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록의 살아있는 신화,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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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록의 살아있는 신화, 신중현


2016. 6. 6.

한국 대중음악 발전의 산실 미8군 무대



한국 대중음악의 시작이 미8군 무대라고하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미8군 음악의 수용자가 내국인이 아닌 미군장병이었다는 점 때문에 절름발이 음악이라고 하거나 전국민의 사랑를 받는 트로트가 엄연히 주류로 이어오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60년대 부터 80년대 까지 한국 대중가요의 발전을 이루어내고 역사를 바꾼 음악인들이 모두 이곳 출신들이라는 점은 인정하기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미8군 무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주둔미군에서 국내인으로 대상을 바꿔 음악활동을 했을때 한국 대중 가요는 한단계 발전했다. 과연 미8군 무대가 무엇이었길래 가요발전의 토대가 되었을까.



① 미8군 무대의 생성



미8군 무대란.



전국 각지의 미군 주둔 캠프가 있었고 그곳에는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클럽이 있었는데 그곳 무대가 미8군무대이고 여기에서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이들을 미8군 연예인이라고 했다. 
미8군 무대는 음악인들에게는 최고의 무대였다.
이들은 분기별로 용산의 USIS라는 곳에서 공개오디션을 거쳐 실력을 인정받아야만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오디션에서 부여받은 레벨은 음악인의 가치이며 거기에 근거해 실력자들은 충분한 보수를 보장받았다. 당시 수출100만달러에 미치지 못하던 시기에 미8군 연예인들의 외화벌이가 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연간 120만 달러에 달했을 정도이다. (6.25 전쟁 이후 한국의 대외무역은 미국의 원조 수입이 대부분이였다.




원조 수입이 전체 수입량의 80%를 넘었고, 수출은 수입액의 1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수준이였다. 수출이란 개념이 우리 생활 속에 들어온 것은 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면서부터이며 철광석, 중석등의 광산물과 농산물 위주로 수출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와중 정부는 공업화 정책을 수립하였으며 64년도에 의류, 신발류 등의 공산품 위주의 수출상품으로 대망의 1억 달러의 수출을 달성하였다. 그후 67년에는 4억달러, 77년에 100억불 수출을 달성하였다.



 98년도에는 1323억불을 수출했다.) 한마디로 실력있는 음악인들이 다 모인 곳이 미8군무대였던 것이다.
또 전국의 각 클럽마다 보통 4-5팀의 전속 가수나 밴드가 있었으니 미8군 연예인의 규모가 엄청났음을 짐작할수있다. 이렇듯 규모가 큰 만큼 이들을 전문적으로 관리해주는 미8군 쇼단체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화양, 유니버셜, 아주, 삼진, 동영, 대영 등의 회사이다. 이들은 미8군 무대가 전성기이던 시기에 함께 성행했다.

미8군의 가수들은 8군 무대의 인기를 바탕으로 종로와 명동 등지에서 성업중인 살롱무대로도 진출한다. 당시 일부 방송과 AFKN등을 통해 팝송에 익숙한 팬들이 즐겨찾던 음악감상실이 있었는데 이들은 점차 트위스트 댄스대회나 미8군 인기 악단을 음악감상실 무대에 세우는 등 젊은이들의 다양한 욕구를 채워주었다.




이처럼 음악감상실이 라이브 무대의 형태로 자리잡으면서 여러 살롱들이 이벤트와 미8군 인기인들을 살롱 무대에 세우기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중 신중현은 가장 인기있는 기타리스트 중 한명 이었다. 특히 세시봉은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등 인기 가수를 배출시켰고 신중현의 에드 훠가 일반무대에 첫선을 보인 곳이기도 하다.
신중현은 화양 에이젼시에 속해 있었는데, 화양에서는 신중현과 동료들을 위해「클럽데이트」라는 패키지쇼를 만들어줄정도로 귀한 몸이었다. 그 공연은 전국 미8군 무대를 돌며 올려졌고 매우 인기가 높았다. 주1)
신중현은 미8군의 인기를 바탕으로 '미도파살롱', '은성살롱', '닐바나'등에서도 활동했다. 신중현의 인기는 날로 높아가 미군 주둔군들이 지방에서 트럭을 타고 신중현의 기타를 들으러 왔으며 AKFN이나 미8군 내에서 특집으로 다뤄질 정도로 대단했다.



