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호의 비극, 침몰당시 처참했던 현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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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호의 비극, 침몰당시 처참했던 현장 이야기


2014. 2. 26.

1912년 4월14일 밤 11시40분,엄청난 참사가 북대서양에서 일어났다. 세계 최대 여객선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부딪혀 1,500여 목숨과 함께 가라앉았던 것이다. 영국은 타이타닉을 절대로 가라앉지 않는 불침선(不沈船)이라고 장담했다. 높이 30m,너비 28m,길이 270m,무게 4만6,000t으로 지구 위에서 첫째 가는 큰 배였으니,누가 보아도 그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타이타닉호의 비극, 침몰당시 처참했던 현장 이야기

그러나 이 배는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처녀 항해에 나선 지 겨우 4일 17시간30분 만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고 말았다. 이 사고로 배에 탄 2,208명 가운데 1,513명이 목숨을 잃었다(여러 기록이 엇갈리므로 실제 죽은 사람은 더 많으리라고 한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다. 날씨는 아주 맑았고,사람들은 갑판을 산책하거나 일광욕을 했다. ‘물 위에 뜬 궁전’의 호화로운 시설들은 승객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타이타닉 호의 앞길에 빙산이 떠다니고 있음을 알리는 첫 무전이 들어온 때는 오전 9시였다. “타이타닉 호 선장에게. 북위 42도,서경 49∼51도 바다에 떠돌이 빙산이 있음. 캐로니아 호로부터.” 정오에는 발틱 호로부터 비슷한 무전이 들어왔고,오후에도 타이타닉 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지나던 캘리포니안 호로부터 조심하라는 메시지가 왔다.



배에는 승무원들말고도 타이타닉을 지은 화이트스타 회사의 브루스 이스메이 전무와 설계사 토머스 앤드루스도 타고 있었지만,누구도 이 무전들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항해사와 당번들에게 바다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속도를 늦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무렵의 여객선들은 도착 시간을 꼭 맞추어 대는 서비스 경쟁을 하고 있었는 데다,어느 누구도 빙산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자만심에 들뜬 승무원들을 태우고 타이타닉은 22노트라는 엄청난 속도로 파도를 가르며 나아갔다.





밤이 되자 날씨가 매서워졌다. 밤 11시에 캘리포니안 호로부터 또 무전이 들어왔다. “여보세요,우리는 빙산에 둘러싸여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배와 교신하고 있던 타이타닉의 무선사는 벌컥 짜증을 냈다. “끼어들지 마시오. 당신은 지금 남의 무전 교신을 방해하고 있소.” 면박당한 캘리포니안 호의 무선사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일이 끝나는 11시30분이 되자 무전기를 끄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타이타닉 호의 망대에서 바다를 살피고 있던 당번이 이상한 물체를 발견한 시각은 밤 11시40분 조금 못 되어서였다. 처음에는 작아 보였지만 점점 크게 다가왔다. “빙산이다!” 나지막한 부르짖음이 그의 목구멍에 걸렸다. 그는 엉겁결에 망대에 달린 종을 세 차례 울렸다.“뭐가 보이는가?” 전화기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바로 앞에 빙산입니다!” 일등항해사 윌리엄 머도크는 얼른 키잡이에게 소리쳤다. “우현으로 끝까지!” 키잡이가 있는 힘을 다해 타륜을 돌리자,머도크는 잇달아 외쳤다. “전속으로 후진!” 키잡이가 다시 타륜을 돌리자마자 타이타닉은 아슬아슬하게 빙산을 비켜 갔다. 그러나 사실은 물 속에 잠긴 얼음덩어리에 옆구리를 들이받힌 뒤였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잠을 자고 있거나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



그들은 배의 옆구리가 뭔가에 긁히는 듯한 가벼운 느낌을 받았다. 갑판에서 밤바다를 구경하던 몇 사람만이 오른쪽을 스쳐 가는 빙산을 우연히 보았다. 빙산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타이타닉은 항해를 계속했다. 그릇이 덜그럭거리거나 뭔가 긁히는 것 같은 느낌에 잠깐 긴장했던 사람들도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타이타닉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싶었다. 그러나 그때 배 오른쪽의 6호 보일러실에는 바닷물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순식간에 4m 높이로 물이 찼다. 스미스 선장은 급히 설계사 앤드루스와 함께 배를 점검했다. 제1 선창,제2 선창,우편실,6호 보일러실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물에 잠겨 있었다. 배를 구할 방법은 없었다.


