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본문 바로가기

박정희,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2017. 7. 6.

표적은 박정희였지만, 엉뚱하게 육영수와 또 한 명의 무고한 학생이 피격당해 사망한 사건이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부터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8.15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오전 10시 6분, 경축식의 클라이맥스라 할 박정희의 경축사가 낭독되기 시작하였다. 이날 경축사의 내용은 "평화통일 3단계 기본원칙"을 밝히는 역사적 내용이었다. 10시 23분경,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빌려 조국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대통령의 경축사 낭독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 식장 1층 뒤편에서 "쾅!"하는 총성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듣지 못했는지 경축사를 계속 낭독하였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시종…"

그때 2번째 총소리가 울렸고, 한 사내가 아래층 중앙 뒷줄에서 단상을 향해 뛰쳐나왔다. 175cm 가량의 약간 통통한 몸집에 검은색 외투를 입고 테두리가 검은 안경을 쓴, 머리를 뒤로 빗어넘긴 20대 청년이었다. 1층 C석 맨 뒤 열의 재일교포석으로부터 B석과 C석의 통로를 따라 단상을 향해 달려 나오고 있었다. 

C석 가운데 앉아 있던 광복회원 이옥희 여사가 "저놈 잡아라!"하고 고함을 질렀다. 고함과 동시에 "잡아!" 하는 소리가 장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장내가 웅성거리는 사이 괴청년은 이미 단상 밑 시립교향악단이 자리잡은 곳 2미터 앞까지 달려나갔다. 그는 C석 맨 앞줄에서 권총사격 자세를 취했다. 여기서 경축사를 낭독하는 대통령까지 거리는 불과 10여 m. 곧이어 3발의 총성이 들렸다. 

독립유공자 자리에 앉아 있던 서대문세무서 재산세계장 이대산이 범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연단 위에서 경호원들이 박정희의 연설대를 둘러쌌으며, 이미 박정희는 빠른 반응으로 연설대 뒤에 숨어서 일단 피한 상태, 그리고 다른 경호원들과 C석의 독립유공자들이 범인을 덮쳐 제압했다. 범인이 넘어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이 튀어 시향 바이올리니스트 김영목 씨의 왼뺨에 맞아, 김씨의 피부가 2cm 가량 찢어지는 찰과상을 입었다.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리장으로 변했고, 웅성거리는 소리와 고함소리, 흐느끼는 소리로 가득찼다. 범인의 총에 육영수가 머리를 맞고 쓰러졌으며, 누군가의 오발에 합창단원인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생 장봉화 양이 숨졌다. 쓰러져 있는 육영수를 위해 한 50대 여인이 올라가 부축하자, 김정렴 비서실장이 거들었다. 

육영수가 호송되고, 3분쯤 뒤 연설대 뒤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는, 연단 위의 보리차 한 잔을 따라 마신 뒤 '여러분들, 하던 얘기를 계속 하겠습니다'라는 말로써 남은 경축사를 마저 이어나갔다.
육영수는 사건 발생 9분만에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오전 11시경부터 신경외과 과장 심보성 교수의 집도로 오후 4시 20분까지 뇌수술을 받았다. 근처 병원과 적십자혈액원의 모든 AB형 혈액을 쏟아붓는 대수술이었는데, 400mL 혈액 148병을 집어넣었다. 용량은 59,200cc, 이 정도면 몸속의 모든 혈액을 거의 10번은 갈아치울 만큼 많은 숫자다.

그러나 이렇게 노력했는데도, 소생할 가망은 없었다. 총탄이 뇌정맥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집도의는 사건 다음날 "꼭 살렸어야 했는데… 5mm만 비껴갔어도…"라며 침통해했다고 한다. 수술이 끝난 뒤, 박정희가 찾아와 회복실에서 약 20~30분 가량 아내와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육영수는 이날 오후 7시경에 숨졌다.

허술한 대응

당시 박정희가 연설을 하고 있었을 때 '텅' 하는 금속성 소리가 울리고 오케스트라석에 앉아 있었던 연주부들이 일제히 고개를 뒤로 돌렸지만 객석에서도, 단상 위의 경호원들과 박정희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이 때 문세광은 당황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 쪽을 달리면서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객석에 배치된 경찰들과 경호원들은 문세광이 권총을 들고 유유히 통로를 뛰어다니는 걸 보았는데도, 아무도 문세광을 제지하지 않았다. 문세광이 발사한 총탄이 연단에 맞아서 그렇지, 조금만 더 위로 총알이 날아갔더라면 박정희를 맞췄을 것이다.


