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레전드 '조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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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레전드 '조용필'


2017. 4. 10.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레전드. 70년대, 80년대, 90년대, 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 곡을 가진, 항상 마지막을 장식하던 최고의 슈퍼스타."

"칠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월드컵 경기장을 매진 시키는 전무후무의 가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설 중의 전설"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군 태생. 경동고등학교 25회 졸업생. 1969년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1979년 "창밖의 여자"로 정식 데뷔했다. 수 많은 히트곡과 한국 내 최대 콘서트 인원 동원 기록, 예술의 전당 7년 연속 공연 기록을 가지고 있는 가수다.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


현존하는 우리나라 가수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인 동시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가요계의 제왕. 대다수의 사람이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슈스케에서 김태우가 이승철을 가왕이라고 호칭하자 이승철 曰 "그건 용필이 형이지."라고 단박에 부정한거만 봐도... 그래도 이승철의 입지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는 일화다. 다른게 아니고 조용필을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입지라는 것이다.


물론, 부정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조용필 본인이다.  스스로 '가왕', '국민가수'와 같은 별칭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단다. 그냥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 그대로 불리기를 원한다고 한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조용필이 방송에도 안나오는데 무슨 국민가수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옛날에는 그냥 TV틀면 이 분만 나왔다. 아닌 것 같으면 부모님에게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인터넷검색으로 가요톱텐 항목에 들어가면 80년대 초반 조용필은 그야말로 읽는 사람이 기가 질릴 정도로 쓸어담다시피 1위를 많이 해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장 이 문서 최상단 항목에도 조용필이 kbs mbc 연말 대상을 4연패씩 하고 통산 5회, 6회 수상한 것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이게 더 이상 대상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결과다.


대한민국 최초로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가수이기도 하다. 당시 9시 뉴스에서 이례적으로 조용필을 따라다니는 오빠 부대 열성팬에 대한 보도를 내보낼 정도였다.

"여러분, 기도하는~ 의 다음 가사를 아십니까? 바로 꺄악~입니다."

사실상 마지막 미8군 출신 히트가수이다. 장르 분화가 강해지고 언더그라운드/인디 개념이 나타나기 전에 바닥부터 올라온 마지막 가수. 전국구 방송이 아닌 지역 기반으로 전국구 스타가 된 마지막 가수. 세션의 연장개념이었던 개인밴드를 영미권의 밴드의 개념으로 바꾸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2008년 열린 "조용필 40주년 기념 콘서트" 콘서트 中>


<2013년 슈퍼소닉 출연 영상>


1969년에 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출발했다.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에서 활동하다가 곧 '화이브 핑거스'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주로 미8군 무대에 올랐다. 그러다 1971년 5월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트리오는 드러머이자 타악기 연주자였던 故 김대환(드럼), 조용필,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1972년에는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라는 연주앨범도 발매하였다. 이때 발표한 곡 "Lead Me On"이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학생을 위한 뮤지칼 '사랑의 일기'라는 앨범에 "님이여", "사랑의 자장가", "케사라", "하얀 모래의 꿈"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게 사실상 조용필의 노래가 들어간 첫 앨범. 이때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도 녹음했다.


1972년 "그룹 25시"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1973년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복무기간 중에도 퇴근 후 음악 활동을 계속하면서 1974년에는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면서 이 곡과 함께 전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재일교포 고국방문과 맞물려 발표된 이 노래는 부산에서부터 인기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졌고, 조용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다. 그러나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1979년까지 활동이 금지된다. 1979년 지금의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이 앨범은 100만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고,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히트하면서 1980년대 최고의 히트 가수가 된다.


그의 대표곡은 대표곡은 "고독한 Runner", "고추잠자리", "그 겨울의 찻집",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그대여", "기다리는 아픔", "꿈", "나는 너 좋아", "눈물의 파티", "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돌아오지 않는 강", "마도요", "모나리자", "못 찾겠다 꾀꼬리", "미워미워미워", "미지의 세계", "바람이 전하는 말", "바람의 노래", "바운스", "비련", "서울 서울 서울", "슬픈 미소", "어제, 오늘, 그리고", "여행을 떠나요",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정의 마음", "창밖의 여자", "촛불", "추억 속의 재회", "친구여", "킬리만자로의 표범", "태양의 눈", "한강", "한오백년", "허공", "헬로", "Q" 등 매우 많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연이 히트곡으로만 구성되었는데도 양일 겹치는 노래 없이 이틀이나 진행되었다.