타이타닉은 어느 한 곳에 물이 들어와도 다른 곳에는 번지지 않도록 격벽(隔壁)을 16개나 만든 배지만,워낙 큰 구멍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니 그 엄청난 수압을 당해낼 수 없었다. 계산해 보니 배가 가라앉기까지는 겨우 90분이 남아 있었다. 스미스 선장은 구조 신호를 보내라고 통신사에게 말하고 이어 구명보트 내릴 준비를 명령했다. 그러나 구명정 16척과 조립식 보트 4척은 고작 1,200명밖에 못 태운다. 나머지 300여명의 목숨은 구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자정 무렵. 뉴욕을 떠나 지중해로 가던 카르파티아호의 통신실. 무선사 H T 포텀은 옷을 벗고 구두끈을 풀었다. 그는 자리에 누우려다가 문득 타이타닉호를 불러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낮에 우연히 타이타닉의 무선사가 캘리포니안호의 무선사를 면박하는 말을 엿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타이타닉의 무선호출부호 ‘MGY’를 발신하자마자 너무나 놀라운 응답이 튀어나왔다. “CQD CQD SOS S0S. 즉시 와주시오. 우리는 빙산에 부딪쳤소. 여기는 북위 41도,서경 50도 14분. CQD SOS!” 코텀은 옷도 입지 못한 채 뛰어올라가 당직 항해사에게 보고했다.


카르파티아호는 지체없이 뱃머리를 돌려 그 배가 낼 수 있는 14노트보다 더 빠른 17노트로 달렸다. 코텀은 무선실로 돌아가 즉시 타이타닉에 알렸다. “MGY, 네시간 안에 가겠소.” 말을 마치자마자 코텀은 송신기를 껐다. 다른 배들이 타이타닉으로부터 구조요청 신호를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타이타닉으로부터 SOS를 받은 배는 카르파티아말고도 두 척이 더 있었다.


그러나 타이타닉과 가장 가까운,한 시간도 안되는 10해리 거리에 있었던 캘리포니안호만은 끝내 구조요청 신호를 받지 못했다. 타이타닉의 무선사에게 모욕을 당한 캘리포니안의 무선사는 그 시간에 무선기를 끄고 잠들어 있었다. 대피 명령이 내려,잠자리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갑판으로 나온 타이타닉호 승객들은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그들은 지시에 따라 구명대를 걸치고서도 다른 사람의 차림새를 손가락질하며 낄낄대고 있었다. 선원들이 여자와 아이들 먼저 보트에 타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저 작은 배에 타느니 차라리 여기 남겠소.” 한 남자가 이렇게 말하자 사람들은 더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4월15일 0시45분. 긴급구조를 바라는 신호탄이 밤하늘에 불꽃을 터뜨리자 사람들은 비로소 사태가 심각함을 알아차렸다. 이미 배는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고 있었다. 갑판은 삽시간에 어지러워졌다. 가톨릭 신부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니며 고해성사를 베풀었고,악단은 감리교 찬송가 ‘가을’을 연주했다. 사람들은 “자비로우신 하느님,망망대해에서 우리를 지켜 주소서”라는 찬송가를 함께 부르며 두려움을 이기려고 애썼다.



남편과 헤어지지 않으려고 배에 남는 부인도 있었고,멋진 야회복으로 갈아입고 기품 있게 죽음을 맞으려는 신사도 있었다. 미국으로 이민 가는 길이던 가난한 아일랜드 어린이들은 3등 선실 갑판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남편과 함께 죽음을 택한 사람은 메이시백화점 스트라우스 회장의 부인 아이다와 앨리슨 부인이다.


앨리슨 부인의 세살배기 딸 로렌은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울부짖어,1등 선실 어린이 29명 가운데 유일하게 타이타닉에 남아 죽음을 맞았다. 이 와중에서도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계속 보트로 옮겨 탔다. 마지막 보트 두 척을 미처 내리기 전,1912년 4월15일 오전 2시20분 타이타닉은 수천명의 울부짖음과 엄청난 폭음을 남기고 물 속으로 사라졌다. 빙산과 부딪친 지 2시간20분 만이었다. 오전 3시55분쯤 되어 카르파티아호가 사고 해역에 도착했다. 타이타닉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밤바다에는 초록빛 등불을 단 구명 보트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물결을 따라 넘실대고 있었다. 첫 번째 보트에서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사이에 날이 밝아 왔다. 사고 해역에는 여기저기 빙산이 널려 있었고,그 사이사이로 사람들을 새까맣게 태운 보트들이 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카르파티아호에 먼저 닿으려고 힘껏 노를 저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은 다 여자였고,남자 선원 한 사람씩이 보트를 이끌고 있었다. 노를 빨리 저으려고 ‘뱃사람이여,기슭으로 저어가세’라는 뱃노래를 부르는 보트도 있었다. 오전 8시40분. 마지막 구명 보트로부터 75명이 카르파티아호에 옮겨 탐으로써 구조 작업은 막을 내렸다.


