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의 황제 나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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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의 황제 나훈아


2017. 5. 22.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 본명은 최홍기 이다. 1950년 2월 11일에 부산에서 태어났다. 1966년 서라벌예고 2학년 무렵에 '천리길'을 발표하며 데뷔하였다.

트로트 장르에서도 유명세를 탔지만, 또한 수많은 히트곡을 직접 작곡해서 히트시킨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한데, 무려 히트곡만 120여곡 이상이 넘는다.


히트곡 수에 있어서도 국내 최다는 물론이고 세계 최다임을 스스로 공인할 정도이며 앨범 발표수만 해도 200장 이상, 800곡의 자작곡을 포함해서 2600곡의 취입곡을 자랑하는 나훈아는 트로트의 황제라는 별명이 정말 잘 어울리는 가수이다.

2017년, 11년만에 컴백할 예정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히트곡이 본인이 작사하고 작곡한 곡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 의해 작곡된 히트곡도 꽤 많다. 가장 최근에 발표한 "고장난 벽시계(윤중민 작사, 박성훈 작곡)" 같은 곡은 의외로 나훈아가 작사 작곡을 하지 않았다. "행운", "남자라 울지 못했다" 등. 자작곡 중 유명한 노래로는 <땡벌> (강진이 부름)이 있다. 사실 "땡벌" 은 나훈아가 1987년에 이미 직접 불러서 발표했었다. 또한 1991년에 원로가수 정원이 "인생은 본전" 이라는 이름으로 가사만 바꿔서 불렀다. 나훈아는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잘 주는 편은 아니다. 땡벌 외에는 이자연이 부른 "당신의 의미", 심수봉의 "여자이니까" 등이 대표적인 곡이다. 자작곡 전반을 보면 평생에 걸쳐 블루스와 민요를 트로트에 접목한 형태의 음악적 시도를 해온 것을 알 수 있다.

오빠부대, 요즘은 빠라고 불리는 무리들이 많았던 인기 가수였다. 전성기 시절에도 상당한 인기가 있었고, 현재에도 트로트 가수 인기순위에서 최상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정말 많다. 트로트의 쌍벽으로 유명한 남진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1970년대 방송사 가수왕은 내내 남진 차지였고 나훈아는 항상 2등이었다. 사실 7, 80년대를 기준으로 두 가수의 행보는 조금 차이가 있는데, 남진은 수려한 외모에 호방한 목소리로 대중성이 강했고, 나훈아는 상대적으로 투박한 외모를 가졌으나 싱어송라이터로 음악성을 어필하는 느낌이 강했다. 두 사람의 상반된 외모 차이와 분위기 탓에 양쪽 팬덤에서도 라이벌 대립각이 만들어져서, 당시 공연장에 가면 남진 팬들은 나훈아에게 '소도둑놈 저리가라'고 외치고, 나훈아 팬들은 남진에게 '돼지 목따는 소리 치워라'라 외치며 공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남진이 인기가 좀 더 많았지만 나훈아가 후에 부각되며 라이벌로 불리게 되었다.


1973년 7월 비밀리에 공군 병사로 자원 입대, 군악대에서 복무하였다.

<군 복무 당시의 모습>


1993년 당시 남진은 '내 영혼의 히로인' 등을 히트시키며 또 한번 주목을 받았으며, 나훈아는 '갈무리',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등 히트곡들을 내고 꾸준한 몸관리와 공연 등이 알려지면서 그 이후로도 더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젊은 층에게 꾸준히 어필이 된 듯. 방송 출연이 없어서 그렇지 어르신들 사이에서 나훈아의 인기는 여전했다. 이런 차이는 남진은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도 워낙에 많은 방송 출연과 공개 활동으로 이미지가 일찍 소비된 반면에, 나훈아는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신비주의 전략으로 포장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공중파 TV에선 매년 명절 때마다 나훈아를 모시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2000년대 이후로 또 다시 둘의 상황은 정반대가 되는데, 남진의 경우 1999년 '둥지', 2005년 '저리가', 2008년 '나야 나' 등의 노래를 히트시키면서 꾸준한 활동을 했다.


나훈아는 간헐적인 콘서트(나훈아 빅콘서트라는 명칭으로 전국 순회 공연)외에는 방송출연 등의 연예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칩거생활을 반복했다. 이후 2006년의 순회 콘서트가 2007년 3월 예정된 단독 콘서트 취소로 마지막 공연이 되었고, 이후 유명한 인터뷰 사건 이후로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2008년 야쿠자 테러설 기자회견과 2013년 이혼 소송과 투병이 알려지면서 심경이 복잡한 듯. 나훈아가 2008년 이후 칩거에 들어간 반면 남진은 2008~2010년에 걸쳐 대한가수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각종 방송에 출연하며 1970년대 당시의 라이벌 구도에 대한 증언 역시 남진의 입장을 중심으로 정리되었고, 만년 2위 가수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게 되었다. 나훈아는 계속 칩거하면서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는 중이었다. 덕분에 나훈아 팬들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측면이 있다. 게다가 2008년 기자회견에서 격한 퍼포먼스를 한 바람에 2013년까지도 계속 패러디되고 있었다. 당시 나훈아의 억울한 상황과 함께 칩거 중이라 명예 실추에도 대응할 수 없는 사정을 감안하면 산 채로 고인드립을 당하는 중이었다.


1972년에 어느 스토커같은 이로부터 테러를 당하여 한동안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다. 깨진 사이다병 파편으로 왼쪽 얼굴을 찔렸는데 무려 72바늘이나 꿰맸고 지금도 그 흉터가 남아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남진이 사주했다는 루머가 돌아서 한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라이벌인 남진 역시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1990년대 TV에 나와 과거를 회상할 당시 가수 위기를 겪었다고...

