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천재, 알란 튜링 (Alan T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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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천재, 알란 튜링 (Alan Turing)


2014. 7. 23.

알란 튜링 (Alan Turing, 1912-1954, 영국)
컴퓨터의 아버지, 세계 최초의 해커, 알란 튜링
배척의 원리는 자유롭게 사귀도록 내 버려둔다면 타락할지도 모를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 알란 튜링


20세기 최대의 발명품은 과연 무엇일까? 비행기, 핵폭탄, 텔레비전, 페니실린, 피임약, 레이저, 장기이식, 시험관 아기, 유전자 복제, 인터넷 등등 20세기로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발명을 열거하는 것은 벅찬 일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역시 빠뜨릴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컴퓨터의 발명'이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 최초의 컴퓨터는 1946년 2월에 공개된 에니악(ENIAC)으로 알려져 있었다. 1만7천여 개의 진공관을 사용한 30t 짜리 괴물인 에니악은 펜실베이니아대학의 모클리(1907-1980)와 에커트(1919-)가 미육군의 포탄과 미사일의 탄도계산을 하기 위해 발명했고, 에니악은 훗날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 중심의 컴퓨터 역사는 그동안 일급비밀로 감춰졌던 영국의 콜로서스(Colossus)가 일반에 공개됨에 따라 그보다 먼저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컴퓨터(1943년 12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알란 튜링의 일생에는 그 어떤 과학자보다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숨겨져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한 전쟁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컴퓨터의 아버지, 세계 최초의 해커, 인공 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최초의 개념을 생각해 낸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모든 업적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국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빼앗아 버렸다. 우리는 흔히 독일의 과학기술이 연합국, 특히 영국보다 매우 뛰어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연합국에 패한 까닭을 단지 생산력에서 뒤처진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영국은 누구보다 먼저 레이더 기술을 도입해 영공방어에 힘썼고, 그들의 첨단 기술은 독일의 자기(磁氣)식 기뢰를 무력화했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이 자랑하는 난공불락의 에니그마(Enigma)암호를 풀었다. 그 에니그마 암호를 풀어낸 인물이 바로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알란 튜링이다.





학교나 공동체에서나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사회성이 아주 부족한 소년



알란 마티슨 튜링은 인도 식민지의 영국 공무원이었던 인도의 차트 라프루에서 임신한 어머니가 영국 런던 패딩턴(Paddington)으로 돌아와 1912년 6월 23일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갓난쟁이 알란과 그의 형제들을 영국 가정에 맡기고 자신들은 다시 인도로 돌아갔고,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식들을 방문했다. 1926년 알란 튜링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학교인 셰르본느 학교(Sherborne School)에 입학했다. 그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데 힘겨워했고, 셰르본느 학교의 교장은 알란 튜링에 대해서 "그는 어떤 학교나 공동체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사회성이 아주 부족한 소년"이라고 평했다. 어린 튜링은 그다지 사교적인 소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열고, 그의 마음을 받아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튜링보다 한 학년 상급생이었던 크리스토퍼 모르콤(Christopher Morcom)이었다. 1930년 모르콤이 18세의 나이로 돌연 사망했을 때, 튜링이 받은 충격은 심각한 것이었다. 그는 "충격을 받아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이때를 회상했다.



1931년 학교를 졸업한 튜링은 1935년 케임브리지 대학 킹스 칼리지에서 수리논리학을 공부하며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할 문제>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그는 이 논문에서 고정되고 명백한 과정으로 풀 수 없는 수학 문제들이 있음을 증명했다. 이는 훗날 컴퓨터 이론의 발전에 이정표가 되었고, 오늘날 '튜링 머신'으로 알려진 개념의 기초가 되었다. 1936년부터 미국 프린스턴 대학으로 건너간 튜링은 이 논문이 출판된 이듬해인 1938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하던 시절 27살의 튜링은 오늘날 현대 컴퓨터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튜링머신’을 수학적으로 고안해냈다. 튜링머신은 명령어와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데, 튜링은 구멍 뚫린 종이테이프에 필요한 명령을 입력하면 마치 자동기계처럼 컴퓨터가 작동할 것이고 설명했다. 헝가리 출신의 프린스턴 대학 수학교수인 폰 노이만(1903-1957)이 그의 아이디어를 보고 프린스턴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튜링은 미국을 떠나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갔다.



