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새로 강림한 황제 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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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새로 강림한 황제 시진핑


2017. 8. 3.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의 제7대 국가주석이자 제5대 중국 공산당 총서기, 제6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주석으로서, 마오쩌둥 이래 전례없던 1인 숭배 종신독재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는 독재자. 2012년 11월부터 중국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집권초기에는 반부패 전쟁 등으로 대중적인 이미지가 매우 좋아 중국 내에서는 시다다(习大大; 시씨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2017년 시점에선 저 명칭은 시진핑을 찬양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비슷한게 되었고, 중국의 젊은이들이 지금 중국의 꼴은 북한이나 다름이 없다며 '서조선'이라는 신조어를 쓸 정도로 시진핑 1인 독재 체제가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각에선 중국의 푸틴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물론 두 나라의 전반적인 인권, 검열 등의 수준을 보면 푸틴에게 미안해질 지경이다.


태자당의 주축으로, 보시라이와는 같은 태자당이지만 그 같은 강경파가 아닌 온건파 지도자에 속한다. 혹자는 푸젠성위부서기 출신으로 중국 공산당 자격으로 중앙 후보 위원 150명 중에서 151등의 꼴찌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당서기가 된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고 찬양하는데, 그건 그냥 당시 당 간부들이 특채해서 중앙위 후보 위원이 됐기 때문에 서열상 꼴찌였을 뿐이다. 원래 관례상 150명만 뽑는 중앙위 후보 위원 자리에 당 고위 간부들이 시진핑을 억지로 밀어넣어서 151위였던 것이다. 애초에 태자당 출신에 당 고위 간부들의 배후 지원까지 받는 중앙 후보 위원이면 승승장구하는 세습 엘리트의 전형이지 핸디캡 논할 계제가 아니다.

생애

산시 성(陝西省)에서, 혁명 원로로 부총리였던 시중쉰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렸을 때는 부러운 것 없이 자랐으나 1962년 류즈단 사건에서 시중쉰이 펑더화이를 지지하다 반당(反黨)집단으로 몰려 오지로 처분되었고 산시 성 시골로 하방(추방)되어 불행한 시절을 보냈다. 이 때 토굴에서 7년간 힘겹게 살았다고 한다. 소시적부터 리더십이 있었는지 하방 당한 곳에서 노동자들을 지도하여 최고의 생산량을 올렸다고 한다...라는건 중국 공산당 특유의 프로파간다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일 수 있으니 함부로 믿으면 안된다. 물론 공산체제에서 반당분자로 찍혔으니 당연히 그땐 고통스럽게 살았겠지만 이런 반당분자가 당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노동자들을 지도해 최고의 성과를 올렸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소리인지 알 수 있다.

시진핑은 1970년대에 명문 칭화대학에서 공정화학과를 졸업하고 공산당에 여러 번 입당 퇴짜를 맞다가 겨우 입당, 정치 생활을 시작했으며 마오쩌둥이 죽은 후 시중쉰이 덩샤오핑에 의해 복권되자 베이징으로 돌아오며 본격적인 정치이력을 쌓기 시작한다.

정치 생활의 대부분을 푸젠 성, 저장 성 등 동남부 지방 정부에서 지냈는데, 2007년 상하이 시 당위서기를 지내면서 장쩌민과 주룽지의 파벌인 상하이방과도 관계를 맺게 되어 태자당과 상하이방 양쪽의 후원을 받는 거물로 성장했다. 2008년에는 국가 부주석 직에 올랐다. 하지만 이때까지 보시라이와 리커창에 비해 외국에 덜 알려졌으며 한국에서도 그가 중국의 주석에 오를 것으로 미리부터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부주석을 지냈던 쩡칭훙 외에도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지지와 후원 모두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주석으로 있다가 2010년에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 직에 오르면서 후진타오를 이을 차기 지도자로 공인되었다.

영국 주재 대사의 딸이었던 첫 아내와는 성격차이로 이혼했고, 재혼한 현 부인 펑리위안은 중국 인민해방군 예술단 소속의 가수로 중국의 국민가수로 불리는 사람인데, 펑리위안의 인기도 시진핑의 권력 상승에 도움이 되었다.


집권

전임인 후진타오 주석이 전전임인 장쩌민이 자기 권력을 내놓지 않겠다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바람에 5년동안 반쪽짜리 권력만을 유지하였으나, 시진핑은 2013년 중국 공산당 제 18회 당 대회 때 후진타오로부터 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동시에 이양받았고 2013년 3월 후진타오의 국가주석 임기가 끝나면서 국가주석 직도 승계하였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2013년 3월 14일부터 별 일이 없는 한 2018년 3월 14일의 연임을 거쳐서 2023년 3월 14일까지 중국과 중국 공산당전체를 이끌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사실 시진핑이 국가주석에 오른 이면엔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권력 암투가 있었다. 장쩌민은 후임인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승계하지 않고 그를 일종의 꼭두각시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이 둘은 물밑에서 박터지게 싸웠는데 이런 암투 끝에 시진핑이 권력을 잡은 것. 장쩌민 입장에서는 태자당이야 어차피 자기 측근 쩡칭훙이 있으니까, 시진핑 역시 자기 사람이나 마찬가지고 후진타오 입장에서도 공청단 소속이 태자당에도 소속되는 등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인원들이 나름대로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진핑도 장쩌민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없었기에 후진타오와 손을 잡고 장쩌민에 대항했고 이게 현재 반부패를 핑계로 한 상하이방 대규모 숙청의 원인이 된다. 원래 장쩌민이 차기 주석으로 삼으려던 인물은 천량위였고 천량위가 실각한 이후 보시라이가 뜨자 보시라이를 주석으로 삼으려고 했다.