구조된 보트는 모두 17척,살아난 사람은 1,530명. 하늘이 도왔다고나 할까. 마침 카르파티아호 선실은 반 넘게 비어 있어서 생존자들을 태우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구조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캘리포니안호가 그곳에 왔다. 그들은 카르파티아호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카르파티아호는 타이타닉이 가라앉은 사실을 알려주고,자기네는 급히 뉴욕으로 돌아갈 테니 그곳에 남아 주검들을 수습해 달라고 부탁했다.


캘리포니안호는 한 시간 가까이 수색했지만 주검은 단 한 구도 찾지 못했다. 물론 생존자는 없었다. 영하 2도나 되는 차가운 물에서 일곱 시간이 넘도록 살아 남은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큰 빙산에 걸려 눈에 띄지 않았던 주검들은,1주일 뒤 다른 배에 306구나 발견되어 대부분 바다에 장사 지내졌다.1971년 미국 우즈홀 해양연구소의 해양지질학자 로버트 밸러드는 타이타닉호를 찾자고 제안했다. 그는 배를 발견하기만 하면 자기가 직접 잠수정을 타고 바다 속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다. 그는 이 제안을 1978년에도 했지만 돈을 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밸러드의 생각으로는 그 무렵의 해양 탐사 장비라면 타이타닉호를 찾을 수 있었다. 1963년에 침몰한 미국 원자력 잠수함 드레셔호와 1968년에 침몰한 소련 골프 2급 잠수함을 찾아 끌어올리면서 심해 탐사 장비들이 눈부시게 발달해 있었던 것이다.


1980년 잭 그림이라는 지질학자가 밸러드에게 돈을 대겠다고 나섰다. 그는 네스 호수의 괴물과 아라랏산에 있다고 하는 노아의 방주,히말라야에 산다는 설인 예티를 찾는 일에 돈을 댄 적이 있었다. 그 세 가지는 다 실패했는데,그는 네 번째로 타이타닉을 찾는 일에 도전했다. 잭 그림이 타이타닉을 찾는 일에 돈을 대기로 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컬럼비아대학의 해양학자 윌리엄 라이언이 그림을 만났다. 그는 그림에게,1963년 드레셔호를 찾아낸 기계는 자력계(磁力計)였지만,타이타닉이 가라앉은 곳은 북대서양에서도 자력이 무척 센 화산지대 근처이므로 스캔소나(수중 음파탐지기)를 쓰라고 충고했다.


밸러드와 그림과 라이언,거기에 사이드 스캔소나를 만든 프레드 스파이에스는 1980년 7월30일부터 8월16일까지 1300평방㎞에 이르는 넓은 바다 밑을 음파탐지기로 수색하다가 돌아왔다. 1981년과 1983년에도 시도했지만 날씨가 나빠 실패했다.밸러드는 세 번이나 실패했어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탐사 지역을 좁히려고 프랑스 해양연구소의 장 자리와 장 미셸 두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미셸과 밸러드는 1973년 대서양중앙해령을 탐사할 때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타이타닉호의 침몰에 관해 쓰여진 모든 항해일지와 기록을 찾아 샅샅이 뒤졌다. 덕분에 배가 가라앉았을 만한 곳을 20평방㎞ 이내로 좁혔다. 1300평방㎞에서 20평방㎞로 좁히다니! 엄청난 성과였다.


1985년 6월,미국 해군이 밸러드에게 22만달러를 대기로 했다. 해군은 타이타닉 탐사를 하면서,사람이 직접 들어가지 않고도 카메라와 비디오를 통해 바다 속을 뒤지는 ‘원격조종 탐사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해군이 만든 심해 탐사용 잠수정을 3900m 깊이에서 시험해 볼 좋은 기회라고 여겼던 것이다.


