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신군부의 등장과 가요계의 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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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신군부의 등장과 가요계의 위축


2016. 6. 6.

신군부의 등장과 가요계의 위축


- 신군부의 등장과 권력 탈취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부마사태(부산과 마산의 대규모 시위)의 성공적 진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측근인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졌다. 법적 권력승계 원칙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지만 정치적 기반이 약한 최규하 정부하에서 군부, 공화당, 관료등 권력을 향한 치열한 물밑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권력공백상태의 비상계엄 상황에서 군부가 군대와 정보를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계엄사합동수사 본부장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 군부는 유신헌법의 조기 폐지와 관련해 권력 중심에서 소외될 위기감을 느끼고 12.12 쿠데타를 일으킨다. 80년 4월 14일 최규하대통령은 군부의 실세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함으로써 군부의 권력장악을 인정하게 된다.



80년은 전국 각지에서 각계각층의 민주화의 열기로 시작된다. 새로운 헌법 제정과 더불어 민선정부를 기대하던 국민들은 진정한 민주정부의 탄생을 염원했다. 이런 민주화의 열기속에서 신민당 등 야당과 재야의 상징처럼 불리어지던 김영삼과 김대중 양김 사이의 권력을 향해 경주를 계속하고 그들과 더불어 민주 세력은 서서히 분열의 양상을 띄게 된다.



군부의 권력장악 이후에도 민주화의 열기가 계속 되자 이에 힘입어 정치권은 80년 5월 17일에 열릴 임시국회에서 계엄을 해제하고 민선정부를 향한 개헌일정을 잡아나가기로 했다. 계엄이 해제 될 경우 전두환 군부세력은 쿠테타로 장악한 권력을 기성정치권에 빼았기게 되며 12.12 쿠테타의 책임을 추궁당할 상황이 전개될 상황이었다.



위기에 처한 전두환군부는 5.17에 대부분의 국회의원을 잡아들여 국회 개회를 저지시키고 김대중을 구속한다. 그리고 그날 광주로 군대를 보내 김대중 구속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한다. 또한 광주의 시위를 구실로 5.18을 기해 전국적으로 계엄을 확대하여 자신의 권력을 보존한다.이어 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어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며 정국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가더니 8월 16일 결국에는 최규하대통령을 하야시키고 유신헌법에 따라 전두환 국보위 위원장은 80년 8월27일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신군부는 대통령 간접선거, 임기 7년 단임과 국회의원 중선거구제를 골자로 하는 5공화국 헌법을 통과시켰다. 보안사 주도하에 신군부는 민주정의당을 창당하고 이어 한국민주당, 민주공화당, 민주사회당등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야당의 핵심 정치인들이 배제된 것으로 실제적으로는 정치세력을 분산시키고 신군부가 정권을 공고히 하기위한 관제정당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결국 장충체육관에 대통령 선거인단을 몰아넣고 거의 만장일치로 전두환은 12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 자유와 낭만의 대학문화 소멸



60년대 말부터 젊은이들 사이에서 외국문화에 대한 관심의 증대하였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포크음악들이 불려지면서 가부장적이고 강압적인 기성세대에 대한 자유와 낭만을 갈구하는 젊은 문화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대학내에서는 통기타써클과 그룹사운드들이 생겨났고 학교 스포츠 행사나 축제 때면 이들은 대학가의 젊음을 표현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77년 MBC대학가요제가 생기면서 이를 목표로 하는 대학생들이 생기고 대학마다 써클(지금의 동아리)과 그룹사운드들이 생겨났다. 특히 그룹사운드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문화를 변화, 발전시켜갔고 그것을 대학가요제를 통해서 보여주었다. 이들 그룹사운드는 대학생 가요와 함께 대학문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것이다. 당시 대학문화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서 보여지듯 젊음의 고뇌와 낭만, 자유와 미래가 있는 활기찬 것이었다.



그런데 10.26 이후 대학문화는 위축되기 시작한다.전국은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휴교령이 내려지고 대학마다 군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학생들은 등교시 교문 앞에서 학생증을 내보이며 군의 검문을 받아야 했고 몇명만 모여있어도 해산명령을 받았다. 유신때와 마찬가지로 학도호국단이 총학생회를 대신했고 학생들의 모든 활동은 감시당했다. 학생들은 민주화운동은 커녕 써클활동도 원활하게 할 수 없었다.