이렇듯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뿌리는 미8군에서 시작된다.최고의 무대였던 미8군에는 가장 실력있는 음악인들이 있었고 이들이 하나둘 가요계로 나오면서 가요계의 내용과 수준을 변화시켰다. 기성가요계에 서구의 음악을 소개하거나 접목시키면서 다양한 음악들을 선보였고 훌륭한 연주로 팝음악에 익숙한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주기도 했다. 결국 미8군 출신 음악인들은 80년대까지 주축이 되어 가요계를 이끌어간다.



② 미8군 무대의 최고 스타 신중현



신중현은 미성년이던 57년에 미8군무대의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보수도 처음 3,000원에서 시작해 서서히 인기를 얻고 62년경 미8군 톱스타의 자리에 오르면서 2,4000원(63년 당시 도시근로자가구의 월평균 가계소득은 5천990원-통계청 자료)으로 올랐다. 활동범위도 미8군 뿐 아니라 국내 여러 라이브 무대를 통해서 신중현이라는 이름을 알렸다. 신중현은 당시 최고의 기타리스트로서, 작곡가로서 부와 명성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60년대 미8군 최고의 스타였던 신중현의 이력을 통해 미8군의 상황과 그가 대중가요계에 남긴 족적을 살펴보자.



신중현의 미8군 생활은 57년 아직은 미성년이던 때 시작된다. 고등학교 2학년때 가출하여 독학으로 배운 기타 실력으로 종로의 기타학원 강사를 하던중 신중현의 제자였던 미8군 무용수의 권유로 미8군무대에 서게된다. 미성년이라 비공식 절차를 거쳐 연주를 하기 시작했고 보수도 3,000원으로 매우 낮았다.
그러나 신중현은 미8군 쇼무대와 '미도파살롱', '은성살롱', '닐바나'를 주무대로 삼아 활동하면서 세계의 음악 흐름을 알게된다. 서서히 실력도 늘고 인기도 올라가 그에게 차츰 기타 솔로연주를 요구했다. 첫 독주 무대였던 60년경의 시빌리안 클럽. 이곳은 미군 정보부 소속의 클럽으로 평상시에도 사복을 입고 다니는 고위층 군인들이 다는 곳이었다.




그곳 클럽 책임자가 그에게 버츄스(Virtues)의 <기타 부기 셔플(Guitar Boogie Shuffle)>이 담긴 음반을 주며 그곡을 독주무대에서 연주하라고 했다. 그는 그런 무대가 처음이어서 긴장을 많이 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연주를 듣고는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것이 신중현이 그의 음악생활에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라고 한다.성공리에 무대가 마무리 되자 클럽 책임자가 월급을 7,000원으로 올려주었다. 옆부대 소속의 클럽에서 그를 스카웃 하려하자 책임자가 18,000으로 올려주었다. 당시 신중현은 미8군에서 '재키', '히키' 또는 '스꼬시'라는 애칭으로 불리워졌고 인기가 대단해서 문산에 있던 미군들이 트럭을 타고 그가 있던 동두천으로 몰려와서 그의 기타연주를 들었다.




그리고 AFKN에서 신중현이 있던 그룹을 특별 방송한 바 있고 당시 미8군 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이나 미국잡지에 여러번 대서특필 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어떤 음반회사에서는 신중현에게 음반 취입을 하자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 오기도 했다. 그런데 신중현은 그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미8군 클럽 책임자가 보여주었다. 신중현이 없으면 미8군 쇼무대 장사에 큰 지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암튼 그때 클럽 책임자를 무척 원망했다. 그러다가 미8군 톱스타의 자리에 오른 62년 경에는 2,4000원까지 올랐다.



신중현은 59년미8군에서 함께 일하던 선배들인 더불베이스, 드럼, 색소폰 연주자와 함께 첫 앨범을 내는데 그것이 도레미 레코드회사에서 발매된 '히키-申 기타-멜로듸 輕音樂 전曲集'이다. 여기에는 재즈풍으로 편곡된 동요와 한국 민요가 담겨있다.
1962년 경, 신중현은 한국 최초의 록 그룹 '에드 훠'(Add 4)를 결성 하여 활동했다.(이전에 신중현이 결성했던 그룹이 있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없기에 편의상 한국 최초의 록 그룹이라 칭한다.) '에드 훠'는 활동시기를 라인업에 따라 시기별로 분류되는데, '에드 훠' 초기에는 신중현이 전기기타를, 한영현이 베이스를, 지금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들 2명이 리듬기타와 드럼을 연주했다. 중기 '에드 훠'는 전기기타 연주의 신중현, 드러머 김대환, 베이스의 지미와 보컬의 서정길로 멤버가 바뀌었다. 후기 '에드 훠'는 신중현(전기기타), 서정길(보컬), 한영현(베이스), 권순권(드럼)으로 멤버가 바뀌었고 1964년, 엘케엘 레코드사에서 '에드 훠' 음반을 냈다. 이 음반은 한국 최초의 록 음악 음반이다.