1930년대 유럽의 뛰어난 두뇌들은 유태인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나치의 광기를 피해 미국으로의 탈출 러쉬가 일어났다. 튜링은 자신의 연구 성과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는 폰 노이만 등 미국 학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벌어진 영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악마의 발명품, 에니그마를 해독하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벌이기 전에 거의 모든 분야에서 비밀리에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그들은 루프트한자를 위한 민간항공기를 제작한다는 명목으로, 고속 폭격기를, 농업용 트랙터를 제작한다는 명목으로 신형 전차를 준비했다. 그들이 준비한 또 하나의 비밀 무기가 바로 '에니그마(Enigma)'였다. 전쟁의 전략은 사령부에서 작성한다지만 작전은 작전일 뿐 명령과 실전상황이 사령부와 야전 사이에서 원할하게 소통되지 못한다면 군대는 다만 눈뜬 장님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전격전'이라는 고속기동전을 주요 전술로 사용하는 독일군에게 그런 통신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런데 통신을 도청해서 그 작전 상황을 상대방이 낱낱이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암호(cryptography)기술은 놀라울 만큼 발전했고 그 결과 등장한 것이 '에니그마'였다.



암호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코드를 이용한 '어구 암호'와 '사이퍼(cipher) 암호'라고 하는 문자 암호이다. 사이퍼 암호라는 것은 글자를 바꾸는 형식의 암호로 경우의 수가 많아질수록 해독하기 어렵게 되는데, 그 원조는 로마 시대의 '케이사르'라고 한다. 건전지로 작동하는 에니그마는 타자기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기본적인 구조는 각각 알파벳이 새겨진 원판 3개와 문자판으로 구성된, 얼핏 보면 매우 단순한 형태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자판 위의 문자키 하나를 누르면 나란히 놓인 3개의 원판이 회전하면서 매우 복잡한 체계에 의해 암호가 만들어지고, 그 경우의 수는 인간이 도저히 계산할 수 없을 만큼 많아지는 것이다. 연락사항을 주고 받는 측은 작동지침서에 따라 매번 다른 방식으로 기계를 조작했고,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지침서가 매월 변경되었다. 그리고 전쟁 직전에는 하루에 세 번이나 바뀌었다. 독일군은 에니그마를 사용한 통신문의 암호화에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한 사람이 통신문을 치고, 한 사람이 암호화된 코드를 읽어내고, 나머지 한 사람이 기록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독일의 추축국 동맹이었던 일본도 독일의 에니그마 암호기의 일본어판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런 복잡한 암호체계와 완벽에 가까운 보안을 통해 독일은 자신들의 암호체계가 완벽한 것이므로 연합국에서는 도저히 이 암호체계를 해독할 수 없으리란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 다른 글자들이 조합되는 복잡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인해 설령 외부인이 에니그마 암호기를 입수했다 하더라도 암호체계를 해독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했고, 더군다나 독일측은 에니그마 암호기에 대한 보안 자체를 엄격히 통제했으므로 '에니그마'를 입수하는 일 자체도 어려웠다. 이러한 암호체계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천재 이상의 능력이 필요해 보였다. 최근 영화 에서 미 해군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탈취하려고 들었던 암호기가 바로 이 '에니그마'였다.



그러나 영국은 에니그마를 영화 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입수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6주전인 1939년 6월 25일 3명의 영국 첩보원은 바르샤바 교외의 몰로코프-피리의 숲속에 만들어진 한 깊은 지하실에서 폴란드의 첩보 관계자들과 만났다. 그 만남에서 폴란드 첩보부는 자신들이 입수한 독일의 가장 소중한 사이퍼 암호기인 에니그마와 그 작동법을 넘겨주었다. 폴란드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은 영국 첩보부는 이 소중한 기계에 대해 특별한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들은 이 암호기가 다가오는 세계 대전의 향방을 좌우할 만한 것이란 판단 아래 입수한 바로 다음날 자정이 되기 전 영국 본토로 이송했다.





블레츨리 파크의 천재들,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난 천재 - 알란 튜링



1938년 박사학위를 받은 튜링이 영국 캠브리지 대학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폴란드 출신의 젊은 공학자 레빈스키였다. 그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쫓겨난 그는 독일의 암호제조장치인 에니그마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은 '에니그마'의 암호 체계를 해독하기 위해 당시 영국의 최고 두뇌들을 비밀리에 소집했던 것이다. 영국은 블레츨리(Bletchley) 파크의 한 농촌 저택에 특별센터를 설치하고, 독일의 암호 해독 작전에 <울트라>라는 암호명을 붙였다. 영국 정부와 첩보부는 '에니그마' 분석애 들어가고, 오래지 않아 이것이 난공불락의 이 암호체계임을 알게 되었다. 영국이 수데텐란트와 체코를 넘겨주면서까지 피하고자 했지만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만다. 개전 직후 영국에서 제법 유명하다는 과학자들이 그들의 학교, 연구실, 거리에서 일제히 사라졌다. 그들이 모인 곳은 거대한 빅토리아식 영지가 자리잡고 있는 런던 근교의 블레츨리 파크였다.