신군부는 80년 광주에서의 대학살을 단행하고 자신들의 의도대로 권력을 잡았다. 국민은 모든 언로를 차단 당하고 자유를 제한 받는 등 전국은 살얼음판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낭만을 추구하던 중창, 그룹사운드, 포크등의 주류 대학가요문화가 환영 받을리 없다. 아니 대학생들 스스로가 젊음의 활기차고 밝은 부분을 강제로 제거해 나갔다. 미래에 대한 희망의 보이지 않는 억압적인 상황에서 대학가의 낭만은 현실적이지 않았다. 80년 이후 대학의 밝고 활기찬 문화는 사라졌고 낭만과 자유를 추구하던 대학가요문화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 억압적 사회분위기로 인한 가요계 위축



신군부의 권력장악은 사회를 공포분위기로 몰아갔다. 정치인들은 대거 구속되었고 대학은 사찰의 대상이었으며 사회정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삼청교육을 실시했다. 폭력사범, 공갈·사기사범, 사회풍토 문란사범을 검거하여 삼청교육대를 통해 사회악을 일소하겠다는 것이다. 처음엔 폭력배, 불량배가 대상이었지만 나중에는 문신이 있으면 무조건 폭력배였고 만취한 사람은 풍기문란이 되고 전과자라면 무조건적인 대상이 되었다. 아무잘못 없는 사람도 자칫 꼬투리를 잡히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는 상황이 되고 사람들은 안전한 공간에서 그야말로 숨을 죽이며 살아야했다.상황이 이러하니 흥겨운 노래가 나올리가 없다. 저녁늦게까지 술먹는 사람이 없고 불량배가 없으니 야간업소가 잘될수가 없다. 야간업소가 위축되니 가수들이 설 무대도 줄어들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신인 가수와 새로운 음악이 만들어질리가 없었고 가요계는 크게 위축되었다.



80년대 초 가요계는 조용필과 혜은이, 이은하, 윤시내 등 몇몇 기성가수만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가수와 노래가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영11과 젊음의 행진등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은 가요계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산울림, 송골매, 전영록이 새로운 가요보급을 담당하고 있었고 개그맨이나 MC 등 대학생 출신의 연예인이 출연하였고 10대들은 조용필을 비롯하여 젊고 새로운 가수들에 열광하였다.



또 대학문화를 고스란히 담아내던 대학가요제는 더이상 주목받지 못한다. 사회나 학원이 노래나 부르고 있을 분위기가 아닌데다 제대로된 대학축제가 불가능하고 학생들이 실력을 뽐낼 무대가 줄어들면서 대학의 노래문화도 축소되고 있었다. 그룹사운드나 노래문화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대학내 스타가 되어야하고 그러려면 그들이 빛을 발할 무대와 그것을 위해 열심히 연습할 분위기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무대의 축소와 살벌한 사회분위기는 대학교의 낭만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렸다.
특히 대학그룹사운드는 70년대말부터 80년까지 가요계를 리드하였지만 81년 이후부터는 힘을 잃는다. 고고사운드를 젊은 스타일로 바꾸며 락으로 전환을 시도하던 한국 가요를 앞장서 발전시켜 나갔던 대학 그룹사운드는 대학문화와 함께 유명무실해졌다.




◈ 84년 자유화조치와 가요계의 부활




- 대학의 민중문화 생성



초기 체제안정을 위해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던 전두환정권은 82년부터는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기 시작한다. 82년 12월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대중씨에게 형집행정지와 신변치료를 명분으로 미국망명을 허용하였고 일본과 미국과의 회담을 추진하며, 국내적으로는 중고생의 두발,교복 자율화를 허하고 통행금지를 없애는 등 자율과 개방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어 83년 2월부터 정치인에 대한 사면이, 83년 12월에는 학원자유화 조치를 취한다. 이것은 80년 이후 꾸준한 경제적 성장으로 인한 자신감과 88년에 있을 서울 올림픽을 위한 국가 이미지 재고를 위한 것이다. 또한 무력으로 얻은 정권의 정당성을 회복하고 정권의 안정화를 위한 미,일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84년부터 시작된 학원자유화로 인해 제적학생이 복교조치되고 총학생회가 부활하면서 학원 민주화 운동이 활발해진다. 학생운동은 전국적인 연합을 결성하며 조직적인 운동으로 전개된다. 총학생회 부활과 더불어 써클 활동 등 대학문화가 함께 활성화되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84년 이후의 부활한 대학문화는 과거의 낭만적 대학문화가 아닌 민중문화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피로 딛고 일어선 군사정권의 억압을 받고 있는 민중과 함께 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문화는 당연히 민중적이고 민족적이어야 했다. 신군부의 집권은 과거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대학문화는 뿌리를 뽑혀 자취를 감추게 했고 이후 학원 자유화조치는 그 자리에 탈패와 노래패 같은 운동중심의 대학문화가 자리잡게 하였다. 이후 학생운동이 활동범위와 내용이 폭 넓어지면서 민중적 대학문화도 함께 커간다.



