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 대종상 '애니깽' 시상식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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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대종상 '애니깽' 시상식 사건


2017. 5. 13.

"이것이 정말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제입니까?" 
<일본 영화배우 사토 마사오가 대종상 시상식을 직접 보고 끝나자마자 기자들에게 한 말>

'애니깽' 사건은 원로 영화인들의 아집으로 한국영화 발전에 찬물을 끼얹은 대표적인 사건이며, 대종상 영화제의 최대의 흑역사이자, 한국 영화 최고의 스캔들이다.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애니깽》을 본따서, 일명 애니깽 사태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6년 4월 27일에 열린 제34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단 한 번도 관객들에게 선보인 적 없었던 영화 《애니깽》이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 등 주요 부분을 수상하면서 영화계는 물론이고 국내 영화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워낙 대형 사건이다 보니 20년이 넘은 지금도 많은 영화팬들의 뇌리에 기억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만큼 대종상 영화제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90년대 한국 영화 최악의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대인 지금도 충무로의 큰 사건사고 내역을 언급하면 반드시 먼저 등장할 정도로 파급력이 넘사벽급이다. 대종상 시상식 자체가 막장 시상식이다 보니 매년 빠지지 않고 소환되고 있다.


시작은 1996년 3월 예심 심사부터였다. 먼저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던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예선에서 탈락하였다. 이어 1995년에 개봉하여 비록 큰 흥행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여성의 억압과 욕망을 사실적으로 연출했다는 평단의 찬사를 얻었던 박철수 감독의 《301, 302》가 예심에서 불이익을 받아 박감독이 차기작으로 내놓은 《학생부군신위》의 심사를 거부하며 수거했다는 소식이 충무로에 퍼지기 시작했다. 예심 심사득표 결과 《꽃잎》이 1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근소하게 2위, 《은행나무 침대》가 3위를 차지했고, 《애니깽》은 단 한 표도 얻지 못했다. 위의 두 편이 좋지 않은 평을 받은 이유는 바로 집행위원들 때문이었는데, 그들의 사고방식이 갈수록 변화하는 한국영화 제작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할정도로 꼰대기질이 심했기 때문이다. 예심 심사 결과 상위 3편의 영화도 집행위원들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평을 받았지만 다행히 일반관객들 평에서 좋은 평을 얻어 예심을 통과했다.


본격적인 문제는 그 다음부터. 아직 편집조차 안 끝나 개봉도 안 된 영화 《애니깽》이 주요 부분에 후보로 올랐고, 결국 본선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당시 영화계와 언론에서 주요 부문 수상이 유력하다고 예측했던 작품을 살펴보면

박광수 감독, 문성근, 홍경인 주연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강제규 감독, 한석규, 심혜진, 진희경, 신현준 주연의 판타지 《은행나무 침대》
장선우 감독, 이정현, 문성근 주연의 《꽃잎》

그러나 《전태일》은 기획상, 《꽃잎》은 여자 신인상만을 수상하였으며, 무려 14개 부분에 올라서 주요 부분 수상이 예측됐던 《은행나무 침대》는 신인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데에 그쳤다. 같이 최우수작품상에 오른 《본 투 킬》은 단 한 개의 상도 타지 못했다. 특히 남우조연상은 모두가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있던 《은행나무 침대》의 신현준 대신, 《학생부군신위》에 출연한 배우 김일우에게 돌아갔다. 이것은 무관에 그친 박철수 감독을 의식해서 보상의 의미로 준 것이라는 해석이 팽배하다.

결정적으로 시상에 나온 일부 원로배우 및 영화계 인사들은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젊은 감독 및 배우들을 향해 '우리가 있었기에 너네가 있는 거다'는 꼰대 발언으로 불쾌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최우수작품상을 시상하러 온 원로 영화인들은 대놓고 젊은 영화인들에게 일갈을 가하기도 했다.

원칙상으로 대종상 후보작으로 출품할 수 있는 자격은 단 하루라도 유료 상영을 해야 하며, 몇 명이라도 관객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출품이 가능하다. 그러나 《애니깽》은 이를 가볍게 무시하고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후보작으로 출품했다. 촬영 도중 간암으로 사망한 배우 임성민을 대체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붐 마이크를 치우지 않은 날것 그대로 예선 심사에 출품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선에 진출한다. 본선에서는 어느 정도 작업을 하여 심사를 했으나 완성도는 최악이었다. 시상식 이후 '당장 개봉하라'는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1997년 12월에 개봉은 했으나... 완성도는 시망. 관객수는 200명이 되지도 않는다. 그나마 나온 결과물마저 돈이 없었는지 중간에 다른 흑백 영상 필름을 집어넣기까지 했다. 사실상 김호선 감독에게 공로를 기리는 의미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줬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그가 연출한 영화들(겨울여자, 서울무지개, 사의 찬미)이 유난히 대종상에서만 작품상, 감독상을 휩쓸어갔었고, 애니깽으로 대종상에서 정점을 찍었다는 게 중평.