현재 가요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명이며, 대부분의 후배 가수들의 꿈 같은 존재다. 신해철이 개기지 못했던 몇 안되는 인물. 한 예로 모 방송에서 조용필의 전화를 받자마자 신해철이 갑자기 자세를 고치고 양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김혜수의 플러스 유라는 방송에 출연했을 때 "마왕으로 불리우는 후배 신해철을 어떻게 생각 하시냐"는 질문에 귀여운 후배로 평가해서 김혜수를 비롯한 관객들이 경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심지어 고스트스테이션에서 신해철이 조용필의 히트곡들을 직접 리마스터해서 특집으로 튼 적이 있었는데 혹시라도 혼날까봐 조용필이 곯아 떨어질 것이 확실한 공연날 밤을 골라서 방송을 했다. 거기다가 실제로도 한 성깔하기로 유명한 이승철이나 독설로 유명한 이은미까지 조용필 앞에서는 고개도 못 든다고 한다.

<방시혁의 배꼽인사>

조용필은 대중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현역시절 시도했던 수많은 실험적 시도와 성공덕에 대중성과 다양성을 오랜 기간 동안 잡아낸 보기 드문 가수이기 때문. 조용필은 이전 세대 이미자, 패티김, 나훈아, 남진, 동시대인 80년대 전영록, 김수철, 이용, 이선희, 조용필 이후 등장한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이승철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조용필은 음악적인 면에서 상술된 전시대 대표 가수들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상술된 후배 가수들과 비교하면 서태지를 제외하곤 그들보다 음악적으로 뒤지지 않으면서도 더 높은 인기를 누렸다는 장점이 있다. 서태지와 비교해 봐도, 폭발성과 파급력 면에서는 서태지가 더 앞설지 모르나 조용필은 폭넓은 계층에서 더 길게 인기를 누렸다는 장점이 있다.

<90년대 끝판왕을 풋풋한 후배로 만드는 80년대 레전드의 위엄>


조선일보의 대한민국의 최고 가수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으며 2위는 이미자, 3위는 나훈아, 4위는 서태지. 
조용필이 2위를 하는 경우는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간간히 서태지의 팬들이 비교되는 가수를 언급할 때 조용필을 언급하기도 한다.
더불어, 거대 방송국이 굽혀주는 몇 안 되는 가수 중 하나로 가요계 배분과 위상이 높은 점에 기인한다. 보통 PD들이 가수를 지칭할때 ~씨라는 호칭으로 큐시트를 주는데 조용필은 방송국에 떴다하면 최고위급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실제로 2013년 각 방송국 예능국장급은 다 조용필과 같은 시대 인물이거나 그 뒤다.


이승철이 회상하기로는, 자신의 신인 시절은 PD들의 힘이 워낙 세던 때라 어린 가수들이 지각을 하거나 하면 '저기 가서 손 들고 서 있어!' 라고 윽박지르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시절임에도 조용필이 오면 반드시 국장급 이상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이승철의 신인 시절이면 조용필이 중견가수긴 해도 30대 후반일텐데 이미 그 때도 엄청났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가수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가수이기도 하다. 80년대는 음악 평론이란거 자체가 거의 전무한 시기였기 때문에 조용필의 크로스오버적인 실험들이 90년대 중반 들어서야 겨우 조금씩 이야기 되기 시작했다.

단독 공연으로는 1999년 마이클 잭슨 이후 처음으로 잠실종합운동장에서 공연 하였으며(2003년 데뷔 35주년 콘서트), 자신의 데뷔 **주년 공연 중 마지막으로 게스트를 초청한 이날 공연에는 신승훈, 신해철, god, 이은미, 장나라, 유열이 출연 하였다. (조pd는 신해철 차례 때 보이지도 않는 뒤에서 랩을 했다는...) 이후 수차례 잠실에서 더 공연을 하게 되는데 만석은 기본이었다. 그 중 03,05년 공연은 우천 속에서도 이룬 매진이었다는게 주목할 점. 이후 잠실 공연에 도전한 이승환도 우천을 만나며 객석이 비게되었고, 이후 이문세, 싸이 등도 도전했지만 잠실주경기장은 쉽사리 만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조용필은 괜히 가왕이 아니다. 또한 99년 말 대중가수 중 처음으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였으며 향후 몇년간 연말 투어로 그곳에서 마무리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모든 활동은 전속 밴드 '위대한 탄생'과 같이 하고 있는데 그의 위상과 걸맞는, 대한민국에서는 전설급이라 할 수 있는 세션들만 거쳐갔다. 대표적인 예가 김광민, 송홍섭, 정원영, 유재하, 김종진, 전태관 등.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영향력은 가요계를 넘어서 방송계에서도 통용된다. 떴다 하면 PD가 아니라 최소 국장급이 나오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도 그럴게 지금 국장 or 사장급인 사람들은 대부분 조용필의 전성기에 막내로 시작한 사람들이다.

