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일어난 참사 중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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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일어난 참사 중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2017. 4. 17.

1995년 6월 29일(목) 오후 5시 57분에 발생한 한국 역사상 최악의 건축물 붕괴사고. 6.25 전쟁, 또는 8.15 광복 이후 가장 큰 인명 피해를 안긴 사고이기도 한데, 원인이 부실공사로 밝혀지면서 안전불감증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오죽하면 이 사고가 발생한 직후 원인을 알기 전까진 전 세계의 모든 건축가들이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다. '외부의 충격이 없이' 붕괴된 모습이 이렇게도 처참하다니 말도 안 된다" 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연장선상에서 사고 직후 영국 언론에서는 외부의 충격 없이 건물이 저런 형태로 완전히 붕괴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북한에 의한 테러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원인이 부실공사로 밝혀지며 여러모로 더 충격을 주었다.



삼풍그룹의 회장 이준은 60년대 중앙정보부의 인맥으로 강남 서초구의 군용지를 불하받는다. 이 땅은 70~80년대 강남개발열풍에 급격히 발전하고 이준은 그동안 건설로 많은 돈을 벌었다. 이때 지은 건축물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이다. 이준은 그동안 모은 자금을 바탕으로 1980년대 후반 서초구 외인주택단지를 철거한 부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삼풍아파트를 건설하고 아파트 단지 내 근린상업지구 개념으로 삼풍백화점도 함께 건설하게 된다. 하지만 후술하다시피 단순 근린상업지구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역대급.



여담으로 이 광고 23초쯤에 나오는 어린이는 배우 김민정이다.

삼풍백화점은 1987년 5월 착공하여 1989년 12월 개장했는데 당시 전국 2위 규모의 단일매장이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현재의 롯데월드 건물보다도 조금 더 큰 초대형 건축물이었으며 하얀색 바탕의 기존 백화점 건물 디자인을 탈피하여 외형 색상을 분홍색으로 채택했고 콘크리트와 유리의 조화로 당시에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게다가 초호화 쇼핑몰의 컨셉으로 출발한 삼풍백화점은 지금 기준으로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각종 명품 브랜드들을 대거 입점시켜 1980년대 신흥 부촌으로 떠오르던 강남구, 서초구 지역 고객들을 쓸어모으게 된다. 이게 어떤 수준이었냐 하면 현재의 압구정 현대백화점 본점이나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조차 당시의 삼풍백화점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외관과 달리 실상은 최악의 부실건물이였고 훗날 붕괴 이후, 외국의 건축 전문가들은 이따위로 지어놓고도 6년이나 버틴 사실에 놀라워 했다. 이것이 사실 후술할 무량판 구조 공법의 강점 때문에 그나마 버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이 약한 건물에 치명상을 입힌것은 에어컨 냉각탑으로, 삼풍백화점은 에어컨 냉각탑을 3대 설치했는데 백화점 옥상 동쪽에 설치된 냉각탑이 가동된다면 소음이 어마어마 할 거라는 바로 옆에 있던 삼풍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고, 경영진들은 89년 12월부터 93년까지 이 냉각탑들을 반대편 우면로측으로 옮겼다. 문제는 냉각탑의 무게로 냉각탑 3대를 통합한 무게는 36톤에, 냉각수까지 채우면 무려 87톤으로, 이는 옥상이 견뎌낼 수 있는 하중의 4배가 넘는 무게였다. 설계변경으로 하중을 한참넘기던 상황에서 이 냉각탑은 삼풍백화점의 치명타가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냉각탑은 사실상 삼풍백화점 붕괴의 결정적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이준 일당이 냉각탑을 옮긴 방법도 문제였다. 이런 무거운 물건은 대형 크레인을 사용하여 공중으로 들어서 옮기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경영진들은 돈이 아까워서 냉각탑 아래에 롤러를 장착하여 옥상 상판 위에서 천천히 끌어가며 반대쪽으로 옮기는 되도 안한 행위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결국 대당 15톤이나 되는 그 무거운 걸 이동하는 동안 옥상 바닥과 지지 구조물에 엄청난 부담이 가해졌고 건물 붕괴의 단초 부분이었던 5E 지주 부분에 견디지 못할 하중이 가해졌다.(위 첫, 두 번째 사진) 특히 이동 후에 계속 작동되는 에어컨 실외기의 진동은 불안정한 옥상을 비롯한 5층 구조물에 그대로 전달되어 이들이 견딜 수 있는 한계점을 초과하기 시작했다.(위 세번째 사진)

한 마디로 옥상에 균열을 쫙 깔아준 것이다.