오늘날까지 이곳에서 이들이 과연 어떤 일들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일급 비밀이다. 다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들 중 일부가 에니그마 암호 해독에 임했고, 그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블래츨리 파크에 거주하면서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당대 제일의 수학자였던 알란 튜링을 포함해서 세계 유수의 암호 해독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난공불락의 암호체계라고 생각했던 에니그마에도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에니그마 암호기를 통해 전송되는 어떤 문자는 결코 실제와 같은 알파벳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B자를 표기할 때, 이 알파벳 문자가 에니그마를 통과해 암호화 될 때는 결코 'B'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영국은 자신들이 알게 된 이런 에니그마의 약점을 이용해 때때로 전술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지점에 항공기를 출동시켜 발생하는 독일측의 암호 전문을 도청하는 형태로 암호 체계의 일부를 해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시간도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오독이 발생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1943년 12월 튜링은 콜로서스(거인; Colossus)라는 세계 최초의 연산 컴퓨터를 만들어 냈다. 이것은 2천 4백 개의 진공관을 이용해 만들어진 이 컴퓨터는 높이만 3m에 이르는 거대한 덩치를 지니고 있었다. 공학 판독기에서 해석된 메시지는 5비트(bit) 텔레프린트 코드로 테이프에 천공되었는데, 1초에 약 5,000자를 천공할 수 있었다. 콜로서스는 이렇게 초당 5천자의 암호문이 종이 테이프를 타고 들어가면서 에니그마의 암호와 일치할 때까지 비교하는 방식이었다. 사람의 손으로 한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부적으로 콜로서스는 수를 세거나 비교하고, 간단한 산술 연산을 할 수 있는 전자 부속들을 갖추고 있었다. 계산결과는 전기타자기를 경유하도록 설계되었으며, 프로그램은 플러그판의 스위치를 조작함으로써 가능했다. 각 세트는 한 차례에 1만7,576개의 조합을 점검할 수 있었다고 한다. 흔히 세계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로 알려진 펜실베니아 대학의 '에니악'은 영국이 '콜로서스'의 존재를 1970년대 후반까지 비밀로 한 덕분에 세계 최초의 컴퓨터의 알려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애니악은 실제로는 콜로서스보다 2년이나 늦게 제작된 것이었다. 튜링에 의해 개발된 콜로서스는 독일이 완벽하다고 믿었던 에니그마의 암호 체계를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 독일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신들의 암호가 영국의 손 바닥 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연합국은 독일의 거의 모든 비밀 통신을 도청했고, 연합군의 유럽 대륙 상륙작전의 주요 목표에 대해 독일이 '노르망디'가 아니라 '칼레'로 예상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승전으로 이끈 영웅, 인공지능(A.I)의 아버지 그러나 동성애자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전후(1948년) 튜링은 맨체스터로 옮겨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기억용량을 가진 맨체스터 대학 자동 디지털 기계(MADAM)의 부책임자가되었다. 이때 그가 보인 컴퓨터 설계와 프로그램 분야에 있어서의 성과는 컴퓨터 기술에 대한 혁명적 성과였으며, 이 때부그는 '생각하는 기계'로서의 컴퓨터의 가능성을 제안했다. 그는 프로그램 작업에 어떤 임의적인 요소들을 도입하면 언젠가는 컴퓨터가 인간의 사유 작용과 비슷한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1950년‘컴퓨터와 지능’이란 논문을 발표하며 자신의 성과를 공표했다. 동일한 질문에 대해 컴퓨터와 인간이 똑같은 대답을 한다면 그것은 곧 컴퓨터가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알란 튜링



1912년 6월 23일 영국 런던 패딩턴 출생

1926-31년 쉐르본(Sherborne School)

1930년 친구 크리스토퍼 모르콤(Christopher Morcom) 불의의 사망

1931-34년 캠브리지 대학 킹스칼리지 수학

1935년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할 문제>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

1936-38년 프린스톤대학 수학 박사

1938-39년 미국에서 귀국 에니그마 암호기 해독작업에 참여

1943년 12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콜로서스 제작

1945년 영국 런던의 국립물리학 연구소 재직

1948년 맨체스터 대학에서 연구 활동

1950년 컴퓨터와 지능(Philosophical paper on machine intelligence: the Turing Test)

1952년 음란행위 일반에 대한 위반으로 체포

1953-54년 법원으로부터 여성호르몬 치료 명령

1954년 6월 7일 독극물이 든 사과를 먹고 자살



그러나 튜링은 곧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의 엄청난 연구 성과와 그동안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기소되고 말았다. 이 무렵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어닥쳤고, 매카시즘은 '빨갱이 사냥'만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에 대해서도 미친 칼날을 들이댔다. 1950년 미국 의회는 군인의 구강/항문 성교를‘정부를 위협하는 변태 행위’로 규정하여 금지했다.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최종해결'하기 전에 먼저 게르만 민족의 장애자와 정신박약자, 동성애자 등을 최종해결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의 매카시즘 역시 공산주의와 동성애를 도덕적 가치가 결여된 신뢰할 수 없는 존재, 사악한 존재로 여겼다. 극우 파시스트들에게 맑시스트와 게이는 똑같은 존재였다. 미국 정부 뿐만 아니라 영국 정부도 동성애자들이 그들의 성적 취향 문제로 공산주의자들의 유혹에 특히 약할 것이라 여겼고, 그런 이유로 공직에 취임할 수 없도록 했다. 그들은 조사를 받았고, 직업을 잃었으며,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인생의 모든 것을 잃었다.



