며 언제든 지존파에게 희생될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이 씨의 탈출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다이너마이트를 잘못 다뤄 손과 발에 부상을 입었던 김현양이 실밥을 풀고 상처부위에 소독을 받는 날, 이 씨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김현양에게 병원에 동행하게 해달라고 한다. 김현양은 흔쾌히 그러자고 답했고 이 씨는 그와 동행하는 데에 성공한다.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던 중, 김현양은 현금 50만원이 든 지갑과 휴대폰을 이 씨에게 맡기고 진료실로 들어간다. 이 씨는 예상보다 빨리 탈출의 기회가 주어지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은 건 마찬가지인데 이왕 죽을 바에야 달아나서 이 사건을 알리는 데 조금이라도 노력하여 피해자분들에게 속죄하겠다는 심정으로 병원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는다. 지존파의 행동반경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택시기사에게 해남경찰서로 가달라고 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하차하고 포도밭 인근의 농가에 숨어든다. 비닐하우스 안 평상 밑에 몇 시간을 숨어있던 이씨는 집주인 부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집주인의 지인의 차를 얻어 타 대전까지 이동한다. 그 뒤 대전 톨게이트에서 택시를 잡아 서울의 한 모텔에 도착한 뒤 자신이 일하던 카페에 연락을 해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이씨는 서초서에 카페 주인의 남동생과 동행하여 사건에 대한 얘기를 꺼냈으나 경찰들은 관할이 아니라며 사건 담당을 거부한다. 분노와 공포가 극에 달한 이씨를 보던 카페 주인의 남동생은 평소 카페를 즐겨찾던 고병천 반장(당시 서초서 강력반장)에게 연락한다.

강력반장이었던 고 반장조차 이 씨의 진술이 충격적이어서 처음엔 믿지 못하였으나 이 씨가 소윤오 부부 실종, 납치사건에 대해 아는 듯한 말을 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이 씨가 지니고 있던 휴대폰이 이 씨가 진술한 지존파의 일원 강동은의 것으로 확인되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체포작전은 수월하였다. 먼저 강동은이 포터 트럭을 타고 마을로 가다가 경찰의 미행을 눈치채고 경찰과 1.5km 추격전 끝에 검거 되었고, 김현양과 이경숙, 문상록이 강동은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한 뒤 형사가 강동은의 이름을 언급하자 문상록이 도주하자 다른 형사에게 제압당하고 김현양,이경숙은 도주하려다가 20km 추격 끝에 검거 된다. 나머지 조직원들은 아지트에 있다가 아지트를 급습한 경찰들에 의해 모두 검거 된다. 이 씨의 탈출 후 하루라도 빨리 아지트를 떴으면 검거되지 못했거나 검거되더라도 시간을 벌 수 있었을테지만 지존파 일당이 이씨가 탈출했음에도 아지트에 남아있던 이유는 이씨의 탈출 성공 후 영광파출소 앞에 잠복해 경찰들의 동태를 살폈으나 평소와 같아 이씨가 신고하지 않은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멀리 서울까지 달아나 신고한 이씨의 기지가 발휘된 부분이다. 또 이씨가 범행에 가담했기 때문에 쉽사리 신고하지 못할 거라 믿은 것도 있다.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고 거창하게 강령까지 내세워 놓곤 결국 이걸 안 지켜서 붙잡힌 꼴이다. 안그래도 검거 후 체포경위를 들은 김기환이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고 했는데, 바보같은 놈들.이라며 질타했다고 한다.


현재도 큰 차이 없지만 당시에는 중범법자는 검거 즉시 신상 공개를 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으므로 범인 체포 후 얼굴이 그대로 나왔고 이들이 카메라 앞에서 "돈 없다고 무시하는 것들. 압구정동 야타족들! 모조리 죽이지 못한 게 한이다!" 라는 식으로 '사회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또 강령에 '고급 중대형차들' 을 지정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어 이상의 중대형차 판매량이 일시 감소했으며 고급차들의 중고매물이 갑자기 늘었다. 언론플레이와 광적인 취재 열기가 잘못 퍼진 좋은 예.

이들은 중국에 가서 훈련하려고 했었고 야인이나 뺑끼통과 같은 책을 교재로 삼았다고 자랑했다.

살해한 사람들의 시체는 지하의 사설 화장장에서 태웠고 일부는 태우면서 인육으로 맛봤으며 주변에 냄새가 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다른 주민들에겐 '돼지고기를 같이 구우면서 먹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왜 식인을 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이길 포기하기 위해서 라는 등 반성의 기미라곤 눈 씻고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없었으며, 살인의 이유를 불평등한 사회 모순이라며 사회로 돌리고 자신들의 가치 전도 현상을 정당화하려 했다. 김현양은 체포되어 끌려갈 때 "2천만 원 이상의 자동차를 가진 놈들은 다 죽여야 해! 그래야 내 원한이 풀려!" 라고 소리를 쳤다고 주민들은 증언했으며 이들은 현장 검증에선 "잘난 놈들을 죽이려 했다" 고 거듭 말했다.



[처벌]

이들은 이경숙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나머지 조직원 6명은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1995년 11월 2일 두목 김기환을 포함해 조직원 6명 모두 신속하게 사형에 처해졌다. 

보통 기존 대통령 임기 중에 벌어진 사건에 대한 사형집행 결정도 최소 2년은 기다려 주는 게 관례임을 생각하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인데, 원래 사형수에 대한 형 집행은 그가 무고할 가능성도 감안하고 또한 마음을 정리하고 뒤늦게나마 교화될 기회를 주기 위해 정권이 바뀐 뒤에. 즉 수년 뒤에 이뤄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사건은 온보현이 저지른 강도 살인 행각과 더불어 워낙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준 '예외적인 경우' 이며 무고할 가능성도 전혀 없기 때문에 신속하게 사형을 집행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김영삼 정부 시절 저질러진 살인 중에 사형이 집행된 경우는 이 두 사건밖에 없고, 그 유명한 박한상이나 악질 유괴살인범들 조차도 사형 자체는 받았을지언정 집행을 피해갔을 정도니 얼마나 사회적 충격이 컸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제보자였던 여성은 강요당해 저지른 범죄라는 점을 고려하여 제외되었다. 검찰 측에서는 결정적 제보자인 여인이 처했던 상황을 불가항력적이었던 것으로 인정하여 기소조차 하지 않고 지방으로 피신시켜 집과 직업까지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일종의 신고자 및 증인 보호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다.

한동안 영광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영광 사람이라는 것을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고 하며 영광 사람들이 객지에 나가면 살인자와 같은 동네에 산다고 해코지를 많이 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