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효하는 호랑이 박완규
본문 바로가기

포효하는 호랑이 박완규


2017. 7. 9.

대한민국의 가수 박완규. 데뷔 이전에는 송탄 미군 부대에서 디제이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러다 미군 부대에서 공연하던 중 조명 감독으로 활약하던 박완규의 누나가 김태원에게 다리를 놓아주었다고 한다. 김태원의 "니가 송탄의 박완규냐?"로 시작된 인연이라고.. 그리고 부활 오디션을 볼때 부른 곡이 바로 레드 제플린의 블랙 독. 노래 한 방에 부활 멤버 전원을 뻑 가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김태원이 "이제 한글 노래를 불러봐라" 라고 했는데 부활의 히트곡 '사랑할수록' 을 부르자 "넌 한글 발음이 안 좋다" 며 디스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완규를 탈락시키기엔 너무도 아쉬웠던 김태원은 박완규의 맞춤곡을 써내려가기로 한다.

위의 오디션 관련 일화로, 김태원이 오디션이 다 끝나고 일주일 후에 통보해 주겠다고 한 뒤 박완규를 보냈는데 당시 박완규는 부활 오디션에서 떨어질 경우 다시 백화점에서 청바지를 팔아야 하는 열악한 신세였고, 사정만큼이나 성질도 급했던 박완규는 김태원에게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형님, 저 지금 당장 결정해 주십시오. 떨어지면 다시 청바지 팔러 가야 됩니다 라고 김태원을 재촉했고 김태원이 처음에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냐?고 디스하다가 한참 고민하다 좋아. 하자. 내가 하라는 대로 따라오면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라고 해서 당일날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동네에서는 "00동의 아들 박완규"라는 식으로 난리가 났다고 한다.



이후 부활의 4집과 5집 사이 나온 베스트 앨범 "이솝의 붓" 에서 박완규가 부른 소나기 가 공개되며 김태원은 "그동안 가지 않은 길을 가려 한다" 며 부활의 새로운 방향을 천명한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 5집의 보컬로 데뷔하였다. 김태원이 5집에 붙인 '불의 발견' 이라는 앨범명 그대로 당대의 충격을 안겨준 화끈한 보컬이었으며, 살인적인 음역대의 곡들을 웃으면서 쉽게 소화함과 동시에 파워와 성량까지 자유자재로 보강하는 것이 가능한 천재적인 록 보컬리스트로 찬사를 받았다. 앨범에서 가장 유명한 곡 "Lonely Night"은 서구의 헤비메틀 보컬 수준에 비춰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숨겨진 명곡으로 "마술사" 가 있다. 비록 시작은 메탈 밴드였을지언정 1집에서 4집에 이르기까지 서정적이면서도 장르적으로는 프로그레시브 록적인 성향이 매우 강한 부활 앨범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앨범으로 박완규의 탁월한 표현력과 가창력, 김태원의 보컬 최적화 작곡 능력이 만들어낸 명반이다.

부활 앨범 녹음 당시 김태원이 얼마나 스파르타식으로 했는지 비틀즈코드에 출연하여 "Lonely Night" 두 소절을 녹음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짓기도 했다. 제목 그대로 외로운 밤의 느낌이 나야 하는데 그 느낌이 안 난다고 퇴짜를 놨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박완규는 불타는 신혼이었는데 외로운 밤의 느낌이 날 리가 있나. 두 소절 녹음하는데 2주일 걸렸다고... 정확하게, "이런 시간엔 더 그리워" 라는 소절을 부르는데, 이런 시간엔~ 다시.이런~ 다시. 다시. 다시...식으로 녹음이 지체된것. 사실 Lonely Night의 가사만 놓고보면 박완규가 아니라 바로 직전 보컬이던 김재기와 김재희에게 더 잘어울리는 가사다. . 아마도 3 ~4집에 연주곡들 중에 쓰려고 남겨둔 가사를 박완규에 맞추어 편곡을 한 것으로 보인다.

