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우표에 새겨지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 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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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우표에 새겨지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 윤보선


2017. 3. 17.

윤보선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대한민국의 정치인,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한 의원 내각제 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이 붕괴한 후에도 1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하였으나, 1962년 3월 대통령직을 하야하였다. 이후 국회의원으로서 야당을 이끌었으나 1980년에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1990년 7월 18일 사망하였다.



윤보선의 생애 
충청남도 아산군 출신으로, 호는 해위(海葦)이다.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윤웅렬, 윤영렬 형제를 필두로 구한말에 유력 가문으로 떠오른 해평 윤씨 집안 출신이다. 윤영렬의 차남인 윤치소의 장남으로, 윤치호가 당숙, 윤치성과 윤치영은 숙부이다. 해평 윤씨 문서 참고. 1915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잠시 활동하다가 탈퇴하고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로 유학을 다녀왔다. 당시 별명이 "영국 신사".

귀국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등 요로를 통해 집요한 협조를 강요받았으나, 석왕사에서 은신하며 일체 응하지 않았다. 게다가 부인과 사별하며 여식만 남겨두고 있던 터라 일본의 협박이 잘 먹히지도 못했다. 심지어는 문중회의에서 결의된 창씨개명을 홀로 거부하기까지 했다.


광복 직후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 활동한다. 미군정에서 농상공국 고문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공화국에서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이 독선적 태도를 견지하며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멀리하자 상공부장관을 사퇴하였다. 6.25 전쟁 중 국민방위군 사건,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승만과 결별하고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4.19 혁명 이후 들어선 제2공화국에서 민주당 구파로 대통령을 역임했다. 하지만 당시는 의원 내각제라서 대통령의 권력이 억제되어 있었고, 1년 쯤 지난 후에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워낙 정권을 잡고 있었던 기간도 짧았다. 실권은 민주당 신파의 장면 국무총리가 담당했다. 

역임 1년만에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으로 하야하려 했는데 당시 반응은 새벽에 보고받았던 "올 것이 왔다"였다. 대규모 유혈사태로 번지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주한미대사와 UN사령군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한림 중장을 저지하고 사임의사를 밝혔다.

하야이후 존재감이 참 없었다. 이런 이유로 최규하 하고 비교되나... 하지만 최규하보다는 많이 알려져있다. 무엇보다 교과서에서도 꽤나 비중있게 다룬다. (제2공화국, 의원 내각제, 그리고 양원제) 또한 박정희와 제5대 대통령 선거, 제6대 대통령 선거로 두 차례나 대통령 선거 대결을 했으며 특히 박정희 집권 전에 치뤄진 첫번째 선거는 거의 이길 뻔 했다. 바로 박정희의 남조선로동당 전력을 들춰 낸 것. 박정희는 매카시즘 하지마라는 말을 할 정도로 당혹해했다. 하지만 결국 그 색깔몰이로 영호남과 제주도의 반발이 일어났다. 오죽하면 전남에서는 박정희에게 몰표가 쏟아졌을 지경이었다. 매우 귀족적인 성향의 윤보선에 비해, 박정희는 그 자신이 소작인 빈농의 자식임을 강조하여 농민 표가 박정희에게 많이 간 탓도 컸다. 두 번째는 완패. 

첫번째 대결에서 근소한 차이로 진 다음에, 그는 스스로를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이후로 '정신적 지주' 등 '정신적'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5.16 이후 해산된 민주당 구파(사실 5.16 직전에는 신민당)을 규합하여 민정당을 창당하고 총재로서 오래 정치를 했다. 이후 민중당과 신한당에 몸담다가 신민당으로 통합. 1971년 신민당의 유진산 체제에 불만을 품고 탈당하여 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유신시대에도 김대중 등과 함께 사회 원로로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제5공화국에는 호의적이어서 민주화 운동에 적극 나서던 14살 연하의 영부인 공덕귀 여사를 허탈하게 했다. 그의 비서를 지낸 조종호나 김정례 등이 민주정의당이 입당했다. 말년에는 노태우를 공개 지지선언까지 했었다.

1980년 10월 22일 열린 제8차 헌법 개정안을 묻는 국민투표에 참석하여 인터뷰하는 모습

공식 상으로 나온 제일 말년의 모습이다. 1989년 5월 17일 홍성철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윤보선 전 대통령을 문병 당시의 사진. 이후 1990년 7월 18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윤보선 대통령이 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을 거부해 현충원에 안장되지는 않았다.

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에 위치한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의 선영.

서예에 능해 서예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가 쓴 글씨 중에서 "落山雲表(낙산운표)"는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고 꾸밈없고 소박하다는 평이며 정확하고 정사각형을 이룬 것과 선이 다소 약한 것은 매우 신중하고 바른 사람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휘호 중 하나인 민주구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