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황제 무측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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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황제 무측천


2014. 9. 19.

【 최초의 여자황제 】
순조롭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무측천은 미신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하여 여론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형성해 나갔다. 예를 들면 그녀의 조카 무승사(武承嗣)는 사람을 시켜 "황제의 모친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니, 황제의 업적이 영원히 번성하리라(聖母臨人, 永昌帝業)"라는 글귀가 새겨진 흰돌을 낙수(洛水)에서 가져왔다고 하면서 바치게 하였다. 그것을 본 무측천은 매우 기뻐하여 연호를 "영창(永昌)"이라 하였다.

당 고조 이연의 11번째 아들 이원가(李元嘉)의 반발이 있었지만 무측천은 즉시에 그것을 진압하고 황제의 등극을 향하여 순조로운 행보를 계속하였다. 이로부터 더 이상 그녀의 권세에 도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690년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을 기하여 무측천은 마침내 예종을 폐위하고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준비해 둔 도읍지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로써 그녀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에서는 그녀를 "무주(武周)"라 일컫는다. 무측천이 황제에 등극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67세였으니, 중국역사상 그녀는 황제에 즉위한 나이가 가장 많은 황제가 되었다.

무측천은 황제에 즉위한 후에 수구세력의 반항을 제지하기 위하여 색원례(索元禮)·주흥(周興)·내준신(來俊臣) 등과 같은 악독한 관리를 임명하여 참혹한 형벌로써 수천명에 달하는 당왕조의 종실과 대신들을 주살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다지기 위해서 많은 인재를 등용하기도 하였다. 과거제도는 위진(魏晋) 이래로 신분에 따라 관리를 임용하던 악습과 그로 인한 폐단을 타파하기 위하여 수(隋) 양제(煬帝) 시기에 처음으로 시행되었으나 무측천 시기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새로 임용된 관리들 중에는 미천한 집안의 출신들도 많았다. 그들은 신분의 상승을 필요로 하였고 무측천은 그러한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 주었다. 이로써 많은 문인학사들은 무측천의 지지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무측천은 수구세력을 타파하여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굳건히 다지는데 그들을 이용하였다.

새로운 인재들을 초빙하기 위하여 무측천은 한편으로는 낙양의 궁전에서 친히 공사(貢士: 과거시험에서 회시會試에 합격한 사람)의 과거시험을 주관함으로써 최초로 "전시(殿試: 과거제도 중 최고의 시험으로 궁전의 대전大殿에서 거행하며 황제가 친히 주관함)"제도를 정착시켰다. 그녀는 또 "무거(武擧)"를 설치하여 무예에 뛰어난 사람을 관리로 선발하였으며, 각급 관리와 백성들이 직접 천거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서적을 편찬한다는 명분 하에 재능이 뛰어난 문인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조정을 위해서 정책을 마련하거나 상소문을 처리하게 하는 등 재상의 업무를 보좌토록 하고, 그들을 "북문학사(北門學士)"라 하였다. 그녀는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하나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특히 새로운 인재의 발굴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고루 잘 등용하였다. 따라서 그녀의 집권 시기에는 정관(貞觀: 627~649, 당 태종의 연호) 시기에 비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궁궐에 인재가 가득하였다. 당시에 재상을 역임하였던 이소덕(李昭德)·소량사(蘇良嗣)·적인걸(狄仁杰)·요숭(姚嵩) 등은 모두 뛰어난 재상으로 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그녀는 직무에 충실하지 못한 관리를 발견하기만 하면 즉각 그들의 직위를 강등하거나 파면하였으며, 심지어는 그러한 사람들을 주살하기도 하였다.

무측천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관리하는데도 매우 신경을 많이 썼다.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절대로 조정의 대권을 내주지 않았다.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한 딸 태평공주(太平公主)는 권모술수에 대단히 능하였다. 무측천은 그러한 태평공주를 엄격하게 지도하여 법을 위반하지 않도록 항상 스스로 행동을 주의시켰다. 무측천의 조카 무승사(武承嗣)가 재상을 역임하고 있었던 692년 이소덕이 무측천에게 무승사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 황위를 찬탈할 위험이 있으니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귀뜸을 하였다. 그후 무측천은 무승사를 재상에서 해임하였다. 이에 이소덕에게 원한을 품은 무승사는 무측천의 면전에서 이소덕을 무고하였으나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질책하였다.

"나는 이소덕을 임용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소. 그는 나의 고생을 덜어주고 있는데 그대가 어찌 그와 비교될 수 있겠는가!"

무측천이 총애하던 환관 설회의(薛懷義)가 권세를 등에 업고 거만하게 횡포를 일삼자 많은 고관대작들이 모두 그의 환심을 사려고 갖은 아첨을 다 떨었다.
어느날 그가 재상만 출입할 수 있는 남아(南牙)라는 곳에 들어갔다가 재상 소량사에게 들켰다. 소량사는 부하들에게 명하여 그를 끌어내어서 따귀를 몇 십대 치게 했다. 설회의는 곧장 무측천에게 달려가서 자신의 억울함을 울면서 호소했으나 무측천은 오히려 그를 꾸짖었다.