"Lonely Night" 의 성공으로 계속 부활에서 활동할 듯 싶었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부활을 탈퇴한다. 당시 부활의 행사 개런티가 120만원이었는데 기획사에서 떼어가고 남은 돈을 넷이서 나누면 그 돈으로는 연년생 젖먹이들 분유값을 대는 것도 힘들었다고 한다. 이때 박완규는 김태원에게 "형님, 돈인지 음악인지 확실히 해주십시오" 라고 묻자 김태원은 "세상 일이 네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돈이면 돈, 음악이면 음악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금전적인 문제와 음악적인 견해가 동시에 충돌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완규 이전에도 숱한 보컬 교체로 나가는 보컬들을 붙잡지 않던 김태원은 박완규에게 "너는 아직 배울 게 많다. 밖에 나가면 양아치, 사기꾼밖에 없다" 며 박완규를 만류했지만 결국 부활에서 나온다. 만일 이때 박완규가 나오지 않았다면 부활의 역사도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솔로 활동

부활에서 나온 이후 미려한 보이스 톤과 중-고음역대를 완벽하게 표현하던 보컬 스타일이 크게 바뀌었으며, 허스키하고 파워풀한 음색을 강조한 솔로 1집(1999. '천년지애')으로 대박을 쳤다. 이 앨범의 타이틀곡이 그 유명한 '천년의 사랑'.

그렇게 1집의 대박으로 소속사였던 캔 엔터테인먼트를 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장은 박완규에게 제대로 된 돈을 지급하지 않았고 그 결과 한동안 죽은 듯이 살았다고 고백했다. 집계 시스템이 정착되지 못하고 희박한 저작권 개념, 그리고 노예 계약이 성행했던 시대가 만들어낸 불운. 지금에 와서는 '없던 일로 치자, 그러나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고 합의본 듯. 그래서 팬들은 "천 년의 사랑 대박 나지 않았나?" 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박완규가 번 건 별로 없었고 이때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MBC다큐에서 밝히길 '돈 벌려고 부활을 나와서 천 년의 사랑을 불렀지만 돈도 못 벌고 마음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천 년의 사랑을 부르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그러나 정작 깡통 사장에게 그렇게 당해놓고도 깡통의 아내인 장혜진과는 콘서트 게스트로 설 정도로 친한 사이다.

앨범은 의외로(?) 꾸준히 냈는데 2006년까지 4집을 냈다. 물론 대중적인 흥행을 한 건 1집 '천 년의 사랑' 뿐. 2집과 3집은 대중성과 하고 싶은 음악 사이에서의 박완규의 갈등이 컸다면 소속사와의 인연을 끊기 위해 마지막으로 낸 4집 앨범은 아예 사비로 앨범을 만들어 박완규가 하고 싶은 음악이 그대로 녹아있으며, 안타깝게도 대중적으로는 흥행은 하지 못했다. 국내 록의 열악한 환경과 본인이 목 관리를 소홀히 한 탓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제대로 된 돈을 지급하지 않았던 소속사의 대우와 이에 따른 생활고. "비밀" 이전에 부활과 한 번 콜라보를 한 적이 있는데 상업적으로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생활고로 인해 아내와 이혼했다. 또한 이 시절 목 상태는 일상생활 대화를 하다가도 쉬어버릴 정도로 최악. 가수도 아예 그만 둔 상태였다고 한다.

재기

"노래가 꼭 아름다운 목소리로만 해야 하는 건 아니죠. 목소리는 아름다워도 마음은 아름답지 못할 사람이 많으니까요. 예상은 했는데 정말 치료가 안 되는 중증에 가까운 병이더군요. 그 상태 그대로 '비밀'에 담았습니다." - 김태원


2011년 김태원이 원래 배우 윤상현에게 주려고 했던 "비밀"을 거절당하고 거의 반 폐인처럼 지내던 박완규에게 건넸다고 한다. 김태원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따라와라" 라고 했다고. 처음엔 목이 너무 상해 노래가 불가능할 지경이었지만 병원에서 약물 치료를 겸하면서 한 소절씩 녹음해서 합치는 식으로 곡을 완성시켰고 이것을 2011년 부활과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 1호로 발매하여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곡 자체는 자가복제적 성향이 강해진 김태원의 네버 엔딩 스토리 2 정도라는 평이지만 박완규의 담백한 보컬과 서정적인 가사가 드라마 OST와 아이돌 댄스계로 양분된 가요계에서 크게 선전했다. 이 당시 의사는 박완규에게 살고 싶으면 노래를 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 수술이 시급했지만 박완규는 그동안 쌓아온 성대 근육이 사라지는 것이 염려돼 결절 치료부터 시작했다. 이후 기적적으로 염증이 가라앉기 시작했고의사는 마치 새살이 돋는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목 상태가 크게 호전되었다.