임기 중 행보

폭발적인 성장에 따라 부작용이 확대하는 것을 감안, 개혁으로 국가 동선을 움직이고 있다. 세계적으로 문제시되는 부정부패를 감시, 처단하는데 힘을 쏟고, 역시 세계적으로 문제시되는 빈부격차에 대해서도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성장과 복지에 모두 관심을 가질 것이며 중국 국내에서 2000년대 후반기부터 문제시 되어오던 한 자녀 정책은 시진핑 시대를 기점으로 폐지되었다.

1%의 국영기업이 40%의 비중을 차지하는 경제에 대해서도 메스를 댈 듯하다. 하지만 중국 내 기득권세력과 개혁세력의 복합적인 이익관계를 조정해야하는 입장이고 게다가 사회적 혼란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정치와 법 분야의 개혁은 안정적인 기조 위에서 실행이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경제 면에서도 마찬가지로 민간기업의 몫이 늘어나겠지만 전면적으로 정부와 무관하게 시장에 권한이 집중될 것으로 보기 어렵다.

임기 초반부터 개방개혁을 우선 강조하며 강한 의지를 보였으나 이에 대해 보수세력들로부터 견제도 받았던 것 같다. 그가 공산당 혁명 유적지를 찾기보다 개혁·개방 1번지인 선전을 방문해 덩샤오핑 동상에 헌화한데 의구심을 표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마오쩌둥 기념식에도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현재 자신의 정책을 실행해나가는 상황이며 계획생육정책의 골자인 한 자녀 정책을 부모 중 한 쪽이 한 자녀일 경우 둘째까지 허용하는 방침이 그 중 하나이다. 노동교화소 폐지도 정책으로 실행된다고 하였는데 정식으로 폐지되었는지 아직 확인되진 않았다. 대대적으로 출범한 전면심화개혁영도소조 조장도 직접 맡고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국내외 현안 전반에 걸쳐 추진작업을 해나갈 것이라고 한다.


다만 중국 국가와 공산당 독재체제에 대한 변화를 근본적으로 꾀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이고, 미국과 똑같은 민주 정치제도의 시행에는 부정적이며, 이 점에서는 여태까지의 다른 중국 권력자와 별반 다른 점이 없다.



2016년, 중국 인민해방군의 군 구조를 대규모로 개편한데 이어, 2016년 4월에는 '중앙군사위 연합지휘중심 총지휘'라는 새로운 직함을 달고 군사훈련을 지휘하는 모습이 보도되었다.

서방 외교

시진핑은 국가 부주석일 때 멕시코를 방문하여
"우리는 혁명을 수출한 적이 없고 배고픔을 수출한 적도 없으며 상대를 괴롭히지도 않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한가한 서방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한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중국이 개혁개방 30년을 지나 경제가 계속 발전하면서 중국에 대한 서방의 간섭이 수위를 높여오자 이에 그가 어떻게 대응하려는지 대충 방식을 보여준 셈이다.

제 18회 당대회에서 취임 기자회견 이후 중화문화의 부흥에 대해서 강조했고 채택된 내부 정치보고 문안에서는 "국제적 위치에 맞고 국가 안보와 발전 이익에 부응하는 강한 군대를 건설하는 것이 전략적 임무"라고 명시함으로써 태평양 지역에서 이제는 미국, 일본과 대립각을 세워 국가 안보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을 것임을 피력하였다.

북한 외교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중국의 안보 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핵보유에 반대한다는 입장이 단호하고 국제적인 규범을 성실히 이행할 것임을 천명하였지만 북한의 동향이 줄 영향에 대해서도 관심이 크므로 북한에 대한 전통적인 외교경제적인 후견인 역할이 어느 면에서 한국과 안정적으로 공조가 이루어져 변화하고 조정될 수 있는지 주목을 받고 있다.

시진핑은 예전에 "항미원조전쟁은 조선을 도운 중국의 정의로운 전쟁" 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 외교

대한민국의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고, 박준영 전라남도 지사, 새누리당의 정몽준 전 의원, 새정치민주연합의 손학규 고문, 삼성 이건희 회장, 현대차 정몽구 회장, 포스코 정준양 회장 등 한국의 많은 정·재계 인사들과의 교분도 깊어 지한파로 알려져 있으며, 예전 중국의 지도자들에 비해 한국과의 관계 발전에 더욱 관심이 많다고 한다.

그러한 점이 작용했는지 2014년 7월 3일 대한민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중국과의 수교 이후 처음으로 최고지도자가 전통적인 동맹국인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을 먼저 방문하는 케이스가 되었다. 박근혜 역시 한국의 대통령이 취임 이후 일반적으로 미국을 처음 방문하고, 그 다음에 일본을 방문하는 관례를 깨고 미국 방문 이후 중국을 먼저 방문하였다.

