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한국 1세대 희극인 서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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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한국 1세대 희극인 서영춘


2017. 10. 4.

서영춘
1960~1970년대 한국 코미디계의 1인자 .


한국의 코미디언. 1세대 코미디 트로이카(서영춘, 구봉서, 배삼룡)중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전설적인 코미디언이다. 다만, 이들 중에서 가장 늦게 데뷔하고 가장 먼저 단명했다. 이주일을 시작으로 전성시대를 맞이한 1980년대 코미디계에서 다른 2명과 다르게 원로 코미디언으로 활약을 하지 못한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원래는 극장가 화공 출신으로, 어느날 무대에 출연할 예정이었던 배우 한 명이 사정으로 불참하게 되면서 악극단 단장의 제의를 받고 대타로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게 된다. 이를 계기로 악극단 단원배우로 전향하게 되었으며, 1950년대 악극 활동을 통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1961년 MBC의 개국과 더불어 방송가에 입문하였으며 웃으면 복이와요 등 에 출연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60년대 유명 스타덤에 오르며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 구봉서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게 되었다. 60년대를 시작으로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던 그의 극장식 패키지쇼. 이른바 서영춘쇼 또한 큰 히트를 치게 된다. 당시 별명은 살살이.

1970년대 중반 TBC 로 자리를 옮기며 고전 유모어극장 등을 통해서 70년대 중후반 부터, 80년대 초반 이주일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코미디계의 부동의 1인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1960,70년대 구봉서, 배삼룡 등과 코미디 트로이카로서 인기를 나눠가졌다고는 하나, 당시를 아는 사람들에게 그들 중 누가 1인자였냐고 묻는다면, 단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영춘을 가장 먼저 첫 손가락으로 꼽을 것이다. 여담으로, 이주일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도 바로 서영춘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방송국 대기실에 들어온 이주일을 본 서영춘은 속으로 '저 놈 방송에 나오면 무조건 뜬다!'라고 예상했는데, 약간의 곡절을 겪은 후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서영춘은 특히 무대 위 애드립의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희극인이었으며 변화무쌍한 얼굴 표정과 판타스틱한 특유의 슬랩스틱 코미디로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TV가 대중화되면서 실질적으로 1세대가 된 당시 악극단 출신 코미디언들이 대부분이 그랬듯, 연기 패턴은 왜정 시대부터 내려온 악극, 만담에서 출발한 것이 많고 내용도 일본 것을 그대로 번안한 것이 꽤 있었다. 예를 들어, 서영춘이 공중파에서 선보였던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깡 무두셀라 구름이 허리케인에 담벼락 담벼락에 서생원 서생원에 고양이 고양이엔 바둑이 바둑이는 돌돌이" 어쩌고 하는 긴 이름 가진 아이 이야기도 일본 설화에 바탕을 둔 것이다.

사실 70년대까지는 우리 나라 문화 예술에서 6.25 동란 이후 일찌기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의 그림자가 짙던 시절이라, 웃으면 복이와요나 고전 유모어극장 같은 공중파 프로그램까지 일본 방송의 내용을 대놓고 똑같이 베껴 쓰던 때였다. 그러나 서영춘을 비롯한 당시 코미디언들이 독창성이 부족한 개그를 하였더라도 폄하할 수만은 없다. 일단 악극도 연주와 노래 개그가 들어가는 뮤지컬 비슷한 형식이지만 분명히 순발력과 암기력이 필요한 연극이었기 때문에 연기력은 필수였고, 노래와 춤도 대충 해서는 안 되었던 분야였다.


서영춘은 바보 연기에 특화된 배삼룡, 노래와 신체 조건을 이용한 개그가 장기였던 이기동, 미남 기믹에 선역과 정극 연기도 능했던 구봉서와 달리 강한 개성으로 어필하였다. 특히 얼굴 표정 연기에 능하였고 연기도 두루 잘 하는 편이었으며 영화에서도 활약했다. 예외로 미국 물(미군 8군 무대)을 먹은 곽규석이 미국식 스탠딩 개그와 성대모사, 남보원 백남봉은 성대모사를 장기로 한 쪽이다.

슬랩스틱과 간신 수염 분장, 표정 연기를 장기로 해서 그렇지, 분장하지 않은 모습은 키도 큰 편에 얼굴이 희고 훤한 미남형이었다. 서영춘 사후 개그계의 미남 미녀로 꼽히던 아들 서동균과 딸 서현선을 보면 피는 못 속인다는 것을 알수 있다.



60년대 극장쇼 무대에서 콤비로 활약했던 백금녀와 함께 한 음반.

그러나 사적으로 음주를 자주 하는 영향으로 간(肝) 건강이 나빠져 간암 발병으로 긴 시간 병고(病苦)를 치루었고, 결국 간암을 이기지 못하며 1986년 11월 1일 향년 5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본래 처음부터 배우를 꿈꾼 것이 아니다 보니 무대 체질이 아니였다고 한다. 그래서 긴장을 풀 요량으로 늘 술을 한잔 마신 후 공연에 임했는데 그게 지나치게 심해져서 결국 중독 수준에 이르렀다고.

게다가 사적으로 구봉서와는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는데 한때 주당으로 유명한 구봉서가 싫다는 서영춘을 억지로 술자리에 매번 데려갔다고 한다. 훗날 구봉서는 개신교에 귀의해 술을 끊었고, 뒤늦게서야 서영춘의 음주습관을 말리려 했으나 너무 늦은 뒤였다. 이 때문에 구봉서는 이를 두고두고 애통해하며 그때 서영춘을 억지로 술자리에 데리고 다녔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한번은 구봉서가 서영춘의 건강을 걱정하며 술을 끊으라고 충고하자 서영춘은 '형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라고 대들기도 했다고. 참고로 서영춘이 사망한 다음날(1986년 11월 2일)은 하필이면 구봉서의 환갑 날이었다. 구봉서는 이를 회고하는 언론 인터뷰에서 '자식들이 마련해준 환갑 잔치인데도 도무지 웃음이 나질 않았다'라고 회고하였다.



가족으로는 딸 서현선과 아들 서동균이 있고 둘 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코미디언, 연극배우의 길을 밟았다. 서현선은 1990년대 초반 KBS '한바탕 웃음으로'에서 레귤러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서동균은 개그콘서트 초중반기 멤버로 참가하며 로보캅 연기로 인지도를 쌓았으나 이후 이정수의 경우와 같이 연극 및 뮤지컬 배우로 전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