- 다시 활기를 찾은 가요계



82년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고 유화국면이 시작되자 가요계도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야간업소가 다시 성행하기 시작하고 무대가 많아지자 기성가수들은 앨범을 내고 활동하기 시작하고 조영남과 이장희등도 외국에 머물던 가수들도 귀국하여 활동을 재기 하였다. 또 83년에는 설운도('잃어버린 30년', 이산가족찾기) 정수라('아! 대한민국',건전가요)같은 스타급 신인이 등장했으며 가요계 활동이 원할해지자 가수들이 앨범을 내는 등 가요계가 본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이용, 전영록, 송골매, 김수철, 산울림 등이 청소년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기는 했지만 살벌했던 신군부독재시절의 젊은 음악인들이 음악으로 미래에 대한 비젼을 보여주기에는 시대는 너무 암울했다. 당시 청소년들은 미래에 대한 음악적 비젼을 가요가 아닌 팝음악의 세계에서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83년 2월 대규모 정치인 사면과 12월 학원자율화가 시작되면서 민주화운동이 급진전되었고 사람들은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했고 84년 가요계는 그런 시대 반영하여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노래들을 선보였다.당시 100만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던 주현미/김준규의 트로트 메들리 '쌍쌍파티'와 신나는 록스타일인 윤수일의 '아파트'는 트롯트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 새롭고 신선한 가사 더불어 전에비해 경쾌하고 흥겨워진 심수봉의 '남자는배 여자는 항구'는 트롯트의 지평을 열기 시작했다.




특히 사랑과 평화 출신의 김명곤이 만든 나미의 '빙글빙글'은 신세사이져로만 연주된 새로운 스타일의 댄스음악으로 시대가 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숨죽이며 80년대 초를 보낸 기성세대는 칙칙한 과거의 노래를 새롭고 신나는 트롯트곡으로 들으며 자신들의 제자리를 찾아갔고 유흥을 즐기는 여유도 누렸다.
대학가요제 역시 이선희의 'J에게'가 대단한 히트를 하면서 다시 주목받으며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선희의 성공은 가수를 꿈꾸는 대학생들과 스타감을 찾는 기획사에게 모범이 되었고, 그들은 'J에게'를 모델로 삼아 대학가요제를 가요계 등용문으로 변모시켜갔다.80년 신군부의 등장 이후 함께 위축되었던 가요계의 기성과 대학신진 양축은 자유화조치와 함께 다시 활기를 찾으면서 다시 발전해 가기 시작했다.



아파트(윤수일)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심수봉)

빙글빙글(나미)



◈ 양김의 대권쟁탈전과 87년의 6월 항쟁



- 민주화와 직선제에 대한 국민적 열망




전두환 정부가 자유화 조치를 취하자 각 학교에서는 총학생회 중심의 학생운동이 부활하고 재야세력의 조직도 급속히 확대되어갔다. 그 즈음인 83년 8월 서울과 워싱턴에서 "김대중, 김영삼 8.15 공동선언" 을 하고 멀어졌던 상도동, 동교동은 함께 민주화 투쟁을 벌이기로 한다. 그리하여 재야를 중심으로 84년 5월 '민주화 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한다. 자유화 조치 이후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이 확산되어 가는 상황에서 85년 12월 12대 국회위원 선거가 치러진다. 민추협을 중심으로 한 야당세력은 '신한민주당'을 창당하고 투표율 전국 평균 84.6%이라는 정치적 관심도 속에서 창당 한달 만에 신한민주당은 돌풍을 일으키며 제1야당으로 급부상 한다. 비록 선거에서는 민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했지만 민의가 어디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12대 국회의원 선거의 '성공' 이후 정치적 입지를 확보한 신민당과 재야 운동 세력은 대통령 직선제를 개헌을 위한 정치공세를 펼친다. 직선제만이 합법적인 정권교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정권을 잡을수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신군부에게 직선제는 정권을 빼앗기는 것이며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명확히 말해 직선제 투쟁은 양김과 신군부간의 생존을 건 싸움 이었다.
물론 국민들도 자신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는 민주주의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체육관에서 선거인단에 의해 치러진 대선이 권력자의 의도대로 장기 집권을 가져왔고 유신이라는 초헌법을 만들었으며 신군부의 구데타라는 민족적 비극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해서 이제는 국민들이 원하는 사람이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시는 국가적 불행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비록 직선제가 양김의 야욕으로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버리기는 했어도 당시의 직선제 요구는 국민 모두의 너무나 절실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었다.