여기에 한국 최초의 록 창작곡으로 신중현의 작품 <빗속의 여인>, <우체통>, <상처입은 사랑>, <소야 어서 가자>, <늦으면 큰일나요>, <천사도 사랑을 할까요>, <그리운 그 님아>, <커피 한 잔(내 속을 태우는구려)>, <나도 같이 걷고 싶네>, <고향길>, <그대와 둘이 앉으면>, <쓸쓸한 토요일밤>, <바닷가>, <굿나잇 등불을 끕니다(유광주 작사)>가 담겨있다. 신중현은 '에드 훠' 음반에 장미화를 데뷔시켰다.



'에드 훠' 의 데뷔 음반 초기에는 '에드 훠'가 서울보다 부산에서 인기가 좋아서 부산 제일극장 등에서 공연을 했고 그 후 서울에서도 인기가 높아지자 서울에서도 공연을 했다. 그리고 '에드 훠'는 KBS-TV에도 여러번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 1965년에 해산되었다.
그런 한편으로 신중현은 1962년경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이교숙에게 작곡, 편곡 등을 배우며 음악이론도 충실히 쌓아갔다.
70년에 그는 엄청난 음악 작업을 했다.1970년 초 '제로'(Zero)악단, 그룹 '퀘션스'를 결성했다. 그룹 '퀘션스'에서 신중현은 리드 기타를, 김대환은 드럼을, 이태현은 베이스를, 김민랑은 오르간을 연주했고 이 그룹에서서 박인수, 송만수, 임희숙, 임성훈 등의 가수가 활동했다. 1970년 초 명동의 '코스모스' 싸롱에 고고 클럽을 개업하기도 했다.앨범을 중심으로 보자.



-70년 봄 '조영남 골든 히트 제1집'

-3월 펄 씨스터즈와 이정화의 음반

-3월 '김상희 리싸이틀쇼' 음반에서 '어떻게해'등 작품 발표

-5월 그룹 '퀘션스' 음반 발표. 여기서 박인수, 임희속, 송만수, 임성훈이 노래를 불렀다.

-6월 '신중현 작곡 힛트 경음악 1집' 음반

-7월 'Go GO Gala Party'라는 신중현 공연 실황음반. 퀘션스와 박인수, 송만수, 김추자가 함께 공연.

-여름 '백만인의 가요 앵콜VOL.1'음반

-가을 그룹 '퀘션스' 해산

-11월 '김추자 스테레오 힛트 앨범 NO.2, '님은 먼곳에' 수록

-11월 '조영남 가요 힛트 수록 Vo.1'

-12월 '신중현 잡품집'(남상규, 박인수. 이정화 노래)

-겨울 '김추자 캐롤집'



이즈음에 일본 음악계에서 '봄비'를 높이 평가하며 신중현을 여러 가지 좋은 조건으로 유혹을 했다. 일본의 한 음반회사에서 그를 찾아와서 헬기, 거대한 집, 거액의 돈을 주겠다는 등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겠다며 그를 유혹했다. 그들은 일본인 귀화를 조건으로 내걸었고 신중현은 그 유혹을 거절했다. 주2)



이후 신중현은 엽전들을 결성한다.

73년경 이남이, 김기표, 최이철, 문영배와 함께 5인조로 시작한 엽전들은 두차례의 맴버 교체과정을 거치며 74년 8월 25일 지구레코드공사에서 첫 앨범 제작을 시작으로 그 해 엽전들 경음악 1, 2집이 제작되고 75년에 2집이 제작된다.

그러나 75년 8월 '미인'등 11곡이 방송금지 되고 12월에는 대마초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다. 4년이 지난 79년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대마초 관련사범들을 모두 해금시키게 된다. 이때 신중현은 해금되지만 그의 곡은 87년에야 비로소 완전히 해금된다.



▣ 75년 가요계 규제 조치와 대마초 파동




75년에 가요계에 분 대마초 파동은 가요계 전체를 흔들정도로 거셌다. 이런 가요 규제 조치의 근간에는 당시의 월남 패망에 따른 국내외 정치 상황의 급변이 자리하고 있다.



