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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심재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관련

24인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피의자 중 대부분은 5월 17일에 연행되었다. 나머지는 6월 15일 이석표 체포, 6월 16일 이신범 체포, 6월17일 전국에 심재철 지명수배령이 내려지고 6월 18일 설훈, 송기원 체포, 며칠 후 이해찬, 조성우 체포, 6월 30일 심재철이 체포되었다.

1988년 5공 청문회에 출석한 심재철 자신이 검찰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 거짓 자백을 했으며 한통련 사건과 관련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 받은 것은 검찰측 증인으로 나온 간첩의 증언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피의자중 대부분이 이때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책을 써 자신들이 고문에 굴복하지 않을수 없음을 고백했다.

심재철이 수배중이었던 6월 17일 이미 계엄사령부는 김대중의 학생운동 총책인 이해찬의 조종을 받아 심재철이 전국의 학생운동을 진두지휘했다고 발표하였으며 심재철이 체포된 후 이미 발표된 내용에 꿰맞춰서 그는 고문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의 거짓 진술에 의한 조작에 꿰맞춰지기 위해 심재철은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고문받던 다른 피의자들과 달리 치안본부 특수대에 끌려가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청와대 경비를 맡고 있던 33 헌병단 군인들(최하가 무술 유단자로 구성된)에게 고문을 받았으며, 내란음모사건 피의자중 가장 혹독하게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진보진영에서 비난을 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심재철이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기 전에는 아무도 심재철을 배신자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복학 이후 복학생협의회에 참여했고 1988년 5공 청문회 당시에도 야당 측 증인으로 증언했다. 심재철은 1995년에도 5.18 단체들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5.18 진상조사를 요구하며 당시 5.18 단체와 교류했다. 결론적으로 심재철이 이후 보수정당으로 갔다고 비판하는 것은 자유지만, 1980년의 행적을 가지고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