영화배우 김지미가 그의 재능을 크게 사서 예절, 서예 등 다방면에 걸쳐 가르쳤다. 덕분에 현재도 나훈아는 서예에 능하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연인 사이를 유지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나훈아는 훗날 "김지미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준 사람"이라 평했다. 김지미도 "진정 남편으로 믿고 의지할 남자였다"라고 평했다. 나훈아는 김지미에게 수천만원의 돈을 건네주었는데 "여자 혼자 살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시엔 이혼한 여자 혼자 살기 힘든 세상이긴 했지만 나훈아의 대인배적 면모가 보이는 일화. 한편으로 김지미와 나훈아의 결혼이 화목했던 기간은 별로 길지 않았으며, 김지미는 주위에 간혹 나훈아와의 결혼이 좀 후회된다는 뉘앙스의 말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원래 둘은 평범하게 식당을 경영하며 살고 싶어했지만 나훈아가 다시 가수로 복귀하면서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게 되었다고.

2008년에 일본 야쿠자와 여배우 K 를 놓고 시비가 붙어 고자되기를 당했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소문이 너무 돌자 이런저런 의혹에 대해 답변하기 위해 1시간짜리 기자회견을 열었고 어느 정도 기자회견을 진행하다가 바지를 내려서 증명해보이려 하는 과감한 퍼포먼스를 보였다. 나훈아가 웃통을 걷어부치고 단상 위에 올라가자 당연히 기자회견장이 술렁거리며 셔터들이 미친 듯이 터지기 시작했고 나훈아는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이 증명해주세요. 제가 지금 여기서 딱 5분간 보여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란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 이때 나훈아의 팬들이 그를 굳게 믿는다고 외쳐서 내리지 않게 되었다. 실제로 이런 기자정신에 입각한 반응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당황했던 건지 그도 아니면 다른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를 말리지 않은 기자들의 행동은 맞는 행동이다. 기자에게는 '현장 불개입의 원칙'이 있어 기자회견장이 졸지에 '사건현장'으로 변해버렸어도 당사자에게 '해라' 혹은 '하지 마라'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애초에 그가 그런 말을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때 팬들이 믿는다고 외쳐서 기자들이 개입할 틈도 없었다. 

거침없긴 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명을 한 덕에 스캔들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들으면 퍽이나 웃긴 모습 같지만, 실제로 나훈아의 용행에 압도되어 이런 류의 소문은 쏙 들어갔다. 그 외에 인터뷰로 기자들이 펜대로 연예인들을 죽인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당시 루머에 휩싸였던 후배 배우들에 대해서도 강력히 언급했다.



당시 모습이 수염을 멋지게 기른 것이 참 미중년이다.

대중문화기자 백은하는 "땅으로 내려왔던 셀러브리티가 그렇게 다시 하늘에서 빛나는 별로 올라갔다."라고 그 '퍼포먼스'를 평했고, 음악평론가 차우진은 "이런 카리스마는 어떤 지도자에게서도,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과연 교주님이라 외칠 만하다."라며 극찬했다.

이와는 별도로 개그맨 황기순의 첫번째 부인 불륜상대가 나훈아였다는 소문이 한 때 돌았지만 그냥 루머인 채 끝났다.

2012년 12월에는 인도와 티베트를 돌아다니며 심신을 달래고 있었다고 한다. 지인의 말에 따르면 거의 도사의 모습이 됐다고.

2013년 1월, SNL 코리아 최민수 편에서 최민수가 패러디하기도 했다. 다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뭘 패러디 한 건지도 알 수 없게 자연스럽게 스토리에 녹였다.

2013년 4월 세번째 부인 정수경과의 이혼 소송 중. 1심에서 승소하였으나 정씨 측에서 상고를 결정한 듯. 또한 지병이 있다는 게 알려지고 칩거 생활 중. 양평에 있던 자택도 내놓았다고 한다.


나훈아의 아내 정수경 씨가 2014년 10월 8일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나훈아도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한다.
결국 이혼소송에서 패소를 하였고 법원에서는 12억을 위자료 배상하라고 하였다. 자녀교육으로 인한 오랜 기러기 아빠 생활에 따른 가정불화와 나훈아의 불륜과 가족들을 위한 생활비 미지급이 가장 큰 원인.

야구선수 강정호와 똑같이 생겼다. 특히 사진의 공군 시절도 그렇고 나훈아의 젊은 시절을 보면 더더욱. 강정호의 별명 중 하나가 "목동 나훈아". 하지만 정작 강정호는 이 별명을 좋아하지 않는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 따르면 삼성일가가 개인적 파티에서의 공연을 요청했을 때 유일하게 거부한 연예인. "나는 대중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대중앞에서만 공연하겠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 표를 끊어라"고 했다고. 더불어 1990년대 연예인들의 정치 입문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자신에게 정계 입문을 권유한 이들에게 거부하면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난 가수가 천직이다." 라고 말한 적도 있다.

또한 스타란 하늘의 별과 같아야 한다며 신비주의를 장려(?)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한가지 일화로 나훈아가 택시를 탄 적이 있는데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가 너무 좋기에 누구 노래인지 궁금해 택시기사에게 물었더니 본인 노래였다고 한다. 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나훈아 자신도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정도로 히트곡이 많기는 하다.

노래방 책에 가장 많은 곡을 올린 가수다. 2위는 쿨.

덕분에 저작권료가 많으면 월 5천만원 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