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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드라마 파친코에 묘사된 '관동 대지진' 대학살

 

관동대학살은 관동대지진이 있었던 1923년 9월 1일부터 약 3~4주에 걸쳐서, 일본 제국 전 지역의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대상으로 끔찍한 살육을 벌인 사건이다. 일본의 군과 관이 개입하였지만 학살자의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내부를 통합하기 위해 분노를 이용한 사례이며, 이를 위해 일본은 조선인에 대한 증오, 허위 선동을 부추겼다. 그로 인해 수천에서 수만에 달하는 무고한 한국인이 살해됐다.

재난에 따른 내부의 정치-사회적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소수자들에 대한 증오를 선동,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고대 로마 대화재 당시 네로의 그리스도교 신자 박해와 비슷하다. 좀 더 가까운 시기로는 15년 뒤,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자행했던 수정의 밤 사건과도 유사점이 나타난다. 대한민국의 요청에 따라 일본은 당시 조선인 사망자 기록을 한국 측에 공개하였는데, 일본의 사망 기록 명부에선 조선인 사망자는 40명으로 축소된 자료를 공개했다.



1923년 도쿄를 위시한 간토 지방은 지진 때문에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가 속출했고, 치안도 무너져 민심과 사회질서가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팽배한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인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편향적인 유언비어까지 더해진 결과, '사회주의자들의 교시를 받은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방화약탈까지 한다.'는 과격한 선동 문구로 완성되어 각지에 나돌았다.

심지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독이 든 만두를 나눠주고 있다', '조선인들이 일본에 지진 일어나게 해달라고 일본에 저주를 퍼부었다.'는 유언비어라 하기에도 급이 너무 떨어지는 허무맹랑하고 비과학적인 낭설까지 나돌았다. 또한 '조선인들 모두가 일본 열도를 영차영차 밀어서 지진을 일으켰다.'는 어이가 없어질 정도의 만평이나 프로파간다 그림들이 신문이나 벽보 등으로 나돌았다.

게다가 당장의 분노를 표출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증오가 있었던 일본 극우들은 이러한 소문들을 곧이곧대로 믿고, 서로 적개심을 확산시켜가며 조선인 학살의 구실을 쌓아갔다.

게다가 조선인들에 대해 무관심했던 다른 민중들도 지진으로 인해 여기저기 무너지고 물 공급까지 끊긴 상태라 삶의 터전을 잃은 허망함과 좌절, 화재, 치안에 대한 불안감까지 커져갔다. 그런데 이런 소문들까지 나돌자 당장의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여 곳곳에서 우익들의 선동 하에 죽창, 몽둥이, 도끼, 갈고리, 일본도, 총기 등으로 무장한 자경단을 빙자한 폭도들이 결성됐고, 이들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민재판을 해 조선인이다 싶으면 가차없이 죽였다.





학살된 한국인의 수가 자료에 따라 편차가 심하여 정확한 피해자의 수에 대해 논란이 지속되어 왔다.

초기부터 수천 명 단위 학살 소문이 돌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자의 자세한 보고서를 통해 6,661명 희생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희생자 중 상당수가 지진으로 인한 희생자의 착오라고 주장하고, 실 희생자는 조선인 약 300명 미만이라고 사태 수습 이후 사법성 명의로 공식 발표했다.

그동안 이의 신빙성은 매우 낮다고 평가되었는데, 적어도 일본 정부가 사실을 인정하고 벌인 각종 재판에서 확인된 희생자 숫자만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를 가볍게 뛰어넘기(약 900명) 때문이었다. 일본 학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2,711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추정했다.

그런데 2013년 6월, 1952년에 한국 정부가 피해 청구 목적으로 조사하여 작성한 희생자 명단이 발굴되었었는데, 이 명단에는 당초 일본 정부가 주장한 300명 미만에 근접한 피해자 318명이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 인원은 남한의 일부 사람을 대상으로 6.25 전쟁 중 짧은 기간 동안 조사한 결과라서 실제보다 숫자가 적을 것이다.

이전까지의 정설보다 더 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는 독일 외무부 자료가 발굴되었으나, 독립운동가들이 학살 4개월 후에 작성된 최종 보고서 형태인데 당시 일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완전히 거부해서 조사를 못 하게 방해했다.

2013년 11월 24일, 명부에 실린 관동대지진 피살자 290명, 3.1 운동 때 피살자 명부에 일부 포함된 52명 등 342명 중 피살자는 198명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살해된 사람들이 '쇠갈퀴'나 '곡괭이'로 살해되었으며 육군 헌병이 개입한 경우까지 드러나기도 했다.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오사카국제평화센터(피스 오사카)에도 관련 게시물이 있었으나, 2011년 하시모토 도루가 시장으로 취임한 후 2014년 9월 들어 보수공사를 단행하여 난징대학살, 조선인 강제연행 관련 자료와 같이 사라져 오사카 대공습 등을 위주로 전시물이 개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