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전설적인 보컬 '김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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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전설적인 보컬 '김현식'


2017. 3. 28.

언더그라운드 가수에서 시작해서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주류로 끌어올렸으며, 동시에 최고의 인기를 누린 입지전적인 가수 김현식

그는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집안배경부터 범상치 않았다. 당시 아버지는 사업가로서 어느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던 분이었고 할아버지 역시 충남 홍성에서는 알아주는 유지였다. 또 외할아버지 역시 만석꾼의 아들로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영문학자였다. 위로 지금은 캐나다에 이민 가 있는 누나가 있고, 여섯 살 밑으로 역시 지금 뮤직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있는 동생이 있다. 1964년에 서울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때 외가인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죽향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3학년 때는 서울에 있는 삼청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당시 전인권이 삼청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당연한 소리지만 서로 누군지 모른 채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학군제의 시행으로 5학년 때 수유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초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굉장히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1970년에는 보성중학교에 전교 4등의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는 보성중학교 때 처음으로 기타를 접한다. 하지만 음악을 알아가면서부터 중학교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은 조금씩 하락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부친의 사업이 실패하자 한동안 방황을 한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열심히 공부하여 당시 명문 학교였던 경기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한다. 결국 1973년에 명지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명지고등학교에서도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였는데 선배의 악기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꾸중을 듣자 이에 격분하여 주먹다짐을 벌인 후 밴드부에서 탈퇴를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고등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게 되었고 결국 1학년을 마치기 전이었던 1974년에 가족들 몰래 자퇴서를 냈다.


자퇴 후에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으며 1975년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더 이상 공부에 손을 대지 않았으며 계속 방황하다가 기타를 메고 종로에 있는 한 음악 다방에서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명동의 큰 무대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후 밤무대나 여러 곳을 떠돌며 통기타를 연주하며 가수로서 길을 내딛고자 노력했다. 이 때 나이를 5~6살은 올려 소개했다고. 이 때부터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주목받는 신인으로 전인권, 한영애 등 선배 보컬들 사이에서 활동하며 검은 나비, 동방의 빛, 신촌블루스 등의 그룹사운드에서 보컬로 활동했다.이때 이장희의 남동생 故 이승희를 만나게 된다.



1980년대 극초반 모습을 볼 수 있는 영상, 말년에 보기 힘든 가성 영역을 들을 수 있다. 

1978년 본래 이장희의 주선으로 1집 앨범을 내려 했으나 이장희가 미국으로 떠나고 김현식 본인도 대마초 문제로 1집 앨범을 녹음만 해둔 채로 놔둬야 했다. 결국 1980년 자신의 이름을 건 데뷔 앨범 1집 봄여름가을겨울을 내지만 그마저도 나온 앨범이 실패해버리면서 이를 비관한 김현식은 술과 담배에 매달리게 된다. 그후 신촌 옷가게의 여인에게 반해 1982년 결혼하고 자신의 분신이라 부르며 사랑하던 아들 김완제를 얻는다. 그리고 이때 피자가게를 하는데 처음에는 잘되나 싶더니 1년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밤무대 가수로 활동하면서 1984년 발매한 2집인 <사랑했어요>가 대박을 거두면서 가수로 자리잡는데 성공했고, 마지막까지 같이 한 동아기획 레코드와 계약한다. 봄여름가을겨울과 함께 제작한 3집 <비처럼 음악처럼>도 30만장이 넘게 팔렸으며 상업적 성공과 호평을 받았건만 그 자신은 술과 담배 그리고 1987년 전인권, 故 허성욱등 과 함께 다시 대마초를 피다가 구속되며 피폐해져갔다. 그리고 이떄 복용한 대마초가 건강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88년 2월에 김현식은 63빌딩에서 재기 콘서트를 열었고 팬들을 실망시킨 사죄의 뜻으로 삭발을 하고 무대에 올랐다. 이떄 김현식은 관중석을 꽉 채운 팬들을 보고 너무나 감격해 눈물이 앞을 가렸으며 그때의 콘서트는 잊혀지질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4집 앨범을 발표한 뒤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한다.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정에 여리고 말은 거칠어도 꽤나 섬세했었다고... 친한 후배인 유재하가 1987년 11월 1일 교통사고로 죽을 때도 대성 통곡하면서 한동안 술에 매달리며 슬퍼했었다. 오죽하면 4집을 낼 당시 친구이던 이문세나 함춘호 같은 지인들은 "아프면 약을 먹어야지 왜 술을 먹냐?" 걱정했음에도 그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술을 들이켜 댔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그의 몸은 점차 피폐해져 갔다. 1989년 영화앨범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녹음할 때부터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 5집 앨범을 발표할 당시 의사가 '술을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죽는다'고 경고할 정도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마지막 6집 앨범을 낼 때에는 그를 이전부터 아끼던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을 만나서 "언젠가 술 먹다가 죽고자 했는데..."라는 식의 말을 할 정도였고 후에는 간경변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입원한 동부이촌동 병원에서도 자주 탈출을 하여 술을 마셨으며 자기몸을 거의 내 팽개치다시피 하였다.
그래도 그에겐 언제나 기타가 들려 있었고 병실에서도 항상 노래소리가 끊임이 없었다.
사후 유작인 '내 사랑 내 곁에' 외 실질적 유작인 5집 앨범 '넋두리' 앨범이 바로 이때 병원에서 외출을 다녀오다시피 해서 간신히 만들어진 것이다. 김영 사장의 포기하자는 말에도 각혈을 하면서까지 엄청난 유작을 남기고 우리곁을 떠나갔다.