박완규는 어릴 적에 산에 올라가서 노래 연습을 하다가 피를 토한 적이 있는데 이때부터 결절이 시작된 상태였다. 말하자면 박완규의 목 상태는 흡사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처럼 변해있던 것. 의학적으로 볼 때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목 상태는 결절로 분류한다. 덕분에 박완규는 예상을 뛰어넘고 훨씬 목 상태가 나아질 수 있었다.

스스로 리즈시절 자신을 '음역대가 좁고 고음만 되는 보컬'이라 평했는데 젊은 시절 이것이 꽤 컴플렉스였던 듯 하다. 비틀즈 코드에 나왔을때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이를 극복하려 공업용 식초인 빙초산을 마신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본인도 무서워서 물은 좀 탔다고... 당시 이 얘기에 패널이었던 유세윤, 박지선이 경악을 했다. 

의외로 박완규는 하드코어를 시도한 적이 있다. 솔로 2집인 <<엽기발랄>>(2000)의 타이틀 곡인 '욕망이란 이름...' 은 당시 인디에서 인기가 있었던 하드코어 밴드 펄럭펄럭이 세션과 래핑을 맡았다.


대표곡은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을 뮤직 비디오로 사용하기도 했던 '천 년의 사랑'. 전항목에서 고음병 환자가 좋아하는 곡이라 했지만 대중적으로도 히트한 곡 이다. 그리고 카우보이 비밥의 한국판 엔딩곡인 'Alone' 이 있다. 한국 애니 바다의 전설 장보고의 주제가 '다시 태어난 전설' 을 부르기도 했다. 다만 그 후로는 활동이 뜸한 편이었다.

2011년 5월 28일에 포크가수 손지연, 토종 헤비메탈 밴드 WON과 함께 합동 공연을 했다. 과거에 다투기도 했던 김경호역시 게스트로 섰다.

혼자 라디오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화려한 말솜씨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분이 혼자 입담으로 이렇게 웃겨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 예로 김동명의 데뷔곡을 정말 아름다운 곡이라 극찬하고, 가수는 곡따라 간다고 자기는 론리 나잇 그대로 평생 외롭게 산다는 등 가차없는 드립이 터져나오곤 한다.

보컬로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부활 보컬 시절과 현재의 보컬 스타일이 확연히 달라진 보컬리스트다.

부활 시절에는 압도적인 하드웨어와 더불어 타고난 미성을 바탕으로 한 폭발적인 고음을 자랑했으며 당시 최고의 고음을 자랑하던 김경호와 라이벌로 자주 매치되면서 로커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다. 특히 일체의 허스키톤도 섞이지 않은 맑고 청아한 클린 톤의 음색이 엄청난 화제를 낳았으며 3옥타브 대의 초고음역이 그야말로 난무를 하는 미친 난이도의 곡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부르면서도 훌륭한 표현력과 전달력을 잃지 않는 완전체였다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이 시절에는 그냥 음역대 자체가 엄청나게 높았다. 고음으로 유명한 Lonely Night의 최고음이 3옥타브 레#(D#5)인데 이거보다 한 옥타브 더 올라갔다고. 불후의 명곡 2 부활 편에서 김태원이 "박완규도 이거 부르다 목 망가졌다" 고 했는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90년대 박완규의 라이브 영상을 보면 박완규는 Lonely Night 이나 "마술사" 를 웃으면서 부른다. 대신 라이브에서 #이 많이 됐다고 한다. 일종의 카운터 테너라고나 할까. 박완규 본인이 방송에서 직접 밝힌 바에 의하면 4옥타브 D~E(레~미) 정도까지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참고로 창법이 바뀌는게 코요태 신지와 흡사한 과정을 거친다. 둘 다 4옥타브 레 이상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던 보컬이었다. 그래서 작곡가들이 더 고음의 노래를 써오고 그리고 소속사의 혹사로 성대가 맛이 가벼려 겨우겨우 재활을 해서 허스키한 보이스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왠만한 사람은 겨우 소화할 음역대가 유지될 정도이니. 
만약에 지금도 이런 키를 유지한 상태였다면 김종서와 더불어서 미성의 고음을 자랑하는 로커이자 김종국이랑 쌍벽을 이루는 날카로운 고음을 자랑했을 것이다. 