"락에서 트롯트, 발라드, 민요까지 수많은 음악 장르를 다뤘으며, 히트까지 시켜버린 미친 능력의 소유자"
"작곡가로서도 국내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아티스트"

독보적이라고 할 만한 가수인 동시에, 작곡, 편집, 무대연출까지 못하는 게 없는 초인. 그냥 할줄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모든 방면에서 국내 최정상급. 앨범 사운드, 공연 퀄리티 모두 그냥 압도적이다. 워낙 능력자다보니 데뷔곡 '창밖의 여자'는 드라마 주제곡 하나 써 달라는 라디오 PD 주문에 즉석에서 5분만에 쓱싹 써낸 노래라는 말도 있는데...어디까지나 루머다. 실제로는 무려(?) 15~20분 정도 걸렸다고.  나는 가수다에서 본인이 직접 밝힌 부분.

조용필을 성대모사하는 연예인들이 웃음을 목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따라해서 그렇지, 조용필의 가창력은 쉽게 따라할 것이 못된다. 4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2시간 내내 20여곡을 라이브로 흐트러짐없이 소화하기도 했을만큼 그의 가창력은 탄탄하다. 원래 데뷔 초기에는 선천적인 미성으로 노래를 했으나, 이후 대마초파동 당시 자숙하던 도중에 판소리에 매료되어 공부하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로드 스튜어트와 조 카커 등 허스키한 보컬들을 음악을 따라 부르면서 지금의 창법이 되었다. 보컬 트레이닝과 발성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많은 성대모사에서 볼 수 있듯 고도로 앞쪽에 집중된 비음이 매우 특징적이고, 판소리를 연마한 이후로 벨팅을 활용한다. 다만 입을 벌리는 크기가 작고 상,하악의 움직임이 큰 편이 아니라 어느정도의 인골라도 포함한다. 특이점으로는 저,중,고음에서의 파장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인데, 보통 파사지오를 넘겨 고음으로 치솟을수록 소리가 커지는 것과 달리 조용필의 경우 세기가 상당히 일정하게 나타난다. 이는 초창기의 발성과 중,후반기의 발성이 바뀌면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는데, 9집까지의 발성이 흔히 그 시대 어른들이 말하는 지르는 방식으로 감정조절보다는 후련하게 내뱉는 판소리 식 발성에 가까웠다면, 10집 이후로 앨범에 직접 참여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자신이 만드는 곡에 보컬을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흔히들 생각하는 비음이 강조된 보컬은 바로 이 10집 때부터 활용하기 시작한 것.


또한 원래 밴드 기타리스트 부터 음악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리듬을 굉장히 잘탄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살펴보면, 특히 중후반기의 앨범의 경우 베이스를 중심으로 꽤 훵키하거나 Jazzy한 리듬의 곡 (10집 - I Love you / 모나리자, 12집 - 내모습, 13집 - 어젯바 꿈속에서, 14집 - Jungle City) 이나 뉴웨이브 스타일의 록 음악 (13집 - 꿈꾸던 사랑), 심지어 트립합 (14집 - 흔들리는 나무)까지 종종 등장하는데, 미묘하게 싱코페이션을 음마다 컨트롤 하는 게 장난이 아니다. 사실 발성으로 따졌을 때 자음을 약간 과하다 싶을정도로 된소리로 강조하는 방식이 이런 리듬웤과 묘하게 상성이 맞으면서 생기는 효과 중 하나. 이런 점 때문에 단순히 노래를 잘 하는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보컬에 맞게 곡을 쓰고 편곡하는 레벨이 상당히 높다고 인정받는다. 

다만 라이브를 할 때와 스튜디오에서의 음색 차이가 분명이 있기는 한데, 이는 더블링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초창기에 라이브를 할 때도 원래 가진 소리 자체는 얇은 음색이었으나, 앨범에서 들리는 소리는 약간 두껍게 들린다. 다만 라이브를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노래할 때 성량 자체가 상당히 커서 어느정도 커버된다고.

