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최승희의 집안은 당시 윗대가 정승 판서를 지낸 명문가로, 아버지 최준현은 고종 즉위 시절 진사에 합격하여 해주 최참봉으로 통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 이름이 성녀, 또는 용경이라고 전해지는데 아버지에게 첩이 한 사람 있었으니 전주 이씨인 이재원 이었다. 최승희의 위로는 큰 오빠인 승일, 작은 오빠인 승오, 언니인 영희가 있었고, 최영희를 뺀 최승일, 최승오, 최승희 모두 후에 월북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단 최승오는 월북할 때 자식들을 남겨두고 가서 현재 남한에도 최승희의 혈육들이 생존해 있다.
최준현은 아들들이 월북하는 바람에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양부인 안창선의 집 문간채에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한국전쟁 도중 사망하였는데, 굉장히 안습하게도 그의 자식들은 모두 부친인 그의 사망 사실을 몰랐고, 그의 장례는 그의 조카이자 최승희의 육촌 동생인 최병창이 혼자 치뤘고, 그의 시신도 최병창이 화장을 하여 산에 뿌렸다고 한다.
아버지 최준현은 한학자로, 집에 한문서당을 설치하여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건시대의 전형적인 선비였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는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 자식들 모두 신식교육을 받게 했다. 그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최승희는 숙명여학교 보통과와 숙명고등여학교를 졸업했다. 학업 성적은 매우 우수한 편이었으며, 소학교 시절에는 내내 전교 1등을 하다 2번이나 월반을 해 같이 입학한 동기들보다 2년 일찍 졸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승희가 숙명여학교를 다닐 때 가세가 기울어, 최승희는 장학금을 받아가며 겨우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하루 끼니를 걱정할 만큼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큰오빠인 최승일이 경성방송국 연예부에 취직하여 아나운서 노릇도 하고, 연극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하며 나름대로 적은 돈이나마 봉급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냥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 어려운 생활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용가로 성공한 이후 최승희는 금전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구두쇠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매우 인색해졌으며, 이로 인해 형제들 사이에서도 돈 문제로 의가 상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또한 최승희는 지나칠 정도로 사치를 심하게 부렸고, 남편 안막이나 주변인들은 최승희에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자제하라고 여러 차례 충고하였으나 그 습성은 절대로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 월북 후에도 그 습성은 고쳐지지 않아 최승희의 호화 사치 행각은 계속 되었고, 결국....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들은 최승희가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여 최승희에게 동경의 음악학교에 진학하라고 권했으나, 연령에 미달된다는 이유로 입학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최승희는 교사로 취직하여 집안에 보탬이 되기 위해 경성사범학교의 입학 시험을 봤다. 100명 모집에 860명이 응시한 이 시험에서 7등으로 합격하였지만, 입학 연령에 미달된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최승희는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할 정도로 크게 낙심했지만, 결국 오빠 최승일의 권유로 일본의 대 무용가인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 들어가 무용을 시작하며 이시이 바쿠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조선에선 최승희의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돈이 필요해서 최승희가 일본인에게 300엔에 팔려 일본으로 기생이 되러 갔다는 헛소문이 났다. 숙명여학교 동창회에서는 이러한 헛소문에 분개하여, 학교의 이름을 더럽힌 최승희의 졸업장을 박탈하고 최승희를 동창회에서 제명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기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에서의 이런 헛소문과는 별개로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무용단에서 점점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지만, 이와는 별개로 이시이 바쿠의 무용단은 점점 망해가고 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이시이 바쿠는 시력이 점점 안 좋아지고 심지어 이시이 바쿠가 곧 실명한다는 말 까지 나올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최승희는 제발 무용단에 남아 달라는 스승의 간절한 부탁을 야멸차게 거절하고, 병든 스승을 배신하였다는 세간 사람들의 비난까지 받으면서 호기롭게 스승의 밑에서 독립하여 경성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개설하며, 드디어 독립을 하였으나, 당시 조선에서 무용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현시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 안막이 일본 경찰에 구속되고, 또한 임신&출산 후 후유증으로 급성늑막염까지 앓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결국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스승 이시이 바쿠의 곁으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에서 활동할 기반을 쌓은 후 다시 이시이 바쿠에게서 독립하였고, 1932년 일본에서 첫 단독 공연을 가진 이후 안막의 수완으로 인해 '최승희 후원회'가 만들어져서 여운형, 마해송,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지금 봐도 거물급 인사들이 후원을 하였다.
최승희는 지방의 춤꾼들을 따라 다니며 전통춤을 배우기도 했다. 심지어는 권번의 기생들을 찾아 다니면서 까지 전통춤을 배울 정도의 열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전통무용과 현대무용의 용합을 시도해 신무용의 창시자가 되었고, 오늘날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의 무용계에 끼친 그 영향이 매우 지대하다. 사실 한국의 본격적인 현대무용은 최승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절대로 과언이 아니다.
또한 1930년대 후반부터는 미국과 유럽, 남미 등으로 세계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는데, 어니스트 헤밍웨이, 장 콕토, 게리 쿠퍼,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 로버트 테일러 등의 당대의 저명인사들이 그녀의 공연을 관람 할 정도였다. 특히 로버트 테일러는 최승희와 굉장히 친밀했었고, 헐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최승희를 소개 시켜주며 최승희의 헐리우드 영화 출연을 알선하기도 했는데,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최승희의 헐리우드 진출은 무산되고 말았다고 한다.
아울러 최승희는 이러한 인기와 함께, 당대의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모던걸, 패션스타로서 조선과 일본의 유행을 주도하였고, 심지어는 음반도 여러 장 내게 된다. <향수의 무희>는 최승희의 자작곡이며, <이태리의 정원>은 <A Garden In Italy>의 번안곡이다. 아마도 번안이 아니라 무단 도용으로 추측되지만, 당시에는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으니.
최승희는 음악에도 나름 조예가 있었는데, 특히 리듬 감각이 매우 예민하고 뛰어났다고 한다. 춤을 추던 도중에 가야금을 연주하던 연주자가 어쩌다가 실수를 하면은 추던 춤을 멈추고 연주자에게 어떤 부분에서 틀렸다고 바로 지적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반도의 무희>를 포함하여 영화에도 여러 편 출연하였는데, 이 중 무용 영화 <반도의 무희>는 최승희가 주연을 하였지만, 일본에서 제작되고, 일본인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고, 일본인 배우들이 출연한 일본 영화다. 내용은 최승희의 자전적인 성공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인 백성희가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애인을 찾아 상경했다가 굉장한 무영가의 눈에 띄어 뛰어난 무용가로 성장했지만 스승의 죽음을 모른 채 화려한 무대에 선다는, 그런 내용이다. 최승희의 딸 안성희의 원래 본명은 안승자 였지만, 광복 후에 안성희로 개명하였는데, 성희라는 이름은 이 영화의 여주인공 백성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 영화는 평가부터 하자면 극영화로는 완벽한 실패작이었다. 아사히 신문의 기사에 실린 혹평을 보면 당시의 반응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승희는 본인이 가진 실력과 그 명성에 비해 한 개인으로의 인간성은 일제강점기 당시나 북한에서나 많이 까이던 편이었으며 매우 독선적인 성격이었다. 대표적인 일화들은 이러하다. 세계순회공연에 제자를 제외시키고 일본에 혼자 남겨 놓아 자신의 딸 안성희를 돌보게 하였고, 제자가 이에 불만을 품자 무용단에서 쫓아내 버렸다고. 또 평소에 제자들을 하녀 부리듯이 마구 부려먹었다고 하며, 심지어 제자들에게 자신의 발을 씻기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 인터뷰에서는 "팬레터를 받으면 대충 보고 그냥 던져 버린다."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말한 일, 면담을 요청하는 수많은 제의들을 "조선 땅에서 나를 만나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라며 차갑게 거절한 일, 심지어는 당시 공연 관람 예절에 익숙하지 않았던 조선인 관객들이 공연 관람 도중 소리를 낸다고 추던 춤을 중단하고 관객들에게 조용하라고 호통을 치며 신경질을 낸 일 등이 있다.