사실 삼풍백화점 붕괴는 어느정도는 예견된 일이었다. 실제로 설계 후 초기 단계에서도 건물 내부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고 미세한 균열이 보이는 등 붕괴의 징후를 여러차례 보여왔었다. 하지만 삼풍백화점 관계자들을 비롯해 상당수가 이러한 붕괴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변변한 자가진단조차 없었다. 결국 건물이 건축된지 약 4년이 흐른 1995년 4월, 건물의 5층 남쪽 천장 가에서 균열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비하여 취해진 조치는 최고층에 있던 상품과 상점들을 지하로 옮기는 것 뿐이었다.

1995년 5월, 붕괴 약 한달전엔 균열의 수가 증가하자 관리자는 5층을 폐쇄하고 토목 공학자들을 불러 기본적인 검사를 한 결과 "건물의 붕괴 위험이 있다" 는 당연한 결론이 나왔고. 상식적으로 이쯤 되면 건물 전체를 폐쇄하고 접근 금지령을 내려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준 일당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붕괴 당일, 붕괴의 가능성을 눈치챈 경영진들은 백화점에서 도망쳤다.

위의 사진은 사고 하루 전에 촬영된 것으로, 펀칭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백화점 옥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펀칭은 무량판 구조의 건물에서 바닥과 지판이 기둥으로 전달할 수 있는 하중을 넘어서면서 바닥이 처지고 기둥이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현상으로, 건물 기둥과 지판의 결속 구조가 무량판 구조물 안전성의 핵심임을 감안하자면, 당시 삼풍백화점 건물은 구조적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황이었고 이는 다시 말해서 건물 붕괴 일보 직전, 아니 사실상 이 때부터가 본격적인 붕괴의 시작이라는 분석으로 귀결된다. 위의 실험에서 나무젓가락이 알루미늄 포일을 이미 뚫었음을 생각하면 된다.

천장의 균열과 바닥이 침하된 5층 식당가의 모습. 1995년 6월 28일 촬영.

사고 전날부터 이미 지붕에 철근이 올라왔고 5층 음식점 일부 부분이 내려앉는 것이 목격되었으며, 사고 당일 아침 5층 식당가의 춘원 전주 비빔밥 전문점에 있는 기둥과 상판 사이에 10cm 되는 균열이 발견되는 등 건물은 이미 거의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으며, 이는 사실상 건물 붕괴가 눈 앞에 다가왔다는 의미였다. 결국 붕괴 당일 식당가는 폐쇄되었다. 균열로 인해 떨어진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식사에서 나오고 천장엔 금이 많이 갔기 때문. 또한 귀중품 판매 매장의 물품들을 1층 등 저층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5층에 식당가와 같이 있던 상품권 매장도 1층 로비로 이동했다.

붕괴 5시간 전에 5층에서 큰 파음이 몇 차례 들려왔다. 파음은 옥상의 에어컨 진동 때문에 난 것으로, 이 진동 때문에 삼풍백화점의 균열들은 더욱 심각하게 벌어져갔다. 파음을 들은 몇몇 고객들이 이에 대해 신고하자 백화점 시설과장인 이영길 이사는 이 파음이 옥상의 에어컨 실외기의 진동으로 인한 붕괴 조짐을 오래되지 않아 눈치채었는지, 사고 당일 오후부터 에어컨 가동을 전면 중단하는 조치를 취하고 백화점 측에서는 에어컨을 껐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옥상의 균열은 이미 10cm나 벌어진 상태였다. 이후 이영길 이사는 나머지 이사들과 함께 최종 결정권자인 이준 회장에게 상황을 알리고 즉각 고객들을 대피시킬 것을 건의했으나, 이준 회장이 경제적 피해를 생각하여 대피 조치에 노발대발하며 반대했고 이에 나머지 경영진들도 따랐다. 하지만 정작 자기 목숨은 아까웠는지 중요 물품들을 빼내고 난 뒤 몰래 대피했다. 그것도 지하 1층에 이준의 큰며느리까지 내버려 둔 채로. (큰 며느리는 나중에 구출되었다.)

오후 5시경, 4층의 천장이 가라앉기 시작하자 직원들은 고객들이 4층으로 가는 것을 막았다. 백화점은 붕괴 52분 전에도 고객들로 시끌벅적했으며 관리자들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오후 5시 40분쯤에는 건물이 이상하다는 조짐을 느끼자 이준과 주요 관리자들은 백화점에서 도주한다. 물론 이때도 백화점 고객들을 대피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사고 발생 약 7분 전, 건물이 붕괴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그 시간인 오후 5시 50분경이 돼서야 이들은 비상 벨을 울리고 고객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으나.....