1985년 7월11일부터 8월7일까지 밸러드 일행이 탄 르 시르와 호는 긴 쇠줄 끝에 프와송(생선)이라고 불리는 음파탐지기를 매달고 바다 밑을 뒤졌다. 거기에는 사이드 스캔과 수직 소나가 함께 달려 있었다. 다른 쇠줄에는 자력계를 매달았다. 음파탐지기가 물체를 찾아 모니터에 비추면 자력계가 쇠붙이인지 아닌지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빠른 해류와 거센 바람 탓에 대원들은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8월13일 밸러드와 미셸은 우즈홀 해양연구소가 보낸 탐사선 노르 호로 갈아타고 다시 탐사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 연구소가 새로 만든 잠수정 아르고 호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르고란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 야손 일행이 황금양을 찾아 나설 때 탔던 배 이름이다. 아르고 호는 자동차만한 크기로 썰매 모양을 했는데,강력한 음파탐지기와 탐조등,고성능 카메라를 갖추고 있었다. 아르고 호는 6,000m 깊이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잠수정으로서 사람들은 노르 호 선실에 편안히 앉아 아르고 호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거센 파도와 물결에 부대끼면서 탐사했다. 그러나 타이타닉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원들은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8월 마지막 날이 되었다. 얼마 안 있으면 돌아가야 할 철이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타이타닉을 찾을 희망은 자꾸 엷어졌다. 8월31일 밤 미셸은 밤 12시부터 9월1일 새벽 4시까지 당직을 서려고 관제실로 나갔다. 그 시간대는 제일 힘겨운 때였으므로,믿을 만한 미셸이 당직을 서기로 되어 있었다.


9월1일 0시30분 조금 지났을 때였다. 문득 석탄과 긴 파이프 같은 것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미셸의 가슴이 뛰었다. 함께 당직을 서던 항해사와 비디오 기술자,소나 전문가 여섯 사람도 꼼짝하지 않고 화면을 지켜보았다. 5분쯤 지나자 커다란 보일러 같은 것이 화면에 나타났다. “누가 가서 밸러드를 깨워야겠어!” 미셸이 말했으나 아무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려 하지 않았다. 이 가슴 벅찬 순간에 누가 화면에서 눈을 떼려 하겠는가. 얼마 뒤 요리사에게서 보고를 받은 밸러드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는 화면에 나타난 보일러를 보자 큰소리로 외쳤다. “바로 저거야!”


한 바탕 뜨거운 순간이 지나간 뒤 그들은 묵념을 했다. 그 시간이야말로 74년 전 타이타닉 호가 바닷물에 잠기고 수많은 사람이 파도에 휩쓸려 죽어가던 시간이 아닌가.다음 이틀 동안 바람은 40노트,파도는 4m 넘게 솟구쳤다. 노르호를 돌려주기로 한 날이 며칠 남지 않아 밸러드는 악조건에서도 24시간 탐사에 매달렸다.


아르고호는 물 속 3,900m에서 쉴새없이 타이타닉호를 맴돌며 사진을 찍어 모니터로 전송했다. 포도주병,매트리스,전신기,마스트,닻 사슬…. 날마다 수많은 잔해가 화면을 메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배의 앞부분만 보였지 뒷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야 타이타닉호가 두 동강 난 사실을 알았다.


1986년 7월14일 2차 탐사가 시작되었다. 밸러드는 탐사선 애틀란티스 2호에서 잠수정 앨빈호로 갈아탔다. 앨빈호는 6,750m 잠수테스트에 합격했고,1960년 이후 지금까지 100개가 넘게 만들어진 유인잠수정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성능과 업적을 자랑한다. 밸러드를 비롯한 과학자 세 사람은 앨빈호 속에서 ‘제이슨 주니어’라는 로봇을 원격조종해 타이타닉호의 계단 통로를 따라 선실로 들여보냈다. 로봇에 장착된 특수카메라가 선실 안 모습을 구석구석 찍었다. 카메라는 높은 수압과 짙은 어둠 속에서도 170 시각을 선명하게 찍었다. 1등 선실의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조금도 상하지 않은 채 매달려 있었고,구리로 만든 조타실 장식품들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조사는 날마다 4시간씩 7월25일까지 12일간 계속되었다. 특이한 것은 조난자들의 뼈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곳 바닷물 속에는 무기물이 적게 들어 있어 뼈가 모두 녹아버렸거나 조류에 휩쓸려 없어진 것 같았다.


7월18일에 발견된 금고 가운데 하나는 아무리 잡아당겨도 열리지 않았다. ‘제이슨 주니어’는 어떤 잠수정도 잠수한 적이 없는 3,650m를 훨씬 넘어선 3,900m 바다 속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녔다. 길이 71㎝ 너비 68.5㎝ 높이 50㎝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로봇은 적 잠수함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 물 속의 전파탐지장치와 미사일을 찾아내는 군사용 로봇이다. 미국 해군은 타이타닉 탐사 덕분에 이 로봇의 쓰임새를 아주 잘 시험해 볼 수 있었다.


마지막 날 밸러드는 구리로 만든 판 2개를 타이타닉호 갑판에 얹었다. 하나는 타이타닉호 희생자 가족들의 모임인 ‘타이타닉 역사협회’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글을 새긴 것,다른 하나는 뉴욕탐험가협회가 보내온 것인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앞으로 이곳에 오는 사람은 심해 탐험 기념이랍시고 이 배를 손상하는 일을 삼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