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과 천명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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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과 천명공주


2015. 2. 15.

친어머니 지도태후와 함께 궁중에서 자란 용수와 용춘은 어린 시절 진평왕을 아버지로 알고 자랐다. 천명공주와 선덕공주도 같이 왕궁에서 자랐으므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용춘은 진평왕의 딸인 천명·선덕의 숙부였으나 신라사회는 친족간의 사랑이 금기가 되는 사회가 아니라 장려되는 사회였으므로 친족이란 사실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용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해 고민하던 천명공주는 어머니 마야왕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남자 중엔 용숙(龍叔)만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속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용춘이 용수의 동생이기에 ‘젊은 숙(叔)’자를 써서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마야왕후가 ‘용숙’을 ‘용수’로 잘못 알아듣는 바람에 서로의 운명이 꼬여갔다.



마야부인에게서 이 말을 들은 진평왕은 용수를 사위로 삼고 왕위까지 물려주려 했다. 용수와 천명공주의 결합은 선왕의 혈통과 자기 혈통의 완전한 결합이기도 했으므로 아들이 없던 진평왕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천명은 기회를 엿보아 용춘에게 ‘첩이 본래 그리워 한 사람은 당신’이라고 고백했으나 용춘은 ‘가정의 법도는 장자(長者)가 귀한 법인데, 신이 어찌 형과 같겠습니까?’라며 구애를 거절했다.



천명공주는 이에 좌절하거나 용춘을 원망하지 않고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용춘의 직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용춘은 13세 풍월주(風月主:대표 화랑)가 되어 골품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발탁으로 큰 업적을 이룩했다. 그러자 진평왕은 용춘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하고 천명공주에게 왕위를 양보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덕공주가 여기에 반발하고 나섰다. 그녀는 남자만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시대의 상식에 도전했다. 그녀는 용춘에게 왕위를 양보하기는커녕 용춘이 자신의 사신(私臣:개인적으로 거느리는 신하. 여기에서는 남편의 뜻도 있음)이 되야 한다고 주장했다.



용춘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대신 그를 사신으로 쓰겠다는 선덕의 당돌한 말은 진평왕을 감탄시켰다. 천명공주 같으면 상상도 못할 발상이었다. 진평은 선덕이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했겠지만 이 정도 배포라면 여왕노릇을 못할 것이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진평왕은 선덕의 요청을 받아들여 용춘에게 선덕을 받들라고 명령했다. 이는 선덕의 사신이자 남편이 되는 것을 뜻했다. 용춘은 사양했으나 임금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화랑세기’는 선덕공주가 “점점 자라자 용봉(龍鳳)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을 갖게 되었다고 적고 있는데 그녀가 왕의 상징인 ‘용봉’과 ‘태양’처럼 된 것은 이런 발상의 전환과 노력의 결과였다. 여왕은 세 명의 남편을 둘 수 있게 하는 ‘삼서지제(三▩之制)’를 제도화해 용춘 외에도 흠반(欽飯)과 을제(乙祭)까지 남편으로 삼았다.



천명은 양보함으로써 왕위와 용춘을 모두 놓쳤으나 선덕은 상식에 도전한 결과 왕위와 용춘을 모두 차지하고, 두 남자까지 더 둘 수 있었다. 선덕여왕은 이런 배포만큼이나 총명했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세 가지 일의 기미를 미리 알아냈다는 내용의 ‘지기삼사(知幾三事)’가 실려 있는데, 첫 번째는 선덕여왕이 당 태종이 보낸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모란꽃엔 향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겨울철에 개구리떼가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라는 연못 부근에서 사나흘을 계속해서 울자, 서쪽 변방 여근곡(女根谷)에 백제군이 숨어 있음을 알아차리고 격퇴시켰다는 것이다. 신하들이 어떻게 백제 군사가 숨어 있었는지 알았냐고 묻자 “개구리의 성난 모양은 병사의 형상이고 옥문은 여자의 음부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므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답한다. 이에 신하들은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세 번째는 자신의 죽을 날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당 태종은 선덕여왕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643년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백제연합군의 공격에 맞서기 위한 군사지원을 요청하자 태종은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종친 한 사람을 보내 임금으로 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신라 사신은 묵묵부답이었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내정간섭에 대한 불쾌감을 꾹 참고 이듬해 정월 사신과 방물(方物)을 보내 태종을 달랬다. 당 태종의 이런 여왕 비하 발언은 신라의 진골 남성들을 부추겨 나중에 비담(毗曇)의 난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이외에도 선덕은 재위 11년(642년) 백제 의자왕의 공격을 받아 서쪽 변경 40여 성을 빼앗기는 등 내우외환을 겪었다. 그녀는 이에 맞서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산) 군주(軍主)에 임명해 백제의 공격에 맞서는 한편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 왜, 당에 파견해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그녀는 당에서 귀국한 자장법사(慈藏法師)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黃龍寺) 9층탑을 축조한 이유는 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고구려·백제)은 항복할 것이며, 아홉 이민족이 와서 조공(朝貢)할 것’이란 말 때문이었다. 이 통일염원탑의 제1층은 일본(日本), 제2층은 중화(中華)…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濊貊)을 진압시킨다는 뜻이니 천하를 제패하려는 선덕여왕의 웅대한 포부가 담긴 탑이었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 선덕왕조에서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난세(亂世)의 일이며,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고 평했으나 삼국 중에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객관적으로 선덕여왕 때 삼국통일의 기초를 세웠다. 그녀는 성공한 여왕이었다.



용수가 죽으면서 형사취수(兄死取嫂)의 유풍에 따라 천명공주와 아들을 용춘에게 맡겼다. 천명은 비로소 꿈에 그리던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용수가 사랑하는 부인과 우애 깊은 동생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기도 했다. 사랑 때문에 왕위를 포기한 천명은 용수가 죽음에 따라 비로소 그 사랑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랑세기’는 “(용춘)공이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선덕에게서)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용춘이 선덕에게 애정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랑에 관한 한 승리자는 천명공주였다. 또한 선덕여왕은 자기 뒤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했다. 용춘이 다른 여자에게서 다섯 아들을 낳은 것으로 보아 문제는 선덕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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