정작 수상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할 김호선 감독은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시상대에 서서 '내가 받아야 할 상을 받았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수상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감독상 수상부터 객석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당시 사회를 맡은 손범수와 배우 지수원은 차츰 굳은 표정으로 진행을 했다. 최우수작품상으로 호명되자 객석의 박수 소리는 거의 나지 않고 참석한 영화인들의 거센 항의 소리가 났으나 다행히(?) 방송에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애니깽》이 안기부의 후원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34회 대종상 시상식은 《애니깽》의 한판승으로 끝날 것이다는 소문이 예선심사부터 나오기 시작했고, 본선 시상식은 결국 소문대로 끝났다. 《애니깽》은 합동영화사가 제작한 영환데, 이 영화가 안기부의 협조(제작비 10억원)로 제작한 영화라고 당시 합동영화사 사장이자 서울극장 사장인 곽정환이 직접 밝혔다. 그리고 영화 《애니깽》이 대종상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주요부분에서 수상을 했을 정도면 작품성이 뛰어난데, 왜 예선에서 홀대받았는지 이해할수 없다는 말도 했다.

《애니깽》은 이어령이 장관시절부터 기획된 영화였다는것이 월간 키노에서 드러났다. 북한 영화 《피바다》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제작비 중 정부지원금도 포함되었다는 것이 1995년 9월 27일 국회문공위원회 영화진흥공사 국정감사장에서 드러났다. "대종상 영화제는 어용 영화제다"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고 결국 그 권위는 점점 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

김호선 감독은 경기도 이천시에서 후원한 춘사영화제 운영 과정에서 각종 비리를 저질러서 검찰에서 기소했으며, 2013년 영화감독협회에서 제명당했다. 그 외에도 대종상 영화제, 신상옥 영화제 등 김호선 감독이 운영에 관여한 행사마다 비리 의혹이 산더미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1983년 미성년자 성범죄로 구속되었던 전과까지 있다. 피해 여성이 당시 중2의 소녀였다고 한다. 연기 강습을 핑계로 피해 여성을 여러 차례 성폭행하였고, 피해 여성은 부모에게 피해 사실을 숨겨오다 피해 여성이 김호선의 아들을 출산하자 부모가 김호선의 범죄 사실을 알게 되어 경찰에 고소한 것이다.

어이없는 수상 결과에 영화평론가들과 영화인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그동안 영화계 내부에서만 쉬쉬하던 이야기들이 씨네21 1996년 5월 14일자 제 52호에 특집 기사로 실렸고, 웬만하면 수상내역만 보도했던 지상파 뉴스에서도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이로 인해 후원 기업이었던 삼성그룹이 1996년 말에 철수해버렸고, 결국 후원사를 구하지 못하다가 쌍방울이 극적으로 나서면서 다음해인 1997년 35회 시상식은 쌍방울 계열사인 '무주리조트'에서 열렸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터지고 쌍방울마저 부도나는 바람에 다른 후원자를 급하게 찾았지만, 경제위기 와중에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서 1998년 시상식은 열리지 못했다. 그래서 1999년 36회 시상식은 출품작이 1998년부터 제작된 영화들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파급력이 일반 대중들까지 퍼지다 보니 월간지 '스크린'에서 전문가와 영화, 방송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가상으로 수상 내역을 설문조사했다. 결과는 이렇다


작품상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감독상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박광수 감독
남우주연상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홍경인
여우주연상 - <301,302> 방은진
남우조연상 - <은행나무 침대> 신현준
여우조연상 - <개 같은 날의 오후> 송옥숙


위 설문에 대한 답변으로 '애니깽'을 언급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후문이다. 

