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를 읽고
본문 바로가기

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를 읽고


2014. 2. 1.

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를 읽고

보편주의 인식론은 역사적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인가?

- 보편주의 인식론의 악용을 통한 역사적 자본주의의 불합리성, 왜곡의 정당화

자본주의 대한민국, 문제가 많은 사회라고 한다. 돈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었고, 우리의 삶은 돈 앞에 수단화되었다. 자본주의는 효율성, 합리성이라는 목적아래 모든 것을 상품화했다. 노동뿐만 아니라 인간, 그리고 감정까지도 상품화했다. 대학도 상품화된 지 오래이다. 돈이 있어야 학문할 수 있는 사회이다. 400만 원 정도의 대학 등록금은 누군가의 학문의 기회를 박탈했을 것이다. 대학에서도 자본주의 체제가 유용하게 써줄 만한 경영학, 경제학 위주의 학문이 대세이다. ‘만물이 상품화’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갈수록 양극화와 불평등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분석들도 많이 보인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이지만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역사적 자본주의는 자본축적만을 위해서 역사적으로 작동되어 온 근본적으로 불평등하고 모순을 지닌 불합리한 체제이며 언젠가는 붕괴할 것이라는 월러스틴의 주장은 유의미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월러스틴은 보편주의 인식론이 역사적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다소 극단적인 견해라 볼 수 있다.



월러스틴은 보편주의 인식론이 표면적으로는 보편적이고 공평무사함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모순이나 착취 구조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해온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한다. 즉, 보편주의 인식론과 이것의 이상으로서의 진리를 편향적이고 불합리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보편주의의 진리가 근대세계에서 아편으로 기능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진리추구라는 명목아래 이루어진 역사적 자본주의의 진보가 실제로는 경제구조의 주변화, 약한 국가구조의 창출, 계서제적이고 불평등한 구조의 고착화 등과 같은 역사적 자본주의의 불합리한 과정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보편주의 인식론이라는 입장을 명확히 제시하고는 있지만, 이러한 결과로 이어지는 논지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부족하다. 아마 월러스틴은 보편주의 인식론이 악용되는 논리와 사례를  보편주의 인식론 자체가 가진 성격으로 본 것 같다. 



보편주의 인식론 자체를 역사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학문의 본질적인 목적은 진리 탐구에 있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의 능력을 사용해 탐구하고 추구하는 진리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성격을 가진다. 진리는 어떤 특수한 영역이나 대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진리는 어디에서나 인정되고 통용될 수 있는 공평무사함과 보편타당성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학문적 진리는 그 자체로 편향적이고 왜곡된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끊임없는 자본축적을 향해 역사적으로 진행되어온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불합리성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었는가. 이 물음 답은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인 자본축적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월러스틴은 역사적 자본주의 목적과 목적인을 무한하고 끊임없는 자본축적으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목적 하에서 성립되고 작동되어온 역사적 자본주의는 ‘핵심-주변’의 수직적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고착화하는 과정이었으며, 지리적 재구성과 생산품의 재배치를 통해 핵심부의 독점적 지위를 강화해온 불합리한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역사적 자본주의에서의 성공과 이상은 자본 축적이었다. 즉, 이러한 역사적 자본주의의 불합리성을 정당화하는 것은 보편주의 인식론이 아니라 핵심부와 자본가들이 행한 ‘진리의 악용 또는 왜곡’이라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이들은 ‘자본 축적’을 하나의 성공과 이상으로 인식하도록 진리를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등 진리를 악용했다.

역사적 자본주의에서 핵심부와 자본가는 자신들의 자본 축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학문적 진리를 입맛에 맞게 선택적으로 활용했다. 학문적 진리는 그 자체로 공평무사하고 보편적인 성격은 가지지만,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해 악용되거나 왜곡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소명의식을 말했다. 그리고 부유해지도록 노동을 하는 이유는 ‘육욕과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신을 위해서’이며 ‘게으른 휴식과 죄 많은 삶의 향락에 대한 유혹’일 경우가 아니라 ‘근심 없이 안일하게 살기 위한 것일 경우’로 한정한다. 막스 베버는 공평무사하고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한 것이지만, 그의 의도와 다르게 그의 사상은 핵심부와 자본가들의 입맛에 맞게 이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본의 축적과 축적을 위한 효율성, 합리성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여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사상으로 이용된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적 자본주의에서 합리성이 어떻게 강조되었고 효율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들이 이용되었는지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월러스틴의 주장은 명확하다. 그는 서구화, 근대화 그리고 진리추구라는 명목으로 전파되고 확산된 보편주의가 경제구조의 주변화, 약한 국가구조의 창출 등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팽창에 수반된 여러 불합리한 과정들을 정당화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서구화, 근대화의 명목으로 진행되어온 과정은 근본적으로 ‘군사적 수단’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문화적 변화를 강요한 배경에는 경제적 효율성과 정치적 안정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보편주의가 어떻게 경제적 효율성과 정치적 안정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월러스틴의 설명은 부족해 보인다.

