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표현의 자유'는 어떻게 미국 민주주의를 망가뜨렸는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민주당 정권이 미 대법원의 균형추를 진보로 돌리기 위해 긴즈버그 대법관의 은퇴를 은근히 종용했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유명하다. 굉장히 졸렬한 행위였으나, 오바마와 민주당에게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바로 2010년 1월 내려진 Citizen's United vs. 미 연방 선관위 사건의 대법원 판결 때문이었다.


미국에는 원래 매케인-파인골드 법이라는 정치자금법이 있었다. 이 법안의 핵심은 하나다. '영리 단체는 정치 광고를 할 수 없다' 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안이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영리 단체인 기업을 정치자금에서 분리하여 정경유착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던 중 2007년 말 Citizen's United 라는 한 보수 성향의 단체가 힐러리 클린턴을 비난하는 다큐멘터리 하나를 제작하여 이를 케이블 채널에 판매하는 일이 발생했다. 미 연방선관위는 이를 매케인-파인골드 법 위반으로 판단하고 연방법원에 제소했고, 연방법원은 이를 법률 위반으로 결론지었다. 여기서 일은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CU는 여기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법원에 항소를 했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수정헌법 제1조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 를 꺼내들었다. "의회는 발언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 수 없다." 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즉 매케인-파인골드 법은 위헌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대법원은 둘로 쪼개졌다. 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한 존 로버츠, 새뮤얼 얼리토, 앤터닌 스칼리아, 앤서니 케네디, 클레런스 토머스는 위헌에,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루스 긴즈버그, 스티븐 브레이어, 존 폴 스티븐스, 소냐 소토마이어는 합헌에 섰다. 물론 당연히 숫자가 많았던 CU 측이 5:4로 승리했고, 매케인-파인골드 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자, 영리 단체가 정치 광고를 할 수 있게 되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물론 기업들은 직접 정치 광고를 하지는 않는다. 주주들이 반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대신 그 기업의 대주주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후보의 PAC(정치활동위원회, Political Action Committee)에 기부를 한다. 홍보는 PAC 에서 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야흐로 미국 정치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슈퍼팩' 의 시작이었다. 슈퍼팩이라는 이름을 최초로 붙인 사람은 미국 정치전문 미디어 Roll Call 의 엘리자베스 카니 기자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그렇겠지만, CU의 대법원 승소 이후로 미국의 각 주들에서는 줄줄이 영리 단체의 정치 광고를 막는 주법들이 폐지됐다. 소를 제기한 주체는 두말 할 것 없이 보수 성향의 PAC 들이었고, 오바마는 재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민주당 성향의 PAC 들에게 지지를 표명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PAC이 대선 후보에게 지지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점이 이상하실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PAC이 어마어마한 자금을 모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정치인을 직접 '지지' 할 수는 없는 오묘한 규정 때문인데, 이 오묘한 규정은 미 대법원이 매케인-파인골드 법을 무력화한 후 정경유착을 막겠답시고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만든 규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거꾸로 PAC의 이념을 '지지' 함으로써 그들이 합법적으로 홍보를 할 수 있도록 만든다. 즉 PAC 들은 정치인들의 공약 등에 영향을 끼치고, 정치인들은 이러한 PAC 을 지지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들의 정책을 홍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지지에는 대가가 따른다. PAC은 정치인의 당선을 위해 돈을 쓰고 홍보를 했으므로, 당연히 당선된 정치인은 그 PAC 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이러한 흐름은 버니 샌더스조차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슈퍼팩을 극도로 혐오했으나 결국 'Our Revolution' 이라는 PAC에 자기 사람을 앉히고 자금 내역을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정치인이 자신과 법적으로 관련도 없는 정치단체에 지지를 표명하고, 선거가 끝나면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이런 코미디 같은 광경은 대체 어쩌다 만들어졌는가? 맨 위로 돌아가 보자, 결국 '표현의 자유' 를 보장하려다 생긴 일인가?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만큼의 돈을 써야 한다면, 그만큼 부자유스러운 사회는 없을 것이다. 돈이 없는 자는 돈이 있는 자에 비해 발언력이 심각하게 하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법원 판결을 통해 시민의 표현의 자유를 갖고 있는 돈의 양에 비례해서만 쓸 수 있도록 만들어 버렸다.



표현의 자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내뱉는 것이 표현의 자유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한 표현의 자유는 너무나도 쉽게 폭력으로 변질되며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게 된다.

슈퍼팩이 등장한 결과, 그렇잖아도 미국 정치에서 소외되던 농촌 지역과 고졸 노동자들은 더더욱 정치에서 소외되고 발언력이 약해졌다. 그 결과 그들은 2016년 대선에서 슈퍼팩을 사용하지 않았던 트럼프를 지지했고, 그 결과 미국은 이렇게 되었다.



물론 트럼프는 겉으로만 슈퍼팩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뿐 자신의 회삿돈을 선거 운동에 끌어다 썼다는 의혹이 있다. 이는 슈퍼팩보다 더 질이 나쁘다. 횡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뭣인들 어떻겠는가. 이미 무엇이 좋고 나쁜지 분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