튜링이 1952년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게 적고 있었다. "집에서 하는 것이 실상 보통하던 짓보다 더 나쁘게 되고 말았다네. 얼마 전에 한 남자 친구를 사귀어 내 집을 알려주었지. 그는 자기 친구들에게 내 집을 알려준 모양이야. 경찰에 적발된 그 친구들 중 한 명이 우리를 일러바쳤다네. 러버풀에 올 때 아마 자네는 감옥으로 나를 만나러 와야 할지도 모르겠어." 튜링은 1885년 오스카 와일드에게 적용된 그 법률 '음란행위 일반에 대한 위반'으로 기소된다. 고지식한 튜링은 경찰에 모든 것을 지나치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바람에 보석으로 풀려난 뒤에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알란 튜링의 자살, 사회의 살해



법원은 그에게 동성애 혐의로 유죄판결을 내렸고, 보석으로 풀려난 뒤 튜링은 집행유예 1년과 일종의 화학적 거세에 해당하는 여성 호르몬 투여를 통한 실험적 치료에 임하라는 의료 처방을 받았다. 한 의사는 "이 요법이 절단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동의하는 환자에게 손쉽게 제공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런 방법은 비정상적이거나 자제할 수 없는 성적 충동을 가진 남자의 경우에나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모멸감 속에 치료에 임한 튜링에게 나타난 여성 호르몬 투여에 의한 부작용은 발기불능, 유방의 발달, 중추 신경 계통의 손상 등이었다. 튜링의 가슴이 여성처럼 부풀어 올랐던 것이다. 1954년 3월 튜링은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로빈 그랜디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온 메시지'라고 적인 암호 엽서 몇 장을 보냈다.



그는 "배척의 원리는 자유롭게 사귀도록 내 버려둔다면 타락할지도 모를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라고 썼다. 그리고 1954년 6월 7일 알란 튜링은 칼륨시안(청산가리)을 주입한 사과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치 동화 속의 '백설공주'와 같이 그는 독사과를 먹고 죽은 것이다. 자살이었다.그가 남긴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회는 나를 여자로 변하도록 강요했으므로, 나는 순수한 여자가 할 만한 방식으로 죽음을 택한다."



알란 튜링. 그는 뛰어난 수학자였고, 자신의 천재적 두뇌를 이용해 전쟁 기간 동안 영국을 구원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으며, 인공지능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성정체성으로 인해 그가 원했던 모든 일로부터 버림받아야 했다. 그는 독일의 전체주의로부터 영국과 민주주의, 자유의 지속이라는, 자신의 피땀어린 연구를 통해 지속시키고자 했던 사회로부터 버림받았고, 결국 비참함 속에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이나 일본이 전쟁에 패한 까닭을 단지 생산력의 격차, 첨단 기술의 격차에서 찾으려한다면 그것은 일면만을 보는 것이다. 독일과 일본은 결국 체제 경쟁에서 패한 것이다. 전체주의 대 민주주의, 자유와 독재의 대결은 결국 많은 우수한 두뇌의 유출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분출되는 창의력, 사회적 에너지를 제약하게 된다. 영국이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독일에 대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쇠락하게 된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유 중 하나를 알란 튜링의 죽음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영국은 결국 세계를 주도해갈 만한 다양성, 포용력, 유연함을 상실한 노쇠한 제국이었다는 것이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 광범위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는 '일탈'의 허용범위가 넓고, 그만큼 폭력적인 범죄의 비율이 낮다. 그러나 획일성이 강요되는 사회, 개인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는 사회는 그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정상'의 범위가 협소하고, 자신들과 조금만 다르면 폭력적으로 이를 교정하려 한다. 사회적 소수자들을 비정상으로 여기고, 이들을 소외시키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으며 이들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의식은 결국 폭력적인 해법을 불러들이게 된다. 일탈에 대해, 마이너리티에 대해 관대한 사회는 전체주의, 편견에 가득찬 협소한 정상(?)의 사회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사회적 에너지를 생산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대로 '인간은 자신이 지닌 피부 색깔이나 선천적인 특성으로 인해 판단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지닌 인격으로 존중받아야 하며 누구나 자신이 갖는 속성에 관계없이 존중'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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