의외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인데, 자기 노래의 대부분에 코러스까지 다 해먹는 몇 안되는 보컬리스트 중 하나다. 소리 자체가 얇지만 워낙 다각도로 활용도 잘하고 음정까지 정확하게 딱딱 들어맞는 보컬이라 주멜로디의 화음을 자기 보컬로 다 채워넣으면서 곡을 더 맛깔나게 하는데에 있어서 초고수다. 보통 이런 방식은 주로 블랙 뮤직을 장기로 하는 보컬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이를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킨 부분에 대해서 뮤지션들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초기에 가창력에 대해 지적을 받은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이것은 미8군 시절 대세가 패티김, 조영남 등의 스탠더드 팝류의 창법이 노래 잘하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가늘고 흐느끼는 듯한 느낌의 조용필은 마치 트로트를 연상시켜서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메이저로의 진출 전까지는 감정 표현이 부족한 가수라는 평가도 받았었다. 단지 시대가 만든 편견의 희생양이었을뿐...오히려 그 시대의 전설적인 세시봉 출신이자 가창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송창식이 거의 그 시대 유일하게 그를 꿰뚫어 보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를 단 한명만 꼽아보라는 말에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조용필을 지목했던 일화도 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조용필은 80년대 음반뽑아내기에만 급급한 소속레코드사와의 갈등속에서 음악적 퀄리티에 대해 성찰과 고뇌를 이어간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표현하는 자신의 창법이 듣기에 과하다고 생각하여 절제하는 창법을 이어가게 된다. 실제로 조용필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식으로 부르는게 아니라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의 느낌으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유의 창법은 조용필을 다른 가수들과 구분짓는 특징이 되어 많은 연예인들의 성대모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조용필의 노래를 듣지 못한채 성대모사만 들은 젊은층들은 조용필을 '특이하게 노래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앨범이나 라이브 영상을 보면 노래의 특징마다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재능과 감각이 타고났으나 그것만 믿고 노력을 안 한건 아니다. 득음을 하기위해 노래 연습하다가 각혈이 나오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래 연습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지만 2013년 SBS에서 방영된 조용필 스페셜에서 인터뷰어였던 이승기가 "득음하다가 목에서 피가 나셨다는 일화가 진짜인가요?"라는 질문에 "아니에요. 목에서 피가 나면 죽지요."라며 웃으며 대답했다. 재능+노력이 지금의 명성으로 이어진 것. 이런 창법이 불을 뿜는 대표곡들을 꼽자면 한오백년, 자존심, 한강 등 민요풍 노래 외에도 창밖의 여자, 촛불 등 다른 장르도 가리지 않는다.

게다가 시도한 장르도 매우 다양했다. 록(미지의 세계), 팝(Jungle City), 발라드(슬픈 베아트리체), 블루스(대전 블루스), 민요(자존심), 트로트(허공), 동요(난 아니야), 오페라(도시의 Opera). 더 무서운건 저렇게 시도를 하고 대부분 다 성공을 했다는데 있다. 18집에서 안토닌 드보르작의 9번 교향곡(신세계 교향곡)에 가사를 붙인 '내일을 위해'라는 곡에서 오페라가 아닌 클래식, 19집의 타이틀곡인 Hello의 경우엔 일렉트로니카, 버벌진트의 피처링으로 랩까지 섭렵했다. 이러한 수많은 노력과 그의 천재성으로 공존하기 어려워보이는 장르들이 대중가요라는 하나의 용광로처럼 녹아든 것은 상당수가 그의 공헌이다.

또한 60대의 나이라는 말에 무색하게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고, 젊은 트렌드에 맞춰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인데, 평소 케이티 페리, 브루노 마스, 마룬 5와 같은 음악을 즐겨 듣고 19집 작업의 모토를 아예 '음악의 깊이 보다는 편안함'과 '세대 간의 융합'으로 잡았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 있다. 그 결과 Hello와 Bounce라는 젊은 가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촌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곡들이 나왔다.


그의 콘서트가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리면, 지하철 배차간격이 바뀌며, 막차시간이 2시간 연장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이 있다. 심지어 김정일도 조용필의 '허공'을 애청했다고 한다. 물론 남북정상회담 당시였으니 립서비스였을 수도 있지만, 탈북자들이 쓰는 대북 관련 책자들에서도 북한 고위층 자제들이 조용필 노래를 몰래 듣고 다닌다고 하는 얘기 정도는 훨씬 이전부터 나왔었다.

