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멸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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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멸망한 이유


2015. 8. 10.

5세기 고구려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를 장악하며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6세기에 북쪽 물길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남쪽의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고 고구려의 제해권은 약해졌다. 백제는 521년 혼자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던 신라가 양나라와 사신 왕래를 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550년대 고구려가 돌궐의 침입에 방비하는 사이 남쪽지방을 빼앗는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신라와 특별한 약속을 함으로써 백제와 신라의 동맹을 붕괴시키려 했다.



남쪽의 나라들이 고구려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고구려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천하에서 벗어나 중국세력과 연합하여 보다 큰 위험세력이 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백제와 신라 사신이 서해를 건너는 것을 중간에서 막았던 것이다.

 

599년 수나라의 침입이 가시화되자 고구려가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수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보급로가 되는 요서지방의 전진기지들과 해안의 수군기지들을 선제 공격하여 무력화시키는 일이었다. 612년 수나라가 수백만 대군으로도 고구려에게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 바로 군량조달 문제였다. 이런 경험을 곱씹은 당나라는 고구려의 배후에서 군량을 보급해 줄 신라를 동맹국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결과 당나라는 겨울철에도 고구려를 공격해 올 수 있었다. 실제로 평양을 공격하다가 군량이 부족해진 당의 소정방 부대는 신라 김유신이 보급해 준 군량 덕에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국세력이 고구려를 공격해 올 때 배후에 동맹국이 있다는 것은 고구려에게 엄청난 부담이었다. 고구려는 남쪽의 나라들을 통제하여 고구려의 동맹국 내지는 중립국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고구려가 당에 패한 주요 원인은 바로 신라가 당의 동맹국이 되었다는것과 서해상의 제해권을 650년 무렵부터 당에 빼앗겨 당나라 군대의 군량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막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서해의 제해권 장악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세계의 안전을 보장하는 중요한요소였는데, 이를 상실함으로써 고구려는 멸망에 이르렀던 것이다.

 

고구려가 제해권 장악에 큰 노력을 기울인 이유에는 중계무역의 이익을 얻고자 함도 있었다.

 

고구려는 북위의 표현대로 동방의 모든 나라를 제어하면서 동방의 맹주로 군림했다. 고구려는 북위와 엄청난 양의 무역을 했고, 그러한 무역품들은 발달된 도로와 수레를 이용한 국내 상업망을 통해 전국으로 배급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교역이 자유롭지 못한 신라, 물길, 왜, 실위 등에 중계무역을 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이것이 고구려 번영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공격한 이유 중 하나도 위만조선이 동방의 여러 나라들이 중국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간에서 엄청난 중계무역의 이익을 챙겼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도 초기에 책구루라는 곳에서 후한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주변 여러 나라에 중계무역을 함으로써 주변 나라들보다 빠르게 국력이 커질 수 있었다. 대릉하 중류의 조양지방은 유목민과 중국인, 고구려인이 함께 모여 거래하는 거대한 국제시장으로 당시 각국의 첨예한 이익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서해의 제해권도 고구려의 상업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송나라에 800필의 말을 수출할 정도의 엄청난 배를 갖고 있던 고구려는 기록되지 않는 민간의 교역 규모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한 이익을 바다를 통해 얻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당에서 신라로 돌아오는 김춘추 일행을 검문할 만큼 고구려 해상 순찰대의 활동이 대단히 활발했던 것이다.

 

제해권을 가지고 활발히 대외교역을 했던 고구려가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해외무역에 소극적이었던 조선과 경제의 활력도가 크게 달랐음은 당연한 일이다. 고구려를 제국으로 번성하게 만든 힘의 하나는 서해와 동해를 고구려의 내해로 삼을 정도의 강력한 해군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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