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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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2017. 9. 18.

존 애덤스
미국의 제2대 대통령. 미국 초대 부통령이기도 하다. 즉 세계 역사상 최초의 부통령.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종교는 유니테리언 계열이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변호사로서도 활동했고, 작은 키에 성격은 고집불통이었지만 강직하고 청렴해서 칭송을 많이 받았다. 대쪽같은 선비 같은 기상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 더불어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도 가장 청렴한 도덕성으로 대표되는 인물이다.



존 애덤스는 알렉산더 해밀턴과 함께 미국 연방주의자들의 거두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작성할때 참여했던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의 정책은 연방정부의 권한 강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대통령 선거는 2등을 한 후보에게 부통령 직위를 주었고 존 애덤스 다음으로 표를 많이 받은 사람이 그 유명한 공화주의자이자 훗날 3대 대통령이 되는 토머스 제퍼슨이였다. 그리고 존 애덤스는 대통령 임기 내내 부통령이자 가장 큰 정적인 제퍼슨에게 견제를 받아야 했다. 말년 이전에는 정치적 앙숙이기도 했었고 실제로 토마스 재퍼슨의 정치적 공격으로 재선에 실패까지 했었다. 

또한 미국은 당시 독립국이긴 했어도 아직은 신생 국가라 유럽 국가들에게 만만한 3류 국가였고 영국은 미국 상선을 습격하여 나포하는 행위를 저지르자 미국은 프랑스에 특사를 보내 영국의 행위를 저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당시 프랑스 정계 실력자였던 탈레랑은 미국 특사들을 푸대접한 것은 물론 미국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

미국의 연방주의자들은 이러한 처사에 분노했고 그들의 압력에 의해 프랑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프랑스를 상대할 국력도 안 됐을 뿐더러 미국 정부는 이 시기에 프랑스와 친하게 지내는 반역자들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외국인법을 제정했지만 실제로는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었다.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프랑스를 좋아한 데다 미국 정부의 권력 확대를 경계하던 공화주의자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행위로 비쳐진 건 당연지사. 결국 애덤스는 전쟁을 철회했고 연방주의자들도 애덤스에게 실망해 지지를 철회해 버려 재선에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애덤스는 그의 정적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이 편하게 대통령 임기를 보내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애덤스는 임기 종료 바로 전날 판사들을 전부 연방주의자로 앉혀버렸고 매버리 대 메디슨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한편 대법원장은 애덤스와 친했던 존 마셜이 차지했기 때문에 제퍼슨은 임기 내내 사법부의 견제를 받았다. 워싱턴 때부터 중립성을 엄중하게 지키던 미국 법원의 전통은 이때부터 확고해졌다.

그리고 존 애덤스가 험한 백악관 생활을 끝내고 정치를 사실상 포기하며 귀향한 이후 알렉산더 해밀턴이 에런 버와의 결투로 사망한 후라 구심점을 잃은 연방주의자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평생 토머스 제퍼슨과 정적으로 얽히고 설킨 관계였으며 한창 싸울 때는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서 서로 말도 안 하고 살았지만 죽을 무렵에는 화해도 하고 서신도 자주 교환했다. 공교롭게도 둘은 같은 날, 그것도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에 죽었다. 유언은 "토머스 제퍼슨은 아직 살아있...(Thomas — Jefferson — still surv — )"가 유명한데, 보다시피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죽었으며, 토마스 제퍼슨은 이 말을 하기 몇 시간 전에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한다.

변호사 시절에는 보스턴 학살 사건에서 시민들에게 총을 쏜 영국 병사들을 변호하기도 했다. 당시 영국 병사들을 미국 내에서 변호해주려는 인물도 찾기 어려웠던 상황이었고, 실제로 이 때 영국 병사가 유죄로 처벌을 받았으면 영국 본토의 보다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영국 병사를 정당방위로 무죄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주동자들을 숨기는 형태로 당시 과격파들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때문에 대체역사를 다룬 유명한 책 만약에에서 역사학자 토머스 플레밍은 만약 존 애덤스가 변론을 하지 않았다면 보스턴에는 영국 과격파들이 파견한 군대가 깔렸을 것이고 당연히 보스턴 티 파티는 벌어질 엄두도 못내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존 애덤스는 이에 대해서 "일찍이 조국에 바친 최고의 봉사 중 하나"로 이 행동을 꼽았을 정도.

그의 아들 존 퀸시 애덤스는 1825년에 제6대 대통령이 되어 미국 역사상 최초의 부자 대통령의 기록을 세웠는데 이때까지도 살아 있을 정도로 장수해서 아들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이 때 존 애덤스는 90세였고 아들 존 퀸시는 58세였다.

여담

고집불통이자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정적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없이 내뱉곤 했는데 조지 워싱턴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풍자한 적이 있다.

"워싱턴 씨의 특별한 지위(대통령직을 의미)는 어디에서 비롯되느냐 하면 우선 키가 크지요. 다른 유대인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서 선택된 유대 지도자와 마찬가지요. 또한 버지니아 출생이오. 버지니아산 거위는 모두 백조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리고 침묵할 때를 아는 천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소. 보다시피 난 워싱턴 씨의 재능을 이렇게 여러가지를 댔소. 읽기, 쓰기, 생각하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말이오."

두뇌의 명석함은 논외로 치고 워싱턴이 특별한 지위를 얻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는 풍자이지만 이쯤 되면 거의 용자 수준. 심지어는 자신의 의견과 맞지 않는 정책을 워싱턴이 수행하자 '그 망령난 늙은이!'라고까지 했던 적도 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워싱턴을 존경했던 것은 분명했다고 한다.


또한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을 임기 말년 즈음부터 매우 혐오하여 "스코틀랜드 행상인의 후레자식", "복숭아나무 뿌리의 벌레처럼 뿌리를 갉아먹기 위해 어둠과 땅 밑에서 12년간 애를 썼고 그동안 그의 정적들은 물론 영국 상인에 빚진 채무자나 프랑스 고용인들의 도끼가 항상 나무 밑동을 쳐댔어도 나무는 쓰러지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함께 대륙회의에 참석한 존 디킨슨을 "돈만 많고 천재성은 희귀한 자"라고 놀리기도 했다. 꽤나 매서운 독설가.

이런 면모를 두고 당대의 지식인이자 정치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애덤스는 분명 정직하고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그는 때때로 완전히 미쳐 버렸다."라고 말했다.

강경한 무신론자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출처 불명이지만 "가장 좋은 세상은 종교가 없는 세상"이라고 말했을 정도. 그러나 애덤스의 종교적 성향은 여전히 학자들 가운데에서 논란의 대상이다. 분명 애덤스는 그리스도교가 미신과 타락에 빠졌다고 지적하기는 했다. 그러나 동시에 존 애덤스의 저작들을 모은 '존 애덤스 페이퍼'에만 봐도 미국의 근간이 된 청교도의 신앙을 긍정하고 있다. 데이빗 맥쿨로의 애덤스 전기에서도 애덤스를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서술한다. 데이빗 홈즈는 애덤스가 그리스도교적 유니테리언이었다고 보았다. 이 경우 이신론자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으나, 그렉 프레이저는 애덤스가 기적의 존재와 성서의 계시적 가치를 일부 인정했기 때문에 이신론자라고 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어찌되었건 애덤스는 이신론자나 불가지론자일 수는 있어도 무신론자라고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