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8.
콜럼버스는 이사벨 1세의 지원을 받아 1492년 8월 3일에 팔로스 데 라 프론테라를 출발, 서쪽으로 모험을 떠났다. 그리고 10월 12일에 그가 '인도'라고 믿은 신대륙 본토와 가까운 바하마 제도에 속한 섬에 상륙해서 '산살바도르 섬'으로 이름붙였다. 훗날 서인도 제도로 불릴 카리브 지역을 탐험할 때 12월 25일 히스파니올라 섬에서 기함이자 가장 큰 배인 산타마리아 호가 좌초되어, 돌아올 때는 배가 1척 줄었다. 콜럼버스는 1차 원정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와 여왕에게 보고했다.
1493년에 시작한 2차 원정에서부터 콜럼버스의 탐욕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우선 그는 1차 원정에서 돌아올 때 선원 30명 가량을 히스파니올라 섬에 남겨두고 스페인으로 돌아와 이사벨라 여왕에게 이번 원정에서는 엄청난 수의 노예와 금을 얻을 수 있다며 1차 원정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원조를 받아낸다.
이렇게 2차 원정이 시작되었지만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로 돌아와 보니 일전에 남겨놓은 30명 가량의 선원들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증언할 당사자가 없으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확실하게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선원들이 한 사람당 최고 5명씩 원주민 여자를 거느린다거나 금을 비롯한 보물을 긁어모으기 위해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심하게는 원주민을 죽이기까지 하는 행패를 부리다가 마침내 견디다 못한 원주민들이 반기를 들어 선원들을 몰살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다.
이후 콜럼버스는 히스파니올라에 여왕의 이름을 붙인 식민지 거점을 세운 뒤, 호전적인 부족뿐만 아니라 보통 원주민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전설에 따르면 한 마을에서는 700명 가량을 자비도 없이 모두 생포해 창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그 후로도 학살은 계속 이어졌다. 그 당시 원주민들은 철기가 없이 돌로 만든 무기들을 가지고 싸웠으니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저항하다가 붙잡힐 시 분살을 포함한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당했기 때문에 패배에 직면했을 시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3차 원정(1498~1500)과 4차 원정(1502~1504) 때 콜럼버스 탐험대는 점점 더 잔인해져서, 마스티프라고 하는 맹견을 데리고 와서 원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14세 이상의 원주민들은 석 달마다 콜럼버스가 제시하는 금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을 시 손이 잘리는 형벌을 받고 과다출혈로 죽어갔으며, 9살의 소녀부터 35세의 성인 여성들까지 강제로 은화 한두닢에 매춘부로 만들었다.
콜럼버스가 오기 전까지 히스파니올라 인구는 30만 명이었으나 2년만에 10만 명이 죽고, 나중에는 500명밖에 남지 않다가 결국 원주민인 타이노족은 전멸했고 혼혈 후예만 남았다. 그러자 콜럼버스와 스페인인은 처음에 원주민 노예들을 수출하다가, 나중에는 흑인 노예들을 수입해 왔다. 흑인 노예들도 원주민 노예들처럼 얼마 안 가긴 마찬가지였으나, 살아남은 흑인 후손들이 원주민 및 백인과 혼혈 자손을 남겨서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은 아프리카계 흑인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이 많다.
위에서 서술되었듯이 콜럼버스는 자기가 발견한 땅이 중국의 남서부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중국 황제나 황금 광산을 찾았지만 나올 턱이 없었다.
보다못한 다른 스페인 관리들이 본국에 콜럼버스의 만행을 알렸지만, 본국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백인들은 원주민이나 흑인들은 인간으로 보지도 않았기 때문인데, 스페인에서 원주민들을 최소한 '인간'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콜럼버스 이후 라스 카사스와 같은 사람들에 이르러서였고 흑인이 그 정도의 대접을 받으려면 그보다 좀 더 시간이 흘러야 했다는 시대적 한계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콜럼버스는 본국에 자기가 정복한 땅의 총독 자리와 지도자 자리를 요청했으며, 해군 제독이라는 지위를 주장하면서 이것을 자식들에게 세습시켜 달라고까지 요구했다. 심지어 사업에서 얻은 이득의 1/10은 자신의 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주는 것도 없이 얻어만 먹으려는 심보였으니 그야말로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 외에도 한 부하 선원이 섬을 발견했는데, 그를 협박해서 자기가 발견한 것으로 거짓 보고하는 등 남의 공을 가로채 부하들 중에서도 적이 많았다. 그리고 그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왔던 원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노예 시장에 팔아넘긴 기록도 있다.
사실 콜럼버스가 저지른 짓은 당시 유럽 기준으로 봐도 아주 사악하다고 비난받은 행위였다. 아무리 당시 백인들이 타 인종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콜럼버스는 야만인(=원주민)과의 약속은 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콜럼버스의 부하들조차 보다못해 "제아무리 야만인이니 뭐니 해도 최소한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하지 않느냐"며 크게 반발했고 심지어 일부는 그에게 대놓고 반기를 들기까지 했다. 어쨌든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한 법이라, 당시 콜럼버스의 부하 중에는 원주민들과 친해져서 호형호제하는 사람도 많았고 원주민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얻은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 앞에서조차 원주민들을 대놓고 탄압했으니 좋게 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1504년 1월에는 일부 부하와 원주민들이 손잡고 콜럼버스를 암살하려 하기도 했는데, 그는 자던 중 놀라서 속옷 차림으로 달아나 다른 스페인 주둔군이 있는 곳으로 피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그 꼴을 본 스페인 군인들조차 대놓고 비웃었을 정도였다.
그가 이렇게 원주민을 잔인하게 대한 이유는, 그의 항해가 수익성이 있음을 스페인 본국에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중국이나 인도를 향하는 항로가 아니라 그냥 허름한 산골동네나 다름없는 신대륙이었다. 물론 이후에 신대륙에서 나오는 막대한 은과 기호품이 유럽 국가들의 재정을 책임지는 근간이 되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대 기준으로도 먼 후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콜럼버스가 당시 발견했던 신대륙은 그냥 외딴 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100% 이익이 난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결과는 1% 이윤만 나는 셈이니, 그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막대한 금을 수집한다. 하지만 그렇게 긁어모은 금조차 턱없이 적은 양이었고 그는 점점 더 잔인해지게 된다.
여하튼 이런 만행 때문에 콜럼버스는 당대부터 이미 크게 지탄받는 인물이었으며, 근현대에 반짝 콜럼버스에 대한 미화가 흥하게 되지만 이내 그의 추악한 민낮이 까발려지며 콜럼버스의 이름은 탐험가의 대명사가 아닌 피와 욕망에 굶주린 학살자의 상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