한편 박근혜가 당선된 이후 "일본에 우호적인 후보가 당선되었다"라는 일본언론 보도가 있었고 이명박 정부 후반기에 악화된 한일관계를 개선할 대통령으로 알려졌으나 아시다시피 한중관계의 강화로 박근혜가 졸지에 반일지도자로 제대로 각인되었다. 한국 내의 친서방 성향의 인사들도 지나친 친중 외교를 비판하기도 했다.

2014년 11월, 베이징에서 열린 APEC에서 시진핑은 박근혜, 버락 후세인 오바마, 아베 신조를 만났는데, 아베 총리에게 보여준 표정은 박근혜,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과 악수할 때는 사뭇 달라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충 봐도 시진핑이 아베 신조와 악수할 때는 표정이 확 다르다. 그래서 그런지 아베 신조도 제대로 웃지를 못하고 있다.

2016년 THAAD 한반도 배치에 크게 반발하여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줄곧 우호적이었던 대한민국과의 관계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한 술 더 떠 2017년 4월엔 트럼프에게 한국은 중국의 일부라는 망언을 한 게 밝혀지면서 더욱 까이는중. 예전에 부주석 시절에도 항미원조전쟁은 정의로운 전쟁 같은 개소리를 해서 우리나라 정부에 항의를 받은적이 있었는데 이 발언들을 보면 중화사상에 심취해있는듯...
문재인 정부 이해찬 특사를 만났을때 본인은 상석에 앉고 이해찬 특사는 그 주위에 앉게해서 결례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중화민국 외교

2015년 11월 7일 마잉주 중화민국 총통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에 대만-중국 간의 정상회담이 66년 만에 진행되었다. "중화민국 총통"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한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2016년에는 하나의 중국 정책에 회의적인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이 총통으로 당선되어서 앞으로의 행보가 어떨지 주목되었다.

1인 독재화

"나는 호랑이든, 파리새끼든 다 때려잡을 겁니다."
보시라이 숙청을 시작으로 점차 자신의 정적을 제거해나가며 권력을 강화시켜가고 있다.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마저 부패 및 국가 반역 시도 혐의로 처벌 수순에 오르면서 시진핑의 독주를 막을 세력이 점점 줄고 있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반대 세력이 건재해서 저우융캉은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걸로 최악을 피할 수 있었다.

단순히 정적 제거뿐 아니라, 마오쩌둥 이후로는 전례없는 지도자 선전 등 그가 점차 권력을 강화시키려고 드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다 보니 새로운 행정기관 설립으로 인해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맞먹는 권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올 정도. 오죽하면 전직 대만 총통이 시진핑의 행보에 대하여 '마오쩌둥 시대로 되돌아가려고 한다는 발언을 했다.

시진핑이 추진하는 반부패 드라이브의 진정성은 이곳에 매우 잘 나타나있다. 반부패 대책을 세우는 일반인들을 탄압하고, 그 재판 과정조차 공개하지 않아 투명성조차 의심이 간다는 내용. 사실상 숙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시 주석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나, 몇몇 매체를 통해 시진핑 암살 미수 및 쿠데타 음모가 적발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처음 이 기사를 보도한 매체가 반중 성향이 강하고 신뢰도가 비교적 낮은 보쉰이라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이후 중국 주요 언론에서도 "비조직 정치 활동"에 대해 언급한 걸로 보아 뭔가 심상찮은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홍콩의 주요 월간지 중 하나인 개방에 따르면 시진핑 암살 시도만 현재까지 6차례나 된다고 한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런 행보로 인해 시진핑의 종신 집권을 점치기도 한다. 중국 정치는 공산당 1당 독재로 민주주의와는 많이 달라서, 주석 임기만 채우고 물러나더라도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계속 집권할 수도 있는 식으로 언제라도 1인 독재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권력이 강해질수록 이런 일을 막는 중국 공산당 내부의 압박이 약해지기 때문에 이런 의혹이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진핑은 주석 임기의 반도 채우지 않은 상태고 남은 임기 동안 그를 견제할 세력은 저우융캉 등 거물급들이 전부 반부패운동을 빌미로 전부 제거된 상태다. 기껏해야 남은 거물급은 장쩌민 정도인데 이미 시진핑이 과거부터 후진타오와 손잡고 철저하게 장쩌민의 측근들을 정리해 온 데다 고령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시진핑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다시 시진핑에게 대항할 세력이 성장하려면 최소 십 년도 모자른 상황이다. 일단 실질적으로 힘을 가진 당 내의 세력도 일소된 상황에서 민주주의적인 장치가 전혀 없는 중국의 사회 구조상 지식인들이 아무리 독재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 해도 시진핑의 폭주를 막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시진핑은 지금도 1인 독재자가 되기 위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장기 집권하는 각국의 지도자들은 민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헌법을 고치기 때문에, 의사가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문혁 시대 자아비판과 감시가 부활했다.
전국인민대회에서 시진핑 모습이 그려진 배지 등장.
그리고 그동안 추진해왔던 반부패의 목적이 종신집권 확립을 위한 도구였음이 사실상 드러났다.