① 월남 패망과 독재의 강화



75년 4월 30일 베트남은 월맹군에 무조건 항복했다.

그리고 그날 '사이공 미대사관의 옥상에서는 베트남에서 탈출하는 미국인들을 가득 실은 마지막 헬리콥터가 거친 신음 소리를 내며 이륙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 전쟁의 마지막 굴욕이었다.' 미국 패전, 이 것은 박대통령에게 충격이었다. 월남패망소식은 박대통령에게 우리도 북한에게 패망할 수도 있다는 것으로 들렸다.

75년 이듬해 미대선을 앞둔 상황이었지만 이미 대선은 시작되고 있었다. 캐네디가 암살된 이후 시작된 월남전은 월남을 공산괴뢰들의 침략로부터 자유세계를 지키기위한 성전으로 선전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미국 자본가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고 미국의 중산층과 노동자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행위였다. 오랜 전쟁으로 미국경제는 침체되었고 월남전의 본질이 서서히 밝혀지면서 여론은 악화되었다. 결국 73년부터 75년까지 완전 미군철수를 하게된다.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던 월남정부는 붕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해 대통령은 미국내 여론으로 미루어보아 틀림없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카터가 당선될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카터의 선거공약 중에 한반도내 미군과 핵무기 철수가 들어있었다.



박대통령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미군과 핵무기의 철수는 곧 북한의 남침으로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월남은 미군의 무차별적 지원과 한국 주력부대의 도움 속에서도 패망하였다. 박대통령은 우리 스스로가 나약하고 퇴폐화된 사회분위기를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도 월남처럼 공산화되어 망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박대통령은 긴급조치를 연달아 발령하게 되고 자주국방과 핵무기 보유를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60년대 말부터 추진되던 중화학공업 육성책은 75년부터 향후 5년안에 자주국방을 완수하기 위한 긴급체제로 전환되었고 그것을 위한 철강, 조선, 자동차, 원자력발전소 등에 한정된 자원을 집중시킨다.



이런 배경에는 국내 긴박한 정치상황논리와 맞물려있다. 정부는 72년 남북적십자 회담등 납북관계를 통해 국내외 여론을 호도하더니 10.17 비상계엄령 선포(10월 유신)하면서 박대통령은 체육관에서 제8대 대통령이 되었고 곧바로 12월에 유신헌법을 선포한다. 73년 가을 유신반대운동이 본격화 되자 박대통령은 74년 초부터 어떤 개헌논의도 금지시키는 긴급조치 1호의 선포를 시작으로 2호 (비상군법회의 설치), 긴급조치 4호(민청학련 관련활동 엄단)등을 연달아 선포하며 권력에 도전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런 국내 정치 상황속에서 73년부터 시작된 월남내 미군의 철수와 그로인한 월남 패망은 박대통령에게 독재강화의 구실을 마련해주게 된다. 혈맹인 미국도 우리를 저버릴 수 있으며 카터가 미군을 한반도에서 모두 철수시키기 전에(5년내에) 자주국방을 실현해야하며 이를 위해 국민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주4)
75년 역시 2.12 유신헌법 국민투표 실시 , 4.8 긴급조치 7호(고려대 휴교령)선포, 4.30 베트남, 공산군에 무조건 항복, 5.13 긴급조치 9호(헌법비방.반대금지)선포 등이 숨막히게 전개되었다.이런 상황에서 12월 가요계 대마초파동이 불어닥친다. 긴박한 정치 상황속에서 연예인과 젊은이들에게 만연된 청바지, 장발, 대마초등 서구 퇴폐문화의 척결은 흐트러진 국민들의 기강을 바로 잡기위한 당연한 조치의 하나였다.



박정희는 국제적 상황을 이유로 민주주의를 제안하는 등 밀어붙이기식 독재를 추진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국가를 위하기 보다는 위기를 구실로 자신과 측근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박대통령의 생각은 대통령 자신과 국가를 벼랑끝으로 몰고가고 말았다.그런 박대통령식의 독재로도 국민들과 야당과 재야의 유신독재반대 투쟁을 잠재울수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국가는 위기에 빠지고 국론 분열이 야기되었으며 박대통령 스스로 암살당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79년 박대통령 시해사건 후 국가의 권력은 공백상태에 이르렀으며 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이후 권력은 전두환 신군부의 손에 쥐어졌고 광주의 민중은 피의 댓가를 치렀다. 아픈 역사의 경험은 위기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해결될때만이 진정으로 극복된다는 가장 기본적인 교훈을 다시 일깨워준다. 위기를 구실로 원칙을 무시하는 것은 자신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② 대마초 파동의 전말