김현식의 음악 장르가 다양한데, 그중 <사랑했어요>을 트로트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나 한국적 크로스오버 발라드라고 하는게 오히려 적합하다. 멜로디 라인이나 악기 구성등 전반적 곡의 흐름이 우리가 아는 트로트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1990년 11월 1일(공교롭게도 김현식이 그렇게나 아끼던 후배 유재하의 기일)에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동아기획 김영 사장에게 "사장님, 저 괜찮으니까 오늘 퇴원해서 내일 녹음에 들어가야겠어요"라면서 밝게 전화를 했는데 이 전화를 끊고 겨우 2시간 뒤에 김영 사장은 그가 하늘로 떠난 것을 전화로 전해 들었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던 걸지도...



그의 유작이 된 6집 <내 사랑 내 곁에>는 200만장이 넘게 팔리는 초대박을 거둬들였으며 가요톱텐 1991년 12월 25일 방송분에서 골든컵을 탄 김정수의 <당신>과 같이 공동 수상을 했다. 다만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이미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에 수상은 그의 아들 김완제가 대리 수상하였다. 대만에서도 리메이크된 바 있으며 대만에서 리메이크해 부른 가수가 바로 한국인 가수 장호철이다. 그는 개그맨 김한국과 초등학교 시절 친구라서 같이 90년대 중순 국내 방송에 나왔는데 아버지가 중국어를 열심히 배워서 어릴적부터 그에게도 배우게 해서 중국어를 상당히 잘했다고 한다. 그 보기로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에 가서 이 가수가 중국어로 짜장면 달라고 하면 화교인 사장이 반가워하며 한가득 짜장면을 줘서 어린 김한국이나 다른 친구들도 실컷 배부르게 먹었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인터넷 찾아보면 담영린(알란 탐)이 광동어로 리메이크한 노래만 나온다.

그밖에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한국계 화교(?)인 강육항(姜育恒)도 리메이크했다. 

데뷔할 때만 하더라도 굉장한 미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에는 음색을 바꾸려는 본인의 노력과, 평소에 즐겨 하던 술담배의 영향이 겹쳐 대중에게 흔히 알려진 쇳소리가 나는 허스키한 창법을 구사하게 되었다. 무릎팍 도사 김건모 편에서도 잠시 비교용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 1집의 <봄 여름 가을 겨울>과 6집 <내 사랑 내 곁에>의 음색은 서로 다른 사람이라 생각될 정도로 1집에서는 정말 놀라울 정도의 미성이었다. 1집의 타이틀 <봄 여름 가을 겨울>, 2집의 <사랑했어요> 등에서 나타나는 그의 보컬은 특유의 미성과 가성의 능숙한 사용으로 쭉쭉 뻗어올라가는 고음을 보여준다. 이후 목소리가 상당히 바뀐 3집의 <비처럼 음악처럼>을 들어보면 미성이 상당히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다른 거칠거칠하면서도 애절한 음색으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으로 목소리가 바뀐 것은 4집 이후로 특히 유작인 <내사랑 내곁에>가 크게 히트하면서 대중의 인식이 거칠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고정됐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발매된 김현식, 병상에서 앨범이 발매된 것도 사연이 있다.

1990년 여름 간경화가 악화되어 입원한 김현식은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면서 역시 장기 입원 중인 한 여성과 면식이 생겼는데 그녀가 병원에서 생일을 맞게 된 것을 알게 되자 아끼는 기타와 녹음기를 찾은 뒤 다른 환자와 간호사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생애 최후의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고 21곡을 부르고 이걸 녹음했던 테이프를 생일 선물로 주었다. 몇달 뒤 김현식은 사망했고 여성은 무사히 퇴원하였지만 들을 때 마다 계속 가슴아파하다 이민을 가면서 소중히 간직해온 테이프를 김현식을 무지 좋아하던 후배에게 양도하였다. 10여년 동안 아끼며 듣던 후배는 TV에서 김현식 추모 방송을 보고 이걸 알리기로 결심해 세상에 나왔다. 김현식 어머니도 흔쾌히 동의하여 살려낸 17곡을 앨범으로 낼 수 있게 됐다.

당시 가요계에서 알아주는 파이터였다고 한다. 가수를 안 했으면 건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오죽하면 별명도 원펀치 쓰리강냉이였을 정도였다. 밴드 김현식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같이 했던 두 후배 김종진&전태관은 얼굴에서 멍이 떠날 날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다른 멤버였던 장기호의 경우 뮤직비디오 찍다가 김현식이 너무 오래 찍는다는 이유로 "야! 악기 싸!'라고 하면서 가려고 하자 말리다가 김현식의 주먹 한 방에 그대로 실신 KO당했다는 후덜덜한 일화도 있었다. 라디오 스타에서 김종진&전태관이 이 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다만 장기호 역시 성질머리로는 어디가도 안 밀린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으로 뮤직비디오 찍다가 가려는 김현식을 말리는 과정에서 목소리를 높이면서 화를 낸 것도 주먹세례를 받은 원인이 된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