이 때 가장 빠르게 상황판단을 한 사람이 당시 단상 위에 앉아 있었던 박종규 경호실장이다. 역광 때문에 객석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문세광이 박정희 쪽으로 뛰어오는 걸 보자마자 앞으로 뛰쳐나가 문세광을 쏘려고 했다. 

당시 송출된 방송화면 캡쳐장면.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박종규 경호실장이고 왼쪽 하단에 검은 형체가 문세광이다.


하지만 박종규 경호실장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권총을 뽑는 과정에서 오발을 일으켜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고, 문세광을 쏘지도 못하였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부분인데,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은 분명히 권총을 떨어뜨렸다. 당시 영상도 자세히 보면 박종규 경호실장 다리 사이로 뭔가 검은색 형체가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이는데, 그게 권총이다. 

그런데 얼핏 보면 박종규 경호실장이 범인과 대적자세를 취한 게 잘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다. 경호실장의 임무는 범인을 응사하는 게 아니라 피경호인 박정희를 보호하기 위해 연대로 나와 머리를 숙이게 해야 하는 것인데, 박종규 경호실장은 이 임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히려 범인을 쏘려고 단상 앞으로 뛰쳐나왔고, 정작 그 자신은 범인을 쏘지도 못했다. 

그러나 경호원들의 대응상황은 박종규 경호실장보다 더 최악이었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그나마 범인과 대적 자세라도 취했지만, 다른 경호원들은 총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않고 있다가 문세광이 제압된 후에야 박정희를 호위하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때 김덕년 경호원은 첫 번째 총탄이 들리자 바로 커튼을 제끼고 단상으로 달려오는 범인을 향해 조준사격을 했다고 했는데, 이 때 이 총알은 문세광의 다리를 스쳤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인지는 불명. 


문세광이 밖으로 체포된 후의 경호원들의 막장 행위는 계속됐는데, 바로 박정희에게 연설을 그대로 놔두게 하는 병크를 저지른 것. 물론 사람들은 '담대한 박정희'라고 칭찬했지만 경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명백한 병크다. 암살자가 제압되었다 하더라도 행사장 안에 제 2, 3의 저격범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경호원들은 사건이 일어나면 반드시 피신시켜야 했었다.

범인 문세광과 그 배경

1974년 10월 14일 재판을 받고 있는 문세광.


범인 문세광은 불과 22세의 재일한국인 2세로, 1974년 5월에 북한의 대일 공작선이며 재일교포 북송선이기도 한 '만경봉호(萬景峰號)'에서 박정희를 저격하라는 지령을 받았음이 밝혀졌다. 문세광 본인은 대단히 과대망상적인 인물로, 소설 자칼의 날의 애독자였다고 한다. 그가 쓴 권총은 일본 경찰의 것으로, 오사카 미나미구의 한 파출소에서 훔쳤다. 
범인은 문세광이 아니다?

당시 사건 수사본부 요원으로 현장검증을 담당했던 이건우는, 1989년 8월에 육영수를 죽인 게 문세광이 아니라는 내용의 양심선언과 함께 몇가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범인은 재일교포 출신의 문세광으로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南條世光)였고,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라는 이름의 여권으로 입국하였다. 문제는 이미 문세광은 김대중 납치사건 때 반한 운동을 벌인 전적이 있어서 중앙정보부의 요시찰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 문세광이 가짜 여권으로 한국에 건너오는데 오사카 총영사관은 문세광에게 비자를 내주었고, 이는 모두 중정에 보고가 올라갔다.

당시 문세광은 사건 당일 조선호텔에서 '서울 2바 1091' 번호판의 포드 20M을 타고 나타났는데, 특별한 귀빈도 아닌 문세광에게 이런 고급 외제차를 제공한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이 자동차는 승차입장카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립극장 정문을 통과했다.

또한 식장에 출입하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에게 경호관이 가슴에 달아주는 비표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문세광은 남쪽 정문을 통과해서 입장하였는데 남쪽 정문을 경비하던 인력은 대통령경호실 1인, 경찰관 4인, 행사안내요원 3인의 총 8명이었다. 그리고 금속탐지기가 설치되었음에도 문세광이 어떻게 권총을 소지한 채 안으로 들어갔냐는 의문도 있다.


