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갑
본관은 양주이며 고종 당시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문신)의 서조카다. 고종 30년(1893년) 전라도 고부군수가 되어 각종 탐관오리 행적을 일삼았다. 만석보라는 큰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원래 상류쪽에는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보가 있음에도 쓸데없이 더 큰 규모의 보를 만들었고, 백성들에게 임금도 주지않고 부려먹는가 하면, 만석보를 완성한 후 만석보의 물을 쓰는데 과도한 수세를 징수하고, 근처인 태인의 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공적비각을 세운다고 백성들을 쥐어 짰으며, 백성의 재산을 탐내 무고한 죄를 뒤집어 씌워 재산을 뺏는 등의 행동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거기에 만석보도 잘못 만들었는지 홍수철 마다 침수피해가 발생해서 백성들의 원성은 계속 쌓여갔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 사람은 만악의 근원이다.
어느날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하고 부조금으로 2000냥을 걷어오라고 요구했는데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이 대표로 나서서 항의하다가 곤장에 맞아 죽는일이 벌어진다.
결국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백성들의 봉기로 동학농민운동(1894년)이 일어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인물. 전봉준 등이 관아를 공격했지만 미리 도망쳤고, 파직되어 고금도로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1년만에 고종에게 사면을 받았다. 1898년에 4품 법무 민사국장에 임명되고, 몇 달 뒤엔 고등재판소 판사도 맡는다. 고등재판소 판사직을 맡은지 한 달뒤인 1898년 5월 30일 조병갑 본인의 학정이 원인이 돼서 일어난 동학의 2대교주 최시형에게 직접 사형 판결을 내렸다.
조병갑의 선정비는 현재 2개가 남아있다. 함양읍 역사인물공원에 세워져있는 것과, 2009년 천안 광덕면에서 새로 발견된 것이다. 함양 선정비 표지석에는 "조병갑이 유민을 편케 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 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임했기에 그 사실 없는 선정을 기리기 위해 고종 24년(1887년)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천안 광덕면에서 발견한 선정비는 마모가 심해 글자판독이 어렵다. 함양과 천안 두선정비는 조병갑이 고부군수(1893년)를 지내기 바로전인 함양군수(1880년)시절과 천안군수(1882년)시절 본인의 공적을 기리기위해 본인이 세운 선정비(?)다. 이와 관련, 함양군의회 군의원들은 "선조들의 충효와 선비정신, 위민과 애민 사상이 깃들어 있는 역사인물 공원 안에 있는 동학혁명의 도화선으로 지탄받고 응징해야 할 조병갑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건 지역 주민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며 역사적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며 조속한 철거를 주장했으며 2007년 1월 함양에 있는 조병갑의 선덕비가 30대 남성 백 모씨에게 비석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조병갑의 둘째아들 조강희는 일제 강점기 때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서 일했으며, 친일신문 동광신문에서는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냈다.
함경도 관찰사로 방곡령을 실시했던 조병식과 헷갈리지 말자. 하지만 조병식이야말로 조병갑을 훨씬 능가하는 간신배에 탐관오리였다고 한다. 방곡령도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라와 백성을 위해'가 아니라, 일본 상인들이 미곡을 다 가져가면 자신이 수탈할 미곡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후 조병식은 충청 감사가 되어서 동학도들의 애절한 호소를 그냥 다 씹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이후 이리저리 좌천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탐관오리 일직선. 나름 지조있는 탐관오리 인생이다. 그리고 마침내 오직 고종의 전제왕권유지와 독립협회를 때려부수는것만 목적이었던 정치깡패 집단인 황국협회의 간부가 되어 직접 독립협회를 때려부수고 민권운동을 탄압했다. 그야말로 못된짓만 골라서 하고 다닌 구한말 최악의 인간말종이다.
한편,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이 바로 이 조병갑의 증손녀로, 월간조선이 이 사실을 폭로하면서 조병갑이 나중에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판사로 복직했다는 기사를 내어 논란이 일자, 조기숙은 조병갑은 동학농민운동의 정당성을 위한 희생양이며, 조병갑이 동학농민운동을 유발했다는 것은 역사적 오류라며 항변했으나, 여론이 악화되자 동학농민혁명군 유족에게 공식사과했다. 이에 대해 정남기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은 “후손이 책임질 일이 아닌데 사과의 뜻을 밝힌 것을 고맙게 받아들인다”고 했으나, 일부 유족들은 '언론에 보도되니 그제서야 면피용 사과를 한다'며 탐탁찮은 반응을 나타냈다.
하지만, 월간조선과 그 계열인 조선일보도 좋은 소리는 못 들었다. 탐관오리에서 친일파로 이어지는 가계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그녀가 욕먹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간단히 사과하여 끝내면 될 일을, 정부 인사가 거짓을 마다하지 않고 자기 조상을 옹호하는 행동을 보이고 뒤늦게 면피용 사과를 했다는 점은 비난 받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