살인적인 난이도와 고음으로 도배된 5집 중에서도 최강의 곡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믿음 이라는 곡이다. 들어보면 그 유명한 고음곡 론리나잇과 마술사의 최고음 3옥타브 미(E5)를 능가하는 3옥타브 파(F5)를 그야말로 따발총처럼 난사하다가 마지막에 진성으로 She's Gone의 최고음과 같은 3옥타브 솔(G5)으로 마무리한다. 당시에는 인터뷰나 목소리 등을 들어보면 여자 성대와 음높이가 비슷했다. 저음이 1옥타브 라(A3) 이하로 내려가지 않아서 부활의 예전 앨범들 노래를 커버할 때는 3키 이상 높이고 부르곤 했다.본인은 컴플렉스가 있었는지 피나는 노력으로 점점 음색을 허스키하게 바꾸게 되었고 음역도 조금씩 내려가게 되었다. 허스키 음색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카랑카랑하고 시원시원하게 고음을 연사하던 박완규의 리즈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97년도 블랙독을 라이브했을때 노래 끝부분에 3옥파를 진성으로 질렀었다.

실질적인 보컬로서의 전성기는 2002년 3집 활동 때까지이다. 이 시기 전성기를 화려하게 불태웠으며 특히 이 시기 발표한 <After You've Gone> 은 박완규의 노래 중 Lonely Night에 버금가는 난이도를 가진 곡이며, 박완규는 이를 라이브로 불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시원하고 맑은 목소리가 어느 정도 남아있었으나 2003년 이후 스트레스가 쌓이고 본인이 목소리를 바꾸기 위해 무리하다가 점차 맑은 목소리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박완규의 창법은 변칙적인 창법으로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아닌 소리를 먹는 창법으로 이런 형식으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희한한 일. 이 창법에 어쩔 수 없이 성대를 갈아가며 쓰는 허스키까지 더해져 성대를 안드로메다로 보내는 창법으로 여지껏 노래를 해왔다. 

전성기 시절에는 4옥타브 미(E6) 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상당힌 미성이었지만 허스키 보이스로 바꾼 뒤에는 음역대가 낮아져서 현재는 3옥타브 솔(G5) 정도까지 올릴 수 있다. 그래서 현재 본인의 곡을 힘들어한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고음역대를 순간적으로 올리는 것과 높은 음역대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난사하는 것은 당연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자신의 최고음과 상관없이 이전에 자신이 부르던 노래를 부르기 힘들어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당장에 Lonely Night의 최고음이 넘사벽의 고음이 아닌데도 상당히 어려운 노래로 꼽히는 이유도 다 이런 이유이다.

여담

아내와는 이혼은 했지만 연락도 자주 하고 친구처럼 잘 지낸다고 한다. 수입도 최소 생활비와 소주값 정도의 용돈을 빼면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낸다고 한다.

학생때는 전교회장을 했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였다고 한다. 어릴 때 꿈은 검사였다고... 집안 형편 때문에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려고 했을 때 학교에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전교 1등을 하던 우등생이 실업계 고교에 진학한다고 하니 학교에선 기함을 할 수밖에. 친구들과 영어단어 외우기 내기를 하던 우등생이 부기, 회계를 배우니 공부에 흥미가 안 생겨서 힘들었지만 밴드부도 하면서 나름 즐겁게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