위에서 보듯이 시진핑이 종신집권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나 어떤 명분을 내세워서 종신집권을 추진할 것인지가 아직 불확실한데 대외적인 명분으로는 2021년까지 중국의 국민소득을 2010년의 두배로 만드는 샤오캉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시 주석의 임기연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걸 봐선 명분적으로는 샤오캉 사회의 실현을 명분으로 하여 종신집권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본인 역시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中國夢)을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해 오고 있다.

위에서 말한것처럼 명분상으로는 샤오캉 사회의 실현을 내세운다면 나머지 하나는 덩샤오핑 이래로 이어진 당내의 10년 집권이란 불문율을 깨뜨릴 수 있느냐의 문제만 남았는데 이 불문율에 대해선 시진핑이 왕치산 중앙기율검사위 서기의 유임을 통하여 이 불문율을 박살낼것으로 보인다. 왕치산의 유임여부가 시진핑의 종신집권 성공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지렛대인 이유를 들어보면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에게 적용되는 칠상팔하(七上八下)라는 내규가 있는데 이 원칙에 따르면 시진핑과 리커창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모두 19대에서 은퇴해야하며 왕치산은 내년에 69세가 되며 또한 시진핑이 추진하고 있는 반부패 운동(을 가장한 정적제거)의 가장 핵심 인물이기 떄문, 따라서 왕치산이 이 내규를 깨고 유임에 성공하여 선례를 만들어 놓을 경우 2022년에 70세가 되는 시진핑 역시도 왕치산의 유임을 통해서 만들어진 선례를 활용하여 칠상팔하를 무력화하고 종신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그 중에서 시진핑의 퇴진 요구 서한 연루설로 일선 퇴진설이 제기됐던 장춘셴 전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기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당건 영도소조 부조장에 선임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6년 제18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18기 6중전회)가 개최하였는데, 중국의 정치는 집단지도체제로 가고 있지만, "7인의 표결" 대신 시진핑의 지시에 따라 정책에 거쳐야한다는 것이다. 18기 6중전회 결과 공보문에서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란 구절이 등장함으로써 사실상 1인지도 체제에 들어갔다.


중국 공산당의 집단지도체제 강화와 문화대혁명의 안 좋은 기억으로 시진핑이 종신집권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반박도 있으나 시진핑은 장쩌민의 정치적 생명을 끝장낸 상황이며 기존의 저항 세력이 이미 박살난 만큼 시진핑이 집단 지도체제를 붕괴시킨다 해도 현재로서는 막을 수 있는 세력이 없기 때문에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시진핑이 자신의 임기내에 정치적 도전에 직면할 일은 없다고 봐도 된다.

그리고 이 6중전회 이후부터 노골적으로 종신집권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2032년까지 20년간 장기집권할 계획을 하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그리고 서방의 가치관은 체제의 위협이 된다고 금지시켜 놓았다. 그래도 전임인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자신들의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 선에서 서방의 문화와 가치관은 어느 정도 허용해 주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장쩌민과 후진타오와 다르게 옥시덴탈리즘이 매우 강해서 서방의 문화와 가치관을 심각하게 검열하였고 이에 중국 젊은이들이나 당내 개혁파들의 불만을 많이 사게 되었다.
그리고 민주화 세력 뿐만 아니라 당내 개혁파를 탄압하였는데 그 예로 사법부의 수장인 저우창이 삼권분립과 사법부 독립은 서구의 사상이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였다 물론 사회주의 중국에서 다른 국가와 같은 철저한 삼권분립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사법부가 당과 국가의 외압을 받으면 중요한 순간에 (그리고 혹시 당이나 국가의 공권력에 희생되는 사람들이 생긴다거나 하면)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어렵게 된다. 시진핑의 옥시덴탈리즘은 서구화된 대만과 홍콩의 반감을 사게 될 정도.

종신집권을 향한 권력강화

집권 이래 약 4년간에 걸친 장쩌민 일파와의 목숨을 건 권력투쟁끝에 결국 6중전회에서 장쩌민을 사실상 무덤으로 보내버리고 핵심칭호를 손에 넣은 이후부터는 노골적으로 종신집권을 향하여 발걸음을 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일환이 바로 습가군(習家軍, 시진핑의 측근들로 구성된 친위 파벌집단)의 약진으로, 이 중에서도 시진핑의 핵심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왕치산의 인맥들이 중앙, 지방 할 것 없이 약진하고 있다고..

겉으로는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집단지도체제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본인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하고 있는데 이는 19대에서 집단지도체제의 종언을 선포하고 시진핑을 중심으로 한 1인독재체제로의 본격적인 전환을 선포하기 위한 밑작업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칠상팔하 역시도 칠상팔하는 민간에서 떠도는 설에 불과할 뿐 당이 정한 규정은 아니다라고 언급하였다. 이 발언을 한 덩마오성은 6중전회 회의문건 초안작성조의 조원이며, 이 초안작성조의 조장은 시진핑이다. 참고로 이 언급은 왕치산에 대해 내년 당 대회에서 연령제한에 대한 예외가 적용되는지의 여부를 묻는 질문에서 나온 답변인만큼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중국 공산당원들에게 서로 '동지'(同志)로 호칭하라고 지시하였다.

집권 이래로 강력하게 추진해오던 상하이방 대숙청도 핵심으로 등극한 이후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6중전회에서 핵심에 등극한 기세를 몰아 아직도 남아있는 상하이방을 전부 뿌리채 뽑아버림으로서 화근의 불씨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중국공산당도 이에 맞추어 총서기제 대신 주석제를 도입해 집단지도체제의 중심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무력화시킬 것이라고 보고 있다.