- 독재강화와 사회기강 확립의 일환으로 대마초 등 퇴폐문화 척결



당시 박정희는 월남 패망 이후 독재강화를 위해 밖으로는 자주국방, 안으로는 체제수호를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 한편으로 핵무기 보유, 국민 총화와 전통문화유산을 강조하게 된다.그런데 당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청바지와 장발, 통기타, 팝송등 서양문화를 추종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체제를 수호하고 국민이 단결해 자주국방을 이뤄야 하는 때에 젊은이들의 이런 서구퇴폐 문화를 좌시하고만 있을수가 없었다. 당장 사회기강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



박대통령보기에 서구의 저질 퇴폐문화를 양산하는 두 부류가 있었으니 그들이 통기타 가수들과 미8군 출신 연예인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단속이 시급했다. 우선적으로 가요나 팝송등을 대거 금지시키고 이어서 대마초 단속에 나섰다. 75년 12월 2일 일명 대마초 파동으로 엄청난 규모의 연예인들이 전면 활동금지로 묶인다.
60년대 온나라가 새마을 운동으로 들끓었다.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부국을 부르짖으며 산업화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분위 속에서 잘사는 외국을 부러워하며 서양 것은 모두 선진이라는 생각이 만연되었다. 이런 사회적 의식은 외국문화에 대한 동경과 함께 하면서 주한미군을 통한 미국문화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대마초 역시 당시 마약에 대한 인식 부족과 불법에 대한 근거도 없는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미8군 소속 연예인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또 외국문물에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지식층이나 부유층에서는 통기타와 히피문화가 대마초와 함께 들어와 만연한 상태였다.



신중현의 당시 대마초와 관련된 솔직한 얘기이다.

신씨가 대마초를 알게 된 것은 60년대말 록 음악을 하던 히피족들과 어울리면서부터. 음악인으로서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록에 당연히 관심이 쏠렸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에 들어와 있던 히피들과 친분을 다지게 됐다. 그중에서도 ‘환각음악’이라는 것에 빠졌고 함께 어울리던 히피들의 생활을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남겨진게 바로 대마초(마리화나)다.



“작업을 하다가 틈틈이 피웠는데 한번씩 피우면1주일간 머리가 멍한 상태로 곡을 못 쓸 정도가 됐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 끊게 됐지요”.

그 때만해도 일반인들은 마리화나 등 환각제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 였다. 소문을 들은 음악인들이 “집에 마리화나가 있느냐”고 물어오면 법 위반이나 위험성도 모른채 “우리 집에 산더미처럼 많다”며 나눠 줄 정도였다. 대마초를 피운 유명 음악인들이 하나 둘씩 묶여 들어가고 추궁 끝에 시발점인 신씨에게 화가 미쳐왔다. 보건사회부와 검찰 합동수사반에 덜미가 잡혔고 남대문옆 건물 지하로 끌려가 이틀 동안 감금된 채 혹독한 취조를 당했다.

(김성호기자, 1998.6.20. 서울신문, 신중현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마초 사범에 대해 최고형 적용을 지시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2일 법무부를 연두순시한 자리에서 『지금 우리가 공산당과 1대1로 죽느냐, 사느냐하며 결판하는 중대한 마당에 젊은이들이 대마초를 흡연하는 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것』이라면서『대마초를 흡연하는 행위 등은 현행법상 최고형을 적용해서 뿌리를 뽑으라』고 지시했다. 박대통령은 『연예인들이 대마초를 흡연하는 것도 큰 문제이고, 특히 학생 사회에 대마초가 많이 들어갔는데 법무부는 학교당국과 협조해서 이를 근절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은『젊은이들이 대마초를 흡연하는 것은 19세기말엽 중국에서의 아편과 같은 생각이 든다』면서『배부른 나라, 부자 나라등에 그런 현상이 있다는데 우리나라는 다른 것은 배워도 이런 것은 절대 붙어오지 못하게 초기부터 막아야 할것』이라고 강조했다. 박대통령은 『사회기강과 질서를 바로 잡는 것은 법만으로는 되지않고 국민의 도의양양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국법이 공정하고 엄격하게 진행된다는 것은 국민총화의 저해 요인을 제거한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특히 반사회 반시국적범죄를 근절시켜야 하며 시국에 역행하는 행위중 현행법으로 다루기 어려운 것이 있으나 이를 어떻게 다루어 나갈지를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일보,76.2.3 대마초흡연에 최고형적용 http://www.parkchunghee.or.kr )



두 글에서 알수있듯이 대마초는 음악인들과 대학생등 젊은이들 사이에서 만연했었다. 서구문물을 추종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대마초등 퇴폐문화로 이어져가고 있었으니 국가의 앞날이 실로 걱정되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결국 박대통령은 대마초등 퇴폐문화를 조장하는 것은 반사회 반시국적 범죄라며 대마초 흡연시 법정 최고형을 적용하라고 지시한다.