- 신군부를 6.29 항복선언으로 굴복시킨 6월 항쟁




곧이어 전두환 대통령은 국정 연설에서 헌법논의에 대해 엄벌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신민당, 민추협,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각 운동단체들은 곧장 범국민 개헌 서명운동으로 맞섰다. 개헌서명 운동이 전국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전두환정부는 국회 합의라면 임기내 개헌이 가능하다면서 신민당을 재야세력과 분리시키며 국회로 끌어들인다. 특히 신민당은 86년 5.3 인천사태의 운동권의 과격한 모습을 비판하며 재야세력과 결별하고 민정당과 국회내 개헌논의를 시작한다.



그러나 국회 논의는 진전되지 않았고 국회내 합의로는 직선제를 얻어내기 힘들다고 판단한 신민당은 결국 9월말 '국회헌법 개정 특별 위원회' 를 탈퇴한다. 이상황에서 신민당 총재인 이민우와 신군부간의 밀월이 있었고 민정당의 내각제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전제된 보수대연합이 추진되자 김영삼, 김대중은 탈당하며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핵심 정치인의 신당창당으로 내각제 개헌이 좌절되자 전두환 정권은 87년 4월 13일 호헌방침을 발표한다.



재야세력은 신민당이 국회로 들어간 이후에도 민주, 인권 운동을 지속해 나간다. 87년 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이를 조사하고 추모대회를 개최하였고 4.13호헌 철폐를 위해 천주교 신부와 재야인사들의 단식농성과 변호사, 교수등 지식인들의 시국성명이 이어지며 호헌반대열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5월 18일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발표가 기폭제가 되어 전국적으로 민주화 투쟁이 일어났으며 5월 27일 이 열기를 바탕으로 재야세력은 다시 통일민주당과 연대하여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본부'를 결성 한다. 이들이 주도하는 6.10대회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시위가 전개된다. 6월 항쟁은 점점 통제가 불가능한 범국민투쟁으로 번지면서 26일에는 전국 140여만명이 참여하며 절정에 달하게 된다. 결국 전두환정권은 6.29선언으로 국민들에게 굴복하게 된다.



- 양김의 대권 야욕으로 좌절된 정권교체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개헌논의는 다시 국회로 들어가 5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합의된다. 이 새로운 헌법은 국민투표 93.1%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 되었다. 이때까지는 그토록 바라던 직선제 쟁취가 국민적 항쟁의 승리로 인한 결과라고 모두가 믿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대통령선거에 들어가자 민주세력의 대열은 흐트러졌다. 김대중은 이전의 '대선 불출마 선언'을 번복했으며 이로 인해 함께 싸웠던 민주세력은 야권의 후보 단일화를 두고 분열과 대립을 거듭했다.




즉, 김영삼은 당내경선을 통해, 김대중은 전국지지유세를 통해 후보를 정하자고 하였고 결국 이 양김의 후보 단일화는 결렬되었다. 이후 김영삼은 공식적으로 대통령출마선언을 하자 김대중은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역시 대선 후보에 추대되었다. 재야운동권 역시 양김 사이에서 분열하며 비판적지지(김대중 지지), 후보 단일화(김영삼 지지) 등으로 대립하였고 일부운동권은 '독자후보론'을 내세우며 백기완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며 마지막까지 단일화를 촉구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결국 민정당의 노태우가 36.7%으로 김영삼(28.0%), 김대중(27.0%)후보를 물리치고 역대 가장 낮은 득표율로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6월 항쟁이라 불리는 범국민적인 민주화 항쟁은 후보단일화 실패와 그 배경이된 깊은 지역주의, 권력을 향한 양김씨의 야심과 독선으로 인해 5공세력의 재집권으로 끝나고 말았다.