대종상 영화제의 총 책임을 맡은 한국영화인 협회, 한국 영화배우 협회가 급격히 발전하는 한국 영화판에서 본인들이 설 자리가 좁아지자 저지른 병크라는 해석이 많다. 문제는 행사를 진행하는 과정을 담은 진행일지, 즉 백서도 없다는 것이다. 당시 협회 이사를 맡은 원로배우 김지미는 개판이 된 대종상 시상식에 대해 지금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외려 자신의 잘못을 비판하는 젊은 영화인들을 비하하는 내용의 인터뷰까지 했다. 참고로 두 협회 모두 원로 영화인, 원로 배우들이 주가 되어 정권에 빌붙는 형태를 취한다고 알려졌고 이런 이유로 현역에서 활동하는 배우 및 영화인들은 오히려 외면하고 있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한국 영화계는 80년대 중반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박광수, 장선우 감독을 위시한 신진 세력들이 등장하여 조금씩 물갈이가 되고 있었고, 90년대 중반부터 기존 세대들과는 완전히 다른 감수성과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들이 무섭게 등장하고 있었다. 위에 언급된 장선우, 박철수, 홍상수 감독들이 대표적으로 이들은 전통적 충무로 환경에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영화를 공부했거나, 외부에서 불쑥 등장한 인물들로 순식간에 젊은 세대의 시선을 사로잡아서 한국 영화의 미래로 주목받는다. 강우석, 강제규 같은 충무로 출신들도, 선배 세대들과는 완연히 다른 성향을 보이면서 철저하게 사전기획에 입각한 영화제작 시스템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하는 신인 영화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에 개봉한 《장군의 아들》을 시작으로 그간 안성기, 강수연으로만 인식되던 한국 배우층이 영화 오디션에서 합격한 신인들과 TV 드라마에서 활약한 탤런트들이 충무로로 몰려들었고,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배우들도 영화계에 진출하면서 조금씩 세대 교체가 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문화 산업의 가능성을 보고 대기업들이 투자에 나서면서 1950년대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충무로 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1996년 이 애니깽 사태와 시상식장에서의 꼰대 발언은 자신들과는 완전히 다른 신세대의 출현에 위기감을 느낀 노땅들이 영화판 내에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벌인 수작이라는 추측이 팽배하다.

1990년대 한국 영화계의 세대교체기 이후 신진 영화인들과 거대자본의 결합으로 《쉬리》, 《JSA》, 《친구》 등의 흥행작들이 폭발하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 와중에 1990년대 이전 영화인들은 임권택, 안성기, 박중훈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도태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영화판에서 밀려난 자칭 원로 영화인들이 대종상 하나만 붙잡고 감투질이나 하면서 이권을 챙기느라 자기들끼리 이전투구나 하는 짓이다. 이런 흐름이 가속화되면서 대종상 영화제의 권위는 19년 후, 역대급 병맛 영화제로 한없이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감독 및 배우층이 얇고 정부 후원을 받아서 제작하던 1950~1980년대 중반까지 활동했던 꼰대 영화인들이 한국 영화의 발전과 함께 세대교체가 되면서 갈 곳을 잃어가게 되자 병신짓거리를 저지르다가 34회 대종상 시상식을 계기로 제대로 사단이 크게 난 것이다.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 중에서는 《은행나무 침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꽃잎》 그리고 문제작 《애니깽》이다. 《은행나무 침대》는 철저하게 사전기획속에 금융권의 투자를 받아서 제작했으며 소재 또한 기존의 한국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판타지였다. 《전태일》과 《꽃잎》은 오랜기간동안 대중문화에서 철저하게 금기시된 5.18 민주화운동과 노동자라는 소재에 과감하게 도전해서 성공하였다. 이렇듯 전자의 세 편은 기존 한국 영화의 제작 형태를 벗어나서 다양한 장르와 소재로도 충분히 관객들의 성향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으며 제작진 및 출연배우 대부분이 젊은 신진급이었다.

반면에 《애니깽》은 제작과 주연배우 대부분 원로 영화인들 앞의 세 편의 영화들이 평단과 관객들의 지지를 한 몸에 얻으면서 충무로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자 우선 대종상 시상식에서부터 이 작품들의 수상을 가로막고 새롭게 자라는 영화인들의 싹을 밟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새로운 변화에 목말라하던 대중들까지도 격한 반발에 나서게 된다.

최우수 작품상을 시상하러 나온 원로배우 장동휘의 발언은 이 시상식이 어떤 시상식인지 확인사살을 시켜주기도 했다. 사건 당시에 대종상을 취재했던 연예, 영화부 기자들이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 자자하다.

"평소 설날이 되면 많은 선후배 영화인들이 나에게 찾아와 세배를 합니다. 앞으로도 그래주시길 바랍니다."

장동휘는 2005년에 사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2015년 다시 한 번 재현된 막장 시상식의 사회를 맡은 신현준은 이 애니깽 사태의 최대의 피해자였다. 당시 주요 부분에서 수상할 거라고 예상했던 《은행나무 침대》가 《애니깽》의 수상 개수도 못 미쳤었고, 게다가 100% 수상이 확실해 보였던 남우조연상 부분에서 신현준이 수상에 실패함과 더불어, 최우수 작품상이 《애니깽》으로 확정된 순간 그가 당황하는 표정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총체적 난국의 대종상 영화제의 사회를 5년째 버젓이 맡았고, 배우가 아닌 진행자로서의 행보만 보여준 덕분에 수많은 영화인들과 일반 대중들에게 안 좋은 이미지로 낙인 찍히고야 말았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런 그의 행보가 꼰대 행세를 하는 일부 선배 배우들의 행보와 너무 닮았다는 말도 있다. 더 이상 배우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대중들에게 인정받기 힘든 상황에서 그가 현재 직위를 맡고 있는 '영화배우 협회'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나 매년 안습한 진행으로 욕을 먹는 대종상 시상식도 몇 년째 진행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원로 영화인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이 많이 목격된다는 점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