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난 이유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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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난 이유를 알아보자


2017. 5. 5.

1773년 12월 16일 밤, 미국 식민지의 주민들이 영국 본토로부터의 차(茶) 수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으켰던 사건. 요약하면 영국 정부에서 과세는 크게 낮춰 주었으나 식민지인들의 본토에 대한 반발심은 생각보다 훨씬 컸고, 그 반발심이 '홍차 조례'에 의해 일거에 폭발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사건 자체는 프랑스 혁명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처럼 후대의 필요에 의해 윤색된 사건이기도 하다. 한 예로 티 파티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은 사건이 일어난지 50여년 후인 1830년대였고, 그 이전까지 이 사건은 '홍차 파기 사건(Destruction of the Tea)이라고 불렸다.



직역하면 다과회인데 한국어로 번역할 땐 보스턴 차 사건이라고 부른다. 마치 'Boston Tea Incident'라고 부르는 식인데, 미국식 특유의 위트를 없앤 심심한 표현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냥 원어 그대로 티 파티를 사용하기도 하고, 해당국가에서 '다과회'란 표현으로 번안하거나, 혹은 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곳도 있다. 중국은 '보스턴에서 차를 쏟아버린 사건(波士頓傾茶事件)'이라고 하는데, 외국어여서 이질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파사둔(= 보스턴) 경차 사건'이라는 표현은 당장 한국어와 비교해도 동사 하나가 더 붙은, 한국어로 치면 '보스턴 차 투척 사건' 내지 '보스턴 차 폐기 사건' 정도가 되기 때문에 한국과 큰 차이는 없다.


1755년에 시작된 프렌치-인디언 전쟁은 1763년, 영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영국은 미국에 대한 지배권 강화와 함께 막대한 빚을 얻게 되었다. 당시 영국 정부의 부채는 세수 총액의 절반이었던 1억 3,000만 파운드로 어마어마했다. 이에 1764년부터 설탕세, 1765년에는 인지세를 내게 하면서 미국 식민지인들은 대거 반발, 대규모 폭력 사태를 일으켰고 결국 영국은 1766년 이를 철회하기도 한다. 또한 1770년 2월 22일에는 크리스토퍼 세이더라는 미성년자가 세관 직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 동년 3월 5일 보스턴 학살 사건이 발생하는등 민심도 흉흉했다.


여튼 반발에도 세금을 부과했음에도 세수가 부족하자 1773년 봄, 영국 의회에서는 세수확대차원으로 홍차법을 제정, 이를 미국 식민지에도 적용하게 된다. 당시 홍차는 중국->네덜란드-(밀수)->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유통되어 네덜란드의 밀수업자들이 이득을 보는 구조였다. 반면 영국 정부가 제시한 홍차법은 중국->동인도회사->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유통망을 형성해 영국은 세수를 확보하고, 영국민들과 식민지배인들은 거품이 빠진 정가에 홍차를 구매할수 있게 하는 법안이었다.

영국법을 통해 동인도회사가 직접 미국식민지에 홍차를 납품하게 되었고, 이 덕에 미국 식민지인들은 기존의 홍차가격의 절반으로 홍차를 먹을수 있게되었다. 당시 식민지인들은 이 법안에 큰 불만이 없었다. 여기까지 보면 도대체 왜 반발한거지?라고 생각할수 있는데 불만을 가진 이들은 식민지인들이 아니라 미국의 홍차 상인들이었다. 당시 홍차상인들은 밀수입을 통해 세금을 내지 않았고 이를 통한 부를 축적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홍차법이 통과가 되니 자신들의 밥줄이 꾾기게 생겼으니 당연히 분노가 일수 밖에.

