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붕괴의 원인은 체르노빌 원자력 폭발 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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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붕괴의 원인은 체르노빌 원자력 폭발 사고였다.


2017. 1. 27.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4분경에 전 인류가 멸망할뻔한 사고가 일어났다.

이날 체르노빌 발전소에서는 부소장 겸 수석 엔지니어인 아나톨리 댜틀로프의 지휘 하에 특별한 실험이 기획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원자로의 가동이 중단될 경우 관성으로 도는 터빈이 만들어내는 전기가 얼마나 오래 전력을 공급해줄 수 있는가?' 라는 것이었다.

[실험시작]

정격출력 22~33%인 700~1,000MW
그 당시 체르노빌 원전의 출력은 100% 였다.
100%의 출력을 22~33%까지 낮추기위해 제어봉을 인출.

이런 실험이 기획된 이유는 원자로가 정지할 경우 사용하는 비상용 디젤 발전기의 문제 때문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수준의 출력에 도달하는 데 1분이나 걸렸던 것이다. 따라서 원자로가 정지했을 때 과연 냉각펌프를 작동하는 데 필요한 전력을 제때 공급할 수 있는지가 불확실했고 그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이 실험이 기획된 것이었다.

실험은 25일 새벽 1시부터 시작되어 오후 2시까지로 예정되어있었으며, 원자로의 정지를 막기 위해 안전장치를 정지시켰다. 이때 키예프의 전력 담당자가 전력공급을 요구했기에 일시적으로 실험이 중단되었는데 장시간 동안 저출력 상태를 유지한 탓에 내부의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정상출력이라면 중성자를 흡수해서 안정된 상태로 돌아갔을 제논-135가 (중성자가 모자라서) 그러지 못하고 축적된 것.

다시 실험을 실시했을 때 문제가 생겼다. 원래 예정보다 원자로의 출력이 크게 떨어진 것. 그 이유는 실험자들의 실수 탓이라는 설이 지배적인데 이미 너무 많이 쌓인 제논-135에 의해서 출력이 통제를 벗어났었다는 가능성도 있다.
실험 당시 100%의 출력으로 운행중이던 원자로의 발전출력을 22%, 700MW까지 낮추는것이 조건이었으나 원자로 운전원의 실수로 30MW까지 낮아진다.

어쨌든 출력이 너무 낮아지자 실험자들은 제어봉을 빼내서 출력을 올리기 시작했다.(다시 200MW 정도의 출력으로 상승시킴) 그러나 정상출력보다 여전히 낮았기에 제논-135의 축적은 계속되었고 이 때문에 출력이 올라가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중성자를 제논-135가 모두 먹어치우니 핵반응을 일으킬 중성자가 모자랐고 출력도 올라가지 않았으며 제논-135는 계속 축적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그래서 실험자는 제어봉을 더 빼냈고 실험의 일환으로 평소라면 쓰지 않을 펌프까지 가동시켰으며 출력 저하로 원자로가 정지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또 정지시켰다. 제어봉은 6개~8개 가량밖에 안 남았었는데 규정상 최소 제어봉은 30개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고가 안전장치도 없는 구식 소련 원자력 발전소가 원인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체르노빌 원자로에도 안전장치는 다 붙어있었다. 당시 체르노빌 원자로에는 ECCS가 장치되어 있었는데 위와 같이 인위적으로 원자로를 중단시키는 실험을 하면 원자로의 연쇄반응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원자로 재가동 절차를 밟아야 했다. 하지만 아나톨리 댜틀로프는 이것을 매우 귀찮게 여겨서(...) 엔지니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ECCS를 모조리 해제하고 실험에 임했다. 이 행동은 집에 누전차단기 내려가면 귀찮다고 누전차단기 안 달고 전기 쓰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그리고 실험이 실시되었는데 전기 공급이 줄어들자 자연스럽게 냉각 펌프에 공급되는 전기의 양도 줄어들었고 이로 인해 냉각수의 유입이 감소하자 원자로 내부가 과열되면서 내부 증기압은 상승했으며 설계결함으로 인해 원자로의 출력은 미친 듯이 상승했다. 놀란 실험진들은 급히 안전장치를 가동해서 제어봉을 삽입했지만 제어봉을 너무 많이 빼놨던 탓에 이것들을 모두 삽입하는 데에는 18초나 걸렸다(가압경수로의 경우 2~4 초대로 가능하지만 체르노빌 발전소의경우 비등경수로 방식인데 비등경수로의 경우 제어봉을 삽입하는데 20초가량 걸린다.그동안 내부의 중성자는 미친 듯이 불어났고 내부에 있던 제논-135로도 이를 모두 흡수할 수 없었으며 마지막 희망인 냉각수마저도 제어봉에 밀려나간 탓에 중성자 흡수에 실패해 버렸다. 결국 원자로 출력은 정상치의 100배(30만MW) 가까이 상승했고 내부의 증기압은 과도할 정도로 상승하면서 터지지 말아야 할 게 터지고 말았다.

