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 최악의 오판 '임팔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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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 최악의 오판 '임팔 작전'


2017. 5. 6.

임팔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3월 15일부터 7월 1일까지 버마(지금의 미얀마)와 인도 국경 지대에서 벌어진, 일본군 최악의 작전이자 흑역사이다.

"보급을 적에게서 탈취한 것으로만 채우려고 하면 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 국내에선 무타구치 렌야의 만행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런 정신 나간 작전이 승인된 것은 자기 파벌과 자신의 안위만 생각한 일본 육군 높으신 분들의 책임도 크다.


보통 일본군의 작전 명칭 작명은 대부분 카타카나 글자만 하나 붙여서 ○호 작전이라고 한다. 따라서 일본군에서 붙인 작전명은 '우호작전'ウ号作戦 ウごうさくせん이고 Battle of Imphal의 번역상 '임팔 전투'로 기재하는 게 정상이지만 한국에서는 '임팔 작전'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 간혹 임펄 작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밑의 사람들이 반대했음에도 무능한 높으신 분이 밀어붙였다는 점과, 보급을 적에게 탈취해서 채우려 했다는 것과, 결국 패망을 더욱 가속화시켰다는 점에서 독일의 아르덴 대공세와 유사점이 있다.

차이점이라면, 독일의 경우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이미 약체화된 상태에서 없는 걸 다 긁어모아 마지막 올인을 한 것이었고, 임팔 작전의 경우 굳이 할 필요도 없던 작전을 하여, 버마-벵갈 전선에서 호각을 이룰 정도로 나름 규모 있던 일본 육군 전부를 말아 먹었다는 것이다.

임팔은 인도 북동부 아삼 지방에 위치한 곳으로 연합군이 중국으로 보내는 보급로의 시작이라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그렇기에 일본은 이곳을 공략하면 중국 국민당군을 압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인도까지 진격해서 영국군을 저~ 멀리 쫓아내는 데 성공하면 인도는 찬드라 보세의 주도하에 독립과 동시에 추축국에 참전하게 된다고 볼 수 있었다. 추축국 가입은 없더라도 영국군이 인도에서 사라지면 인도 독립만큼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1942년 8월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된 시점부터 이미 임팔 공략에 대한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방위체계가 부실한 데다 현지 사령관들이 반대하여 일단 공략 작전은 중지되었다.

그런데 작전 구상 자체를 중지한 것이 아니라 작전 연구는 계속하게 했다.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

일단 일본군이 버마 지역 방위부터 굳히기로 하고 그 준비를 하는 동안 연합군이 버마 북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 육군의 윙게이트 장군(Orde Charles Wingate, 1903–1944)이 이끄는 공수부대가 버마 서북부에서 게릴라 작전을 시작하고 연합군 정찰 부대가 나타났다. 일본군은 이것이 대대적인 공세의 시작이라 여기고 재편성을 시작했다. 버마 방면 사령관에는 육군 중장 가와베 마사카즈가, 그 휘하에 제15군과 제55사단, 그리고 직할 부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제15군 사령관에 문제의 무타구치 렌야가 임명되었다.

일본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무타구치가 15군 사령관으로 임명될 당시 대규모 인사 이동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15군 내 무타구치 외에 현지 사정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무타구치의 독단적인 전횡이 가능했다고 한다.

임팔작전 초기에 어이없게도 무타쿠치 렌야는 사단장일 때 당시 다른 사람이 아삼 지역 진공 작전을 계획하자 무모해 보인다고 반대했었다. 근데 자기가 지역 사령관이 되자 임팔 작전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아삼이나 벵골에서 장렬히 죽고 싶다"라고 노래를 했다고.