이날 식장에는 치안국(현 경찰청)을 비롯해 서울시내 중부, 성북, 성동, 용산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 250명을 비롯해 국립극장 내외에 총 548명의 경찰관이 배치되었고 경호원, 중앙정보부 요원까지 더하면 600여명이 경비하고 있었지만, 경호실에서 나온 경호관들 외에는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 한다.

8.15 기념행사장의 입장은 오전 9시 50분에 완료되었는데, 문세광은 행사 직전에 이미 착석했었으나 드디어 문세광이 비표를 달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경호실 직원이 문세광에게 로비로 내보낸다. 하지만, 문세광은 이보다 23분 늦은 10시 13분에 다시 입장했다. 이때 경호관이 검문하자 문세광은 자신을 일본대사관 직원이라 했고 그대로 통과, 중부서 정보과장 최정환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때문에 아무리 일본대사관 직원이라 해도 박정희가 참석한 식장에 그렇게 쉽게, 그것도 입장이 다 끝난 상황에서 참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문세광을 내보냈던 경호실 직원은 문세광이 여전히 비표도 없이 다시 입장해서 착석한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세광의 뒤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것은 문세광이 앉은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있던 맨 뒷자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있는 경호원을 제외한 모든 경호원은 빠져나오라는 무전이 계속 왔다고 한다.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이 때도 총이 몇 발 발사되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재판부 사형언도 판결문 내용에 따르면 문세광은 총 5발을 쐈으며 1발은 오발로 자신의 대퇴부, 2발은 연설대 좌측, 3발은 불발, 4발은 육영수의 우측 두부에 명중, 5발은 국기에 맞췄다고 나와있다.

하지만 이건우는 문세광은 총 5발 중 4발을 쐈고 1발은 오발, 2발은 연단, 3발은 태극기, 4발은 천장에 맞췄다고 양심선언에서 주장하였다. 5번째는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 5번째 총탄이 문세광이 말한 3번째 불발탄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시기 많은 이들은 총성이 총 7번 울렸다는 증언이 있다. 

- 첫탄은 총을 꺼내다가 오발하여 문세광의 대퇴부에 명중, 
- 2탄은 연단, 
- 3탄은 불발. 오발이 아니라 불발이므로 이 3탄은 총성이 나지 않는다.
- 4탄은 육영수의 오른쪽 머리, 
- 5탄은 태극기


여기까지는 문세광의 주장과 일치한다.

- 6탄은 합창단원으로 참석했던 장봉화 양이 맞았다. 이 총탄은 박종규 경호실장이 발사한 오발로 추정된다.
- 7탄은 천장. 
- 그리고 의문의 8번째 총성.


경호실은 이후 현장을 모조리 뒤졌지만, 불발탄을 포함해서 6개의 탄자밖에 찾아내지 못해서 2개의 탄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총에 맞고 사망한 장봉화 양,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문세광이 총을 가지게 된 경우도 문제가 많다. 문세광의 총은 주일미군 부대에서 도난 당한 2자루의 미제 콜트 M1911A1권총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파출소 도난 현장에서 발견된 족적이나 지문이 문세광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소지 하지 않은 2번째 총의 경우도 문제가 많았다. 문세광은 오사카의 한 호수에 버렸다고 진술했는데, 이 총은 호수를 박박 긁었는데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조작극이라는 이야기가 많은 듯 하다.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소리분석이나 각도분석 등으로 고의적이 아니고 우발적으로 경호원이 쏜 총알에 육영수가 사망했다는 주장을 내세워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그것이 알고싶다 홈페이지에서 해당편을 무료로 다시 볼 수 있다. 326회(2005-02-12), 332회(2005-03-26) 당시 진행자는 배우 정진영. 이에 대하여 월간조선에서 유언비어와 음모론의 확산을 막기 위한 사건 관련 기사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북한의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는 아예 박정희가 정치적인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고 이야기를 꾸며냈다. 제 손으로 아내를 죽여서 전 국민을 북한이 일으킨 테러리즘의 공포에 놓이게 했다는 것. 해당 영화에서는 육영수가 총에 맞아 절명하자 박정희는 안전하게 식장을 걸어 나가다가 뒤를 슬쩍 돌아보고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건 이후

문세광은 즉시 체포되어 중앙정보부 조사실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구타에도 불구하고 완강히 입을 열지 않아 전혀 수사가 진행되지 못했는데, 당시 김기춘이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법무비서관이던 검사로 있었다.