- 6월 항쟁에서 주도권을 갖지 못한 학생운동권



범국민적으로 전개되었던 6월 항쟁에서 많은 학생들이 항쟁의 위치에서 함께 있었지만 주도권은 재야운동권과 양김에게 있었다. 6월 항쟁에서 학생운동은 가장 많은 참여와 역할을 해내었지만 내용면에서 상당히 소극적이었다.그러나 학생운동이 미약한 탓은 아니었다. 80년대 초 학생운동은 전두환정권의 철권통치 상황하에서도 조직활동과 투쟁을 멈추지 않았었다. 84년부터 자유화 조치로 총학생회가 부활하고 제적생이 복교되자 학원과 사회의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갔다. 1985년 전국학생총연합회가 결성되었으며 그 산하에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을 위한 투쟁위원회(삼민투)가 조직되어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단체에 의해 1984년 11월 14일 민정당사 점거사건이 발생하였으며 5·18광주민주항쟁 기념투쟁, 1985년 5월 23일 미문화원 점거농성이 주도되는 등 학생운동의 역량과 위상을 높여갔다.



이렇듯 80년대 중반까지 학생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를 가지고 있고 마치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서있는 듯했다. 그러나 87년 전국적으로 일었던 범국민적인 민주화운동에서 학생들은 주도권을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80년대초부터 정권이 지속적으로 운동권을 탄압하고 운동조직을 검거한데 기인한다. 특히 86년 10월 28일 건국대에서 열린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의 발족식에서 NL(민족해방-주1)의 주요 운동권 학생 천여명이 구속되는 사건은 학생운동을 고립, 와해시키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NL의 학생운동 핵심인물들이 모두 구속되어 많은 조직이 와해되었으며, 이들과 노선이 달라 위기를 넘겼던 PD(민중민주-주2)는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학생운동권의 자기 반성과 조직정비를 서두르고 있을 때 재야와 양김을 중심으로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일어났다. 그러나 학생운동세력은 민주화의 열기를 폭넓은 논의와 사회개혁으로 이끌기는 커녕 개헌서명운동원으로, 선거감시위원단으로, 비판적 지지와 후보단일화로 우왕좌왕했다. 결국 학생운동권은 민주화의 열기를 이끌기는 커녕 양김의 대권을 향한 야망에 동원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당시 학생운동 세력이 나이가 어리고 적은 연륜으로인해 비록 정치인들에 의해 끌려다니기는 했어도 6.10 항쟁을 통해 많은 교훈을 얻었으며 이때 확대된 사회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후 성장한 학생운동권들은 386세대로 불리우게 되었으며 정치계는 물론 법조계, 학계, 종교, 언론, 영화, 대중음악 등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대중문화권에서는 음반평론, 음반유통, 음반기획및 제작, 언론문화부기자, 영화평론, 영화제작등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 80년대 운동권의 민중문화, 민중가요



- 70년대말 기존곡에 운동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시작




70년대에 대학문화는 자유와 낭만을 추구하고 있었다. 대학생들은 포크나 중창, 그룹사운드의 형식을 빌어 대학문화를 노래하였다. 그것은 70년대의 대학가요제에서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 대학가요제 이전에 대학에서 주로 불리던 노래가 포크였고 선두였다면 77년의 '나 어떡해' 이후에는 그룹사운드 형태로 불리던 노래들이 가장 화려했고 많은 주목을 받았다. 물론 새롭게 등장한 중창스타일 역시 많은 주목을 받았다.

70년대의 대학생은 중, 고교 시절 치열한 입시경쟁을 거치며 생활했으며 입시의 연속인 그들에게 문화란 없었다.