사실 여기까지의 행보로만 보자면 한국 무용의 레전드로써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러나 1940년대 들어서는 일본군 위문공연에 출연하고 국방헌금도 여러 번 내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보를 펼쳤으며, 그래서 광복 이후에 친일파라며 여러모로 압박을 받고 욕을 많이 먹었으며 먼 훗날인 2008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을 당당히 올리게 된다.
쉴드를 치는 쪽에서는 이러한 친일 행보가 최승희 본인의 자발적인 행보가 아닌 일제에 의한 강요된 행보, 혹은 친일행보는 페이크였고, 실제로는 뒤에서 몰래 민족적인 행보를 보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러한 주장들은 주로 최승희와 가까웠던 관계거나 혹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하고 있고, 그 사실 관계가 확실하게 증명된 것이 아니니 알아서 걸러 듣는게 좋다.
기자 출신으로 최승희와 친하게 지냈고, 최승희의 평전을 쓰기도 했던 다카시마 유사부로는 최승희의 친일 공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승희는 일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황군 위문을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센티멘탈하지 않았다. 그 본심은 일본군을 위문하여 재일조선인 뿐만 아니라 조선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대접받고 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그 여자는 일본군 위문을 갔지만 군이 기대한 것과 같은 전의양양을 위한 무용 같은 것은 일체 추지 않았다. 만몽의 광야에 지쳐빠진 군인들에게 상냥스러운 <견우직녀의 칠월칠석>을 춤추어 보였다. 멀리 떨어진 고향의 어릴 때의 평화로웠던 시대의 칠석놀이를 생각하며 일본병들은 모두 울었다."
그리고 1940년대 당시 최승희의 공연에서 반주를 맡았던 지영희는 "최승희가 일본군의 돈을 받고 춤을 추었지만, 그 돈을 연안독립동맹에 보냈다."고 증언했고, 최승희의 육촌 동생 최병창도 자신이 최승희로부터 연안독립동맹에 돈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고 증언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증언일 뿐 확실하게 그 사실 관계가 입증되지 않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증언은 최승희와 가까웠던 지인들이나 혈육들에게만 나온 증언이고, 이 증언의 사실 관계가 정확하게 입증 되려면 돈을 받았다는 쪽, 그러니까 그 연안독립동맹의 관계된 사람들이 직접 이런 증언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 쪽에서는 이런 증언이 없다. 반면 애국헌급 납부, 일본군 위문 등의 최승희의 친일 활동은 일단 엄연히 여러 기록이 남아 있는지라.....
최승희의 명성과 재능을 아꼈던 사람들, 혹은 최승희와 가까웠거나 친했던 사람들이나 제자 등 주변인들은 최승희의 친일행보가 사실이더라도 그녀의 춤과 그녀가 한국 무용에 남긴 업적까지 폄하되어선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이를 어떻게 받아 들일지는 뭐 받아 들이는 사람들 마음이다.
다만 광복 직후 최승희에 대한 여론은 앞서도 말했지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최승희의 주변인이나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최승희 본인은 자신의 친일 행위를 나름 반성하긴 했지만 자신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최승희 자신이 일본군 위문도 했고 친일적인 행위를 한 것도 사실이지만 남편 안막이 일본 경찰에 많은 수모를 겪었고, 연안독립동맹에도 가담하였으며, 자기 자신도 나름의 민족 의식을 가지고 좋은 일도 했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에 광복 후 자신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당황했다고 한다.
한 예로 최승희는 중국에 억류되어 있다 1946년 5월 29일에야 겨우 귀국할 수 있었는데 귀국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 동안에 일본에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친일을 했다는 것은 변명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나 최승희가 해방된 조국에 와서 속죄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코리안 발레를 창건하는 것으로 이바지하겠다." 라는 인터뷰를 하였으나 언론에서는 최승희의 발언을 왜곡, 곡해하여 "일본 놈들 앞잡이 노릇 하던 최승희가 이제는 코 큰 사람들이 들어오니까 이제는 미국 놈들의 앞잡이가 되서 발레라는 것을 하려고 한다." 라는 자극적인 보도를 하였고, 저 보도로 최승희에 대한 여론은 더욱 악화되서 최승희를 당장 반민특위에 넘겨야 한다고 들끓었으며, 이로인해 최승희는 더욱 겁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광복 직후 월북했기 때문에 혼자 귀국한 최승희를 보고 어떤 기자는 "당신의 남편은 평양으로 갔는데, 당신은 이 곳에 왜 온 것인가?" 라고 면전에서 대놓고 빈정대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승희가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기자에게 험한 말을 하였는데,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이런 최승희의 태도에 반성의 기색이 전혀 없다고 더욱 신나게 깠으며, 그래서 최승희에 대한 여론은 더욱 악화 되었다고 한다.
자신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견디다 못한 최승희는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를 만나 자신을 선처해 달라, 자신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달라고 호소하였으나, 하지의 대답은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라는 짧은 말이었으며, 그는 최승희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월북했던 안막은 몰래 남한에 내려와 최승희에게 월북을 종용했지만, 최승희는 월북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급기야 안막은 "여기 있으면 당신이 갈 곳은 감옥 밖에 없다. 나랑 같이 북으로 가면 여왕처럼 대접 받을 것이다." 라며 최승희를 협박하며 달래기까지 했다.
이 때 믿거나 말거나한 일화지만 최승희는 무당에게 자신이 서울에서 사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평양에서 사는 것이 좋은가를 봐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무당의 대답은 "당신은 젊었을 때는 세계를 누비며 명성을 올렸지만 말년에는 비참하다." 라는 말이었고, 특히 북으로 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고 한다.
무당에게 점을 칠 때까지만 해도 최승희는 월북에 회의적인 입장이었지만, 안막의 계속되는 설득과 협박에 결국 마음을 바꿔 기어이 월북하고 만다. 뒤에 후술되겠지만, 월북 후에 최승희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면... 결국 그 무당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하고 만 셈인데, 애초에 최승희가 공산주의 사상이 투철했던 것도 아니고, 이 월북은 그저 도피성 월북 이었다는 점에서 그 결말이 사실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최승희는 반민특위를 두려워하여, 자신이 처벌 받을 것을 겁내고, 도망치듯 월북하였지만, 최승희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반민특위는 결국 이승만 독재정권의 방해로 인해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와해되었고, 대부분의 친일 민족 반역자들은 단죄 받지 않고, 여전히 잘 먹고 잘 살며 자신들이 누려왔던 영달을 그대로 누렸으니, 결과적으로 최승희의 선택은 삽질이었던 셈이다.