냉각재로 원자로 안에 들어있었던 물이 한꺼번에 끓어올라 일으킨 압력이 1차 폭발을 일으켰고 나머지 열이 수증기를 흑연과 반응시켜 수소와 일산화탄소로 만들어서 2차로 대폭발을 일으켰다.

이 두 번의 폭발은 반응로의 뚜껑에 이어 원자로의 콘크리트 천장까지 통째로 날려버렸고 이후 감속재인 흑연이 타면서 화재가 일어남과 동시에 최소 500경 베크렐, 최대 1200경 베크렐 가량의 흉악한 양의 방사능 물질이 사방으로 누출되었다.이때 누출된 방사능 물질의 총량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 리틀 보이의 400배.



[재앙의 시작]

화재가 발생하자 1차로 14명의 소방대원이 파견되었고 그 다음으로 급히 달려온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가 지휘하는 체르노빌 소방대가 전력을 다해 진화작업을 벌였다. 그들은 방사능 방호복도 없이 사투를 펼쳤지만 그들의 힘만으로 막기에는 재난의 규모가 너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중에 도착한 키예프 소방여단과 교대할 때까지 진화작업에 전력을 다한 결과 오전 5시에 대부분의 화재가 진압되었다.
텔랴트니코프의 소방대는 역부족이었으나 화재진압과 3호로의 보호에 최선을 다했으며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3호로는 기적적으로 무사했다. 만약 이것까지 터졌으면 재앙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지도 모르며 이 공적을 인정받아 텔랴트니코프는 그의 부하인 블라디미르 프라비크와 빅토르 키베노크와 더불어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텔랴트니코프는 53세가 되던 2004년에 암으로 죽었으며 키예프에 마련된 그의 무덤에는 그를 위한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대량의 물이 사용되었으며, 이 물은 4호로와 접촉하면서 증기로 변한 것이 내부 물질과 반응하여 가연성 물질로 변했다. 그리고 이것은 26일 오후 9시 41분에 다시금 대폭발을 일으키고 만다. 이 때 치솟은 불기둥의 높이가 자그마치 500m였다고. 500m라 해서 얼마인지 짐작이 안 간다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미국 윌리스 타워가 442m다. (안테나 포함시 527m.) 즉 한 거대 마천루 높이를 능가할 정도의 대폭발이었던 셈. 좀 더 쉽게 설명을 첨언 하자면 63빌딩이 249m, 롯데타워 지붕까지의 높이가 554m이다.

물이 소용 없음을 깨달은 소련 당국은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대량의 붕소, 돌로마이트, 납, 진흙, 모래 등을 뿌렸지만 방사선이 너무 강해서 원자로 위에 헬리콥터를 멈추게 할 수가 없었고, 이런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원자로 상공을 지나가면서 흙을 뿌리도록 해야 했다. 이 방법은 5월 7일까지 계속되었으나 흙이 4호로만이 아닌 주변까지 뿌려지면서 열이 식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헬리콥터도 추가 폭발 위험 때문에 물러나고 말았지만 다행스럽게 4호로와 딱 붙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호로가 무사하면서 여기에 있던 액체 질소가 4호로에 주입되었고, 5월 9일에 화재 진압에 성공한다. 만약에 3호로까지 폭발했더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날은 마침 소련이 나치 독일을 상대로 대조국 전쟁에서 승리한 승리의 날.