2017년 3월 5일에 열린 전인대에서 '시 핵심'이라는 단어만 6차례나 언급되었다는 기사에서도 나와있다시피 시진핑의 권력이 어느 정도에까지 위치해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리커창이 관할하던 경제 분야에서조차도 본인의 영향력을 강화해가면서 리커창과 공청단의 입지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좁아지고 있다.

2017년 들어서도 시진핑의 상하이방 숙청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시진핑의 최대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장쩌민의 군부 내의 영향력을 약화시켜서 제 19대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기 이전에 상하이방을 패망시켜 장쩌민이 19대 당대회에서 아무런 힘을 못쓰게 만들 목적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시진핑에 의해서 홍콩에서 중국으로 납치된 장쩌민 일파의 자금책인 샤오젠화 밍톈그룹 회장으로부터 장쩌민 일파의 비리에 대한 실토를 받아내는 등 상하이방의 완전궤멸을 위한 명분을 만드는 중이다.

한편 2017년 8월, 1982년 폐지된 공산당 '주석' 자리의 부활을 지도부가 참가하는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에서 제안할 것이라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당 관계자를 인용해 30일 보도했다.보도에 따르면 베이다이허 회의에선 리잔수(栗戰書) 중앙판공청 주임이 주석직 부활과 관련,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할 방침이다. 참고로 이거 '마오쩌둥이 종신직으로 해먹었던 자리'고 옛 헌법에선 당 주석이 '무장 역량을 통솔한다'고 규정해 당과 정부, 군에 강력한 권한을 갖도록 했다."시진핑, 마오쩌둥 맡았던 '공산당 주석' 부활 제안할 듯" 이것만 차지하면 옛날 마오처럼 국가 주석자리에서 물러나도 무한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누가 앉게될지는 너무나도 뻔하지 않은가?

우상화

시진핑이 권력을 공고히 하면서 시진핑을 찬양하고 우상화하는 낯뜨거운 노래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2014년에는 '<시다다(習大大)는 펑마마(彭麻麻)를 사랑해>'라는 노래가 나왔고(음원, DJ 리믹스 버전), <시집 가려면 시다다 같은 남자를 만나라(要嫁就嫁習大大這樣的人)>라는 노래도 나와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시다다는 펑마마를 사랑해>는 5400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시집가려면 시다다 같은 남자를 만나라>는 댄스 뮤비까지 나오면서 인기 몰이를 하고 있고 검열 당국에서도 해당 노래의 인기를 크게 반기고 있다고 한다.

인민일보는 외국인 유학생들을 동원해 "시다다는 정말 귀여워요." 같은 인터뷰 영상까지 찍었다.

일련의 시진핑 우상화 열풍이 중국 인터넷을 강타하자 인터넷에서 '시다다' 애칭이 자취를 감추고 자신을 시다다라고 부르지 말라고 지시했다. 친근한 아저씨 같은 이미지보다는 위엄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키고 싶어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덕분에 인기 동영상(?)이었던 <시집가려면 시다다 같은 남자를 만나라>도 중국 인터넷에서 삭제됐다.


하지만 저 지시 이후에도 중국의 걸그룹 56둬화(56朶花)가 시진핑 찬양가 '당신을 어찌 부를지 모르겠다', '만두가게' 등을 부르는 등 개인 우상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중국의 일부 불교 승려들이 시진핑은 보살의 화신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일당독재가 지속되는 중국이라지만 문혁 이후 중국 공산당은 최고지도자라도 개인을 우상화하고 숭배하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시진핑은 이 관례를 깨고 있다.

마오쩌둥에게만 불렸던 '영수(領袖)'를 공산당 기관지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반부패 어록도 띄워주고 있다.

결국 마침내는 자신의 사상을 당헌에 집어넣는 초유의 일 까지 벌이고 있다. 중국 공산당 당헌에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지도자의 사상이 포함된건 마오쩌둥 밖에 없으며 덩샤오핑조차 '이론' 수준에 만족해야 했고 장쩌민, 후진타오의 경우 아예 이름으로도 넣지 못하는데 이제 시진핑은 자신의 이름을 마오와 동등한 수준으로 넣겠다고 하는 것이다.

애런 프리드버그 프린스턴 대학 교수의 의견에 따르면, 독재 정부는 스스로가 정통성이 결여된 사실을 우려한 나머지 국민의 불만을 피하기 위해 실제 또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가뜩이나 후진타오 시절 잘 이끌어가던 중국 경제는 이미 위험신호를 보이고 있다. 양적완화로 거품 잔치하면서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위안화 가치 하락 우려로 심화되는 자본 유출, 폭발적인 지방은행들의 그림자 금융에 각 지방의 부채 문제가 심각하다. 이걸 감추기 위해 시진핑은 강경 외교정책을 써 외부의 적을 만들어서 비뚤어진 중화사상을 조장했다. 이렇게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대외적으로 힘을 과시하면서 사회불만을 돌리는 사이 자신의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중국 웹사이트에서는 현재의 중국은 시진핑 1인독재 체제로 가는 상황을 막을 수 없다는 자조적 의미로 서조선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이는 남조선(남한)이 아닌 북조선에 빗댄 호칭으로, '시씨의 북한', '북한이나 중국이나 다를게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말이다.