우선 보편주의 인식론의 학문적 진리와 역사적 자본주의에서 핵심부, 자본가들의 논리 즉, 이들에 의해서 선택되어 발전되어 온 자본주의의 논리를 구분해야 한다. 이들은 그들의 불합리한 논리를 학문적 진리라고 포장해 교육하고 선전하고 전파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핵심부와 자본가가 계서제적 구조를 공고히 하고 경제적 효율성과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는 방법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한 진리와 그것의 ‘교육’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역사적 자본주의가 전파되는 일차적인 수단은 군사적 방법이었다. 실제로는 이미 근본적으로 계서제적인 성격을 지닌 역사적 자본주의의 논리는 표면적으로는 보편성을 가지는 학문적 진리로 포장되어 전파된 것이다.

근대세계에서 새로운 시장의 개척, 새로운 자원 및 노동력의 획득을 위한 노력 등은 역사적으로 필연적이었던 것 같다. 이것을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지리적 팽창 즉, 식민지화로 본다. 프롤레타리아화의 증대로 인해 발생한 이윤감소 효과를 노동 비용이 저렴한 반프롤레타리아를 계서제의 맨 밑바닥으로 편입시켜 상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평등, 양극화의 불합리성은 핵심부, 자본가의 취향에 맞게 왜곡된 진리를 통해서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들은 자본 축적 극대화를 위해 보편주의가 탐구하고 탐색하는 진리를 이용한다. 식민지의 계서제 구조 하위계층에게 노동을 강조할 때에도 이용된 것이 바로 막스 베버가 말한 금욕, 근면, 성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원주민들의 여유는 게으름으로 치부되었고 이것의 교정은 곧 교육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면하고 성실한 태도의 강요는 개인 노동력의 극대화 즉, 효율성과도 연관이 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논리가 반영된 교육은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계서제적 관계를 확대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즉, 교육을 통해 핵심부와 자본가들의 논리만을 강요하고 주입해서 자본주의 체제를 더욱 견고히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육을 통한 사회적, 경제적 평등화란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합리성, 보편성으로 가장한 왜곡된 진리는 교육으로 가장해 강요되고 주입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자본주의 논리의 확장에 기여했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월러스틴의 논증은 적절하다. 그는 이러한 핵심부, 자본가의 논리 앞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고 설명한다. 자본주의 논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지적 성취의 계서제 안에서 스스로 낮은 지위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불평등한 실제의 권력관계를 뒤엎을 수 있는 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 이 두 가지이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그나마 최선의 선택은 일단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해 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특징적인 것은 중간계층의 생성이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자본주의 논리의 확장 즉, 합리화와 보편화의 과정에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행정가ㆍ기술가ㆍ과학자ㆍ교육자와 같은 합리화의 전문가들인 중간계층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확장되고 복잡해지면서 필요한 것이 이 중간계층의 확장이라 보았다. 자본주의 논리를 교육받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이들은 자본주의 논리의 확대, 재생산에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월러스틴이 말한 과학적 문화의 형성도 이 중간계층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근본적으로 모순을 안고 있으며 불합리성이 축적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온 역사적 자본주의는 언젠간 붕괴될 것이라는 월러스틴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앞으로도 중간계층이 핵심부와 자본가들의 논리를 더욱더 확장하고 발전시켜나간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월러스틴의 보편주의 인식론에 대한 논증은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진리 탐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대학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학문의 목적은 진리 탐구에 있다. 보편주의의 문화적 이상으로서의 ‘진리’는 공평무사함과 보편타당함을 지닌다. 학문적 진리는 그 자체로 편향적이고 왜곡된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진리를 감추려 하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 편향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학문을 하려 할 때 생긴다. 우리사회의 중간계층은 무엇을 위한 학문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