사고 직후 당연히 구소련 정부는 필사적으로 이를 숨기려고 했으나 사고로 인해 발생된 낙진이 저 멀리 서방국가 스웨덴까지 날아가는 바람에 스웨덴 사람들이 "뭔가 크게 터졌는데 눈가리고 아웅이라고? 개소리 집어쳐!!"라고 여기저기 떠들어대서 이 사고가 뽀록났다.



[대피와 작업 준비]

당시 체르노빌은 발전소인 동시에 발전소 직원과 연구원, 주민 등 5만 명의 인구가 살았고 특히 100km 내에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키예프가 있었기에 이만저만 난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인권 따위 개나 줘버린 소련 정부에서는 당연히 사고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고 덕분에 인근 주민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방사선에 피폭당했다. 그리고 사고 발생 당일 그 방사능 물질이 스웨덴까지 날아갔으나 이 항의를 계속 묵살하고 개기는 바람에 이 소문이 전 유럽에 모조리 퍼지고 나서야 소련에서는 사고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낙진은 전 유럽을 싸그리 다 덮었다. 심지어는 저기 멀리 떨어진 일본 및 홍콩에도 이 사고의 낙진이 떨어졌다. 거기까지 떨어졌다니 한국이라고 낙진이 안 떨어질 리가... 결국 브라질 같은 남반구를 빼고는 낙진이 모조리 날아갔다는 얘기.

사고 첫날의 방사능 누출량은 그렇게 크지 않았으나 26일 밤에 원자로에서 다시금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방사능 물질의 누출량이 크게 늘었고 이에 따라 소련 당국도 주민들을 피난시키기로 결정했다. 사태가 워낙 심각했던 까닭에 군부대와 경찰, 소방관 등 수십 만의 인력이 인근으로 투입되어 인원을 대피시켰다. 처음에는 프리피야트와 체르노빌, 그 인근 지역 주민들만 피난시켰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위험지역은 점차 확대되었기에 4월 30일부터 추가적인 소개 작업이 시작된다. 최종적으로는 발전소 주변 30km 이내의 주민 전부가 철수하였으며 방사능 물질이 대량으로 뿌려진 지역으로부터의 탈출이 종료된 것은 8월이었다.

당시 아주 번창하던 도시인 프리피야티(혹은 프리피야트)는 이 사고로 인해 인구 5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도시를 하루아침에 전부 떠나야 했다. 현재 가장 유명한 유령 도시로 알려져 있는 지금은 온갖 잡초가 자라고, 야생 동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나는 전설이다의 배경이 현실화된 도시라고도 불린다.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의 맥밀란 대위와 함께하는 암살미션에서 메인장소로 등장한다.

동시에 소련 당국은 정화 작업에 착수했으나 여기서 당시 소련의 국가적 한계가 드러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련이 무능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전 문서에서는 체르노빌에 방사능 방호복이 없었다고 하는데 실제론 직원용 몇 벌만 있었고 이걸로 모든 복구 인력에게 입히는데 무리였기 때문에 소련 전국에서 방호복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생방 보호의나 우의에 납을 붙여서 보낼 수밖에.

그래도 소련 정부 당국도 마지막 양심은 있었기에 아이오딘 131에 대한 방호를 위해 인부들에게 요오드가 첨가된 보드카가 다량 지급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지만 다른 방사능 물질을 막을 수가 없었다!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수습을 위해 골머리를 짜냈으나 토의 끝에 이들이 도달한 결론은 "방사능 물질에 오염된 지역은 모조리 부숴서 평평하게 한 다음 콘크리트로 2m 이상 덮어버리고, 오염된 원자로는 초대형 커버를 씌워버린 뒤에 10년쯤 지나면 해결 방법이 나오겠지?" 였다. 하지만 10년이 다가오기 전에 소련은.... 그리고 그야말로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체르노빌 전투]