사실 최승희가 월북하기 직전에 최승희가 월북할 거란 소문이 있었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최승희의 월북을 말렸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 당시 이승만도 최승희에게 월북하지 말고 남한에 남아서 일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최승희는 자신이 처벌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거고, 결국 최승희의 월북은 도피성 월북이 아니라, 그저 김일성이 최승희에게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였기에 마음이 흔들렸다고 보는 게 최승희의 월북에 대한 보다 더 정확한 해석이 될수도 있다. 실제로 안막이 최승희가 월북하기 전까지 뻔질나게 남과 북을 왔다 갔다 했었던 정황을 볼때, 최승희는 안막을 통해 월북 후 자신이 북한에서 누리게 될 특권에 대한 교섭을 김일성과 하지 않았나 추론해 볼수도 있겠다.
결론적으로 최승희의 월북은 자신이 친일 민족 반역자로 단죄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보다 더 좋은 조건에서 활동하고 싶은 욕심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참고로 안막의 형인 안보승은 최승희의 월북을 끝까지 말렸고, 안막이 최승희에게 계속 월북을 종용하자 "너는 가도 되지만 제수씨는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고 동생을 혼내기까지 했는데, 후에 최승희의 월북을 회고하면서 <최승희 이름 석 자> 라는 시를 남겼다고 한다.
"오대륙을 누비시고
환국하신 제수님
북쪽에는 안 가겠다
무당집도 찾으셨지
아- 기어코 넘으신지
반세기가 되옵는데
무지한 손아귀에
지고야 마시다니"
1946년 7월 21일자 민주일보에는 최승희가 기고한 「해방민족의 기수로 무용창조」라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은 최승희가 자신의 친일, 반민족 행위에 대해 스스로 쉴드를 치는 내용이었는데, 이 글이 신문에 실리기 전날에 최승희는 월북했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의 반응은 더욱 냉소적이 되었다고 한다.
최승희는 1931년 오빠 최승일의 소개로 문학 평론가이자 좌익 활동가인 안필승과 결혼하였다. 결혼 직후, 안필승은 최승희의 요청에 따라서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딴 안막으로 개명하였다. 또한 안막은 최승희와 결혼 이후 문학 활동에서 손을 뗀 채 오로지 최승희의 뒷바라지에만 열중했는데, 이는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는 안막에게 했었던 "작가는 많이 있으나 최승희와 같은 무용가는 나오지 않으니 최승희를 높여주시오." 라고 충고를 충실히 따른 것이다.
안막은 최승희의 매니저로서 최승희의 공연의 기획, 선전, 자금을 끌어 오는 일 등 온갖 업무를 도맡아 했다. 이러한 일들에 적성이 있었는지 안막은 제법 수완을 보였다. 최승희의 단발도 안막의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안막은 단발머리가 최승희의 특징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다고 믿었고, 최승희의 머리를 단발로 고정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 말에 안막과 잘 알고 지냈던 가토 구니오라는 사람은 안막의 수완에 대해 이런 증언을 남겼다.
"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극장예술공연은 허가제로 바뀌었고, 그 내용이 '황국신민' 운동에 도움이 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공연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무용이면 공연종목에서 반드시 전쟁수행 고무에 직결된 군사무용이 있어야 허가를 했는데 최승희의 공연에는 이러한 춤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가 있는지의 비결은 일본사람들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모두 안막이 짜낸 것이다."
그러나 1940년대 중반 이후 안막이 연안독립동맹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정치에 몸을 담기 시작하자, 이후 안막이 하던 업무들을 최승희의 두 오빠 최승일, 최승오와 안막의 남동생 안제승이 분담하게 된 것이다.
동요 엄마야 누나야와 부용산의 작곡가인 안성현은 안막의 조카로, 그 역시 숙부를 따라 월북하였다. 다만 안성현이 정말로 안막의 조카인지는 좀 더 신중히 따져봐야 할 게, 일단 안막의 아버지 안기선은 자식을 무려 12명이나 낳았으나 안막을 포함하여 단 3명만 살아남고, 나머지 9명은 불행히도 모두 일찍 죽었다. 안막은 살아남은 3명 중에 차남이었고, 안막의 형이 안보승, 남동생이 안제승인데, 위키백과에는 안성현의 아버지의 이름을 안용승이라고 적어 놨다. 그 서술이 사실이라면 안성현은 절대로 안막의 조카가 될 수 없다는 건데, 물론 안용승이 일찍 죽은 9명 중 한 사람일 수도 있다. 또 호적상 안막은 숙부 안창선의 양자로 입적되었는데, 안용승이 그 안창선의 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안막이 안창선의 양자로 입적된 이유가 안창선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간단하게 다시 말해서 안성현의 아버지 이름이 정말로 안용승이라면 안막과 같은 승자 돌림인 걸 감안하면 안성현은 안막과 친척 관계가 되고, 안막의 조카일 수도 있는 확률은 높겠지만, 애초에 안성현의 아버지의 이름이 정말로 안용승인지도 불분명 하니 무조건 안성현이 안막의 친척이나 혹은 조카라고 확신할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철저한 연좌제 사회인 북한에서 안성현이 안막의 숙청 후에도 살아 남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어쩌면 안막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중앙일보 기사에 의하면 안성현의 부친은 민족 음악가 안기옥이라고 하며, 위키백과 자료에 의하면 월북 이후 판소리 발성에 관련하여 김일성과의 갈등이 있었고, 1974년 혜산에서 타계했다고 한다. 그리고 국립국악원에 있는 성우향 구술채록(PDF파일)에 의하면 안기옥의 동생이 명창 안기선인데, 안막의 부친 안기선과는 동명이인이다. 정리하면 안성현과 안막은 친척이 아니다. 아마도 동명이인 안기선으로 인해 잘못된 자료가 전해진걸로 추측된다. 참고로 안막의 부친 안기선은 천안초등학교의 전신인 천안사립영진학교의 설립자다.
아무튼 월북 후의 최승희는 그간의 명성으로 공훈배우 칭호를 받고 김일성의 특별대우를 받으며 평양에서도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워 소장을 맡아서, 북한 각지의 전통무용들을 발굴하여 북한지역의 무용을 발전시켜나가는 등 한동안 승승장구하였다.
김일성의 최승희에 대한 특별대우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수입을 최승희가 고스란히 다 가져갈 정도였다고 한다. 이 무용연구소는 지금의 옥류관이 있는 자리에 위치하였으며 3층 건물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요정 동일관이었는데, 김일성의 지시로 개조를 하였고, 최승희 가족도 이 건물에서 생활하다가, 후에 집을 따로 지어 이사를 갔다고 한다.
