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시인 밥 딜런 Bob Dy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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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시인 밥 딜런 Bob Dylan


2016. 12. 27.

가수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은 1941년 미네소타 주 덜루스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중산층 자녀로 태어났다.어렸을 때부터 행크 윌리엄스, 엘비스 프레슬리, 리틀 리처드의 광팬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엔 로큰롤 밴드를 조직하여 여러 번 공연을 했었다. 이 당시에 그가 속한 밴드는 다른 스쿨 밴드보다도 매우 시끄럽게 연주했다고 하며, 한번은 교장 선생이 마이크 줄을 끊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59년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미국에선 로큰롤 배척 분위기가 팽배해져 우디 거스리의 포크 음악과 흑인 전통 블루스에 관심을 돌리고 근처에서 밥 딜런이라는 예명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961년에 뉴욕으로 올라와 카페에서 반주를 하고 간간이 노래를 부르며 살았다. 이 때 그는 우디 거스리의 병실을 찾아가 그를 간병하며 초기 음악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1962년 컬럼비아 레코드의 눈에 띄어 첫 앨범인 "Bob Dylan"을 발표한다.






1961년 1월 딜런이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도착했을 동갑내기 존 바에즈는 이미 "포크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딜런의 2004년 자서전에 따르면 딜런이 처음으로 TV에서 바에즈를 보았을 땐 "눈을 뗄 수가 없었고, 눈을 깜빡이기조차 싫었다 (중략) 그녀의 모습에 난 한숨만 나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 악령을 쫓는 목소리. 하느님에게 직접 노래하듯한 목소리 (중략) 못하는 게 없었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그에 비하여 1961년 바에즈는 딜런의 공연을 보고 별로였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963년 바에즈는 아직 무명인 딜런을 자신의 공연에 불러 듀엣도 하고 솔로의 기회도 주기 시작하였다. 만명에 달하는 관객은 딜런의 낯선 스타일에 야유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The Freewheelin' Bob Dylan 앨범과 더불어 딜런의 인기는 바에즈를 추월하였고 이제는 바에즈가 딜런의 도움을 받기 시작하였다. 1965년 유럽 공연을 떠난 딜런은 초기 바에즈가 준 도움에 보답을 하고 싶다며 바에즈를 초대하였으나 이미 인기가 몰락해버린 바에즈는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였고, 바에즈는 큰 상처를 입은 채 2년간 이어진 그들의 로맨스를 끝내고 말았다.


이후에도 늘 저항 가수로서 활동하던 바에즈는 딜런에게 다시 돌아오라며 공개적으로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였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던 딜런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둘은 수차례 합동 공연을 통해 인연을 이어갔고, 바에즈가 자서전에서 딜런을 엄청나게 씹어댔지만 현재는 서로에 대해 좋은 말을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바에즈는 딜런의 노래만큼 부르기 즐거운 음악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생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에즈와 결별한 해 밥 딜런은 비틀즈와 조우하면서 서로의 음악에 큰 영향을 주고 받게 되었고대마초도 전수해준다, 폐쇄적인 포크 소사이어티를 벗어나서 서로 다른 장르들이 융합하는 포크'록' 아티스트로서의 행보를 걷게 된다.


본격적으로 재능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에 발표한 "The Freewheelin' Bob Dylan" 앨범이었다. "Blowin' In The Wind",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등의 명곡이 쏟아져 나왔으며, 시적이면서 정치적인 깊이가 있는 가사와 모던 포크의 간결함을 수용한 이 앨범은 곧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이 앨범으로 인해 그의 음악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밥 딜런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곧 너무 단조롭고 심심한 포크와 폐쇄적인 포크 커뮤니티에 질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신은 딜런에게 비틀즈를 선사했다. 더불어 신은 비틀즈에게 딜런을 선사했다.


당대의 스타였던 두 뮤지션들은 곧 서로에게 빠져들게 되었다. 비틀즈는 심도있는 가사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딜런은 비틀즈의 로큰롤이 가진 에너지와 환희에 매료되었다. 딜런은 후배 밴드인 "버즈(Byrds)의 "Mr. Tambourine Man"과 자신의 앨범인 "Bringing It All Back Home"을 통해 록을 시험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자신감으로 본격적으로 포크 록에 도전한다. 그리고 기존 포크팬들에게 쌍욕을 먹기 시작한다.

당시 포크 씬은 전기 기타를 드는 행위를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기 기타를 드는 행위가 포크의 순수성을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5년 5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은 전기 기타를 드는 것으로 그들의 믿음을 배신했다.하지만 딜런은 아랑곳하지 않고 8월 "Highway 61 Revisited"를 발표했다. 오히려 포크의 대부 우디 거스리는 "젊은 사람이 하겠다는 것이 바로 미래이다"라면서 딜런을 옹호했다.

이 앨범은 여러모로 밥 딜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우선 "Bringing It All Back Home"에서 간보기를 했던 포크 록을 본격적으로 완성시켰으며, 가사 역시 하나의 예술의 경지로까지 올렸다. 록 평론가 '데이브 마시(Dave Marsh)'는 이 앨범을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최고라고 평하면서, "이 무렵 그의 영향력은 너무도 확산되어 정말 수천의 사람들이 그의 언어 하나 하나에 매달리는 실정이었다."라고 말했다. 수록곡 "Like A Rolling Stone"은 6분이라는 파격적인 곡 길이와 비의적이지만 신랄한 가사, 당시로서는 복잡한 실험성에도 불구하고 싱글차트 2위에 올라 그의 대표곡으로 자리잡았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도 밥 딜런 커리어 중 으뜸으로 자리잡고 있다. 앨범전곡을 가사번역하신 분이 계신다.


