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그린벨트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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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그린벨트 제도


2016. 3. 18.

런던의 방역선과 한양의 금산제도



그린벨트제도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한창이다. 약 28년간 시행되어 오던 그린벨트제도가 대폭 축소 조정되면서 생긴 일이다. 그린벨트제도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도시에서 생활하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도시가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시행하는 제도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30년 동안의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도시 주변 환경보전에 큰 기여를 해왔다. 그런 그린벨트제도가 지금 크게 흔들리고 있으며, 그것을 둘러싼 논란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근데 이런 그린벨트제도는 언제 어디서 처음 시행되었을까? 현재 시행되고 있는 것과 같은 그린벨트제도는 1947년에 영국의 런던 주위에 폭 10마일의 고리 모양 녹지대가 설정되면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시행되기 시작한 그린벨트제도는 짧지 않은 전사前史를 가진 것이었다. 1580년에 영국의 엘리자베드 1세에 의해 과밀 주거와 빈민 집중을 방지하고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계획된 런던 시가지 주위의 '방역선防疫線'이 그 효시였다고 일반적으로 얘기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조선 개국 초기인 14세기 말, 15세기 초부터 이미 이와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으니, 바로 한양 금산禁山제도였다.



서울 강북 지역에 녹지대가 많은 이유



조선시대에 시행하던 한양 금산제도는 도성 안팎에 일정한 구역, 즉 금산을 정해두고 그 안에서는 농사짓기, 나무하기, 돌을 캐거나 흙을 퍼가기, 집짓기 같은 일들을 못하게 하던 제도였다. 이 금산에 포함되는 범위는 조선 전기에는 도성 안과 성밖의 일부 지역, 즉 북쪽으로는 북한산·도봉산 일대, 서쪽으로는 무악재 일대, 동쪽으로는 안암로타리 부근, 남쪽으로는 이태원, 한남동, 청파동 일원을 잇는 지역이었다. 후기가 되면 성 밖 십리에 이르는 지역으로 확대된다. 조선 후기 들어 한양의 인구가 늘어나고 토지가 부족해지면서 많이 느슨해지긴 했지만 대부분의 금산은 구한말까지 유지되었다. 현재 서울 강북지역의 주요 녹지대는 대부분 과거에 금산이었던 곳이다.



한양을 명당으로



도성 안팎에서 실시되었던 금산제도는 도시의 지나친 팽창을 막고 자연을 보존하는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가히 '조선시대의 그린벨트제도'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한양 금산제도는 현행 그린벨트제도와는 사뭇 다른 사상적·정치적 배경을 가진 것이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풍수지리사상과 봉건적 군주제에 사상적·정치적 바탕을 두고 있었다. 금산제도에는 물론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를 줄인다거나 도성에 어울리는 숭엄한 주위 경관을 조성한다는 등의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금산제도를 시행하던 사람들의 더 큰 목적은 산줄기를 따라 흐르는 땅의 기운, 즉 지기地氣를 잘 모아 왕도인 한양을 명당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운을 일으키고 왕업을 번성케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일이었다.



이런 차이는 두 제도가 시행되는 구체적인 방식에도 적지 않은 차이를 가져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금산의 범위 설정에서의 독특함이었다. 우선 위에서 말한 금산의 범위 내에 드는 모든 땅이 금산으로 지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 중 지기가 흐르는 길, 즉 산줄기만이 금산에 포함되었다. 때문에 그것을 평면지도 위에 그려보면 하나의 굵은 고리 모양이 아니라 가지와 잔가지들이 다소 복잡하게 얽힌 모양이 된다. 또 같은 산줄기라도 성 밖 인근의 산줄기들은 산마루만이 금산에 포함되었던 반면, 도성 안의 궁궐로 이어지는 산줄기들은 산마루와 산기슭이 모두 금산으로 지정되었다. 한양으로 오는 지기가 집중되어야 할 곳은 바로 임금이 있는 궁궐이었기 때문이다.



또 관리 면에서도 금산의 관리에는 금산 내에서의 경제 활동을 금지하는 일만이 아니라 지기가 허하거나 새어나가기 쉬운 곳에 나무를 심어 지기를 북돋우는 일도 포함되었다. 또 지금의 그린벨트제도와는 달리 금산 내에서는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르는 것까지도 금지했던 것도 그것이 단순한 환경 보호 이상의 목적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금산은 지금으로 치면 개발제한구역 정도가 아니라 절대보존구역, 나아가 적극적인 육성구역이었다.



삶 속에 녹아든 풍수지리



조선시대에 풍수지리사상은 사람들의 삶의 곳곳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죽은 자를 위한 묘터를 잡는 데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꾸리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한양 금산제도는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