그리고 무용단원들을 위한 기숙사도 있었으며 단원들에게는 400원의 국비가 제공되었는데, 이는 최소한의 식비와 생활비였다고 한다. 어떤 용자는 이 국비가 적다고 최승희와 안막에게 징징대었고, 결국 300원을 더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무대에 서기 시작하면은 800원의 월급을 추가로 받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에도 선출되었으며 인민배우가 되었다. 또한 1951년에는 주은래의 지지로 중국 중앙희극학원에도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개소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중국 전통 무용과 경극의 현대화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였고, 중국의 유명한 경극배우이자 광복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매란방과 함께 중국 무용, 경극, 예술 등에 대해 대담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 당시 최승희에게 사사 받았던 중국 무용가 서교(舒巧)의 회고에 의하면, 최승희가 딸 안성희에게 작품을 지도할 때 종종 문틈으로 몰래 엿보곤 했는데, 어찌나 무섭게 호통을 치는지 몰래 엿보고 있던 사람들이 겁을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 서교뿐만 아니라 최승희의 다른 제자들의 증언 역시 대체로 다 비슷한데, 최승희가 워낙 제자들을 혹독하게 가르쳤기 때문에 최승희의 제자들은 최승희를 존경하면서도 무서워 했다고 한다. 최승희의 제자로 1.4 후퇴 당시 월남하였던 무용가 전황은 자신의 고향인 함흥에서의 3인무[옥중투사] 공연 도중 객석의 부모와 지인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만 춤 순서를 잊어먹고 말았는데, 당연히 그 날 공연은 망쳤고, 공연이 끝난 후에 화가 난 최승희를 피해 도망가려 했지만 붙잡혀서 그녀의 긴 손톱에 살이 뭉개지고 피가 날 정도로 계속 꼬집힌 적이 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다만 이 날 함흥 공연은 바쁜 일정으로 인해 사전에 아무런 리허설 없이 즉흥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공연의 퀄러티는 전체적으로 개판이었으며, 최승희는 관객들에게 직접 사과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분노했다고 한다. 공연에 참가한 모든 제자들이 기합을 받는 와중에, 공연을 망친 주범으로 지목된 전황은 더욱 혹독한 체벌을 당한 것이다. 이 날 최승희의 분노는 대단해서 심지어는 모든 단원들을 다 쫓아내려고 까지 했었다는데, 제자들이 그야말로 싹싹 빌고서야 최승희의 분노는 겨우 진정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전황은 최민수의 외할머니 전옥의 남동생이기도 한데, 누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에 조카인 강효실과도 나이 차이가 불과 3살밖에 나질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전황과 강효실은 삼촌과 조카라기 보단 마치 오누이처럼 지냈고, 그 강효실이 바로 최민수의 어머니이다. 부모의 이혼 후 아버지 강홍식과 함께 평양에 살고 있던 강효실을 전황이 데리고 월남하였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전황이 아니었다면 최민수는 태어나지도 못했을지도. 그러나 강효실의 두 남동생은 안타깝게도 같이 월남하지 못했고, 전옥은 평생 두 아들을 그리워 하며 살았다고 한다.
아무튼 최승희가 중국 무용과 경극에 남긴 업적은 최승희가 중앙희극학원에 있을때 최승희의 조교를 했던 왕시영(王時英) 교수의 "최승희가 경극 발전에 끼친 첫 번째 공은 경극무용동작의 기초를 정립한 것이고, 2번째는 경극무용의 신체훈련법을 만든 것이다." 라는 평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사진의 맨앞줄의 왼쪽의 인물이 남한의 원로 무용가 김백봉이다. 김백봉은 최승희의 수제자이며,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남동생 안제승의 부인으로, 최승희에게는 손아랫동서이기도 한데, 스승인 최승희를 따라 월북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4 후퇴 당시 부친, 남편과 함께 월남하였고, 남한에서 최승희의 무맥을 이어 받았다. 남편인 안제승은 경희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연극연출가, 무용평론가로 활동하였다.
참고로 저 사진처럼 최승희가 직접 제자들을 가르치는 건 매우 드문 경우였다. 최승희는 주로 조선춤에 한해서 가끔 제자들을 직접 지도하였고, 나머지는 주로 안성희나 김백봉 같은 경력이 오래된 제자들이 교관이 되어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수업의 내용은 조선 춤부터 현대무용, 발레, 소련의 민속춤, 인도의 춤이나 중앙아시아 지역의 민속춤 등 다양한 종류의 춤을 배웠다고 하며, 소련의 민속춤 같은 경우는 소련에서 온 무용가가 지도하였다고 한다.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단원들은 최승희가 북한 전역을 돌아다니며 직접 뽑았다고 한다. 최승희에게 발탁되어 입단에 성공하였어도, 수업 태도가 태만하다거나, 실력에 발전이 없거나, 몸 관리를 못해 살이 찌거나 빠지면 가차 없이 쫓겨났으며, 그렇게 쫓겨나고 울고불고 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단원들 간의 위계질서도 강한 편이었으며, 최승희의 눈에 들어 무대에 빨리 서기 위해 같은 단원들끼리도 질투와 경쟁이 상당히 심했다고 한다. 최승희가 무대에 설 단원을 뽑는 기준도 상당히 엄격했는데, 무용 실력도 무용 실력이지만 키와 외모도 중요한 기준이었다고 한다. 춤을 아무리 잘 췄어도, 키가 작고 외모가 떨어지면 절대로 무대에 세우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막이 1958년 한설야를 제거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부르주아 비평가로 몰려 카프 계열 문학가들과 함께 숙청되면서 그녀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는데, 북에서 월남한 이철주라는 사람이 쓴 <북의 예술인> 이라는 책에 보면은 안막이 숙청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58년(58년인지 59년인지 확실하지 않다.) 김일성 일파는 안막을 김일성 일파를 위해 충실했고, 또 한설야와 함께 행보를 걸어온 것을 인정하나 그 경향성이 부르조아적 영웅주의로부터 출발한 공명심이 좌우했다고 단정하고 그를 숙청하는데 이르렀다. 그 결과 김일성 일파는 안막을 이승화, 임화 사건과 동일하게 미국고정간첩으로 내몰았으며 비공개리에 재판을 받고 투옥하였으나 형기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김일성 비서실장 고봉기의 유서> 라는 책에서는 시바다 사노루라는 일본인이 쓴 <춤을 출 수 없게 된 여류무용가 최승희> 라는 글의 내용을 인용하여 안막의 숙청에 대해 이렇게 적어놓았다.
"비밀경찰은 1958년 들어와 안막에게 반당 종파분자의 용의를 품고 평안도 출신의 작가로 최승희의 평전을 쓴 서만일과 함께 체포했다. 비밀경찰은 안막이 김일성의 궁정작가라 불리는 한설야의 직계이고 이태준을 숙청하는 데 공적이 있었기 때문에 표면화하지는 않았지만 안막이 일제강점기에 도쿄에 있었던 사실에 착안하고 비합법시대에 공산주의자로 자칭할 수 있었던 것은 전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몰아세웠다.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의 숙청에 나선 수사관들은 안막 체포 후의 자택 수색에서 많은 귀금속 제품을 발견하고 이것이 적의 스파이인 증거라고 단정하였다."
