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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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을 아시나요??


2014. 3. 11.


충돌의 서막 : 미루나무

2002년 2월 20일 한국을 방문한 조지 W. 부시 미대통령은 경의선 복원 현장인 도라산역을 방문하기 직전, 서부전선 주한미군부대를 방문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북한의 터무니 없는 침략이나 세계평화를 깨는 행위에 대해선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연설을 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이날 부시 미대통령이 방문한 부대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북한의 경비병들에게 살해당한 두 미군 장교들 중 한명인 아더 G 보니파스 대위의 이름 딴 '보니파스부대'였다는 것이다.

1976년 8월 18일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군에 의해 미군이 2명이나 살해되면서 이를 둘러싼 한반도의 전쟁기운이 최고조로 달아올랐던 날이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이날 오전 10시경 미군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UN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감독·경비하고 있었다.
당시 UN군측인 미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제5관측소에서 제3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관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 3개 초소에 둘러싸인 제3초소 부근에 약 12m에 이르는 미루나무 가지가 무성하여 이를 제대로 관측할 수 없었고, 북한군에 의한 미군의 납치를 우려하여 이날 가지치기 작업을 수행한 것이었다.



이때 북한군 장교 2명과 15명의 사병이 나타나 작업 중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11시경 수십 명의 북한군 사병들이 트럭을 타고 달려와서, 몽둥이와 UN군측 노무자들이 나무 밑에 두었던 도끼 등을 휘두르며 기습적으로 공격하였다.
이들은 UN군측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집중공격을 가해 경비중대장 보니파스 미군대위와 소대장 바레트 미군중위가 이마에 중상을 입고 피살되었으며, 이밖에 미군 사병 4명, 한국군 장교와 사병 4명 등이 중경상을 입었고, UN군측 트럭 3대가 파손되었다. 휴전협정 조인 이후 23년만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희생자가 발생하는 초유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폴 버니언작전(Operation Paul Bunyan)'과 '우발계획'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하자 한반도는 즉각 긴장상태로 달아올랐다. UN군사령관을 겸하고 있었던 주한미군 사령관 리차드 스틸웰은 '데프콘3(Defense Readiness Condition 3 : 예비경계태세)'를 발동하고, 미군방송을 통한 임시발표에서 휴가중이거나 부대를 떠나 있는 전장병에게 즉시 복귀하도록 명령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데프콘 3'가 발령되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미루나무 절단 작전 때에는 데프콘 2(공격준비태세)까지 올라갔다.



이에 맞서 북한도 김일성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의로 인민군과 예비군격인 로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등에 전투태세에 들어갈 것에 대한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리고 전국에 '북풍 1호(준전시상태)'를 선포하여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로 치달았다.



미국의 포드 행정부는 긴급참모회의를 열고, '워싱턴특별대책반'을 구성하여 스틸웰의 제안에 따라 문제가 된 미루나무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작전은 미국의 전설적인 나무꾼의 이름을 따 '폴 버니언작전(Operation Paul Bunyan)'으로 명명되었고, 1976년 8월 21일 아침 7시에 강력한 무력시위를 동반하여 전격 단행되었다.



미국 본토에서는 핵탑재가 가능한 F111전투기 20대가 날아왔고, 괌에서는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서는 F4 24대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였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7함대 소속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순양함 등 중무장한 5척의 호위함을 거느리고 동해를 북상하여 북한 해역으로 이동하였다.



무력시위만이 아니었다. 미국은 교전상황에 대비한 구체적인 전쟁계획인 일명 '우발계획'까지 수립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절단 작업시 교전사태가 발생할 경우 한국군 포병과 미군포병이 북한지역 개성의 인민군 막사에 대한 포격과, 개성 위쪽의 시변까지 포격하여 초토화하고, 인민군 포병부대를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쟁이 확대될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에 대한 탈환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남진할 경우 이에 대한 전술핵의 사용도 고려되었다. 그야말로 핵전쟁까지 상정한 실질적인 전쟁계획이었던 것이다.





'도발유도계획'과 판문점의 분단



미루나무 절단 작전에는 태권도 유단자로 구성된 한국군 64명의 특전사 장병들이 투입되었고, 1사단 수색대도 참여하였다. 당시 특전사 장병들은 카투사병으로 위장하여 '돌아오지 않는 다리' 입구에서 경계근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우발계획'의 내용을 미처 모르고 있었던 이들의 실제 임무는 북한군을 자극하여 도발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도발유도계획은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준비한 계획이었다. 이들은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무기 휴대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M16소총, 수류탄, 크레모아 등으로 무장하고 북한군을 살해하기 위해 '특전사 자체계획'하에 움직였다. 나무가 절단되기까지 북한군의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자 이들은 공동경비구역 안의 북한군 제5·6·7·8초소를 파괴하고 무력을 과시하며 북한군의 사격을 유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한군에는 "도발하지도 말고 도발에 걸려들지도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작전 종결후 북한은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 김일성의 '유감성명'을 전달했다. 북한의 유감표명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 미국은 북한의 성명이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다가 24시간만에 태도를 바꿔 이를 수락하였다. 아마도 여기에는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던 사정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이후 북한군과 UN군사령부는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 제446차 비서장회의에서 판문점 '공동경비'를 군사분계선에 따라 '분할경비'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군사분계선 남쪽에 있었던 북한군 4개초소가 철거되었고, 북한군이 통로로 사용하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지금까지 통행이 차단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유일하게 남북한이 공존하던 판문점에는 그후 회의장 건물 구역에 너비 50cm, 높이 5cm의 시멘트포장 경계선이 만들어졌고, 그밖의 부분은 가로 세로 10cm, 높이 1m의 시멘트 기둥이 10m 간격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휴전선이 다시 그어지게 된 것이다.



만약에 미국의 우발계획과 남한군의 도발유도계획에 따라 당시에 단 1발의 총성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상황은 단순교전상황을 넘어 핵전쟁까지 치달았을 것이고, 한반도는 지금 핵폭발에 의한 방사능 오염으로 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지옥으로 변했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한반도가 남북한 절멸의 위기에 놓였던 무서운 순간이었다. 다른 한편으론 정전협정체제가 전쟁위기방지에 얼마나 무력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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