그야말로 공산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한 무한한 인력 동원과 인권이나 자유를 무시한 조치들이 이런 비상 상황에는 효력을 발휘했다. 소비에트 휘하의 모든 공화국에서 인구 비례로 인원을 할당하여 소련 전체에서 총 60만 명(!)의 인력(주로 예비군)을 징발해냈다. 소비에트의 높으신 분들은 엄청난 인원을 조금씩 피폭시키는 방식으로 체르노빌 근로인력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한 것이다. [총지휘는 니콜라이 타라카노프(Nikolai Tarakanov) 장군이 맡았다.

1986년 체르노빌이 폭발 사고로 황폐화된 지 8일이 지난 뒤 노동자들이 핵발전소의 파괴된 원자로에서 자신들을 밖으로 실어 나를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살신성인]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사고 첫날 화재 진압을 위해 뿌린 물이었다.

사고 직후 녹아내리는 노심과 방사능 물질이 원전 지하에 흐르는 지하수와 만날 경우 광범위한 오염 또는 수소폭발이 일어나 오염이 유출되고 사고 통제가 어려워지는데 이렇게 되면 수습이고 뭐고 없다.

이를 막기 위해 펌프기사 알렉세이 아나넨코(Alexei Ananenko), 발레리 베스팔로프(Valeri Bezpalov)와 일반사병인 보리스 바라노프(Boris Baranov) 3명의 사람이 지하수로 흘러들어가는 방사능들을 막기위해서 램프를 들고 직접 지하로 들어가 방사능에 오염된 물로 잠수, 펌프를 가동시켜 지하수를 차단했다. 흔히 이들이 스페츠나츠 출신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사능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글이 떠돌아다니지만 Andrew Leatherbarrow가 2016년 조사한 결과 바라노프는 2005년 65세로 사망했고 나머지 두 명은 멀쩡히 살아 있었다. 물도 무릎 정도까지밖에 올라오지 않았다고...물론 그래도 위험한 일이었던 건 맞다.

어쨌든 이들은 소련뿐만 아니라 전 지구를 방사능에서 구해냈다.

 

[바이오 로봇]

소련군이 폭심지 주변을 헬기로 찍은 화면에서는 아직도 방사성 물질이 나오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에 대해 엔지니어들은 거대한 석관을 씌워 뚜껑을 덮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 작업을 위해서는 일단 발전소 지붕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지붕은 폭발 당시 튀어나온 감속재 흑연으로 뒤덮여 있었고 방사능에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인간이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으므로 무인 달탐사차량인 루노호트를 만들었던 기술자들을 불러와 로봇을 제작해서 투입시켰다. 거창한 물건은 아니고 일종의 원격조종 불도저 같은 것으로 밀어서 조각을 지붕 아래로 밀어서 떨어뜨렸다. 달에는 우주 방사선이 강력하게 내리쬐는 환경이므로 달탐사 로봇을 만든 기술력으로 원자로의 방사능도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배터리 수명에 문제가 있었다.

작업을 마냥 미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3,500명 정도의 인력 투입이 결정되었고 로봇을 대신해 투입된 이들은 바이오 로봇으로 불렸다. 문제는 화생방보호의가 없었다는 것. 정확히는 몇 벌 되지도 않기도 하고, 애초부터 그 인원에게 전부 줄 수는 없었기에 이걸 3,500명에게 번갈아가며 입게 한 후, 즉시 우의에 납 판때기를 기워 만든 조잡한 화생방보호의가 만들어졌으나 이마저도 몇 벌 없었던 까닭에 작업인원들이 돌아가면서 입어야 했다. 거기다 지붕의 방사선 수치가 너무 엄청나다 보니 올라가 잠깐 작업한 뒤 되돌아와 쉬어야 했는데 작업 시간은 보통 2분을 넘기면 생명을 장담할 수 없었으며 방사능이 강할 경우 작업 시간은 불과 40초로 제한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8명이 뛰어들어가 삽으로 퍼내서 지붕아래로 떨어뜨리는것을 2번 하고 다시 뛰어나와 재빨리 옷을 벗으면 그걸 다음 조가 갈아입고 또다시 뛰어들어가는 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당시 이 위대한 자기 희생의 모습을 찍으려고 같이 현장으로 들어간 사진기사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방사선 모양으로 카메라 필름이 타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3,500명이 10일간을 작업한 뒤에야 방사능의 1/3이 줄어들었고 석관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방사선과 싸운 댓가로 증명서 하나와 100루블(오늘날 U.S 100달러 정도의 수준)을 받았다.