위에 인용된 글의 내용에서도 보듯 안막이 체포된 후 가택 수색을 했을 때에 집에서 최승희의 사치로 인한 금, 은, 보석 등 온갖 패물들과 외제 물품들과 보물, 미술품, 골동품들이 많이 나와 안막은 미국의 간첩으로 몰리고 최승희는 부르주아적인 무용가라고 비판 받는 단서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안막은 소련파, 연안파, 남로당파 등과 똑같이 미국 간첩 누명을 쓰고 숙청된 걸로 추정된다. 여기서 굉장히 아이러니한 사실은 안막과 최승희 부부는 소련파, 연안파, 남로당파 계열과는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았는데, 남로당 계열의 문화인들과 소련파 계열의 문화인들이 최승희를 김일성에게만 아부한다며 눈엣 가시처럼 여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1958년 중국 공연을 준비하던 도중, 당 간부들은 최승희에게 국립 교향악단과 가수들을 동반하여 종합 공연을 나가라고 요구하였고, 무용의 단독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던 최승희는 이에 빡친 나머지 직접 김일성을 찾아가 이럴 수 있느냐며 항의하고 따졌다고 한다. 최승희는 불편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을 때마다 직접 김일성을 찾아갔었다고 한다. 즉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었지만, 이 때는 험한 말이 오갔다는 카더라도 있을 정도로, 김일성과 대판 싸운 걸로 추정 되는데.....
결국 최승희는 자신의 무용단만을 이끌고 독자공연을 강행하였으며, 아무튼 그래서 김일성이 빡쳤을 만도 한데, 사실 최승희는 김일성과 당의 간부들이 무식하고 교양이 없고 예술을 모른다며 불만을 가지며 김일성을 무시하고 있었고, 김일성은 최승희의 명성과 그 능력 때문에 최승희를 우대했지만 내심 최승희가 오만방자하다고 여기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 사건으로 김일성과 최승희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고,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일성은 예술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부 작가 예술인들은 잘한다고 칭찬이나 하고 상이나 주어야 좋아하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아하지 않았다. 무용대가라고 자처하는 한 예술인은 당과 인민을 위해서 일을 더 잘하라고 당에서 지도와 방조를 주었으나 그는 돈을 많이 받고 칭찬을 듣고 상을 많이 타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평을 부리고, 시비질을 하고, 자기 작품에 대한 논평을 신문에 내지 않으면 불평을 부리는데까지 이르렀다. 그는 자기만 잘난 체하면서 내세우던 나머지 마치 자기가 없으면 조선의 무용 예술이 발전할 수 없는 것 처럼 교만하게 행동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최승희의 실명을 거론하진 않았지만 여기서 '무용대가라고 자처하는 어떤 예술인' 이라는 지칭은 누가 들어도 최승희를 저격한 것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최승희를 공개비판하였고, 이로 인해 결국 최승희는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나 잠시간의 자숙의 시간(?)을 보낸 후 이 시간 동안 1년 뒤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주은래가 김일성에게 최승희를 복귀 시키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말도 있는데, 자숙의 시간(?) 동안 최승희는 집에서 주로 독서로 소일하였으며, 최승희의 조카인 최호섭의 증언에 의하면 이 사건 후 최승희는 기가 많이 죽어 모든 일에 있어서 소심해 졌다고 한다.
월간 말의 1995년 8월호에 수록된 <월북 천재 무용가 최승희의 비극적 최후>라는 글 내용에 최승희의 제자였던 김해춘의 증언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이 때 김일성이 근신중인 최승희에게 옥백미 2가마를 보내라고 지시하며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사람 좀 되라고 했는데, 지금쯤 어깨가 쭉 늘어져 있을테니 찾아봐 주어라." 뜻하지 않은 쌀가마를 받아 안은 최승희는 쌀가마를 부둥켜 앉은채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물론 걸러 들을 필요가 있는 증언인데,.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최승희의 행보에서 김해춘의 증언과 최승희의 혈육인 최호섭의 증언이 서로 엇갈리는데, 앞의 서술한 대로 최호섭은 이 사건 후 최승희가 기가 많이 죽어 모든 일에 있어서 소심해졌다고 한 반면에 김해춘은 이 사건 후에도 최승희는 여전히 기세등등하여 김일성과 당 간부들과 계속 마찰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어쨌거나 이후 1967년까지 최승희는 '문예총 중앙위원',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 '무용가 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등의 직함을 달고 활동하였으나 그나마 이런 직함들은 전부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었으며 1960년대 이후 최승희의 무대 출연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승희는 1966년 3월 평양의 문학신문에 <조선 무용 동작과 그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성> 이라는 논문을 4차례에 걸쳐 연재하였고, 1958년에는 <조선민족무용기본>과 <최승희 무용극 대본집>이라는 책을, 1964년에는 <조선아동무용기본>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조선민족무용기본>과 <최승희 무용극 대본집>은 남한에서도 출판되기도 하였다.
1967년 후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1967년에 남한의 언론에 의해 최승희의 숙청설이 보도되고, 최승희의 조카 최호섭과 최로사가 지방으로 강제 이주당한 것으로 볼 때, 이 시기에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1967년은 갑산파가 숙청되었고, 김일성의 5.25 교시 후 도서정리사업이 시작되며 김일성의 우상화가 본격화되던 시기이며, 김정일이 문화계의 전면에 나서며 혁명 가극, 영화 등을 창작하며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시기다.
그리고 1958년 출판된 <조선민족무용기본> 에서 최승희는 대단히 큰 실수(?)를 했었는데......
"끝으로 나는 이 무용 기본을 발표함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준 조선민족 무용 기본 연구위원회 위원을 비롯한 여러 동무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책의 저자의 말에 김일성에 대한 헌사를 빼놓은 것이다.
김일성은 1969년 5월 1일 교시에서 "조선 사람은 무용극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인민은 노래 부르고 춤도 추는 것을 좋아한다." 라고 말했고, 김정일은 자기가 쓴 <무용예술론>이라는 불쏘시개에서
"그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무용극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 때 만든 무용극은 우리 인민의 민족적 정서에 맞게 우리 식으로 만들지 못하고 서양식 무용극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무용극이 우리 인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서양식 무용극을 절대화 하는 그릇된 관점과 낡은 틀을 부수고, 「피바다」식 가극이라던가, 「성황당」식 연극과 같이 우리 인민의 사상, 감정과 정서에 맞는 우리 식의 새로운 무용을 만들어야 한다."
라고 적어 놓으며 최승희의 무용극을 매도하였는데 그 뜻인 즉슨 결국 최승희의 무용극을 배격하고 자신들을 우상화하는 공연을 하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주체사상의 원수이자 적인 최승희와 최승희의 무용, 무용극들은 반혁명적이고 자본주의적이라 하여 매장되었고, 최승희의 사진들이나 관련 자료들은 모두 불태워졌으며, 최승희의 제자들이나 최승희와 연관된 사람들은 모두 지방으로 추방당하거나 숙청된 것이다.