이런 박대통령의 단호한 태도에는 아들 지만의 대마초 흡연이 관련이 있다는 후문이 있다.

박지만 역시 히피문화의 영향을 받아 대마초를 했는데, 그것이 히피친구들의 영향이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박대통령이 당장에 퇴폐문화 단속을 강력하게 진행시켰고 후에 이 사건을 신속히 마무리한 검사를 따로 격려하기도 했다고도 전해지는 얘기는 시대적 상황과 함께 박대통령이 왜 대마초에 대한 강력한 철퇴를 내렸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③ 대마초 파동의 최대 피해자, 신중현



긴급조치 9호가 발령나자 신중현의 곡 '미인', '나는 너를 사랑해', '생각해', '할말도 없지만'등 11 곡이 방송 금지된다. 그러나 이것은 시련의 시작에 불과했다 1975년 12월 6일 갑자기 몰아친 대마초 파동의 한가운데 신중현이 있었다.



신중현은 72년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청화대라며 박대통령 찬가를 만들어 줄것을 요구했는데 그는 반발하며 거부했다. 그후 75년 대마초 사건으로 연루되어 '대마초 왕초'로 낙인 찍히게 된다.대마초로 붙잡혀 들어가면 무조건 동료연에인을 50명씩 대야하는 상황에서 신중현은 시발점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결국 혹독한 취조를 당했다. 신중현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문화탄압의 첫표적이 신중현 자신과 자신의 노래였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록은 반전 무드 속에서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는 것이었고 신중현의 '미인'같은 곡 역시 사랑을 노래한 것인데 그토록 오랫동안 방송금지가 되어있던게 납득할수 없었던것이다.



신중현은 4개월간의 구치소 생활을 했지만 그 동안의 기간이 4년만큼이나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현실은 그에게 구치소 보다 더 혹독했다. 음악인에게 활동정지는 사형선고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해금되기까지 4년동안 모든 공연 활동이 금지되는것은 물론이고 신중현의 대부분의 곡이 방송금지곡이 됐고 음반마져도 판매금지조치를 받았고 결국 신중현은 음악가에게 가장 소중한 악기를 하나씩 팔아가며 생활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1979년 12월 6일 신군부에 의해 가요규제조치가 해제되며 신중현을 비롯한 대마초 사건 가수들이 해금되었다. 그러나 만4년의 금지인생이 끝난 신중현에게 또 다른 장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중현 자신과 세상은 모두 4년전과는 너무나 많이 달라져있었던 것이다. 생활고에 시달려 악기를 팔아버려 다시 음악활동을 재개할 형편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세상은 펑키와 디스코의 열풍으로 신중현이 설 땅이 없었다. 주5)



신중현은 미8군 최고의 음악인이었고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그러나 대마초 파동은 그에게서 부와 명성, 인기 모두를 빼앗아 갔다. 79년 해금이 된 후에도 그의 곡 '미인'등 엽전들 1, 2집 수록곡 20여곡은 계속 방송금지에 묶여 부당한 대우를 받다가 87년에서야 비로서 완전한 해금을 맞는다. 75년에 시작된 신중현의 금지인생은 모든 곡이 해금된 87년에야 비로소 끝을 본 것이다.



④ 박대통령 시해와 80년 서울의 봄



박대통령은 70년 초부터 독재 강화를 꾀했고 유신 헌법으로 영원한 권력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자신의 측근이었던 김재규의 총격으로 시해당하고 만다. 다시 서울의 봄이 오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되살아 난다. 이때 대마초 파동으로 활동이 묶였던 신중현 조용필 등 이 79년 12월 2일을 기해 해금된다.이제 미8군의 최고의 실력자인 신중현과 조용필이 special AA의 사랑과 평화가 사라진 자리에 자신의 능력을 펼칠 시기가 온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영웅인 이 두사람이 80년에 다시 등장한다.