조사에 투입된 당시 김기춘 검사는 문세광에게 담배를 권한 후, 그가 즐겨 읽었다는 소설 자칼의 날을 언급하면서 분위기를 어느 정도 풀었다. 그리고 "자, 사나이 대 사나이다. 당신이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난 100% 다 믿을테니 모두 말해보게."라고 말했고, 문세광 역시 "좋습니다. 선생께서는 저를 이해해 주시리라 믿으니 전부 말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드디어 진술을 시작했다.

특히 총에 대해 질문하자, 문세광은 일본에서 훔친 2자루 중에 버린 1자루의 위치를 그림까지 그려가며 상세히 설명하고 이게 사실로 드러나는 등, 비로소 사건의 전말이 풀렸다. 또한 문세광은 중간중간에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재일 조총련 정치부장 김호룡의 사주로 박정희를 암살하려고 했다'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많은 글들에서는 김호룡을 통해서 공작금을 받고 북한과 연계되었다고 이야기가 나오지만, 당시 일본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김호룡이 줬다는 공작금은 문세광의 모친이 준 돈으로 밝혀졌다. 2005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한국 언론 최초로 김호룡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자신의 연루설을 부정했다. 또한 당시 사건 조사를 맡았던 일본 경시청 경비국장 야마모토 시즈히코도 조총련과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에 연관이 있다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김호룡을 무엇보다도 김호룡은 이 사건으로 한국 수사당국을 통한 어떤 조사조차 받은 적이 없다. 김호룡 연루설은 아무도 안 믿었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문세광에게는 내란목적 살인,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출입국관리법 위반, 총포화약류 단속법 위반 등의 혐의가 적용되었고 사건 발생 4개월 뒤이자 대법원 확정판결 3일만에 1974년 12월 20일 오전 7시 30분 서울구치소의 사형집행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사건의 여파로 직접적인 책임을 물어 박종규 경호실장과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이 경질되었다. 후임으로는 각각 차지철, 구자춘이 임명되었다.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은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에 열성을 기울여서 이 날이 개통식이었음에도 국립극장 행사 관리 책임이 서울특별시에 있기 때문에 경질되었다. 결국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식은 침울한 분위기에서 열렸으며 이로 인해 서울 지하철의 건설 계획 대부분이 뒤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그리고 그 해 9월 홍성철 내무부장관, 이봉성 법무부장관 등의 각료들이 경질되고, 대신 김재규 건설부장관 등이 새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치안국도 이 사건을 계기로 1974년 12월 24일 치안본부로 승격된다.

당시 새로 임명된 황산덕 법무부 장관은 독실한 불교 신자라서, 재직 중에 절대로 사형 집행영장에 서명하지 않았다. 사형집행 서명은 법무부 장관 전결이다. 문세광의 경우는 결국 장관이 휴가내고 나가서 차관이 대신 결재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구치소장이 그에게 최후에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는 창백한 얼굴로 울부짖으며 10분간 최후진술을 했다.
"나는 정말 바보였어요… 외국에서 태어난 것이 한스러워요. 일본에서 속아만 살아… 속아 살았어요. 속아 살아…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박정희에게 정말 몹쓸 짓을 했어요. 육영수와 죽은 분(장봉화)에게는 정말 죽을 죄를 졌어요. 저도 그분들 곁으로 같이 보내주세요… 제 처에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나이도 젊으니 재혼해서 제2의 인생을 살도록 전해주세요…….(실제 진술은 일본어로 했다.)"

당시 사형집행 검사로 현장을 지켜봤던 조태형이나, 수사본부장으로 사건을 총지휘한 김일두는, 문세광의 최후진술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진범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재일교포 출신 암살범이라는 것 때문에 이 시기 한일관계도 상당히 악화되었다. 일본은 조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사과 사절을 보내는 데에도 난색을 표했다. 사죄 이유에 대해서는 하단 각주 참고. 결국은 일본 총리가 직접 조문을 오면서 사죄가 이뤄졌다. 물론 김대중 납치사건 같은 희대의 범죄를 벌인 터라 그런 점도 있었다. 실지로 이 사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발표에 대해 일본 언론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연상케 하는 독재자의 자작극에 불과하다"는 논평을 했다. 