최승희의 제자로 무용가로 활동하다 탈북한 김영순 증언에 의하면 최승희의 무대 데뷔 40주년을 기념하여 최승희의 제자인 남자 무용가 오몽희가 닭 40마리를 털을 다 뽑아서 잡았는데, 개인 우상화를 했다 하여 오몽희는 잡혀가 죽었고, 이 사건이 최승희 숙청의 결정적인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최승희가 직접 창작하고 주연했던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도 비판을 받았고, <사도성의 이야기> 역시 숙청의 이유 였다고 한다.
<사도성의 이야기>는 최승희가 중국에서 1년 동안이나 심혈을 기울여 대본을 탈고한 후 1954년 초연되었으며, 최승희가 창작한 무용극들 중에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았고, 이후 김일성의 지원으로 1956년 영화화까지 되었다. 참고로 이 영화가 북한 최초의 컬러 영화라고 하는데, 물론 촬영 기술은 북한의 기술이 아닌 소련의 기술이었지만 당시의 북한의 경제사정을 고려해 보면 매우 과감한 투자를 한 것이다. 참고로 <사도성의 이야기>의 영화 버전은 1998년 남한에서 중앙일보가 러시아에서 수집하여 공개되기도 하였다.
여담이지만 남한 최초의 컬러 영화는 1949년작 <여성일기> 인데, 현재는 필름이 남아 있지 않고, <여성일기> 이후 컬러 영화가 제작되지 않다가 1958년 임화수가 홍콩의 쇼브라더스와 합작하여 <이국정원> 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였고, 1960년 <여성일기>의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과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남한 컬러 영화의 효시다.
<사도성의 이야기>의 영화를 연출한 정준채는 이후 8월 종파사건에 휘말려 숙청되었으며, 그의 동생 작곡가 정추는 소련 유학 도중 모스크바에서 김일성을 비판하였고, 북한은 소련에 정추의 송환을 요구하였지만, 당시에는 북소관계가 경색되던 시기라 소련은 북한의 송환 요청을 씹고, 정추를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유배보냈다. 정추는 그 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는데, 소련 해체 이후 무국적자가 되었고, 결국 2013년 객지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다만 카자흐스탄의 음악 교과서에는 그의 작품 60여곡이 수록 되어 있을 정도로 카자흐스탄 음악계가 존경하는 위대한 거장으로 우대받았다. 남한에서는 월북하였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배신자라고,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게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고 잊혀진 비운의 인물이다.
정준채는 <조선예술>지에「첫 천연색 예술영화 <사도성의 이야기>를 끝내고」라는 글에서 영화 <사도성의 이야기>의 연출후기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이 작품은 이미 형성된 무용으로서 또 무대에서 상연된 작품인 만치 모든 것이 생각과 달랐다. <사도성의 이야기>는 무대의 원형을 그대로 살리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무대에서 해결 못지은 점들을 영화언어로써 해결하면서 무용을 살리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원작을 충실히 잘 살린다는 것, 즉 원작의 정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작품에 대한 나의 기본태도 였고, 이와 아울러 무용이 가지는 아름다운 선을 잘 살려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무용은 그 표현형식에 있어서 리듬과 템포를 소유하고 있다면 영화도 리듬과 템포를 소유하고 있다. 이 표현형식을 적절히 배합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에서 첫 번째 무용극 영화이며, 첫 솜씨의 천연색 예술영화인 만큼 허다한 부족점들이 내포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경험을 거울로 삼아 보다 우수한 새 작품을 창조하는데 정성을 기울일 것을 맹세하자."
다만 <사도성의 이야기>가 안막의 숙청 후, 위에 상술한 김일성의 1958년 최승희 공개 비판 사건 이후 당과 언론으로 부터 비판의 난도질을 당한건 사실이지만 <사도성의 이야기>가 최승희 숙청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김영순의 개인적인 견해다. 그리고 김영순이 해당 인터뷰에서 <옥련못의 이야기>를 <사도성의 이야기>로 착각하여 잘못 말하거나 혹은 인터뷰를 한 기자가 착오로 잘못 적지 않았나에 대해서도 의심해 봐야 한다.
최승희가 대본을 쓰고, 안성희가 안무와 연출을 맡아 1964년 공연했던 무용극 <옥련못의 이야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지 않았다는 이유와 혁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과 난도질을 당했고, 결국 이 작품이 최승희의 마지막 작품이 되면서, 최승희는 자신이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던 무대에 다시 설 수 없게 되었으며 무용 생명이 끊어지고 말았다. 즉 <사도성의 이야기> 보다 <옥련못의 이야기>가 오히려 1967년의 최승희의 숙청에 결정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옥련못의 이야기> 공연 이후 안성희에게도 비판의 화살이 갔지만, 안성희 본인이 대본을 직접 쓴게 아니고 안무와 연출만 맡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고 어머니를 따르기만 했다는 자기비판을 하는 선에서 대충 넘어갔다고 한다. 이후에 안성희가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 안무한 <당의 딸>이라는 무용극은 김일성에 충성을 다하는 어떤 여인의 삶을 그렸는데, 안성희로서는 어떻게든 북한의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한 노력, 혹은 일종의 최후의 발악 이었던 셈이다
최승희의 정확한 사망 연도와 날짜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애국렬사릉의 그녀의 무덤의 묘비를 보면 1969년 8월 8일에 사망한 걸로 추정된다.
최승희의 딸 안성희의 남편과 절친한 관계였다는 황장엽은 1969년 8월 8일은 최승희가 숙청된 날이고 실제 사망 날짜가 아니라는 다른 이견을 내놓았는데, 어떤 탈북자는 자신이 1979년 한 정치범수용소에서 비참한 몰골의 최승희와 안성희를 목격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기도 하였지만, 탈북자들의 말이 다 신뢰가 가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 말은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또한 최승희의 제자인 김해춘은 최승희가 1969년 지방으로 추방된 후 1975년 양강도 풍산군에서 간암으로 투병 중 사망하였다고 증언하였지만, 역시 확인되지 않은 말이다.