▣ 신중현의 재기를 위한 야심작, 뮤직파워




① 뮤직파워의 결성




70년대 중반 신중현이 퇴장하자 가요계의 판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가요계는 고고와 펑키 디스코의 열풍으로 완전히 춤판으로 되어 있었고 사운드도 소울풍에서 시끄럽고 밝은 분위기의 일렉트릭적인 것으로 흐름이 바뀌고 있었다. 당시 가요계는 그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활동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5년여 공백기를 가졌던 신중현은 79년 12월 6일 가요규제조치가 해제되자 곧바로 재기를 위해 준비한다. 그러나 그의 재기준비는 단순히 인기를 회복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요계가 댄스판으로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음악을 통해 본 모습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것과 동시에 계속해서 신중현 자신이 최고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것의 직접적인 의미는 <사랑과 평화>보다 자신이 뛰어나다라는 것이다.

78년 이후 가요계 최고의 실력자는 <사랑과 평화>였고 그들은 뛰어난 연주력과 편곡으로 가요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며 가요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 밴드의 리더인 최이철은 신중현과 함께 밴드를 했던 경험이 있으며 다른 맴버들 역시 미8군 무대 출신으로 신중현의 후배이기도 하다.



< 사랑과 평화>가 선보인 펑키는 테크닉 중심의 세련된 것으로 백인적인 퓨전재즈적인 색체가 강했다. 그러나 펑키는 리듬앤블루스에 근간하는 것으로 흑인풍의 체취가 나는 감각이나 선률, 리듬 등을 얘기하는 것으로 그 본질은 흑인 음악에 있다고 할수있는 것이다. 신중현이 보기에 <사랑과 평화>의 사운드는 백인풍의 것이며 너무 세련되어 흑인적인것과는 거리가 있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후배와 대중들에게 흑인의 냄세가 나는 제대로된 펑키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구닥다리가된 엽전들도 아니고 블루스 록도 아니어야 한다. 최신의 음악과 그에 맞는 밴드로 그의 능력을 발휘해 보이고자 했다. 신중현은 제대로된 펑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뮤직파워를 결성한다.



② 신중현의 재기작, 뮤직파워1집



신중현은 <신중현과 뮤직파워>로 KBS TV 쇼프로그램을 통해 주말 황금시간대에 화려하게 컴백한다.

그가 TV를 통해 선보인 음악은 8분짜리 '아름다운 강산'과 13분짜리 '히트곡 메들리' 였다. 밴드의 편성도 무척이나 화려했다.



-보컬, 기타 : 신중현

-여성보컬 : 김문숙, 박점미

-드럼 : 이승환

-베이스 : 박태우

-키보트 : 김정희

-트럽펫 : 이근희

-알토색소폰 : 홍성호

-테너색소폰 : 한준철



와 같이 9인조 거대 편성이었다.이 멤버만으로 백댄서 필요없이 큰 무대를 가득 채워낼 수 있었다. 이런 편성으로서 우리는 신중현이 보여주고자 했던 사운드의 목표를 짐작해볼 수있다.