참고로, 1942년에 계획할 당시가 오히려 그나마 임팔 작전 때보다 일본군에게 더 승산이 있었다. 동남아 전선이 무너지면서 영국군 잔존부대는 간신히 영국령 인도로 퇴각한 뒤 막 전력을 가다듬고 있었고, 당연히 인도의 방위력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임팔 지역을 공략하는 게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한창 일본군의 전력이 정점에 달한 1942년 초 당시와는 달리, 임팔 작전이 시작된 1944년 초에는 이미 연합군이 뉴기니를 탈환하고 일본의 '절대 국방선' 인 마리아나 제도 코앞까지 당도해서 동남아 점령지대와 일본 본토와의 해상 운송로가 끊기기 직전이었다. 처음부터 제대로 보급 작전을 구상해도 실전에서 과연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들 판인데, 무타구치는 그조차도 무시한 것이다.

무타구치는 중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원흉이었다. 당장 제15군의 상급부대는 버마 방면군. 버마 방면군 사령관은 육군대장 가와베 마사카즈로 무타구치가 독단으로 노구교 사건을 일으켰을 때에도 직속 상관이었다. 그 내막은 더욱 가관인데 자신이 속한 계파가 정치적으로 대패하면서 노구교 사건 당시 중국으로 부임한 시점에서 이미 좌천당한 신세였다. 노구교 사건 당시 이 일을 계기로 좌천당한 자기 신세를 만회해보려는 심산으로 공격 명령을 내렸고 마찬가지로 같은 계파였던 가와베도 이를 묵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론은 역시 일본군의 전매특허인 파벌주의의 폐해로 이 '실책'을 만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이미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버마 북부에 영국군 게릴라 부대가 출몰하자 이를 역전의 기회로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당연히 이 게릴라들은 걸어서 온 것이 아닌 비행기로 공수된 것이지만 무타구치는 임팔 작전을 강행한다.

그리고 이 작전에 대한 반대의견이 나오자 자신의 작전에 칭기즈 칸이 했던 '약탈 보급'의 방식을 취할 것이라 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적의 것을 빼앗아 전리품으로 확보하는 건 정석 중 정석이긴 한데 이건 엄연히 공수부대로 하는 작전이 아니고 3개 사단에 이르는 정규전 병력으로 치루는 작전이다. 아사다 테쯔야나 아카기 시게루 급의 타짜라도 자기 판돈 정도는 준비하고 그걸 기본으로 작전을 짜는 법이다. 게다가 이렇게 조달할 수 있는 품목은 현대전에서는 어디까지나 식량까지고, 자군의 무기에 맞는 탄약은 조달 못하는데 일본군의 무기체계는 자군 내에서조차 호환성이 극악이었다. 더구나 식량도 약탈에만 의존하게 되면 항상 필요한 양 이상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에 식량 부족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적군도 바보냐? 그것도 아니다. 난전 중이라면 모르지만 후방에 있는 보급 지역에는 이미 질 거 같으면 후퇴하면서 챙기거나 챙기지 못한 보급품들은 적들이 못 쓰게 파괴할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청야전술에 패배하게 된 군대들조차도 이런 멍청한 발상으로 출발하진 않았다. 그리고 만약 적군까지 보급은 적에서 취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빈손으로 왔다면  정말로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저 '식량'으로 쓰겠다는 코끼리와 소, 말은 대개 점령지에서 조달하는데 먹이도 제대로 안 주고 부려먹은 데다가 원래 종자들이 장거리 이동을 잘 안하는 종들이라 먹은 소보다 지쳐서 객사한 소가 더 많았다고 한다... 일부는 강을 건너다가 떠내려가기도 하고 산맥을 넘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포격에 놀라 도망치기도 했다... 심지어 사료 문제를 들먹이자 "이것(가축)들은 초식동물이니 길가의 풀을 먹여 사료 걱정을 할 필요 없다"라고 하기도 했으니 뭐... 그러나 군부대의 보급과 같은 대규모 수송에 동물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길가의 풀'은 조속히 고갈되는 데다 독초 등을 뜯어먹고 쓰러질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마초 역시 보급해야 한다는 점은 이미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군이 경험한 사실이다. 사실 이미 삼국지에서도 마초 보급을 따로 준비하는 대목이 나온다. 참고로 부피가 크고 무거운 마초를 따로 준비할 경우 그 마초를 실을 소와 말을 더 동원해야 하고 당연히 보급 관리에 애로사항이 더욱 꽃핀다 당연히 마초를 수송하는 소와 말을 먹일 마초를 준비하면 실을 것이 더 늘어나니 소와 말을 추가해야 하고, 다시 추가한 소와 말을 위한 마초를 준비하면 실을 마초가 늘어났으니 다시 소와 말을 추가하고... 이렇게 계산을 하다보면 어느 시점에서 소와 말을 추가하지 않아도 되긴 하는데 결과적으로 준비해야 할 소와 말과 마초가 생각했던 것보다 3~4배 정도 불어나게 된다.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현대전에서 항공기의 중요성을 망각했다는 것은 둘째로 치고라도 정작 영국 공군은 포위된 자국 육군 진지에 계속 항공 보급으로 각종 물자를 쏟아부었다. 당시 굶주린 일본 육군들까지 그 항공물자가 자기 쪽으로 떨어지기만을 고대하면서 운 좋게 손에 넣으면 처칠 급여라고 불렀을 정도이다. 게다가 당장 이 작전의 원인이 된 영국군 게릴라들도 당연히 공수된 부대다. 그리고 항공지원이 없는 보병은 적의 제공권 하에서는 보통 큰 피해를 입고 위축되어 작전을 하는데 그 상황이 실제 일어났다. 반면 연합군이나 독일군의 경우는 항공지원이 잘 결합되어 큰 전과를 올린 경우가 많아 심하게 대조된다.