상술된 김영순의 증언에 따르면 북창 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도 정확한 사실은 아니고, 신상옥 감독은 자신의 납북, 탈북 수기에 최승희가 딸 안성희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하려다 붙잡혀서 총살당했다고 적었지만 확실치 않은 이야기다. 신상옥 감독은 이 수기에 월북, 혹은 납북된 문화예술인들의 행적과 근황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을 하였는데, 그 내용들이 대부분 잘못된 정보 였던걸 보면, 이 이야기 역시 잘못된 정보일 확률이 상당히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최승희가 간첩죄를 뒤집어 썼을 확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고 그 개연성도 충분한데, 안막이 간첩 누명을 뒤집어 쓰고 숙청된 이상 최승희에게도 간첩 혐의가 붙는 건 북한의 사회 성격상 충분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중국으로 망명한 전 인민군 군의관 이복순이라는 사람은 최승희는 국제 스파이였음이 탄로나서 숙청되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또한 1950년대부터 일본에선 최승희의 초청 공연을 계속 추진 했었고, 최승희 역시 일본으로 공연을 가고 싶어 했으나 공연은 번번히 무산되었고, 최승희는 계속 일본에 가고 싶다고 징징댔다고 한다. 그러다 한 번은 일본 사회당의 대표단이 방북한 적이 있었는데, 최승희가 이들을 북한 당국의 아무런 허가 없이 만나서 자신의 무용단을 일본으로 초청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고, 승낙을 받아냈었다고 하는데, 정상진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당국에서 이 면담을 문제삼아 뒷조사를 한 뒤에 최승희에게 일본 사회당과 연계하여 간첩 활동을 하였다는 누명을 씌웠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에 정말로 그런 누명을 썼다면 최승희는 더 이상 북한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느끼고 탈북을 시도하였을 수도 있는거고, 그러다 잡혀 총살당했을 개연성도 충분히 있으니 신상옥 감독의 수기의 내용이 마냥 터무니 없는 소리만은 아닌 것이다. 연변예술학교 교장을 지낸 조선족 무용가 조득현도 최승희가 중국대사관으로 망명을 요청했으나 중국대사관에서 받아주지 않았고, 이것이 탄로나 대동강에 있는 쑥섬에 감금되었다.라고 신상옥 감독의 수기의 내용과 비슷한 증언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들은 다 정확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완전히 확신하긴 어렵다.
참고로 안막의 남동생 안제승은 안막과 최승희의 숙청을 미리 예언했는데, 한국전쟁 당시 안제승은 안막에게 "우리들의 출신 성분은 농민이나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계속 있다간 언젠가 숙청당할지도 모르니 이번 기회에 남한으로 내려 가는게 어떻겠냐."며 형을 설득하였으나 안막은 화를 내며 동생의 말을 무시하였고, 결국 안제승은 자신들 부부만 월남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안제승이 이런 예언을 한 배경에는 그만큼 최승희의 평소 언행과 행동이 북한 사회에선 매우 위험수위였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해볼 수 있다. 사실 안막은 문화선전부상의 자리에 있을때 최승희 때문에 타격을 많이 받고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최승희가 사사건건 김일성, 당 간부들과 싸우면서 눈 밖에 날 언행과 행동들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승희는 김일성이나 당 간부들과 싸울 때마다 항상 "내가 그 위대한 최승희인데, 니들 따위가 나한테 감히 개겨?" 이런 식의 감정적이고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심지어 어떤 고위 간부는 최승희와 싸우다 최승희에게 뺨을 얻어 맞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그나마 사후에는 1980년대 부터 "그래도 최승희의 무용이 최고였지."라는 김일성의 말 한 마디로 복권의 기조가 보였고, 1994년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불쏘시개 <세기와 더불어>에서 최승희와 최승희의 춤에 대해 호평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사실상 복권 되었으며, 2003년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완전히 복권되었다. 또한 유해 역시 애국렬사릉에 묻혀 있으며, 심지어 2011년에는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행사까지 성대하게 열며 <사도성의 이야기>를 리메이크 하여 공연하였다고 한다.
지방으로 쫓겨났던 최호섭과 최로사는 쫓겨난지 20년이 지난 1987년에야 평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으며 이들이 1995년 5월 김정일을 접견했을 당시 김정일은 이들에게 "편협한 자들 때문에 최승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고, 최호섭, 최로사가 20년간 지방으로 쫓겨가있어서 정말 가슴이 아팠다."는 희대의 개드립을 날렸다고 한다. 지가 말한 그 편협한 자들에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도 포함되니, 결국 셀프디스인 셈......
최호섭과 최로사의 어머니는 유명 여배우 석금성인데, 남편인 최승일과 시누이인 최승희가 월북했을 당시, 석금성은 시아버지를 병간호 하느라 따라가지 못했고, 후에 형편이 어려워지자 아들인 최호섭과 딸인 최로사를 좋은 형편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월북하려는 황철을 통해 남편에게로 보냈고, 그 후로 그녀는 아들과 딸을 평생 다시 볼 수 없었다. 석금성은 평생 재혼하지 않고 자녀들과 재회하길 간절히 바랬었지만, 그녀가 노환으로 타계하는 1995년까지 자녀들과 그 바램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다만 1991년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녀들의 소식을 들을 수는 있었는데, 최로사는 북한에서 시인이 되었고, 최호섭은 고모의 뒤를 이어 무용가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 최호섭이 무용가가 된건 최승희가 오빠 최승일에게 집안에 남자 무용가도 한 명 있어야 하지 않겠냐면서 최호섭에게 무용을 시킬 것을 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석금성 본인이 증언한 자녀들의 월북 경위는 여기 서술된 내용과는 전혀 다른데 "평소에 남편은 북한에 가자고 했고, 나는 한국에서 연극을 하겠다고 하여 자주 언쟁을 하는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내가 부산에 연극하러 갔다 왔더니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아이들 넷을 데리고 북한으로 떠나 버렸어요. 무정한 사람이었어요." 라는 증언을 하였다.
최승희의 딸인 안성희는 어렸을때 부터 어머니 최승희에게 무용을 배웠고, 6살부터 어머니와 함께 무대에 서며 무용가로 활동하다가. 1953년엔 소련 모스크바의 볼쇼이 발레학교로 발레 유학을 갔는데,
유학 생활 도중 1956년 모스크바 국제 무용 콩쿠르에서 '집시춤'으로 1등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4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의 귀국 공연에서는 김일성이 공연을 관람 하였고, 공연 후에는 그녀에게 직접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고 한다. 조선족으로 최승희의 제자이자, 당시 이 공연을 관람하였던 김예화의 증언에 의하면 이 날 안성희는 자신이 직접 안무한 여러가지의 춤을 추었지만 관객들이 제일 열광했던 춤은 바로 '집시춤' 이었다고 한다.
이후 공훈배우가 되어, 최승희가 총감독을 맡고, 안성희가 안무지도를 하는 방식으로 어머니와 여러 작품들을 합작]하며 그 명성이 최승희에 버금갔고, 국립 평양무용극원의의 원장으로 재임하여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국립 평양무용극원의 원장을 처음 맡았을 때 안성희의 나이가 불과 31세였으니 이건 북한 정부가 그만큼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였다는 뜻이다.