비리

2014년부터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면서 자신의 친인척들에게 재산을 처분하고 대외투자를 줄이라고 압박하고 있다고 한다. 누나 등 가족들에 재산 처분 압박 시진핑이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2007년 이후 친인척들의 재산이 크게 불어났다고 하니.

일단 부정부패 척결은 모든 지도자가 하는 말이고, 위에서 솔선수범을 하지 않는 이상 아래에서 절대로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강경 행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중국은 나라가 큰 만큼 원체 정치인들이 해쳐먹는 규모가 남달라서 부패를 강하게 때려잡아야 할 명분이 서고도 남는다. 정치권의 부정부패를 가만 놔두면 중국의 암적 존재가 되어 경제 성장을 방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


다만, 이를 단순한 쇼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반부패 정책이 실제로는 시진핑의 정적 숙청 수단으로 쓰일 수도 있기 때문. 중국의 중앙 정치는 일당독재이기는 해도, 실제로는 공산당이라는 틀 내에서 수많은 계파가 싸우는 형국이라 모든 당원이 친주석파는 아니다. 또한 부패 척결이나 사회 정화 목적으로 내놓은 정책을 반대파 탄압에 악용하는 것은 상당히 자주 있는 일이다. 이로 인해 시진핑의 "반부패 드라이브"의 진정성이 의심받기도 한다. 반부패 운동 자체가 그의 권력 강화를 위한 기반이 아니겠냐는 의혹이다. 반부패를 위해 권력을 강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반부패를 권력 강화에 이용하는 것인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듯. 이러한 반부패 운동에는 친누나도 예외가 없다.

시진핑을 포함한 중국 지도부의 친인척이 4000조원을 탈세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저 어마어마한 액수의 탈세를 시진핑이 몰랐을 가능성은 매우 낮으므로, 시진핑은 이에 대해 아무리 낮게 잡아도 공범이나 협력, 혹은 최소 방관의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기사에 보듯 저 액수는 중국 지도부가 2000년 이후 부터 탈세해온 돈으로 시진핑이 국가 주석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러니까 시진핑이 공범이라고 무조건 몰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

시진핑의 매형인 덩자구이가 조세 피난처에 유령회사를 세웠다는 의혹이 있다.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시진핑은 부인중.
공산당 기관지에서는 시진핑에 대한 이런 의혹을 서방의 음모라고 주장하면서 빈축을 샀다.

반부패기관 국가감찰위원회을 2018년 3월에 창설한다.

외교, 민족문제의 악화

시진핑 집권 이후의 중국은 점점 대외적으로 강경하고 양보가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과거 덩샤오핑이 서방 세력과의 강한 충돌을 경계한 이래 중국은 그 동안 이웃국가들이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을 자극하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려 노력했는데 시진핑의 등장 이후 중국이 주변국들은 물론 서방과의 충돌도 점점 높아지는 상황이다. 남중국해 해역 일대의 동남아 국가들과의 영해 분쟁은 물론 한국과도 북한 문제와 영해 문제로 인해 점점 국민갈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식으로 중국이 대책없이 주변국들을 적으로 돌리는 팽창주의적 외교를 하는 데는 시진핑 자신의 독재체제 성립 시도와도 연관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시진핑의 1인독재 시도는 중국 내외적으로 반발이 있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중국 경제도 과거만큼 잘 나가지 못하게 되면서 쌓인 시진핑 및 공산당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민족주의를 통해 외부의 이웃 국가들에게 향하게 함으로서 정권을 유지하려 한다는 것. 문제는 이런 방식의 통치는 국민들의 국수주의 성향 유지를 위해 계속 고압적이고 비타협적인 외교방식을 유지하는 방법밖에 없기에 대화를 통한 외교문제 해결이 어려워지고 주변국과의 적대관계가 높아질 위험이 크다는 것. 실제로 이로 인해 주변 아시아 국가들이 그를 크게 경계하고 있다.


팽창주의

세계에 중국 위협론을 본격적으로 대두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시진핑은 전 지도부의 내정불간섭 원칙을 내세우며 세력을 확장해나가던 중국의 외교원칙을 깨부수고, 일대일로 정책 추진 등 적극적이고 팽창적인 대외확장 외교를 실시함으로써, 미국이 대중국 포위망 구성에 박차를 가하게 만들고, 중국을 외교적으로 고립되게 하였다. 일부 친중 인사들은 시진핑이 현 중국을 후진타오 시기의 중국보다 더 퇴보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다. 몇몇 네티즌들은 중국 위협론 및 그의 철혈 권력을 이유로 '신 중화제국의 시황제'라 하기도 한다.

남중국해에서 필리핀이 석유 시추하는 것에 대해서 로드리고 두테르테에게 전쟁 가능성까지 경고했다. 