 그런 학생들이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대학만 가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팅도 할 수있고 이성친구도 사귈수 있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MT를 통해 외박의 경험을 얻는등 비로소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이 대학생의 전모는 아니다. 유신시대의 암울한 사회에서 대학생들은 정권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위한 학생운동을 하기도 했다. 이들 학생운동권은 스스로 일반 대학생들과 달리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 역시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생운동권에서 운동적 의미를 가지고 부르는 노래들이 민중가요의 시작이었다.그들은 포크문화를 단지 낭만을 노래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새로운 운동적 의미를 부여했다. 70년대 말부터는 한대수와 김민기를 비롯한 다양한 포크곡들을 재해석하기 시작하며 노래책을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그 노래책들은 학생운동권의 문화적 동질성을 획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70년대 후반에 민중가요는 학생운동권의 노래문화로 시작되었다.(중략) 이시기의 민중문화는 자생적인 노래문화였으며 노래운동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중략) 따라서 이들 민중가요문화는 완전히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기존의 곡들을 취사선택하여 그노래에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구전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창간호)





- 80년대 들어 사상무장을 하면서 창작과 보급활동



80년대 들어 광주항쟁을 경험한 학생운동은 자본주의체제를 부정하는 이론으로 무장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단의 목표를 군부독재를 타도하는 민주주의 혁명으로 삼게 했고 학생운동권은 그 목표하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의 본질적인 내용은 계급혁명이였다.주3) 따라서 70년대말 학생운동권 사이에서 재정립되어 불리던 초기의 민중가요의 개념은 80년대 사상무장을 한 학생운동과는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 학생운동권은 기존 곡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대신 스스로 창작한 노래를 자신의 주류문화로 채택해간다. 혁명성이 결여된 70년대의 노래 대신 그자리를 80년대의 창작 민중가요 즉, 군가풍의 행진곡과 가곡스타일의 서정가요로 채우게 된다. 그외에 포크나 기성 가요스타일의 노래도 있었지만 민중가요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지는 못했고 민요풍의 노래들도 점차 비중이 약해졌다.



민중가요와 탈패등 대학내 민중문화는 70년대에 낭만적 대학축제 대신 총학생회 부활과 함께 시작된 대동제를 통해서 대학의 주류 문화가 되었다. 비록 대학의 민중문화는 그들 생활 속에 배어있는 것도 아니었고 참여도도 낮았지만 학생운동에서는 이런 민중문화를 통해서 군부독재의 실상을 폭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중문화가 주류문화가 되었다지만 일반 대학생들에게는 조금은 낯설고 거리감있는 문화였다. 민중문화는 투박하여 거친 느낌을 주는데다가 사상문제나 시위문화와 관련되어 있어 과격한 것으로 생각되어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런 민중문화를 즐긴다는것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안락함을 포기해야 하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도 했다.그러나 87년 이후 대중운동이 활발해지고 열려진 정치공간을 경험한 많은 대학생들은 민중문화를 좀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 80년대 중반이후 정치적 공간이 넓어지면서 민중가요에 대한 대중적 관심 증대



80년대 중반 이후 직선제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면서 반군부독재의 감정이 심화되고 있었다. 87년 초 박종철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고 군부독재가 고문한 사실이 감춰지고 있음이 용기있는 부검의사에 의해 드러났다. 이후 전두환대통령이 4월에 호헌발표를 하고 이어 전국 대학교수들에 의해 호헌철폐 성명서가 발표되면서 전국적으로 직선제 요구가 일기 시작했다. 87년 6월이 시작된 것이다.그 투쟁에 중심에 학생운동권이 있었다. 당시 그들은 국민들의 암묵적인 동의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과격한 시위와 혁명적 이슈 대신 평화행진과 같은 행동과 직선제 쟁취라는 대중적 슬로건을 취하고 있었고 학생운동권이 가장 적극적으로 군부독재에 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87년도 6월투쟁은 범국민적 민주화 운동이 되면서 대중들이 대학내에서 불리우던 투쟁가인 민중가요를 접하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친숙한 노래가 되기 시작했다. 또 그 노래들은 6월투쟁에서뿐 아니라 군부의 6.29 항복선언이 있고 얼마 후 100만이 운집한 이한열열사의 추도행렬에서 또 7,8,9월의 노동자대투쟁 현장에서 나아가 87년 12월에 있었던 대통령선거 유세현장에서 대중들에 의해 불리워졌다. 이렇게 87년에 민중가요는 국민들에게 승리의 노래로 받아들여졌고 여럿의 히트곡을 탄생 시켰다.