물론 북한에서 이렇듯 안성희를 높이 띄워준건, 후에 다시 서술 되겠지만, 최승희를 견제하기 위한, 혹은 최승희가 없어도 우린 그녀의 딸을 이용하여 북한의 무용을 발전 시킬 수 있다. 라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인민배우가 되었지만, 상술했듯이 아버지는 숙청되고 어머니는 연일 당의 비판 공세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그녀의 입지 역시 매우 위태위태 했고, 그녀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지만, 결국 어머니 최승희가 숙청된 후의 행적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향간에는 그녀가 자기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어머니인 최승희를 고발하였고, 어머니에게 자아비판을 강요하였다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이건 말 그대로 소문일뿐, 확실치 않은 이야기다. 아버지가 숙청 되고 어머니가 연일 당의 비판 공세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 딸인 안성희만 혼자 승승장구 했다 보니, 안성희가 부모를 자신의 영달과 출세를 위한 제물로 희생 시켰다는 이런 류의 소문이 돈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다만 최승희와 딸인 안성희의 사이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을수도 있는데, 모스크바로 발레 유학을 다녀온 안성희는 서양무용에 능통했고, 최승희는 그런 딸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조선 사람은 조선 춤을 춰야 한다."고 항상 딸에게 자주 말했는데, 최승희의 조카인 최호섭의 증언에 의하면 소련파 간부들은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안성희를 내세워 모녀간의 갈등을 민족파 VS 현대파의 대립구도로 몰아넣으려는 의도로 모녀 간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두 모녀를 떼어 놓으려고 하였다고 한다. 1959년에 안성희가 모친 최승희를 공개 비판 했다는 건, 그녀의 자의가 아닌, 주위에서 강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안성희 문서의 평가에도 언급된 말이지만, 최승희는 딸인 안성희를 자신의 정통 후계자라고 생각했지만, 안성희는 자신을 최승희의 후계자라기보다는 최승희와는 다른 독자적인 계파의 무용가로 여겼으며,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강했던 최승희는 그런 딸에게 내심 서운한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최승희의 활동이 끊긴 1967년 이후 딸인 안성희의 활동도 같이 끊기고, 사촌인 최로사와 최호섭이 지방으로 쫓겨난걸 보면 아마도 안성희도 최승희와 같이 숙청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김영순은 안성희도 최승희와 함께 북창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증언하였다.
다른 이야기로는 지방으로 추방된 후 농사를 짓다 탈곡기에 한쪽 손을 잃었다는 말이 있는데, 재일교포 2세 출신의 논픽션 작가 김찬정이 저술한 <춤꾼 최승희> 라는 책에 저자와 절친한 사이인 어떤 재일교포 무용가가 1999년 북한을 방문하여 최승희의 제자이자 당시까지 북한 무용계에서 직접 활동하던 사람으로 부터 "안성희는 무용계에서 추방당한 이후 농촌에서 평범한 농민으로 생활하고 있어요.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을 하다가 탈곡기에 손목이 잘려 한쪽 손이 없는 상태이지요." 라는 이야기를 직접 들은적이 있다는 내용이 있고, 또 안성희가 2001년 사망하였다고 들었다는 내용도 있는데, 최승희 모녀와 관련된 그들 모녀의 여러 지인들, 그리고 탈북자들의 증언들의 내용들이 서로 일치하지가 않고, 엇갈리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 내용들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냥 이런 썰이 있다 정도로만 알아두자.
안성희가 정확히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로사와 최호섭이 1987년 평양으로 돌아온 걸 볼 때 적어도 1987년 이전에 사망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만일 1987년까지 생존해 있었으면 최로사와 최호섭이 평양으로 돌아올때 안성희도 같이 돌아왔어야 했는데 돌아오지 못한걸 보면, 또 1980년대 이후 최승희의 복권 분위기에도 그녀의 이름은 북한에서 언급하지 않는 걸로 보면 그 이전에 사망하였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한때 안성희가 최승희의 숙청 후에도 동생 안병건과 함께 피바다가극단에 소속되어 안성희는 무용 안무를 담당하고, 안병건은 음악을 담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기도 하였으나, 이 소문은 일본에 살고 있는 어떤 교포 음악가에 의해 바로 반박 되었는데, 이 사람은 자신도 피바다가극단에 가보았지만, 안성희나 안병건이라는 사람은 없었다고 말하였다.
10년 넘게 최승희에 대한 자료를 모아 2002년 최승희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던 정수웅은 1992년 러시아에서 과거 소련 시절 KGB에서 일했다는 사람으로부터 "안성희가 극장에서 일하고 있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지만, 역시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저 증언을 한 사람이 정말로 KGB에서 일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최승희는 안성희 말고도 안병건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안성희와는 나이 차이가 무려 14살이 난다. 안병건은 10대 시절부터 작곡가로 활동하며 어머니와 누나의 무용극의 곡을 쓰기도 했지만, 최승희가 숙청된 후의 행보는 전혀 알려지지 안았는데, 아마도 엄마, 누나와 같이 숙청된것으로 추정 된다.
여담으로 여성가족부가 한국을 빛낸 위인 중 한 사람으로 최승희를 올려놔서 논란이 일고 있다. 또 최승희가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홍천군에서는 최승희 춤 선양사업으로 최승희 생가터 복원과, 전시장, 공연장 건립을 계획했다가 최승희의 친일/친북 논란을 든 강원도내 보훈단체와 여론, 지역사회의 반발과 지역민의 호응 부재로 잠정 중단되었다.
다만 홍천군의 한 관계자는 군에서 추진하는 선양 사업이 중단되는 것이지, 최승희의 출생 마을인 남면 제곡리의 주관으로 매년 개최되는 추모 행사와 최승희 춤축제와 같은 최승희기념사업회 자체 사업은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으나, 2010년을 끝으로 최승희 춤 축제는 현재 중단 상태이다.
사실 최승희가 정말로 홍천군 출생인지도 불분명 한데, 일단 국내에서 최승희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진 최승희 전문가인 무용평론가 고 정병호 중앙대학교 명예교수는 최승희의 모교인 숙명여자고등학교의 학적부를 근거로 하여 최승희의 고향이 홍천이라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이 저술한 최승희의 평전이자 이 문서의 참고서적인 <춤추는 최승희>에도 최승희의 출생을 서울이라 기록하였다. 최승희의 학적부에는 최승희는 서울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고, 숙명여고 재학 당시에는 종로구 체부동 137번지의 초가집에 거주했다고 분명히 적혀있다.
최승희의 홍천군 출생설은 1989년에 강원도민일보 기자였던 함광복이 최승희에 대해 취재하던 중 누군가로 부터 “최승희 고향이 홍천”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약 15년간 자료를 뒤진 끝에 최승희의 5촌 조카 최경희의 “최승희의 고향은 홍천군 남면 제곡리”라는 증언과 1938년 미주공연을 마친 뒤 교민신문인 신한민보에 실린 “최 여사의 약력을 듣건대 그는 강원도 홍천군의 최준현씨 영애로 일찍이 경성 숙명여학교를 필업하였고…”라는 기사를 주요 근거로 하여 2006년에 최승희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기사의 내용을 보면 '강원도 홍천군의 최준현 씨의 영애로' 라는 말이 분명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최승희가 홍천군에서 태어났다고 해석하는 건 분명히 무리가 있다. 최승희의 부친 최준현의 출생지가 홍천이었을 수도 있지만, 최준현의 집안, 그러니까 최승희의 집안이 윗대 선조가 정승판서를 지낸 명문가 출신인 걸 감안하면 이 역시 가능성이 떨어진다. 한 마디로 신한민보의 보도가 오보일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이야기다.
모교인 숙명여자고등학교에서는 당연히 학교를 빛낸 '위대한 선배님들'의 반열에 올라와 있고, 심지어는 전교에 최승희 포스터가 1~2장씩은 붙어 있다 한다. 이를 본 한 학생이 교장선생님께 최승희는 친일파인데 왜 이렇게 찬양하느냐 따지고 들자 교장은 오히려 최승희의 행보를 두둔하며,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했기에 예술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