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요기 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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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요기 베라


2018. 4. 15.

메이저리그 사상 최고의 포수
반지의 제왕. 열 손가락 모두에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낄 수 있는 유일한 선수

뉴욕 양키스의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를 풍미한 위대한 포수로, 그가 양키스의 마스크를 쓰는 기간에 얻은 우승 반지만 10개나 되며, 15회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통산 MVP 투표에서 5위 안에 든 횟수만 7번이고, 그 중 3번이나 MVP를 차지했다. 그야말로 MLB 역사상 최강의 포수에 꼽힐 수 있는 선수. 또한 지도자로서도 양대리그를 모두 우승하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기록을 갖고 있어 지도자로서도 3회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왜 본명을 쓰지 않고 요상한 이름을 쓰게 되었느냐면, 생김새가 인도의 요가 명인 같다고 해서 베라와 친분이 있던 유명한 코미디언인 밥 호프가 "요기"(요가하는 사람)라는 별명을 붙여 줬고, 이거를 그냥 선수 등록명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정작 그는 요가를 할 줄 안다거나 인도 태생은 아니며,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다.

양키스 경기를 중계하며 See Ya!로 유명한 마이클 케이는 올드 타이머스 데이 행사에서 요기 베라를 소개할 때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얼굴을 가진 사람(one of the best known faces on the planet)"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2015년 9월 22일(한국날짜 23일)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자택에서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시절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원래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열렬한 팬으로서 카즈에 입단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14세에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다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아마추어 리그인 American Legion League에서 맹활약하다가 카즈에 입단 테스트를 받았는데, 당시 카디널스 GM 브랜치 리키에게 사실상의 퇴짜(계약금 제안이 형편없었다)를 맞았고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리키 단장의 입장에서는 베라의 키가 겨우 5'7"에 불과하고 어깨도 약한 점이 마음에 걸렸을 테고, 당시 본인은 카즈를 떠나 브루클린 다저스로 옮기려던 참이었기에 뉴욕으로 옮겨서 신체조건은 딸리지만 재능은 보이던 그를 데려가려던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42년에 갑자기 뉴욕 양키스가 리키 단장에 앞서 베라를 낚아채버렸고, 결국 브랜치 리키 단장으로서는 요기 베라를 포기한 이 일이 최악의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마이너 시절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이가 찼던 베라는 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해군 대공포 사수로 활약했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가하는 등 산전수전 다 겪고 돌아와서 마이너리그로 복귀했다.

양키스에서 영광의 시대를 보내다
그렇게 마이너에서 더욱 수련을 거쳐 1946년에 첫 7경기를 뛴 베라는 유니폼을 벗은 선배 빌 디키로부터 주전 자리를 완전히 물려받고 1948년부터 전성기를 열어간다.

80여 경기 출전한 47년을 논외로 하면 실질적인 첫 풀타임 시즌인 48년의 타격 3할을 포함, 9년간 OPS 8~9할을 유지하며 최고의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고, 미키 맨틀과 조 디마지오 등과 함께 양키스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시대를 주도했다. 51년과 54, 55년에는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49년에는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 라이벌리의 역사에 남을 수도 있는 트레이드가 논의되었는데, 바로 테드 윌리엄스와 조 디마지오를 맞바꾸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키 GM 래리 맥페일은 레드삭스 측이 요기 베라를 딜에 포함할 것을 요구하자 트레이드를 거부하였다.

수비도 일품이었는데, 통산 도루저지율이 이반 로드리게스의 그것과 맞먹는 47%라는 우월한 수치를 자랑한다. 또한 무실책 시즌을 만들어낸 역대 4명 뿐인 포수 중 한명이며, 148게임 연속 무실책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1954년 월드시리즈에서 돈 라슨과 합작한 퍼펙트 게임은 그 중 백미라 할 수 있다.

또한 최고의 클러치히터로도 꼽히는데, 그의 통산 스플릿 스탯을 보면 주자 없는 상황에서는 .265, .329, .449로 다소 떨어지지만 클러치 히터의 상징인 RISP, 즉 득점권 상황에서는 .290, .367, .478로 대단한 집중력을 보였고, 한점 한점이 중요한 연장전에 나서면 .355, .447, .618로 본즈가 되었다. 14차례 출전한 월드시리즈에서도 통산 최다 출장 선수로서 최다 안타 기록도 가지고 있다. 다만 선구안에 대해서는 젬병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공도 다 건드려서 안타나 홈런을 만들었다보니 역대 최고의 배드볼 히터로도 꼽힌다. 하지만 그렇게 컨택능력이 좋았기 때문에 아웃을 당하더라도 볼을 건드리고 아웃을 당하는 일이 매우 많아서 삼진을 당하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 통산 2120경기 출전을 오늘날의 한 시즌 경기인 162경기 단위로 환산할 때 한 시즌 삼진의 개수는 32개에 불과하다. 홈런이 삼진보다 많았던 시즌도 5차례나 된다. 게다가 선구안이 좋든 나쁘든 그는 양키스의 중심타자였기에 상대 투수들이 은근히 피해가는 성향이 있어서 통산 414삼진을 당할 동안 무려 704볼넷을 얻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60년 이후로 그는 점점 타격이나 수비 면에서 하향세를 겪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이가 들면서 타격 성적도 하락하고 수비도 불안정해지고 부상까지 생기자 좌익수로 포지션을 옮기기도 했으며, 결국 1963년을 끝으로 은퇴하였고, 1964년 양키스의 감독이 되었다.