또 6월 항쟁 중 회사일을 놓고 거리로 나섰던 젊은 직장인들과 노동자들에게 민중가요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비록 투쟁에 적극 참여 하지 못하지만 구경 하는 것으로 또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하며 박수를 쳐주는 것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해소하던 젊은 직장인들에게 민중가요는 군부독재를 마음 속에서 나마 쳐부수는 위안의 노래가 되었다. 또한 80년도에는 임금인상투쟁이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던 나약했던 노동자들에게 노조를 만들고 단결하는 과정에서 민중가요는 큰 무기가 되었다. 87년 노동자투쟁 이후 울산의 노동자는 노동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커다란 정치적 힘까지 갖게 되었다.



87년 10월 민중가요만이 불리워지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 공연이 올려지기 시작했다.사람들은 민중가요를 들으러 공연장으로 모였다. 승리의 노래를 듣기 위해 돈을 내고 이들의 공연을 찾아간 것이다. 1년이 넘게 이어진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87년도에 국민들은 시위 현장에서 새로운 노래들을 접한다. 그것이 민중가요이고 그러한 노래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가사나 멜로디도 모르고 접할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6월 항쟁이 있었고 그곳에서 민중가요 처음 접하게 된다. 그것은 '아침이슬', '님을 위한 행진곡' 등 이었다. 이 노래들은 금지곡 이었고 정권에 의해 불온시되온 것들 이었다. 그러나 6.29 군부의 항복 이후 이 노래들은 신군부에 대한 승리의 노래가 되었다. 그 이후 이런 노래를 부른다고 잡혀가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과거에 군부에 의해 불온시되었던 민중가요 공연이 관심을 끌고, 민중가요 노래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맴버였던 안치환, 김광석, 권진원 등의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고 안치환의 곡들은 대중들의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원래 민중가요는 거칠고 어둡고 투박한 질감을 가진 노래였고 행진곡의 노래들은 투쟁적인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노찾사는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싶었으며 대중들이 이질감을 느낄만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민중가요를 부드럽고 미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노찾사는 노래운동권이 대중문화공간에서 민중가요를 공식화시키면서 민중가요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려고 만들어진 노래팀이다. 때문에 대중들이 민중가요의 정서와 질감을 소화할 수(?)있도록 선별 편곡, 연주하였다. 이것은 대중 가까이 다가갈수있는 토대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민중가요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노찾사는 성공했고 민중가요는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다.



- 민중가요의 주류가요계로의 진출과 성공



87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민중가요는 주류가요계로 진출하게 된다. 노찾사는 민중가요를 가지고 87년부터 콘서트를 열기시작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여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권진원, 김광석, 안치환 등이 있었다. 이들은 89년도에 2집을 발표하고 커다란 인기를 얻는다. 2집 앨범에는 전국민이 다 아는 운동권의 여러 히트곡이 포진되어 있었다.



 87년도의 운동권의 인기는 이 앨범에 그대로 반영되어 50만장이라는 대단한 판매고와 '사계'라는 또 다른 히트곡을 만들었다.
노찾사는 80년대 후반 당시의 민중가요를 정리하여 보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성공의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30여개의 민중가요 노래패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노찾사의 성공은 노찾사 스스로의 성공이기 보다는 사람들의 군부에 대한 승리의 환희에 대한 만끽과 운동권 진영의 영향력 확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민중가요의 존재는 알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몰랐다. 그들은 노찾사를 통해서 자신에게 미지의 존재인 운동권과 그들의 문화를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노찾사의 노래에서 호기심과 미지의 노래들을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 들은 운동권의 노래들은 기존 가요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일반 대중들은 운동권 문화를 주류의 문화로서 받아들였고 노동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문화로 만들었다. 87년 7,8,9월의 노동자대투쟁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민주노조를 만들고 임금투쟁을 하면서 대학생들의 것이었던 민중문화를 자신들의 문화로 받아들였고 노동문화로 만들어갔다.



그날이 오면 - 메아리 (문승현 작사, 작곡)

임을 위한 행진곡 (백기완 작사, 김종률 작곡)

민중의 노래 - 노동가요 공식음반 1집 (김호철 작사, 작곡)

동지 - 80년대에 비합법적으로 제작된 민중가요 노래 테입 (작사, 작곡 미상)





-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민중가요의 쇠퇴 ; 몰이념의 새로운 시대와 서태지의 등장



89년 이후 민중가요 진영은 김호철의 행진곡풍의 노동가요에 의지했다.87년 여름 갑작스럽게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졌고 이어 민주노조 설립투쟁이 이어졌지만 노동운동이 시작 단계인 것은 물론이고 노동자의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투쟁의 현쟁에서 대학생들이 불렀던 민중가요들을 불렀다. 그러나 89년 김호철의 등장으로 노동자들은 행진곡 스타일의 <노동조합가>와 같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고있는 다양한 노동가요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또 노동자 노래패같은 문화활동을 벌이기도 하는 등 자신들의 문화를 스스로 만들어갔으며 이 시기의 민중가요를 선도했다.