결국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삼풍백화점은 붕괴되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직후, 인근에 있던 어느 시민이 우연히 촬영한 사진. 사진 속의 콘크리트 먼지 구름의 형상이 붕괴 전 건물의 모습을 띠고 있어서 붕괴 직후 촬영된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사진 속에서 보듯이 A동이 붕괴된 다음에도 B동은 멀쩡했으나 B동 역시 붕괴의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폐쇄 조치된 후 1998년 10월에 철거공사에 들어가 1999년 1월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붕괴 사고 사흘 후 실시된 현장 조사결과 B동도 설계 강도보다 모자란 강도로 지어진 것이 밝혀졌다.

위 사진들은 실제 사진이 아닌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 CG로 재현한 영상을 캡처한 것이다.


오후 5시 57분에 건물의 남쪽 A동의 옥상이 무너져 그곳에 있던 에어컨 실외기가 5층으로 떨어졌으며 이 거대한 충격으로 인해 나머지 아랫층들의 상판들은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무너지면서 20초 만에 지하 4층까지 붕괴됐다. 백화점 안에 있던 고객을 비롯한 종업원 1500여 명 대부분은 A동의 붕괴와 함께 그대로 매몰되어 사망하거나 다쳤으며 그중 일부만 건물이 내려앉는 도중에 겨우 빠져나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지하에 주차되있던 차량과 지나가던 차량 수백대가 콘크리트에 깔렸다.

여담이지만, 에어컨을 끈 뒤 천여 명의 고객들이 내는 열기때문에 삼풍백화점 안은 찜통이 되었고 이 덕분에 사고 발생 직전에 너무 더워서 쇼핑을 그만 두고 백화점을 빠져나간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개그맨 이상해와 국악인 김영임 부부다.


▲ 백화점 붕괴 직후 소방관 및 기자들이 출동하여 촬영한 영상. 붕괴 폭풍에 휘말린 주차 차량이 뒤집혔으며 가운데 유리창이 모두 터져나갔다.

오죽했으면 뉴스에서 직접적으로 지옥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반면 사고에 직접적으로 휘말리지 않은 지나가던 시민들은 그냥 삼풍이 무너졌다는 투로 무덤덤히 말하고 의료진과 구조진 그리고 취재진들이 출동하기 전만 해도 그냥 태연히 근처 마켓에서 쇼핑을 했다고 하는 목격담도 있다고 한다. 피해 규모를 잘 몰랐고, 이 때까지만 해도 사망자가 수백명이 나오리라고는 예상도 못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당시 미국에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사건이 얼마 전에 일어났기에, 붕괴 직후에는 북한의 폭탄테러라고 생각한 주민들도 많았으며, 저 큰 건물이 저절로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 했던 것이다. 실제 주민 경험담을 들어보면 사고 당시 현장에서 약 400m 떨어진 아파트 주민들은 땅이 울리는 느낌에 지진이 난 것으로 착각하고 경비실에 연락을 했다고 한다. 백화점이 무너졌다고 하니 그저 '백화점 공사 현장에서 골재들이 무너졌나 보다'라며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사고 직후 강남소방서, 서초경찰서 등 관내 관공서의 전화는 시민들의 신고 전화가 폭주하면서 불통이 됐다. 관공서 관계자는 물론 기자들조차 이 소식을 못 믿고 건물에 금 정도 갔겠지 했으나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한 뒤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최병렬 서울특별시장과 이틀 전 지방선거로 당선된 조순 서울특별시장 당선인도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오죽하면 최병렬 시장은 한동안 너무 기가 막힌 듯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정말이지 황당한 상황이다. 작년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다리가 무너지더니 이제는 대형 백화점까지 주저앉았으니 말이다.

그외에도 YTN의 취재로 당시 백화점 내부 또는 그 주변의 CCTV 사진으로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어둠 속 사고 현장에서 옷들을 훔쳐 유유히 달아나는 어느 여성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공개되었고 지금도 이 사진은 인터넷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상당히 오래된 보도 사진이지만 대형 참사가 난 뒤 잔해를 뒤지며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점에서 소름끼친다는 반응이 많으며 짤방으로 가끔 쓰인다. 현재도 이 사진의 범인인 여성이 이후 세간의 질타를 받고 자살 또는 잠적했다는 카더라도 있었다. 하지만 선명하긴 해도 애초에 옆모습만 찍은거라 이 사람이 누군지도 불확실한데다 이 사건의 진위나 여인의 행방은 지금도 알 수 없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 이외에도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 백화점 물건을 도둑질을 하는 사람이 제법 많아서 이를 개탄하는 기사나 사설도 쏟아졌다.