그리고 홍차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정부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식민지의 지식인들이었다. 당시에는 북미 대륙의 여러 영국 식민지들에는 각각 따로 총독이 파견됐고 각 식민지들은 독자적인 정부와 의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 식민지들을 통솔할 본국 정부는 대서양 건너편에 있었으므로 식민지들은 서로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미국은 영국에서 다른 식민지들보다 자율성을 좀더 부여받았다. 그래서 영국에서 정책을 제정 및 실행할때 각 식민지배의 총독과 협의 끝에 결정되었는데, 설탕세부터 시작한 세수 확대 법안은 모두 영국 의회 독단으로 이루어 졌고 직접세를 부과한다는 것을 식민지 자치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아담스의 6촌 형이었던 사무엘 아담스(Samuel Adams). 그는 자유의 아들들 (Sons of Liberty)이라는 집단을 이끌고 행동에 나섰다.
1773년 12월 16일 저녁 7시. 미국 보스턴 항구에 등장한 100여명의 자유의 아들들은 아메리칸 인디언이었던 모호크족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손에는 도끼, 얼굴에는 석탄가루를 바르고 있었는데 어두운 저녁이었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 알아볼수가 없도록 방지한 것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중국에서 수입해온 차가 잔뜩 실린 동인도회사 소유의 무역선이었다. 100여명이 총 3그룹으로 나뉘어 3척의 배에 올라탔고 이들은 선장과 선원을 협박해 화물칸 열쇠를 얻어냈다. 그리고 화물칸에 쌓인 342개에 달하는 상자들을 박살내 그 안에 있던 중국 푸젠 성 우이 산에서 생산된 우이옌(武夷巖)차들을 모두 바다에 버려버렸다. 바다에 뿌려진 우이옌 차의 총 가치는 9,000 파운드로, 현재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16억원에 달한다.

사건의 여파로 얼마 동안 보스턴 앞바다의 색깔은 희미한 갈색을 띄었다고 하며 며칠 동안 찻잎이 떠올라 해변에 밀려왔다고 한다. 주워다 끓여 먹은 사람도 있었다고.

우선 미국과 영국의 반응은 "무슨 짓거리야!!!!" 였다. 심지어 당시 미국식민지의 주요인사인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도 "이건 용서받을수 없는 짓"이라며 대차게 깠다. 특히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 사건으로 영국 측이 입은 손실을 메꿔주자고 했고, 실제로 11억원 가량의 성금을 모으는데 성공, 당시 영국 수상 노스 경에게 가져갔으나 거절 당했다.

머리가 돈 영국은 당연히 "이새키들이 내가 오냐오냐 하니까 기어 올라?"라는 반응을 보였고 이듬해인 1774년 함대를 파견해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메사추세츠 자치정부를 해산시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자치통치에서 직접통치로 식민지배의 방향을 바꾸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물론 이 사건 때문에 독립을 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게 아니다. 애초에 미국식민지 주민들과 지식인들은 독립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원했던 건 과거처럼 식민지의 자치권을 보장해주고, 영국정부의 간섭을 과거처럼 최소화 해달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 독립전쟁을 일으킨 '건국의 아버지'들이 했던 초기 생각도 "국왕 폐하의 눈을 가리는 본국 의회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식이었다. 다만 '대표 없이는 과세도 없다'란 표현은 실제로 영국 본토에서 식민지에 '그럼 대표 보내 봐' 했지만 식민지인들은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는 식민지만의 의회를 원한 것이었으므로 거부했다.

본격적으로 독립하자는 의견이 불붙기 시작한 때는 전쟁 중에 발간 된 토머스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이 대박난 이후였다. 

보스턴 차 사건의 영향으로 미국인들이 "우리는 영국놈들이 마시는 차는 안 먹겠다능. 대신 커피를 마시겠다능." 식의 애국심을 강조하는 듯한 속설은 미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으나 사실 미국에서 커피를 더 많이 마시는 이유는 그냥 커피값이 차값보다 싸서이다. 과거에 차는 인도에서 영국으로 실고 온 걸 다시 미국으로 실어 날랐는데, 커피는 미국 코 앞에 있는 쿠바와 브라질에서 대량 재배되고 있었으니 운송비가 싼데다가 구하기 쉬웠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