소수 민족 탄압

시진핑 체제 수립 이후 소수민족 분리운동에 대한 강경정책이 시행되었는데, 독립을 요구하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사람들에게 단호한 대응을 취하고 있다. 분리운동 테러분자들에 대해 강경대응한다는 점에서 기존 중국의 노선와 별반 다르지 않는 안보정책을 취하면서 경제적으로는 개혁개방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별행정구 간섭

게다가 중국 내 특별지역들은 물론 이제는 특별행정구나 대만과의 관계에서도 점점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데 시진핑의 강압적인 독재 스타일의 정치는 일단 민주주의 체제를 따르고 있는 홍콩과 대만으로서는 절대 받아들이기 힘든 체제였고 중국이 홍콩과의 약속을 어기고 내정에 간섭할 듯한 모양새를 취하면서 홍콩에서의 반중 감정이 높아지고 있으며 대만도 홍콩이 겪는 꼴을 보고 양안이 다시 하나가 되느니 그냥 분리독립하는게 낫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러시아도 차이나 머니 때문에 친분을 유지하려고는 하지만 중앙아시아 패권 문제 등으로 인해 충돌이 있다.

홍콩 특별행정구에서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중앙정부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문제는 행정장관 후보는 무조건 공산당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홍콩 우산 시위다.

홍콩은 중영공동선언에 따라 자치와 민주주의가 보장되지만, 중국 공산당은 홍콩의 자치와 민주주의가 본토로 확산되어 일당독재에 위협을 줄 것으로 인식하고 있어서인지, 이런저런 장치를 통해 완전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않고 있다. 공산당 정부는 홍콩 반환 이후 홍콩의 자치 및 민주주의에 이런저런 간접적인 방식으로 간섭을 해왔고, 따라서 이것이 딱히 시진핑 정권이 만들어낸 문제점은 아니다. 시진핑 정권의 문제점이라면 홍콩 및 마카오 양 특구에 대한 정치 및 사회적 간섭을 더 심화하고, 그에 따른 특구 주민들의 반발을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일국양제 훼손 시도라고 비판하지만 중국에서는 내정간섭이라고 반발중. 이 때문에 홍콩 쪽에서는 일국양제 안 지킬거면 차라리 독립해 나가겠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일부 존재한다.
중국 중앙정부와 홍콩의 갈등의 원인에 대해 말하자면 중국 정부는 민주파나 독립세력의 책임이 크다고 이야기하는데 실제로는 시진핑과 중국정부의 책임이 더 크다. 애초에 홍콩 주민들의 어그로를 끌거나 내정 간섭을 하지 않았다면 이 사태가 더 심각하게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예로 물건을 팔려면 고객의 의중을 파악해야 거래가 성립되지 중국 정부처럼 물건을 사라고 강요하면 고객이 더 화가 나 불매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양안관계

"우리의 대만정책은 명확하고 일관적이다. 대만 정국의 변화에 따라 변하지는 않는다. 어떤 형태의 이른바 대만 독립 분열 행동도 결단코 굴복시키겠다."

차이잉원이 대만 총통에 당선된 이후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 차이잉원은 대만 독립노선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미 국호도 "중화민국 대만"이라고 바꾸기로 했고, 대만 주미대표부의 수장도 기존의 '대표'에서 '대사'로 격상시키기로 했다. 이는 현상유지를 목표로 하던 92공식을 변화시키려는 것으로, 중국 입장에서는 대만 독립 추구로 비춰지고 있다.

2016년 3월 6일, 시진핑 주석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차이잉원 중화민국 총통 당선인을 겨냥한 사실상 선전포고에 가까운 강경발언을 쏟아냈다. 차이잉원은 아직까지 표면적으로 대만 독립을 주장하지 않는 등 온건한 스탠스를 보이고 있으나 정식으로 총통에 취임하고 나면 양안관계가 격랑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중국 국민당의 홍슈주와 회담에서 대만이 독립하면 중국공산당이 무너진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것을 시진핑과 중국정부가 하나의 중국을 위반하고 독립분자의 책임으로 여기는데 애초에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 중국 정부이다. 홍콩의 상황을 보왔듯이 자기에 입맛에 맟는 어용 단체를 동원하고 민주화나 보통선거요구에 대한 홍콩 민중의 의중을 공권력과 내정간섭으로 무조건 억눌르려 하였기 때문에 이 상황을 지켜본 대만인들은 중국과 너무 친하게 지내면 홍콩 꼴된다 하여 민진당을 지지하였고 외교적 횡포와 일국양제 강요와 경제적 제재 갑질 등으로 대만인들의 반중 감정을 더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화사상과 한국 역사 논란

"시진핑이 한반도는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함."
-도널드 트럼프-

비록 수천 년간 다방면에서 엄청난 영향을 받아 왔지만 한국 전체가 직접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던 적은 없다. 황청직공도에서도 조선은 사실상 외국으로 분류되었다. 류큐, 일본 등의 나라들과 같이 이 책에서 조선은 1권에서 다루어졌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중화제국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 과거 중국은 민족국가적 개념이 비교적 희박한 중화제국이었고 조선을 비롯한 한민족의 조상들은 이 보편제국적 체제가 자신들을 위협하지 않는 이상 이것에 순응하는걸 위험하다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 중국의 보편적인 중화질서가 정도를 넘어 그 독립성을 침해하려 들면 설령 얼마전까지 그 체제에 순응했더라도 필사적으로 그에 저항하면서 국체를 보전해 수천년간 중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유지해 온 것 역시 한민족의 역사이다. 과거만 해도 이럴진데 현재의 중화사상은 그런 보편주의적 세계질서조차 아니고 노골적으로 타국을 적대하며 깔보는 극단적 민족주의 사상에 불과하고 현재의 중국은 대국의 정신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소인배스러운 국가인 주제에 자기들이 대국인거 마냥 주변국에 횡포를 부리고 있다. 그 폐해를 실시간으로 옆에서 보고 위협당하고 있는 한국의 현 상황에서 이런말이 나오니 한국인들이 적대감을 품는게 당연한 일이다. 