붕괴 후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은 공황 상태에 빠진 상태였고 이런 참사에 대하여 사전에 마련된 대응 수칙도 없었기에 초기 대응 단계에서 사고 현장의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시의 붕괴 현장을 찍은 CCTV나 취재 동영상들을 관찰하다 보면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이런 분위기를 틈타 붕괴 현장에서 무너지지 않은 B동의 슈퍼마켓 계산대를 털거나 A동의 무너진 잔해 더미 속을 파내며 희생자들의 소지품들을 뒤지며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헤매는 추태를 보여 당대의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삼풍백화점은 붕괴된 후 3년동안 그대로 흉물로 방치되어 있다가 1998년 10월 경에 철거가 시작된 뒤 1999년 1월 완전히 철거되었다.

삼풍백화점 인근의 서초동은 강남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이라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긴 했지만, 워낙 악명높았던 최악의 참사가 일어났던 곳인 만큼 매각이 잘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으나, 1996년 11월 대상그룹이 서울시의 부지 매각 공개입찰에서 2만2천7백여㎡ (6천8백70여평)의 해당 부지를 2052억 4300만원에 낙찰받아 1999년 8월에 낙찰가 및 지연금을 모두 완납하여 최종 인수하게 되고, 이후 시공사로 대림산업을 선정해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 2004년에 501명이 몰살당한 바로 그 자리에 아크로비스타라는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500명이 참사를 당한 자리에 업무용이나 상업용 건물도 아니고 주거용 건물을 올렸으며, 위령비고 뭐고 하나도 안 세우고 말이다. 그 때쯤 되면 센트럴 시티에 신세계백화점이 들어서니까 백화점은 패스. 

삼풍 사고 위령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긴 한데, 그 장소가 엉뚱하게도 양재시민의 숲이라 그런 것이다. 그나마도 먼저 지어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위령비에 밀려 한쪽 구석에 쳐박혀 있다. 그 옆에는 자그마한 정자도 하나 있다. 주로 서울 코믹월드 때 쉬는 장소로 자주 쓰인다.


서초동에서도 요지 중의 요지인 삼풍백화점 터가 아크로비스타의 착공 전까지 5년이 훨씬 넘도록 어떠한 건물도 들어섬이 없이 거의 폐허와 같이 방치된 것은 단순히 참사의 이유로 매각을 꺼린 상황에서 비롯된게 아닌 것이 이미 사고 1년 뒤에 경매에서 대상그룹이 낙찰을 받았기 때문으로, 대상그룹이 부지 경매에서 낙찰받고 금액 납부를 3년 씩이나 지연해서 공사가 늦춰진 것이다. 대상그룹이 미원등으로 식품산업에서 유명한 재벌이긴 해도 당시 2,000억원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마련할 정도로 기업규모나 시가총액 수준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던데다 IMF 외환위기 등의 경제적 위기상황까지 감안하면 낙찰가 납부를 위한 자금 마련이 내부적으로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이 반면교사가 되었는지 2011년 7월 5일 강변 테크노마트 건물 진동 사고가 생기자 즉시 손님과 상인들이 철수하고 대책회의를 열며 급히 문제분석에 들어갔다. 근데 건물주 측은 빠른 움직임을 보인데 반해 입주 상인들과 어느 대형 입점업체는 돈 한 푼이라도 벌려고 바로 철수 안했다. 

한반도 최악의 참사로 사고 구조과정에서 지하 바닥이 드러나기 전까지 생존자가 간간히 구조되어 거의 보름간 뉴스에 삼풍 구조소식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지 몰라도 상당수 사고들이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는 반면에 상당수가 기억하고 가끔씩 얘기하면서 안전불감증에 대해 몸서리치곤 할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최악의 참사다. 그래서 이 사고에 대해 적혀있는 현대사 책도 있다.

실제 삼풍 참사가 발생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시기에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에서 영업 중 정전 사고가 났는데 쇼핑하던 고객들이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지르거나 기둥을 붙잡는 등 건물의 진동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불안감을 표출하는 반응들을 보이기도 했으며, 위에서도 언급한 2011년 발생한 강변 테크노마트 건물 진동 사고에서도 건물에 있던 사람들이 마찬가지의 불안감을 표출하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찌보면 붕괴사고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피해자 유족 및 부상자들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언론 보도를 통해 사고 현장과 수습과정을 모두 지켜본 당시 대한민국 사람들 대다수가 이 사고로 인한 PTSD 증후군을 안고 살아가는 셈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대표적 역대급 참사임에도 이런 사고가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교육 현장에서는 언급되는 일이 드물어졌다는 말도 있다. 그나마 대학교 공학윤리 과목에서는 필수소재가 되어 있으며 외국 교재에서도 자주 인용될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