펑키는 리듬앤블루스에 바탕을 둔 흑인풍의 감각이나 선률, 리듬 등을 말하는 것이다.즉, 신중현은 <사랑과평화>가 보여준 가요계에 알려진 펑키가 아닌, 보다 제대로된 흑인적인 펑키를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고 <뮤직파워>는 와 같은 대편성을 추구한것이다. 디스코-펑키의 대표적 그룹이었던 이들은 브라스 여성보컬, 남성 보컬,베이스,기타, 키보드 등의 거대편성을 가지고 있었다. <뮤직파워>를 통해 신중현은 진짜 펑키란 이런것임을 알려주고 싶어했을 것이다.
< 사랑과 평화>가 5인조의 심플한 편성으로 신세사이져가 주가 되는 뛰어난 화려하면서도 테크닉적이고 감각적인 펑키한 음악을 선보였다면, 그는 거대 편성을 바탕으로 브라스가 들어간 어쿼스틱하면서 친숙한 느낌이 나는 제대로된 흑인풍의 펑키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이 앨범은 그가 최고임을 입증시키지는 못했다.신중현은 <뮤직파워>의 첫 앨범을 통해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스타일인 펑키라는 것에 도전했다. 그러나 흑인풍의 펑키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에 대한 강한 의욕은 왕성한 창조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대규모 편성의 <뮤직파워>는 국내 가요계 최초의 제대로된 흑인풍의 펑키곡을 통해 가요계를 리드하는 대신 소극적으로 과거의 그의 곡들은 밴드에 맞는 형식으로 개조/편곡했을 뿐이다.그는 이 앨범을 통해 그에게 있어 대형 밴드라는 형식과 펑키 스타일에 맞는 곡들을 창출해 내는데 실패했고 그 곡들은 70년대 말 이후 변화된 대중의 기호를 선도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제 불혹의 나이에 이른 그에게 필연적인 궁여지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아름다운 강산'의 뛰어남이 대중들에게 각인되고 멋진 흑인풍의 펑키를 보여 주었지만 브라스 펑키밴드의 사운드는 대중이 원하는 것이 아니였다. 즉, 그는 80 년대의 새로운 감성을 담아내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일인자로의 재기를 이루지 못 했으며 이 편성으로 2집을 내기에는 그의 창조력이 따라주질 못했으며 시대도 펑키 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 뮤직파워>는 대편성의 펑키밴드에 맞는 새로운 형식의 노래를 선보인 것이 아니라 과거 그의 노래들을 펑키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에서 멈추었다. 결국 <뮤직파워> 1집은 히트곡 메들리에 불과 했으며 그 노래들은 본래 펑키적인 것은 아니였다. 아무리 그의 과거 노래들이 훌륭했다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의 노래일 뿐이며 대중은 80년 대에 맞는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를 원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중현은 과거의 노래를 불렀으며 그의 사운드가 아무리 훌륭한 것일 지라도 그것에 대중이 열광하고 따라줄 수는 없는 것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강산'은 신중현의 가치를 빛나게 했다. 신중현은 <뮤직파워>를 통해 흑인색체가 나는 펑키를 선보였다. 결국 명곡임에도 고전으로만 머물러있던 '아름다운 강산'을 히트시켰다. 이곡은 초반 리듬기타의 인트로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으며 신중현이 히트곡을 내면서 재기할수있는 발판이 되었다.



-아름다운 강산

-힛트곡 메들리(이상 뮤직파워1집)

-내가 쏜 위성(뮤직파워 2집)



③ 과거로의 회귀



신중현은 제대로된 펑키를 선보임으로써 화려한 재기를 꿈꾸었다.그러나 <뮤직파워> 1집은 히트곡 모임이 되어버렸고 대편성의 브라스 펑키밴드는 크게 성공하지 않았다. 이제 펑키/디스코는 80년대 들어 주류 팝시장에서는 신쓰 팝/뉴웨이브에 의해 흘러간 음악이 되어버렸다. 또한 조용필의 등장으로 변해버린 가요계 상황에서도 브라스 펑키밴드는 가요시장에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대부분의 맴버를 교체하며 2집에 '내가 쏜 위성'을 발표한다.



-보컬, 기타 : 신중현

-보컬 : 김동환

-기타 : 최용태

-베이스 : 송창도

-키보드 : 김정희

-색소폰 : 홍성표

-드럼 : 윤세봉, 백천남



<뮤직파워>1집에서 하고자했던 펑키는 신중현에게는 새로운 시도였고 도전이었지만 기대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신중현이 다시 최고의 음악을 선보이기 위해 선택한 것은 과거로의 회귀이다. <뮤직파워> 2집 '내가 쏜 위성'은 가요계 최초로 선보인 하드록 이다. 그러나 그 양식은 그가 전성기였던 70년대 초의 음악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다. 신중현은 과거 자신의 전성기였던 6,70년대의 음악을 통해서만 그의 창조력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뮤직파워> 2집은 실패로 마감된다.



신중현은 또 한번의 진정한 명예 회복을 위해 83년 <세 나그네>를 결성한다. 이남이와 함께 한 <세 나그네>는 <엽전들>의 80년대판이라 할수있다. 음악 역시 <엽전들> 때의 블루스를 기본으로 한 것들이었다. <세나그네> 는 신중현을 과거의 인물로 규정지었고 점차 그는 비주류음악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이키델릭과 블루스 록에서 최고의 음악성을 발휘한 음악인은 디스코의 시대에서 점차 과거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고 80년대 들어서는 신스팝과 뉴웨이브라는 흐름속에서 흑인음악은 점차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80년대는 인간적인 사운드는 사라지고 신세사이저 위주의 전자적인 사운드로 급격히 전환하고 있었다.
80년대들어 가요계의 사운드는 신세사이저를 중심으로한 화려한 편곡으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었는데 반해 신중현은 그런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고 그런 그는 시대의 중심이 될수 없었다. 시대는 이제 그의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