 

[마그마 문제]

위쪽을 덮는 것 뿐만 아니라 아래쪽을 차단하는 것도 문제였다. 용융된 핵연료 마그마들이 점점 바닥을 뚫고 내려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아래쪽으로 핵연료가 누출될 경우 대수층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서부 러시아의 전체 식수원이 오염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엔지니어들은 방사선이 그나마 약한 지하 쪽으로 땅굴을 파들어간 다음 발전소 아래에 액체질소를 사용한 냉각기를 설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소련 전역에서 광부들이 소집되었다.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열기 안에서 광부들은 한 달 만에 작업을 완료했는데 통상의 3분의 1로 단축된 것이었다. 그러나 지반이 매우 좁고 더워서 방호복을 입을 수 없는 상황에서 토양은 방사능에 오염된 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히 광부들도 다량의 방사능에 피폭되었고 재수가 없어서 방사능에 오염된 흙을 먹고 그 자리에서 사망하는 광부들도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희생을 한 끝에 발전소 아래에 공간을 마련하고 나니 정작 냉각기 완성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겼다. 결국 액체질소 냉각기는 취소되고 그 자리를 콘크리트로 채워버리고 말았다.

 

[석관의 완성]

체르노빌 원전을 완전히 뒤덮을 석관의 부품은 소련 각지에서 제작되어 운반되었고 이 부품은 현장에 투입된 인원들이 조립했다. 현장에서 모든 것을 다하지 않은 이유는 발전소 주변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었고 이런 곳에서 오래 작업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조립은 1986년 10월에 완료되었으며 50만 명의 소련군은 방사능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첫 번째 전투의 종결일 뿐이었으며, 그 후에도 사후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석관 위에 다시 더 큰 석관을 씌우는 프로젝트 역시 진행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단독으로는 도저히 무리여서 각국의 모금을 걷어 진행 중이다.


<2016년 11월 완성된 새로운 석관 별 문제가 없다면 향후 100년은 안전할 것 이다>

새로운 석관이 완성된 후 핵연료를 끌어내서 폐기할 때까지 위협은 계속될 것이다.

위 훈장은 저 생지옥에서 목숨을 걸고 희생한 사람들에게 수여한 것이다. 참고로 끌려간 사람들 중 대다수가 20년 이내에 사망했다고 한다. 1991년에 이 메달과 인증서를 저 생지옥에서 고생한 사람들에게 나눠줬으며 그 사람들이 받은 이 훈장을 그들의 아들, 딸 혹은 홀로 살아남은 배우자들이 팔고 다녔다고 한다. 러시아의 침체된 10년동안 제대로 연금도 못 받을 수준의 경제 상황에서 저런 훈장이라도 팔지않는다면 당장 굶어죽을 처지였다.

 

[책임자들의 처리]

문제의 실험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사고 당일 즉사하거나 극심한 방사능 피폭으로 며칠에서 몇 주 사이에 죽었으며 발전소 직원들 상당수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발전소장인 빅토르 브류하노프(Виктор Брюханов)와 실험책임자인 아나톨리 댜틀로프(Анатолий Дятлов)는 살아났으며 소련 정부는 이 둘에게 책임을 묻게 된다. 중대한 업무상의 과실 치사 혐의를 적용, 형사고소를 통해 10년의 징역형을 때린 것이다. 그리고 현장 직원들도 도마에 올랐지만 조사 결과 그들은 상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것으로 밝혀졌으며 사후에 용기 칭호가 수여된 사람도 있다.