"뭐라고? 그딴 걱정은 하지 마. 적을 만나면 총구를 하늘에 대고 3발만 쏘아 보라고. 그러면 자동으로 항복하게 되어있어."

15군 사령부 작전회의에서 '보급이 원활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지하게 염려하는 의견을 제시한 15군 보급참모 우스이에게 농담이랍시고 한 소리다. 무타구치가 적인 영국군을 얼마나 터무니 없이 얕보고 방심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의 모든 명언들을 버로우시킨 희대의 명언이 있었으니, 일선 부대에서 보급품이 모자란다고 하소연하자...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이 말의 경우 "일본인은 주로 채식을 하기 때문에 식량이 떨어지면 초근목피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또는 "일본군은 원래 초식동물인 고로 주위를 둘러보면 풀이 이토록 많으니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그 말이 그 말이다. 당시의 참전했던 군인들 중 한 명은 풀을 가리키면서 "식량이 사방에 널려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풀을 뜯어먹으면서 전진하면 된다"라고 말했다는 증언도 남겼다. 참고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식량이 떨어지자 주변의 식물을 아무거나 집어먹다가 전멸한 사례는 흔하다. 게다가 정글은 사람들의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녹색 사막이라고 부를 정도로 생산력과 인구 부양 능력이 극도로 떨어지는 지역인데 사람이 먹을 만 하거나 많이 나는 식물은 적지만 독성을 가진 식물은 많다. 식물에서 눈을 돌려 벌레나 작은 동물을 사냥한다고 쳐도 그걸로 사단을 이루는 1만 명 이상의 식량이 될 리가 있겠는가? 애초에 저런 것만 먹으면 몸이 버틸 수가 없다. 그 베어 그릴스도 구조받을 때까지 살아남는 시간을 연장 하려고 벌레를 먹는다. 제대로 된 한끼 식사로 벌레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얘기이다. 애초에 군인들은 보급을 잘 받고 식량을 잘 챙겨먹고 해야 전투력이 생긴다. 그리고 극지 생활하는 사람들처럼 전투도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하기 때문에 평상시 성인 섭취량보다 배는 먹어야 한다. 전투식량이 맛은 없어도 열량만큼은 엄청나다는 걸 생각해보자. 근데 이분은 보급이라고는 하나도 모르고 거기에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않는데 군인들이 잘 버티고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는 정글에서는 전투력 유지와 생존을 위해 잘 먹고 체력을 보존하는 게 더더욱 중요한데 풀만 뜯어먹으라는 것은 이미 그 시점에서 전투력을 포기한 수준의 발언이다.