일단 트럼프의 말은 카더라일뿐이라 정말 저렇게 말을 했는가에 대한 건 공식적으로는 모르는 일이다. 이런 발언을 언론에 흘린 트럼프의 행보에 대해서도 치밀한 계산인가 생각 없는 행보인가 의견이 분분한 상태.

어쨌든 발언의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중국의 도련선전략으로도 알 수 있듯이 어느 정도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저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저 말이 사실이라면 현재 중국이 한반도를 보는 시선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보는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단 한국 외교부는 즉각 반발했다.

중국 정부측은 이에 대해서 "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건 한국민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라 말하며 답변을 회피했다. 환구시보의 사설에서는 워싱턴에 물어보라며, 베이징에 물으면 외교적 결례라고 하기까지 했다. 사실이 아니라면 시진핑이 대답해주면 끝날 문제를 이렇게 끄는걸 보면 실제 위험한 이야기를 하기는 한 모양.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왜 이렇게 민감하고 자신감이 없나, 중국은 현대 한국의 한국 역사상 가장 성취를 이룬걸 존중한다"고도 하였다. 이쯤되면 한국에 혐중감정이 퍼지라고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닐까 싶을정도로 매우 오만한 태도다.

반면 미국의 경우엔 마찬가지로 논란이 촉발되자 백악관은 트럼프가 언급한 시진핑의 발언을 수습하기 위해 한국이 수천년간 독립적이었단 사실을 잘 안다.라는 훨씬 명확하고도 한국인들의 반발을 쉽게 무마할 수 있는 대답을 했다. 대통령과는 대조적으로 백악관의 노련한 대처에는 호평이 많다. 적어도 미국과 중국 중에서 어느 나라가 그나마 겉으로라도 한국을 존중해주는 제스쳐를 표하는지는 이것으로도 분명해진다.

여담으로 예전에 방한 했을때는 한국에 온게 친척집에 온거 같다고 했었다 SBS 중국을 큰집, 한국은 작은집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기타

축구광으로 유명하다.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을 때는 메시의 유니폼까지 선물받고 좋아할 정도. 2011년 당시 민주당 대표이던 손학규와 만남 당시 "중국이 월드컵에 나가고, 월드컵을 유치하고,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이 내 세 가지 소원" 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영향력 때문인지 중국의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서 체육 과목 구기 테스트 종목에 축구가 공식적으로 포함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AC 밀란을 인수한다는 기사가 떴다. 그러나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잇따른 삽질로 현재는 중국 국가대표팀에 대한 기대감을 어느 정도 접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대신 중국 슈퍼 리그를 무지막지하게 키우자는 걸로 방향전환을 했다고 한다. 축구굴기라 해서 중국 축구 산업을 급속도로 성장시키고 있다. 전국에 축구 전문 학교 2만개 설립을 하고 있는데, 2만 개면 우리나라 전국에 있는 학교 수보다 많다.

바둑을 즐긴다고 하며, 이창호의 팬이기도 하다. 2014년 방한 당시 청와대 만찬에서 이창호의 얼굴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악수하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국가간 선물 교환 시에도 한국에선 바둑알을 선물했다.

2014년 7월 서울대 강연에서 서울대에 책 기증 의사를 밝혔고, 약 1 년 후 서울대 도서관에 책, 정기간행물, 영상물 약 1만 점을 기증함으로 약속을 지켰다.


키 177cm로 아시아 정치인치고는 꽤 장신에 속한다. 위의 단락 사진을 보면 박근혜보다 넘사벽으로 크고, 아베 신조보다 약간 크고, 버락 오바마와는 그렇게 키 차이가 나지도 않는다.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나폴레옹이 중국한테 했던 중국은 잠자는 사자다. 잠에서 깨면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라는 말을 인용해서 중국이라는 사자는 이미 깨어났다. 이 사자는 평화적이고 친절한 문명 사자다.라는 말을 했었다.

중국산 스마트폰 골수 마니아라고 하며 현재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ZTE Axon 시리즈 스마트폰 중 하나인ZTE Axon 이라고 한다.

도올 김용옥은 차이나는 도올 방송에서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과 더불어 매우 칭찬했다. 서방이나 국내 언론에서 시진핑의 부패 척결이 권력강화의 수단이기만 하다는 일각의 견해를 부정하고, 시중쉰이 어린 나이에 큰 공산주의 조직을 세웠던 것이나 천안문 사태 때 후야오방을 지지했던 것을 언급하기도 했다. 덕분에 2017년 현재 도올을 깔때 가장 자주 쓰는 레파토리가 저런 시진핑 찬양과 현 중국공산당 찬양에 대한 것이다.

대기원시보에서는 시진핑을 중국공산당의 독재를 종식시키고 중국의 민주화를 이룩해낼 중화민족의 메시아로 보고 있는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