1972년 명예의 전당 2번째 투표에서 85.61%의 득표율을 얻으며 헌액되었고, 양키스는 빌 디키와 함께 요기 베라를 8번 공동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양키즈에게 버림받다
1964년에 첫 감독 생활을 시작한 베라는 첫 해부터 팀을 월드 시리즈로 이끈다. 다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이끌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에이스 밥 깁슨을 맞아 7차전까지 팽팽한 접전을 간 끝에 아쉽게 7차전 선발이었던 깁슨의 벽을 넘지 못하고 5:7로 패해 시리즈 3승 4패로 결국 우승에는 실패하는데, 양키 수뇌부가 시리즈 종료 바로 다음날 베라를 자르고 상대팀이었던 카디널스의 감독인 쟈니 킨을 새로 데려왔다.

이에 크게 분노한 요기 베라는 그 길로 62년부터 새로 창단한 뉴욕 메츠를 맡았던 은사 케이시 스텐젤 감독을 따라 65년에 메츠와 플레잉코치로 계약을 하기에 이른다. (선수로서는 65년 한 시즌만 뛰고 이후로는 코치직에 전념했다.)

그 이후 양키스는 쇠락을 거듭하며 11년간 비밀번호를 찍는, 양키스 사상 첫 흑역사 시대가 도래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카즈를 우승시켰던 쟈니 킨 감독은 경질되었다.

그렇게 양키가 흑역사를 쓰는 동안 베라는 메츠에서 코치로 활동하고 감독직에도 올랐는데, 1973년에는 그 유명한 It ain't over till it's over를 말하더니 팀을 월드시리즈까지 보내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이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지도력도 인정받기에 이른다.

허나, 양키스의 레전드였고 감독 첫해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하는 등 성공적인 감독 데뷔시즌을 보낸 베라가 양키스에서 짤리는데는 황당한 사건이 원인이었으니, 바로 필 린츠의 하모니카 사건이다. 이 때문에 구단 수뇌부에 선수를 통제 못하는 감독이라고 찍히기라도 한건지 전격 경질되고 만다. 양키스 구단 역사상 손꼽히는 큰 실수중 하나로 평가될 만 하다.

컴백
그렇게 양키스가 조지 스타인브레너에 인수되며 겨우 정신을 차리던 양키스는 76년에 요기 베라를 다시 코치로 모셔오는데 성공했고, 그 해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였다. 비록 그 해에는 빅 레드 머신에게 장렬히 스윕당했지만 양키스는 77년에 다시 WS 우승을 차지하고 78년에는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원게임 플레이오프를 따내며 다시 월드시리즈에 진출, 2연패에 성공한다.


다시 뒤통수를 맞다
WS 2연패 이후 다시 흔들리던 양키스는 84년에 요기 베라를 감독으로 임명하며 팬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팀의 성적은 월드시리즈 우승이 아니면 실패라는 보스에게는 성에 차지 않았다. 85년 시즌 중 결국 보스는 베라를 다시 해고하는데, 베라는 보스의 이 행동에 대해 크게 분노하여 "스타인브레너 구단주 체제에선 다신 양키 스타디움에 오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고, 정말로 14년간 양키스와 상종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양키스는 다시 지구 꼴찌도 한번 해주시면서 10년간 단 한번도 우승을 못하는 흑역사가 시작. 다행히 96년 조 토레 감독이 오면서 우승은 했지만, 양키스가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요기 베라에게 잘못 보일 때마다 흑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골이 난 올드 팬들은 보스가 요기 베라에게 사과할 것을 주장했다. 88년에 구단은 양키스타디움의 모뉴먼트 파크(구단 영구결번자들에 대해 기념하는 공개 박물관)에 빌 디키와 베라를 함께 헌액하였지만, 베라는 보스에 대한 서운함을 풀지 않았다.