박정희는 이때 일본과의 국교 단절도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고, 미국도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지 않게 두 나라 사이를 중재해야 했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지나치게 강경하게 나온다고 보고 "더 이상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라"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당시 조일환 같은 조폭들이 서울로 상경하여 손가락을 끊는 단지 시위를 벌이며 "또 다시 국모를 죽인 일본에게 원수를 갚자!"라는 시위를 벌였다. <조폭으로 보는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또 청와대에선 공공연하게 도쿄 폭격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고 나중에 신문에 회고록이 실리기도 했다. 

반면 박정희는 단기적으로는 나름대로 정치적 이득을 보았다. 그때까지 대외적으로 인권문제와 특히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일본에 숙이고 들어가야 했던 상황이었다. 김대중은 일본 정치인들의 초청으로 일본에 머물고 있었고, 한국 정보기관원들이 일본으로 들어와서 무단으로 망명객을 납치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런데 문세광이 일본 여권으로 입국하였으며, 암살에 사용된 총이 어쨌거나 일본 경찰이 도난당한 총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책임을 피할 수 없었으므로 기존이 불리한 상황이 극적으로 역전되었다. 미국 역시 인권문제에 대한 수위를 낮추었으며, 학생운동까지 약화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이 사건 1주일 이후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해제하는 것으로 이런 상황을 안정화시켰지만, 얼마 뒤 조총련계 재일교포 고향방문단 입국을 허락하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대일본관계도 관리에 들어갔다. 이런 점이 자작설과 음모론이 탄생할 수 있게 만드는 배경이다. 피해자인 박정희가 가장 큰 정치적 수혜자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육영수 저격 사건이 박정희를 무너뜨렸다."는 의견도 많다. 박정희가 실의에 빠져 판단력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또한 경호실장 직무에 최선을 다하던 박종규가 잘리고, 권력욕으로 똘똘 뭉친 차지철이 전횡을 일삼았다. 게다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비서실장 김계원은 차지철을 막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유신 정권은 엉뚱한 곳으로 갔다. 그래서 신민당 각목사건, 김영삼 제명 파동같은 짓을 저지르다가 10.26 사건을 맞았다. 물론 이것 자체도 박정희 정권이 무너질 때,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육영수가 사망한 후, 그녀의 모교인 배화여자중학교ㆍ배화여자고등학교 교정에는 그녀를 기리기 위한 '육영수 여사 기념관'이 세워졌다. 이를 계기로 배화여자실업전문학교가 설립되었고, 이 학교는 2/3년제 대학인 배화여자대학교로 개편되었다. 기념관은 현재 배화여대의 대학본부로 쓰이고 있다.


한편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육영수의 장녀 박근혜(당시 22살)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10.26이 터지기 전까지 영부인 역할을 대신했다. 이때부터 박근혜는 어머니처럼 올림머리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멘붕한 박근혜에게 왠 사이비 종교 교주가 꼬여버려 운명이 완전히 틀어지게 되었고, 이는 42년뒤인 2016년, 대한민국 국정사 희대의 최순실 게이트로 나타난다.

여담

한국 정치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참사라서, 청와대 경호원으로 들어갈 때 반드시 배운다. 당시 문세광은 일종의 출입증인 비표가 없었는데, 고급외제차를 타고 일본어를 쓰면서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척 하자 몸수색없이 출입을 허가해버린 것이 당시 경호원들의 최대의 잘못으로 설명되어, 어떠한 경우에서도 예외 없이 출입증을 검사하고 몸수색을 하도록 교육하고 있다.

여고생인 장봉화는 이 사건으로 숨졌는데, 2005년 인터뷰에서 유족들은 "성금을 일부 받았을 뿐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배상받지 못했다."고 한탄한다.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김상중이 문세광 역을 맡았다. 위에 소개한 월간조선 기사에 충실한 고증을 했지만, 역시 오발설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 김상중은 재미있게도 2008년부터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을 맡고 있다.

박근혜는 해마다 8월 15일 육영수 추도식에 참석했으나 18대 대통령 취임한 후에는 불참했다. 광복절 기념 행사가 더 중요도가 큰데다, 대통령 신분으로서 추도식에 참석하면 자칫 정치 논란이 발생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