임팔 작전은 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서 인도의 북부인 아삼을 기습해 직접 압박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작전 입안과 강행 자체가 자신의 체면 때문이었다고 주위에서 증언했다. 게다가 무타구치가 제시한 작전 기한은 불과 15일밖에 안된다. 물론 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서 인도의 북부인 아삼까지 15일만에 갈 수 있을 리 없지만, 보병 개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식량이 15일치이기 때문에 작전 기한을 15일로 잡은 것. 이렇듯 보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작전이었다.

물론 연합군이 갑자기 정신을 놓고 미친 짓을 했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에게는 대단히 불행히도, 연합군은 매우매우 정상이었다.

서부의 정면에는 길포드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 보병 3개 사단과 기갑 1개 사단, 윙게이트 장군의 공수부대 6개 여단이 배치되었고 북부에는 스틸웰 장군의 미, 중군 2개 사단 반, 동부에는 위립황 장군의 중국군 14개 사단이 배치되어 3방면으로 포위 태세를 갖추는가 하면 유력한 공군 부대도 공격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특히 중경으로 보낼 군수물자 수송로인 레도 공로(Ledo Road)와 버마 공로(Burma Road)를 건설하고자 알래스카 공로 2,500km를 8개월 만에 완성한 알로 스미스 공병대가 파견되었다. 이 레도 공로는 인도의 레도에서 중국운남성 쿤밍(곤명)에 이르는 1,079km의 군용 도로이며, 버마 공로는 미얀마 라시오에서 쿤밍까지 이어지는 1,154km의 군용 도로로 레도 공로는 동북 인도의 유전지대에서 생산된 연료를 운반하기 위한 것이며 버마 공로도 역시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한 목적. 비행기로도 충분히 수송이 가능했지만 비행기로 수송되는 연료=비행기 사용 연료였기에 연료 소비를 줄이기 위해 도로를 뚫은 것.

버마 공로를 상징하는 유명한 '24 커브'. 정말 크고 아름다운 도로다. 저 사진을 보고 "왜 길을 구불구불하게 내요? 그냥 일직선으로 내지"라는 말이 많으나 저 도로는 산비탈에 낸 것이다. 당연히 일직선으로 내면 차량은 커녕 사람도 지나가기 힘든 지독한 내리막길 = 반대 방향으로 가면 지독한 오르막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부러 비스듬하게 내는 것.


연합군은 레도 공로를 '도쿄로 가는 길'이라 불렀으며 이 도로가 일본군 점령지를 가로질렀기 때문에 '싸우면서 건설하고 건설하면서 싸우는' 작전을 펼쳐야 했다.

또한 스틸웰 장군은 태평양 방면의 해상공세에 호응하여 반격 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중국군 90개 사단을 미국식 장비로 개편하는 작업도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임팔 작전을 준비하면서 그 결행을 망설이고 있던 43년 9월말, 연합군의 선봉부대는 어느새 후콩 계곡의 북쪽에 나타나 계곡 일대를 정찰 중이던 일본군 1개 중대와 마주쳤다.