1966년에 발표한 "Blonde on Blonde" 역시 큰 찬사를 받았고, 작품성으로는 그의 정점이라 평해진다. 밥 딜런은 저 세 장의 앨범으로 천하를 제패했다. 하지만 앨범 발표 뒤에, 오토바이 사고가 일어나 크게 다친 그는 잠시 세간의 눈을 피해 요양하게 된다. 이는 사실 매니저 앨버트 그로스먼과 짠 계획이었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던 딜런은 그로스먼과 신비주의 전략과 가정을 위하여 일부러 크게 다쳤다고 발표하기로 하고, 그가 다쳤단 소식이 들리자 딜런의 앨범 판매량이 급증했다.

복귀 이후 그는 히피 운동이 한창이였던 1960년대 말을 "John Wesley Harding", "Nashville Skyline" "The Basement Tapes"같은 앨범을 녹음하면서 어쿠스틱과 컨트리에 집중하는 인상을 보였다. 이렇게 대중과 평단의 기대와 어긋나는 행보에 미묘한 반응을 얻던 차에 이혼 직후인 1975년 발표된 'Blood on the Tracks'으로 다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 앨범과 'Desire' 이후 그는 다시 한 번 방향을 급격하게 전환한다. 종교 때문이었다.

1970년대 말, 기독교에 심취하기 시작한 밥 딜런은 1979년 "Slow Train Coming"이라는 가스펠 음반을 내놨으며 그래미 상도 타고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밥 딜런은 기독교에 심취함을 넘어 전도사로도 활약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그는 전도사 생활 비중을 늘리면서 예전보다는 덜한 대중들의 관심 속에서 정규적인 앨범 발표와 공연과 반전 운동으로 1980년대를 보낸다. 허나 발표한 앨범들의 퀄리티가 전성기보다 못해서 이 시절은 그의 암흑기로 불린다. 정확히 콕 집어서 말하자면 백 밴드 놔두고 당대 유행인 뉴웨이브를 어정쩡하게 도입하려고 했다가 안 좋은 평을 받았다고. 그 와중에도 기억될 만한 음악적 경력을 꼽자면 미국의 유명 뮤지션 25명이 녹음한 자선음반인 "We Are The World"의 녹음 참가 정도(...) 그래도 별다른 휴지기 없이 꾸준히 공연 돌고 반전 운동에 참여하긴 했다. 별로 눈에 안 띄는데다 상대적으로 걸작이라 할만한 앨범이 없어서 그렇지

1989년 "Oh Mercy"로 지금까지의 암흑기를 떨쳐버리고 재기의 가능성을 내비친 그는 1997년 "Time Out Of Mind"로 확실히 재기에 성공한다. 지금도 3~5년 터울로 꾸준히 음반을 내놓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밥 딜런의 음악은 음악적인 뿌리 (블루스, 포크)를 찾아 회귀하는 인상을 보이고 있다.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상 이유는 "미국 가요 전통 안에서 참신하고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낸 공로."

문인이 아닌데 노벨문학상에 선정된 경우는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 정치인 윈스턴 처칠,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가 있지만 이들은 기존의 문학이라고 생각되는 범주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었고 가수로서 이 상을 수상한 것은 밥 딜런이 처음이다.

하지만 2016년 10월 19일 현재, 밥 딜런은 노벨위원회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있으며, 노벨위원회는 밥 딜런에게 연락을 포기했고 측근에게만 수상 사실을 알렸다는 기사가 나왔다. 실제로 밥 딜런은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하여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사르트르처럼 노벨상 수상을 거부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는 상태다. 노벨위원회는 시상식에 오고 싶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10월 28일,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소감을 밝히며 상을 받겠다고 했지만 다른 약속이 있다는 사유로 불참을 선언했으며, 어떤 약속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는 기사도 있다. 특히, 시상식 불참을 선언한 이후 비판적 시각이 늘어났다. 하지만 밥 딜런을 비판하고 있는 해당 조선일보 기사는 '아무 근거는 없지만, 필자는 전 세계 재계와 언론계를 꽉 잡고 있는 유대인들의 입김이 이번 노벨문학상 선정에도 작용했다고 본다. 밥 딜런은 본명이 로버트 앨런 지머맨(Robert Allen Zimmerman)인 유대인이다. 공교롭게도 뉴욕타임스의 딜런 수상 기사에는 비판적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는 지극히 인종 차별적이고 편협적인 내용이다. 기자 본인이 인정했듯 아무 근거도 없는 비난을 기사로 작성한 것이다.

딜런은 노벨상 시상식에 수락 연설문을 보내며, 다른 사람이 대신 연설한다고 밝혔다. 그 다른 사람은 아지타 라지 주스웨덴 미국 대사가 대독하였다. 연설문에서 "만약 누군가가 내가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말했다면 나는 그 가능성이 달에 서 있을 확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수상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음을 밝혔다.

이어서 "자신을 극작가로 여겼던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쓸 때만 해도 '역에 잘 맞는 배우는 누구일까' 등 다른 많은 문제를 고민했을 것"이라며 '내 작품이 과연 문학인가'라는 것은 그가 가장 하지 않았을 질문이라고 언급했고, 딜런 자신도 셰익스피어처럼 창조적 시도를 하고, 삶의 일상적 문제를 다루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다며 '내 노래들이 과연 문학인가'라는 질문을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런 면에서 자신의 노래를 문학으로 여겨준 한림원에 감사를 전하며 러디어드 키플링, 조지 버나드 쇼, 헤밍웨이 등 문학 거장들과 함께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함께 이름을 올리게 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날 시상식에서 축하 공연을 한 가수 겸 작가 패티 스미스는 딜런의 노래 'A Hard Rain's A-Gonna Fall'를 선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