그러나 이런 노래들은 학생운동권에서 최고의 인기곡이 되긴 했어도 대중들에게까지 보급시키기는 어려웠다. 대중들에게 민중가요를 보급하는 역할을 맡은 노찾사에게 있어서 김호철의 노래들은 가사나 음악적인 면에서 소화해 내기 힘든 것이었다. 그의 곡들은 시위 현장에서나 힘을 발휘하는 노래들이었지 주류 대중음악시장에서 대중들에게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노래들은 아니었다.
결국 89년 이후 민중가요는 대중적으로 어필 할 수 있는 서정가요풍의 히트곡을 내놓지 못한다. 게다가 민중가요가 주는 신선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친숙함으로 변하고 김호철의 투쟁적 노동가요 외에 새로운 음악을 제공하지 못하면서 점차 시대에 뒤쳐지게 된다.



91년 상반기부터 이전과 같은 엄청난 호응을 동반한 인기곡이 사라지고, 행진곡의 퇴조(중략).. 일상가요도 별로 재미가 없어지는 당혹스런 현상이 벌어졌는데..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창간호)



이른바 문민정부(인용자;92년)가 들어선 뒤에도 노래는 계속됐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는 논리와 함께 민중가요의 수용층은 급격히 줄었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부문운동의 침체는 노래운동판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대중들은 ‘부담스런’ 노래를 기피하기 시작했고 조직대중들도 각자의 활동공간을 추스리기에 바빠 노래를 부를 여유가 없어졌다. 많은 노래꾼들이 노래부 르기를 그만두고 떠났다. (중략)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음반이 수십만장 팔리고 그들이 부른 ‘솔아, 푸르른 솔아’가 인기가요 순위에 진입하기도 했던 시대는 꿈결처럼 사라졌다.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대중들의 요구가 상당 부분 희석화되고 새로운 보수주의 물결이 사회를 장악하면서 민중가요는 이제 무시해도 좋을 대상이 됐다. 87년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중산층 시민계급도 이제는 ‘ 마음의 빚’을 깨끗이 청산하고 체제 내적인 대중문화로 돌아갔다. “그런 노래는 불러도 즐겁지 않다”는 게 그들의 불만이다. 노랫말이 피부에와닿지 않고 음악성도 낮다는 지적도 터져나왔다. (노래운동의 길을 찾아서, 권복기기자, http://user.ksucc.ac.kr/~kim0611/page6_2.html)



88년도에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었고 전두환은 백담사로 가면서 목숨을 부지했다. 그리고 김영삼과 김종필은 신군부세력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형성된 부는 노동자와 자본가에게 모두에게 뿌려졌다. 그리고 점차 투쟁의 기억은 잊혀지기 시작한다. 민중가요도 사람들의 현실과 점차 멀어지고 그 노래들은 일상이 아닌 시위용 노래로 변해갔다.
89년에 동구권이 붕괴되고 91년 소련마저 붕괴되면서 운동권도 이념의 혼란에 휩싸인다. 90년대, 공산권의 붕괴되고 계급주의는 현실적 힘을 잃었다. 대중들은 점차 80년대에서 점차 멀어지고 새로운 시대로 변화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90년대는 투쟁의 80년대와 전혀 다른 시대임을 보여준 위대한 음악가가 출현한다. 그가 서태지이다. 서태지가 등장하자 변화된 시대를 미쳐 따라잡지 못하고 80년대를 부여잡고 있던 민중문화는 투쟁의 시대에서 90년대라는 새로운 시대로 바뀌였음을 알게 된다.
이제 투쟁, 동지, 해방, 타도등의 용어와 그것을 표현하던 노래들은 대중들뿐 아니라 운동권 스스로도 사로잡지 못하게 된 시대가 되었다. 80년대의 민중가요는 과거의 문화가 되어 버렸고 이제 그들은 90년대에 어울리는 자신들의 새로운 노래문화를 만들어 가야만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