후콩 계곡(Hukawng Valley)은 인도 국경을 따라 펼쳐진 동서 30~70km에 남북으로 200km나 뻗은 대정글지대로 우기에는 수많은 하천으로 급류가 흘러 도처가 늪과 연못으로 변해버리는 곳이다. 협곡은 온갖 부패물에서 나오는 독기와 코브라를 비롯한 독사, 도마뱀, 독거미, 전갈, 거머리들이 들끓으며 주변의 산지에는 표범이나 호랑이가 득실거렸다. 원주민들도 맹수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1943년 10월 30일, 일본군이 계곡에서 마주친 것은 중국군 제38사단의 정찰부대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무타구치는 즉시 제18사단 예하 제56연대를 급파하여 중국군 제38사단을 포위하려 했다. 1개 사단 병력을 1개 연대 병력으로 포위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군이 지금까지 만난 당나라 군대 중국군과는 전혀 달랐다. 무장도 아주 잘 돼있었고 특히 왕성한 전투 의지는 일본군을 매우 놀라게 했다. 일본군 제56연대는 밀림의 중국군을 포위하여 압박해 들어갔으나 중국군은 전차와 중화기로 원통 진지(Admin Box)를 구축하여 공중 보급을 받으면서 방어하고 있었다. 이 원형 진지는 영국이 고안해낸 전법으로서 종래와 같이 방어진의 일각에 구멍을 뚫고 돌입하여 분단한다는 전법은 먹히질 않았다. 특유의 반자이 어택을 감행해 보았지만 결과는 뻔했다.

결국 후퇴를 하게 된 일본군은 역시나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당시 중국 중앙일보의 종군기자로서 이 전투에 참가했던 장인중(張仁仲)은 당시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마인칸 교외에서 연합군에 투항해온 일본군의 영양실조는 놀라울 정도로 심했다. 개중에는 문자 그대로 굶어 죽기 직전인 자도 있었다. 먹을 것을 던져주니 몹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그것을 받아 먹었는데 10일이고 1개월이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나무 뿌리나 벌레를 잡아 먹으며 연명했다고 한다."

결국 일본군은 전사자 32,000명, 병사 및 아사자 40,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이는 각 사단마다 90%에 가까운 손실로 전멸을 넘어 섬멸되었다. 반면 연합군의 피해는 사상자 17,500명이었다.

당연히 사토 중장은 군법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사토 중장은 오히려 이걸 별렸다고 한다. 재판장에서 무타구치와 그 일당의 추태를 낱낱히 까발릴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사토 중장에게 정신병판결을 내렸고, "정신적으로 하자가 있는 자에게는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예편시켜버렸다. 이는 제15군, 버마방면군 등 상부조직과 군 장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결과적으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임팔 작전의 실패 책임과 소재를 육군 상부가 스스로 감추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작전 책임자인 무타구치는 15군 총철수 이전에 퇴각로 '시찰'을 명목으로 먼저 도망간 사실이 드러났지만 겨우 예비역에 편입되는 경미한 징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장으로 승진했다. 또한 그의 상관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으며, 더러는 승진까지 했다! 

자신도 병을 얻어 후송된 야마우치 마사후미 사단장은 임종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공격할 탄환도 없고 지금은 호우와 진흙 속에서 병과 기아에 전투력을 상실했다. 제1선부대가 처한 이런 현실은 군과 무타구치의 무능 탓이다."

임팔 작전의 실패로 인해, 그 전까진 호각지세였던 일본군의 버마-벵갈 전선은 붕괴해 1945년 3월에는 아웅 산 장군이 이끄는 버마국방군이 일본군을 몰아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당시 버마를 책임지고 있던 스틸웰 장군도 무타구치 만큼은 아니지만 전투 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일관하며 일본군을 얕잡아보고 무리한 공세를 추진하다가 1941년에 버마를 날려버리고 걸어서 버마 국경을 넘어 달아나는 추태를 보인 무능한 인간이었고 이 치욕을 씻겠다고 중국군 예비대 수십만을 멋대로 차출해와서 이를 갈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놈의 오만한 근성 어디 버리질 못하고 버마의 일본군이 얼마 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며 멋대로 공격했는데 실제로 버마의 일본군은 스틸웰 주장의 3~5배에 달했다. 하지만 때를 맞춰 무타구치가 자폭해준 덕분에 그는 역사에서 까일 거리를 겨우 하나 줄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