물론 처벌이 가벼워 보이는 게 사실이나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도 10년형인 건 물론 책임자들이 의도적으로 사고를 친 것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명백한 과실이었기에 소련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 이들이 자행한 '실수'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능지형에 처해도 모자랄 지경이지만 과실과 고의는 구분되어야 하고 어차피 이들도 방사능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는 건 물론 인류가 존속하는 이상 영원히 손가락질 속에서 살게 될 테니 그걸로 대가를 치렀다고 볼 수 있겠다.

더욱 가관인 것은 두 사람 모두 형기를 채우지도 않고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핵심 책임자인 댜틀로프는 평생 방사능 때문에 고생해야 했고 사고가 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1995년 결국 세상을 떠남에 따라 체르노빌 사고 후유증 사망자 명단에 오르게 됨으로써 대가를 치렀다.

2011년 4월 28일 체르노빌 발전소장이었던 빅토르 브류하노프가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사고 당시 피폭량이 250rem(2.5Sv)이었기에 살아남은 것 같다.

 

[주변 지역의 피해]

체르노빌과 프리피야트는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유령도시가 되었으며 주변 마을들도 모조리 비워졌다. 주변의 숲들도 똑같은 이유로 출입금지구역이 되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붉은 숲이다.

원전에서 18 km 떨어진 체르노빌 시는 오랫동안 유령도시가 되었다가 2003년 체르노빌 복구 및 개발 프로그램(Chernobyl Recovery and Development Programme)이 시작되면서 관련자들이 들어와 거주하고 있다. 원전과 프리피야트 관람도 여기서 출발한다. 그러나 전성기에 비하면 꽤나 적은 숫자로, 일부 건물을 제외한 도시의 거의 모든 건물이 빈 상태라서 유령도시에 가까운 상태다.

 

[주변 국가의 피해]

주변 국가들도 무지하게 피해를 봤다. 일단 벨라루스(벨로루시), 러시아에서는 소아 갑상선암 발생률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특히 하필이면 바람이 위로 불고 있었던 탓에 벨라루스에는 이 사고의 낙진의 80% 가량이 떨어져서 지금도 벨라루스 국토의 33%씩이나 되는 곳(남한 면적의 반이 넘는 면적)이 방사능 오염으로 출입금지 구역이다. 영국이나 스웨덴 같은 유럽의 반대쪽에서도 토양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었다. 특히 영국의 일부 지역은 이때의 사고로 인하여 방사능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출입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곳도 있다. 이탈리아산 파스타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어 일본에서 수입을 금지당하는 일도 있었다. 우리나라 역시 이 사고의 영향으로 현재 2, 30대 중에 갑상선암 발병 비율이 높아졌다는 주장이 있다. 당신의 갑상선암은 체르노빌 탓인가. 이 주장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방사능량이 미미했으며, 갑상선암의 발생율 증가는 건강에 대한 관심과 검진율의 증가가 원인이라는 반론이 있다. 녹색연합 최초 문제제기에 대한 반론.

이 사건 이후 러시아에 근접한, 아니 근접하지 않은 유럽 여러 나라 야생동물의 뼈와 뿔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된다. 독일 같은 경우 방사능에 오염된 멧돼지를 잡을 경우 잡아먹지 않고 정부에서 그 대신 돈을 줄 정도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한약재로 인기가 높은 녹용(!)에 방사능이 쌓이기 때문.

서방 세계, 특히 서유럽 지역에서도 체르노빌 사고가 너무 큰 피해였기 때문에 자국 내 원전 반대여론과 집단 패닉 사태를 우려하여 사건에 대한 진상을 감추었다. 체르노빌 사건 관련 자료는 당시 즉각적으로 발표되지 않고 어둠 속에 묻혔으며 2000년대 들어서야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었다.

