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시켜주는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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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 시켜주는 기계


2018. 4. 17.

사르코라는 이 기계는 죽고자 하는 사람이 캡슐에 들어가 버튼을 누르면 (캡슐 안이) 질소로 가득 차게 된다. 죽으려는 사람은 약간 어지럼증을 느끼지만 급속하게 정신을 잃은 뒤 죽게 된다.


안락사 찬성

당장이라도 고통과 부담을 없애줄 수 있는 선택

안락사가 합법인 스위스에서는 엄격한 조건 하에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안락사를 허가해준다. 이때 이 "환자의 고통"은 경제적 부담, 차도가 보이지 않는 치료로 인한 희망고문, 그리고 환자와 가족의 정신 및 육체의 괴로움 등이다.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삶의 질을 중시한다. 최대한의 치료 서비스를 제공해도 삶의 질이 향상되지 않는 시한부 환자의 경우, 무의미한 연명치료로 고통받는 시간을 늘리기보다는 가족, 친구들과 이별의 시간을 가진 후 편안한 임종을 맞이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자신의 생명 보존보다는 '질 높은 삶'을 더 높은 가치로 여긴다. 6개월을 살더라도 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삶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로 12개월 동안 병석에서 고통받으면서 지내다 죽는 삶보다 더 낫다고 평가하며, 질 높은 삶에는 질 높은 죽음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한다. 유족들의 입장에서도 연명치료를 시도했다가 더 고생만 하게 하고 보낸 것 같아서 죄책감과 후회가 든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도 하며 지켜보는 가족의 경제적, 정신적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괜히 고된 간병 이후 PTSD 등의 정신병에 시달리거나 치매, 병을 앓는 부모를 죽이고 스스로도 자살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위에도 나오지만 정말 가망이 안 보인다면 이게 그나마 최선의 치료라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많다. 매정한 선택처럼 보이더라도 불우한 환경을 탓할 망정 어차피 죽을 것 그냥 편안히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욕하진 말자. 잘 죽는 것도 복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반대 측에서는 비용 문제를 거론하며 안락사를 반대하지만, 이는 자본주의 무한경쟁의 폐해와 의료보험 체계의 미비함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환자와 보호자에게 전가시키는 의지드립에 불과하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라는 말의 본 뜻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자신의 생사를 결정할 권리를 존중하라는 의미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축약한 것일 뿐이다. 나의 생사를 결정할 권리는 신도, 국가도 아닌 오롯이 나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회 전체가 나서서 고통이나 어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 전부를 보살피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라 자체에서 돈을 쓰거나 부자들이 재산을 기부하지 않는 한 실현하긴 힘들다.



안락사 반대

사회 합의에 의한 살인

어떤 이유로든 존중받아야 할 한 사람의 생명을 당사자의 고통이 극심하다거나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포기해버릴 수 있다. 특히 생명의 주권이 개개인에게 있다고 보지 않는 종교계나, 일찍 죽는 건 결국 스스로에게 독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생명윤리 중시자들은 큰 소리로 반대한다. 두 부류가 내는 의견은 공통적으로 결코 사람의 목숨이 돈 문제로 이어져선 안된다는 등 이상적이고 본질주의적인 양상을 띄기도 한다.

죽음이 용인되어 그 무게가 덜어진다면 결국엔 죽음이 쉽게 될 것이고, 지친 채 애써 무시하는 사람들은 누군가 죽어나가도 그저 외면만 할 것이다.

정말 엄숙하게 치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살인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가령 유산을 노리는 가족 구성원이 의사를 포섭해 대상을 안락사시키거나, 장기 입원으로 발생하는 거액의 병원비와 오랜 병수발에 지친 가족이 환자에게 안락사를 강요하는 사례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가정 내 권력이 약한 사람이거나, 가난, 장애, 치매 등의 이유로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즉, 안락사가 인정받게 되면 이것을 빌미로 사회구성원 중에서 취약계층의 사람들이 사회적 비용의 문제로 치료받을 기회를 박탈당하고 그들은 죽어도 괜찮다나 어차피 방법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사실상 살해당하게 될 가능성이 늘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가장 크다.


그리고 위의 안락사 찬성측에서도 안락사가 이루어 지는 이유가 병원비 다시 말해 돈 문제와 심각한 연관성을 띄는데 실제로 위의 김할머니도 자녀들이 안락사 후 병원비로 소송을 벌인 등 병원비가 직접적인 안락사 이유였고 안락사가 용인된 지역에서는 암치료비를 낼 수 없는 저소득층에게 안락사를 제시했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이쯤되면 그냥 돈없는 사람이 난치, 불치병에 걸리가나 늙으면 그냥 죽어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때문에 썰이지만 21세기 들어서 정부가 자살은 막는데 안락사는 용인하는 이유가 자살은 세금납부자가 사라져 수익이 줄어드니 막고 안락사는 의료보험금 소비자가 사라져 지출이 줄어드니 용인한다는 주장도 있다. 역사적으로도 의료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장애인을 안락하게 가스실로 보내버린 사례가 있어서 마냥 허황된 말이라고만 여길 수도 없다.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해선 안 될 일에 합리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그냥 포기하는 상황이 늘고 있는데 사람을 죽이는 것을 공인하게 된다면 숨을 끊은 칼날이 언제든 자신 혹은 남들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주의하자. 건드려선 절대 안 될 것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법리적으로도 안락사는 대부분 말기암 같은 극한의 고통상황에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럼 극한의 고통상황에 처한 사람이 자신의 안락사를 합리적으로 결정한다는 보장은 어디있는가? 그리고 뇌사같이 자기 표현이 불가능한 상황이면 더 답이 안나오는게 한국의 김할머니의 사례처럼 뇌사자 본인이 안락사를 해주라고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주장한 적은 없고, 안락사는 가족들이 요청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쯤되면 청부살인과 차이가 없는 행각이다. 그리고 사전에 안락사 서명을 받는 것도 사실상 앞으로 자신과 주변인에게 닥칠 수도 있는 어려움을 가지고 협박으로 불법계약을 체결한 것과 별다른 바가 없다.

자살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더 낫게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정말 죽고 싶은가? 스스로 죽고 싶다 해도 다시 생각해보라. 어느새 죽음을 강요당하는 것과 같은 상황에 몰린 처지일 수 있으니.

철학자나 종교인의 자살을 가지고 이런 말을 반박하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이 생활고 때문에 부정적 자기 살해를 하는 이유와 철학자나 종교인이 아무런 현실적 어려움 없이 막연한 신뢰에 의해 삶을 탈출하려는 시도를 하는 사례는 서로 크게 다르며 만약 이 둘을 같다고 판단해 내몰린 자들의 죽음을 바람직한 이상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한다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이는 다른 존엄성과 본질을 챙기고 보살펴야 하는 이유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낙관 뿐인 속삭임 속에서 그저 이야기를 끄적이듯 미약하게만 보이는 삶과 생명을 마구 다듬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챙길 수 있을 것처럼 느끼겠지만, 현실에서는 얇디 얇은 종잇장에 끄적인 글씨만으로도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