보스와의 화해
그렇게 영원히 남남으로 지낼 것만 같던 1999년 7월 19일. 보스는 1954년 월드시리즈 퍼펙트게임을 기념하며 돈 라슨과 요기 베라를 초청하고 그간의 섭섭했던 일들을 사과하는 의미로 요기 베라 데이를 선포한다. 일흔이 넘은 배터리는 시구와 시포를 맡았고 양키 팬들은 다시는 흑역사가 반복되지 않길 바라며 오랜만에 양키 스타디움에 찾아온 요기 베라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 당시, 조 디마지오가 99년에 사망함으로서 요기 베라는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양키' 자리를 물려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날, 양키스 선발 데이빗 콘은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이후로도 구단의 최고 원로로서 구단 운영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큰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보스가 일선에서 물러난 뒤엔 그간 늘 보스 맘대로 이리저리 휘둘려왔던 브라이언 캐쉬맨 단장에 대한 절대적인 감사와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양키 팬들은 보스가 고인이 된 이후로도 계속 철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두 아들 행크와 할 스타인브레너에게 베라의 쓴소리가 회초리로 작용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양키스타디움에서 종종 치러지는 올드 타이머스 데이 행사에서도 요기 베라는 숱한 레전드들을 제치고 마지막 즈음에 팬들에게 가장 큰 환호를 받으며 입장하곤 한다. 양키스 팬들도 이젠 구단 역사의 산 증인이 된 요기 베라에게 가장 극진한 대접을 하고 있으며, 베라 본인도 팬들의 환대에 그간 서운했던 감정을 풀었다.

명언 제조기 요기 베라
그의 이런 해학적이고 역설적이고 촌철살인의 성격도 가진 숱한 명언들을 요기즘(Yogiism)이라고 한다. 가정 형편 때문에 8학년(한국으로 치면 중2)에 학교를 그만둔지라 가방끈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촌철살인의 말을 많이 남겼다. 과거 양키스의 한 시대를 풍미한 HoF 좌완 투수 레프티 고메즈의 웃음기 넘치고 허풍이 많은 언변과는 사뭇 다른 블랙유머 성격이 짙다.


가장 유명한 말로는 역시 "끝날 때까지는 끝난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가 있다. 이 말은 뉴욕 메츠 감독 시절이었던 1973년에 한 말로, 그때 내셔널 리그 동부 디비전에서 꼴찌를 하고 있었는데(1973년 7월 선두 시카고 컵스와 9.5게임차였다.) 기자가 "너님은 안될거야 아마"라는 말을 하자 쏘아붙이듯 했던 말이라고 한다. 그 해 메츠는 베라의 말처럼 기적적으로 동부 디비전 1위를 차지했고, NLCS에서 빅 레드 머신을 격파하고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장렬하게 패배. 이 말은 이후 요기 베라의 자서전에서도 Yogi : It ain't over라는 제목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스포츠 종목을 가리지 않고 적용되는 말로서 스포츠 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서도 옳은 말로 받아들여지며 분야를 가리지 않고 널리 쓰이는 명언이다. 록키 발보아의 태그라인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등에 인용되었다. 심지어는 스포츠 외의 분야에서도 인용되었는데, 게임에서는 스타크래프트 2에서 짐 레이너가 아크튜러스 멩스크가 나오는 TV를 총으로 쏴서 부수면서 한다. 여기서 한국어로는 "게임은 끝나봐야 아는거야.."라고 번역되었다. 음악에서는 레니 크라비츠의 동명 노래제목인 'It ain't over till it's over' 가 있는데, 화자가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을 막으려는 감정을 나타낸 노래이다.

1963년 다저스와 양키스가 월드시리즈에서 격돌했을 때 요기 베라는 당시 다저스 선발에게 "저런 애송이한테 25승이나 헌납하다니 내셔널리그 타자는 모두 바보냐?"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애송이가 바로 한시대를 풍미한 다저스 레전드 좌완 샌디 코팩스다. 코팩스의 활약으로 다저스가 양키스를 제압해 우승을 거두자 "어떻게 25승을 했는지 잘 알겠어. 그런데 어쩌다 5패나 했어?"라고 묻자 당시 코팩스의 동료인 모리 윌슨은 "그가 못한 것이 아니라 우리(타자)들이 망쳐서 그래."라고 대답했다. 정작 베라는 이 시즌에는 38세의 노장이라 주전에서 밀려난 상태였고, 3차전 9회 대타로 들어와 돈 드라이스데일에게 우익수 플라이로 아웃됐고, 그 타석이 양키스에서의 마지막 타석이 되었다.

이런 명언들은 딱히 월드시리즈라든지 인터뷰라든지 하는 간지나는 상황에서만 한 것은 아니라서, 평소에 경기를 뛸 때도 요기 베라는 늘 수다쟁이였다고 한다. 플레이트에서 공을 받든, 출루해서 1루수를 만나든, 외야로 옮겼을 땐 관중들을 만나든, 요기 베라는 언제나 신나게 떠들어댔으며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줬다고. 다만 1루에 나가서 각종 작전을 지시받았을 때는 평소 같지 않게 아무 말 없이 진지한 모습으로 일관했는데, 이후 상대편 코치들이 이걸 간파해서 양키 측의 작전 수행을 원천봉쇄하는 바람에 팀의 작전 구사에 있어 은근히 골칫거리로 작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