 

[동식물들의 피해]

하지만 세상 일은 끝까지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 현재 체르노빌 지역은 몇십 년간 인간의 손이 닿지 않고 보존된 덕분에 야생동물의 천국이 되었다. 방사능 물질이 어느 정도 줄어들자 동물들이 돌아와 현재는 유럽의 희귀동물들이 여기서 살고 있다는 듯. 인터넷에서 4m가 넘는 메기나 초거대 지렁이/쥐 사진이 떠돌면서 체르노빌 괴물이라고 나오고 있지만 루머에 불과하다. 4m가 넘는 메기는 웰스메기라는 종으로 원어종 자체가 3m는 자라며 사람의 출입이 통제되면서 자연 상태로 무럭무럭(?) 자란 것에 불과하다. River Monsters에서는 방사능으로 인해 오히려 크기가 줄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초거대 지렁이는 자이언트 지렁이라는 녀석으로 남미/호주에 서식하는 종. 이 또한 원래 기본 1m에 최대 3m까지 자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대쥐는 중국 모 대학생의 제작품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야생동물의 천국이 된 것까지는 좋은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잔류 방사능 물질 때문에 체르노빌을 갔다오는 철새들의 생식능력이 떨어져 간다고 한다. 철새가 이런데 다른 동물도 그렇게 무사하지는... 실제로 체르노빌 주변에서 서식하는 기형동물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하나의 몸통에 머리통이 여러 개가 달린 개구리나 자체가 둘둘 말린 해바라기나 꽃 한가운데를 뚫고 다시 올라온 꽃대와 꽃 같은 기형 생물들이 실제로 발견되고 있긴 하다.

 

[소련의 붕괴 시작]

소련에서는 사고 후에 어떻게든 발전소 간판만은 내리고 싶었지만 이미 간판이며 뭐며 전부 방사성 물질에 절어버린 뒤라서 건드릴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고. 그뿐만 아니라 당시 복구작업 때 쓰던 장비들도 방사능 폐기물로 버려져 있다고 한다. 심지어 원자로를 콘크리트로 매워버리는 데 사용된 세계 최대 헬리콥터 Mi-26 헤일로 100여대 역시 모조리 메워버렸다. 거기다 바로 옆에는 소련에 두 대밖에 없다는 초대형 핵미사일 감지 레이더("Russian Woodpecker" DUGA-3)가 위치한 비밀 기지도 있었는데 이 물건도 방사능에 오염되어 버려졌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은 내셔널 지오그래픽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투입된 비용이 거의 국가 예산 전체 규모에 맞먹었던 것으로 구소련의 붕괴를 불러일으킨 결정적 요인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가뜩이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들인 비용에 미국과의 군비 경쟁으로 인해 소련의 재정지출이 크게 늘어났고 더군다나 사우디와 영미권 업체간의 치킨게임으로 인해 석유값이 폭락하는바람에 쓰는돈은 그대로인데 걷어들일 돈은 크게 준 상태에서 체르노빌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사건을 수습하는데 드는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어버리는 바람에 소련경제가 회생불능의 상태가 되었다는게 정설이다.

거기에다 위에서 보듯 체르노빌 원전 폭발로 아직도 많은 지역이 방사능에 덮혀있고 50만 명이 넘는 인력을 동원한 것과 그 인력들 대부분과 인근 지역에 살았던 이들 대부분이 방사능에 피폭되었으므로 건강한 삶을 살았을 리는 만무하다. 또한 정화작업에 투입한 자원과 지역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데 든 비용을 생각해 보면 과장이 좀 있다고는 해도 소련 같은 대국도 부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비용이 든 건 명백한 사실이다.

이렇게 원자력 발전소 폭발로 인한 대규모 피해와 이를 수습하는 데 혼선을 겪었고 그리고 이후로도 다른 희생양을 찾아 죄를 뒤집어 씌우는 소련 당국의 태도는 소련과 공산주의 정치 체제의 실패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그나마 소련 당국이 비난 이후 최대한 진실에 가까운 정보 공개를 허용한 것이 이 사건이 부른 몇 안 되는 진보.

이때 입은 인적, 물적 피해는 미국의 SDI 계획과 함께 소련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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