"남아(南牙)는 재상이 출입하는 곳이니 너는 마땅히 북문(北門)으로 갔어야 했어."

무측천은 만년에 이르러 황위를 자기의 조카 무승사에게 물려주려고 하였지만 재상 적인걸(狄仁杰) 등의 반발에 부딪혔다. 황위를 조카 무승사에게 물려주어 무씨 정권을 계속 유지시킬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아들(중종 이철과 예종 이단)에게 물려주어 다시 당왕조의 황태후로 돌아갈 것인지, 무측천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이미 74세의 고령이었던 무측천은 적인걸을 불러 이 문제를 의논했다.

"내가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큰 앵무새의 양날개가 잘려져 있더군요. 경이 보기에는 이것이 무슨 징조인 것 같소?"

그러자 적인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칙천에게 이렇게 말했다.

"폐하의 성씨가 '무'씨이니 그 앵'무'새는 바로 폐하이시고, 양날개는 바로 폐하의 두 자제분이십니다. 만약 폐하께서 다시 두 자제분을 기용하신다면 양날개는 새롭게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699년 무측천은 유폐시켰던 자신의 셋째 아들 중종 이철(즉 이현李顯)을 다시 불러 황태자로 삼았으며, 당시의 태자였던 예종 이단은 현명하게 태자를 형에게 양보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무승사는 자신의 계승권이 단숨에 날아가 버린 것을 알고 격분해 하다가 결국 화병으로 죽었다.

705년 정월 무측천은 이미 82세의 고령에다 병까지 겹쳐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이때 재상 장간지(張柬之) 등이 문무대신들을 거느리고 궁궐로 진입하여 무측천의 환관 장역지(張易之)·장창종(張昌宗) 등을 죽이고 중종(中宗)을 황제로 옹립한 후 "당(唐)"이라는 국호와 당왕조 전장제도를 복원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무측천을 그대로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 일컬으면서 존대하였다.

그해 11월 무측천의 병세가 위독하여 중종이 병문안을 갔다. 이에 무측천은 중종에게 무씨(武氏) 집안을 잘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한 후,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82년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한 일을 모두 다 했으니 더 이상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지난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꿈만 같구려. 차후에 나를 꼭 황제라 칭하지는 말고 여전히 태후라 칭하여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불러주시오."

그리고는 다시 중종에게 자기에 의해 학살된 황후와 저수량·한애(韓璦) 등의 가족을 사면해 달라고 부탁했다.




< 무측천과 고종의 건릉(乾陵)>


특히 태평공주에게는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던 딸로 나만큼 총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총기로 잘못을 저지르지는 마라."는 말을 남기도 하였다. 705년 11월 2일 무측천은 상양궁(上陽宮) 선거전(仙居殿)에서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무측천은 후세 사람들이 자기를 평가할 때 양단으로 엇갈릴 것을 예상했기 때문일까? 어째서 그러한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죽기전에 자기의 묘비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금도 무측천의 묘비는 이례적으로 글자가 없는 비석으로만 남아 있다. 


706년 정월에 무칙천의 영구는 장안으로 운송되어 그녀의 유언에 따라 고종의 무덤인 건릉(乾陵: 지금의 서안시 서북쪽 건현乾縣 양산梁山에 있음)에 합장되었다. 무측천이 죽은 후 그녀의 휘호는 여러 번 바뀌었지만 후손들의 존경심은 바뀌지 않았다. 중종이 죽은 후 다시 황위에 올란 무측천의 막내 아들 예종 이단은 그녀의 존호를 "천후(天后)"라 하였다가 다시 "대성천후(大聖天后)에서 "천후황제(天后皇帝)", "성후(聖后)"라 하였다.



<무측천의 비석>

당(唐) 현종(玄宗)이 즉위한 후에는 다시 "측천황후(則天皇后)"라 하였으니 비교적 객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749년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무측천의 휘호를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로 확정하였다.

무측천은 약 반세기 가량 국정을 다스리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여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특히 농경장려, 인재중용, 측근단속 등의 조치를 취하여 당시의 사회를 효과적으로 안정시키고, "정관지치(貞觀之治)"의 업적을 공고히 다져서 경제를 윤택하게 발전시켰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녀는 잔혹한 살상과 천륜을 위배하는 만행을 저지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역사상 그 정치적 공헌을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녀는 불교 장려의 일환으로 대단위 사원 공사를 벌여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계층간의 위화감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어떤 학자들은 무측천이 재위 시절에 자신의 정적 제거와 불교 사원 건축에 대부분의 정력을 쏟아부어 사회적 경제적 발전의 지연을 초래했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