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위해 어두운 시대와 맞서 싸운 이 시대의 진정한 법조인 조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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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위해 어두운 시대와 맞서 싸운 이 시대의 진정한 법조인 조영래


2017. 1. 3.



지금까지 충분히 실천은 못하였으나 4개월 동안 내가 수행하려고 하는 제일보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다른 것은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은 수가 없겠다. 만약 친절히 해서 일이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마침내 승인하게 되는 일이 만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나에게 더할 수 없는 심대한 패배가 될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혹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 1981년 12월 사법연수원에서 -




경기고등학교 3학년 재학 당시인 1964년, 6.3 항쟁을 주도하다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인 1965년에 서울대학교 전체 수석으로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서울대 재학중에도 한일기본조약 반대, 삼성그룹 사카린 밀수 규탄, 6.8 부정선거 규탄, 3선 개헌 반대, 대학생의 교련수업반대 등을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김근태, 손학규와 함께 서울대학교 운동권 삼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1969년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한 그는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 들어갔다. 사법연수원 재직 중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었으며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973년에 만기 출소한 후 민청학련 사건의 관련자로 수배되어 6년 간 피신했으며, 수배기간 중에서도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전태일 열사의 삶을 기록한 전태일 평전(부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했다. 장기표가 전태일의 어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전태일의 수기를 조영래가 정리하여 집필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전태일 문서 참조. 이책은 당시 시대상 일본에서 먼저 출간하였다가, 1983년 저자를 익명으로 하여 국내에도 출간하였다. 조영래가 사망하고 1년 후인 1991년 1차 개정판에 와서야 저자가 조영래라는 것을 세상에 알린다.

1980년 8월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경기고등학교 선배 이종찬의 도움으로 수배가 해제되면서 복권되어 사법연수원에 재입학하여 1982년 수료하자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3년에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설립한 이후 1984년 망원동 수해 주민들의 집단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시작하였다. 1984년 대홍수로 서울 망원동 5,000여가구가 침수당한 사건에 무보수로 참여해 3년에 걸친 법정 공방 끝에 ‘천재’가 아닌 ‘인재’라는 판결을 받아내었다. 집단소송제도 없고 그 개념조차 낯설던 1984년, 그는 2300여 피해 가구를 조직하는 고단한 법정 투쟁 끝에 호우 피해는 천재(天災)가 아닌 국가의 책임임을 입증했다. 인권변호가 시국 형사사건에 머물던 시대에, 일반 국민의 일상에도 법률이 유용할 수 있음을 한국 사회에 알린 것이다. 

1986년에는 한 전화교환원의 호소로 시작된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소송을 이끌었다. 당시 '미혼 여직원의 정년은 25세'라는 1심 재판부의 판결에 절망해 항소를 망설이는 이경숙을 설득, 항소심에서 여성의 정년도 남성과 똑같이 55세임을 확인받은 이경숙 사건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주요 판결이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숙 씨를 변호하고 가해자 문귀동에 대한 유죄판결을 이끌어내는 등의 활동으로 인권 변호사로서 큰 활약을 했다. 

1987년에는 연탄공장 옆에 살다가 진폐증에 걸린 시민을 도와 손해배상소송을 진행하였다.

1988년에는 국제그룹 강제해체를 겪었던 양정모 전 회장의 헌법소원을 담당하였다.

이외에도 한겨레신문 압수수색 취소청구사건 및 보도지침 사건 등을 변론했다.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및 동아일보 객원 편집위원도 역임하였다.

특히, 대한변호사협회 인권보고서 발간의 산파역을 하였다. 당시 대한변협의 사무실에도 국가안전기획부나 국군보안사령부 요원들이 상시로 출입하던 시절이라 그는 보고서조차 은밀히 쓰고 출간해야 했다. 보고서가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자, 그는 보고서의 후기를 이렇게 고쳐쓴다. “우리의 인권보고서는 할 말을 잃었다. 다만 치떨리는 분노로 이렇게 외칠 따름이다. ‘박종철을 살려내라’고.” 

주요 시국사건을 같이 담당하던 인권변호사들을 결집해서 상설조직인 정법회를 창립하였고, 이 정법회가 훗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약칭 민변으로 발전해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렇게 남들이 하지 못할 노력으로 이 땅에 봄을 오게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0년 12월 12일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44세. 유족으로는 부인 이옥경 여사와 슬하에 2남이 있다. 유고집으로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가 있다.

조영래는 실제로 엄청난 골초였다고 한다. 1980년대에 변호사로 같이 활동한 박원순 변호사의 말로는 평소에도 하루에 2~3갑씩 담배를 피웠지만, 각종 소송을 담당할 때 방이 담배연기로 가득찰 정도로 피워 댔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법대 15동 건물 5층에는 그의 이름을 딴 '조영래 홀'이라는 열람실이 있다.

이 분의 삶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노력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꾸었으나 정작 자신은 그 보답을 받기도 전에 서둘러 이 땅을 떠났다.

문성근, 홍경인이 주연으로 출연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그를 모티브로 하였다.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뛰어난 문장력을 가졌던 그는 한일회담 반대를 위해 처음으로 쓴 문장인 '선언문'을 작성한 바 있으며, '전태일 평전'에서 그의 필력을 알 수 있다. 1977년에 전태일 7주기를 기해 발표된 장시 '노동자의 불꽃, 아아 전태일'은 "저 처절한 불길을 보라/저기서 노동자의 오랜/억압과 죽음이 탄다/아아, 노예의 호적은 불살라지고/끝없는 망서림도 마침내 끊겨버린/저기서/노동자의 저항이/노동자의 자유가/불타오른다."로 시작되며 이는 민중문학사의 첫 장을 연 것으로 평가받고있다. 그러나 조영래 자신은 사망할 때 까지 자신이 '전태일 평전'과 '노동자의 불꽃'의 저자임을 밝히지 않았다.

민청학련과 인혁당에 대한 정부의 조작과 고문의 실상을 폭로한 김지하가 재수감돼 사형 위기에 빠지자 조영래는 김지하의 이름으로 양심선언문을 쓴다. 후에 국제사회의 지식인들이 김지하 구명운동에 나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김지하가 이 문장 역시 조영래 그의 작품이라고 밝혔다.

조영래가 김지하의 이름을 빌려서 위작을 내놓은 것은 결코 아니다. 철저하게 김지하 씨의 의견이 담긴것으로 손질,대필해주었다는 의미가 강하다. 양심선언문을 발표할 무렵의 여러가지 정치적인 문건 중에 조영래가 직접 관여한 문건이 많았다. 개인의 이름으로 발표하지 않고 단체 이름으로 하여 만들어 지는 과정에서 많은 첨삭가감이 이루어져 실제로는 공동작품일 수 있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항목의 맨 위에 있는 변론 역시 조영래가 초고를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