<부인 안진현>


조용필은 1984년 3선 국회의원 박찬 씨의 딸 박지숙 씨와 결혼을 하지만 결혼기간의 갈등끝에 4년만에 합의이혼한다. 이혼 당시 대부분 재산을 양도하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등 가왕다운(?) 모습을 보였으며 원만하게 이혼을 하여 별 추문 같은 게 없이 조용히 끝났다. 이후 그는 94년 미국 로비스트 출신 안진현과 재혼했다. 안진현은 조용필의 음악적 삶을 존중하며 내조하고, 그는 이러한 아내에 대해 애정을 숨기지 않는 잉꼬부부의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결혼 5년만에 심장병에 걸린 안진현은 2003년 투병도중 사망하게 된다. 당시 안진현씨의 사망소식은 주요언론매체에 의해 자세히 보도되었는데, 조용필은 장례를 치루는 내내 핼쓱한 모습으로 상주를 서다가 간간히 오열하는 모습 등을 보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아내의 사망이후 조용필은 상속액 전액을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였으며, 현재까지 수익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2003년 18집에 수록된 노래 '진' 은 바로 아내를 그리며 작곡한 노래로 알려져 있다. 같은 해 조용필이 잠실운동장에서 처음 공연을 한 35주년 기념 콘서트날 공교롭게 비가 엄청나게 내렸는데 조용필은 이 노래를 부르던 말미 잠시 울먹이기도 했다. 정치인 허경영이 2004년 10월엔 “가수 조용필씨의 부인인 안진현에게 동양화 매매대금을 받지 못했다”면서 조씨를 상대로 50만달러의 매매대금 청구소송을 냈다. 증인이 없으니 우기면 삥좀 크게 뜯어낼꺼라고 고인을 이용해서 정신나간 소송했지만, 어짜피 근거도 없고 증거도 없어 패소했다.

활동경력 중 오점이라면 불륜소동과 대마초 흡연 사건. 이 사건들 이후 일시적으로 은퇴하기까지 했다.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이 연예가를 휩쓸었을 때 조용필 역시 구속되었다. 과거에 뭔지도 모르고 피우다 알레르기 반응이 생겨 곧 중단하긴 했어도 대마초를 몇 차례 피웠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죄가 경미해 활동금지는 면했었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기가수 대열에 서자 과거 경력이 다시 문제가 되었고, 결국 다른 가수들처럼 1979년 완전 해금까지 활동금지가수가 된다.

또한 최근 앨범 Hello가 발표된 이후 신대철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조용필의 빼앗긴 저작권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2000년에 저작권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현재 자신의 곡들 중 31곡의 저작권을 지구레코드의 임정수에게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다. 뒤늦게 깨닫고 법정까지 갔으나 결국 패소하였고 이 31곡의 저작권은 임정수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임재우에게 상속되어 넘어갔다. 그리고 임재우는 저작권을 다시 되돌려줄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빼앗긴 31곡의 목록]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너무 짧아요, 슬픈 미소, 촛불, 간양록, 일편단심 민들레야, 잊을 수 없는 너, 여와 남, 물망초, 고추잠자리, 내 이름은 구름이여, 너의 빈 자리, 못 찾겠다 꾀꼬리, 생명, 난 아니야, 꽃바람, 자존심, 비련, 산유화, 한강, 나는 너 좋아, 황진이, 정의 마음, 눈물로 보이는 그대, 어제 오늘 그리고, 나의 노래, 그대여, 미지의 세계, 아시아의 불꽃, 여행을 떠나요

초기에 이 노래들을 부르기 위해선 저작권료를 내야한다고 잘못 알려졌었는데 이는 사실 관계가 다르다. 조용필이 지구레코드사에 넘긴 것은 엄밀히 복제권과 배포권, 유무형 복제권이다. 따라서 조용필이 본인의 노래를 녹음하거나 공연할 때 A회장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공연을 하는데는 하등 문제가 없다. 이는 공연권으로 조용필에게 있으며 창작실연자에게 부여된 권리다. 지구레코드가 강제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그러던 2013년 10월경 해당 곡들의 저작권을 조용필이 다시 되찾았다고 한다. 자세한 합의 내용은 양자 합의에 의해 5년간 비밀을 유지하기로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