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국회 오물 투척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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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국회 오물 투척사건


2017. 7. 4.

왼쪽의 통을 뿌리고 있는 사람이 김두한. 국무총리 정일권,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장기영, 재무부 장관 김정렴, 법무부 장관 민복기 등 내각 구성원 모두가 오물을 맞고 있다.

1966년 9월 22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김두한 의원이 미리 준비한 오물을 국무총리 등 내각에게 투척한 사건이다.


당시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던 한국비료가 일본에서 사카린의 원료를 밀수하다 적발되면서 나라가 여간 떠들썩했던 게 아니었다. 이에 국회에서 본회의가 열려 '특정재벌 밀수 사건에 관한 질문' 안건의 상정 및 통과가 진행되었고 관계인들이 모두 소환되어 추궁을 받았다.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야당인 민중당 등이 힘을 합쳐 정부의 모르쇠와 삼성 비호에 대해 열심히 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삼성이 한국 최대의 기업이라는 점과 이미 정부와 결탁했다는 점 등으로 인해 정부는 삼성 비호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도 여야는 한목소리로 관련자 전원 구속과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는데...

정부와 대기업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거센 와중에 국회 질의 마지막날인 9월 22일, 결국 국회의원이었던 김두한이 일을 저지른다. 당시 김두한은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이라는 조작 사건에 휘말렸다가 오물 투척 사건 직전에서야 무죄 판결을 받았던 상태이며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독립당은 와해되어 무소속인 상태였다. 한마디로 울분이 쌓일대로 쌓여있던 상태. 실제로 김두한은 발언 중에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서대문 형무소에서 영하 20도의 날씨에 콩밥을 먹었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게다가 김두한이라는 인물의 원래 성격 자체가.. 이미 김두한은 이 사건 8년 전인 1954년 자신을 무시한다며 사세청장을 폭행한 전적이 있었다. 

김두한의 태도는 발언 전부터 매우 험악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국회부의장으로 사회를 보던 이상철이 김두한의 발언 순서를 불리하게 조정하자, 김두한이 그의 머리를 가리키며 “당신 이거 한번 부서지는 것을 보려고 그래요?” 하고 협박하였고, “그 따위로 당신 하면 좋지 않아! 노인이니까 그냥 두지, 장 부의장같이 유도깨나 쓰면 날릴 테야!” 하고 소리쳤다고 한다. 실제로 사세청장을 폭행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김두한의 이런 발언들은 매우 심상찮게 여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본회의에서 이만섭, 김대중의 질의가 끝나자 김두한의 질의가 시작되었는데, 일단 김두한은 “교동공립보통학교 3년 동안에 2년을 낙제하고 1년 밖에 다니지 못하여 기초상식이 부족하여 말을 (잘)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할 줄 모르는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운을 떼었다. 그러나 당시 국회 본회의 기록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 있듯이 실제로 김두한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일자무식한 깡패답지 않게 달변가라서 말솜씨가 아주 좋았다. 

결국 이 때부터 그의 장광설이 시작되었다. 김두한은 이 사건의 부정, 불의에 대해 열변, 위에서 언급한 콩밥 이야기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별장같은 감옥에 이미 40여회 들락날락했는데 또 다시 들어갈 심정”이라는 이야기, 그의 과거 반공투쟁에 대한 자화자찬,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이야기, 존 하지 때문에 오키나와 형무소로 갔다는 이야기, 그의 정치적 신념, 대한민국의 과거와 미래, 해외 각국의 사례, 서독의 풍족한 달러 보유,북한 공산당들보다 남한에 이상적인 복지국가 건설을 해야 한다는 주장, 통일 이후 무산대중을 먹여살리기 위해선 허리띠를 졸라매고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된다는 이야기, 친일파 민족반역자 모리배 집단에 대한 규탄, 이승만과 싸운 이야기, 박정희 정권이 과거 이승만 정권과 뭐가 다르냐는 항변... 등등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참다못한 부의장 이상철이 "시간이 대체 얼마나 걸리냐?"라면서 눈치를 주었지만, 김두한은 "15분 정도 더 남았다"고 발언했다. 오전에 대가리 깨버린다는 협박을 들었던 때문인지, 이상철은 다른 의원들의 양해를 구하고 김두한이 계속 발언을 하도록 허락하였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이 때까지만 해도 막무가내인 김두한의 행동을 보면서 다른 국회의원들은 상당히 재밌어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김두한의 발언은 계속되었지만 중간에 맥이 끊긴 탓인지 발언이 재개된지 얼마 뒤에... 아래에 당시 국회 회의록에 기록된 김두한 발언의 마지막 순간을 그대로 옮겨 둔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나는 대통령이 여기에 나왔으면 호되게 한 번 따지고 싶지만 국무총리가 여기 대통령을 대리하고 여기 장관이 나와 있으니까 나는 이 사람을 내각으로 보지 않고 오늘날 삼 년 몇 개월 동안 부정과 불의를 하는 것을 합리화를 시켜버린 하나의 피고로서 오늘 이 시각서부터 다루겠습니다. (의원들이 웃었다고 기록되었다) 이것이 도적질해 먹는…국민의 모든 재산을 도적질해서 합리화하고…합리화시키는 이 내각을 규탄하는 국민의…(이때쯤 X보따리를 꺼내 단상에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의 사카린이올시다. 그러니까 이 내각은 고루 고루 맛을 보여야 알지…(이 시점에 X보따리를 풀어 헤친 것으로 추정된다) 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


이 똥물은 사실 똥을 뿌린 행위 자체가 중요하지, 그 똥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훗날 스포츠 서울과 MBC 히스토리 후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두한이 당시 수행비서였던 채원기를 시켜 파고다 공원 변소에서 퍼왔다고 했고, 같은 수행비서였던 모세원은 다른 비서인 이세원이 탑골 공원에서 퍼온 것이라 증언했다. 김두한 본인이 직접 사건 직후 순국 선열의 혼을 기리기 위하여 일부러 파고다 공원 변소의 똥을 퍼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966년 첫번째 공판 과정 중에는 비서 2명에게 지시해 자택 변소에서 퍼왔다고 증언했다.

어쨌거나 순식간에 인분을 뒤집어 쓴 국무위원들의 비명과 진동하는 인분 냄새로 국회는 한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회의는 바로 중단. 이날 김두한의 정면에 앉아있던 국무총리 정일권이 인분 세례에 직격당하면서 양복은 물론이고 시계까지 냄새가 배어서 결국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또한, 국회 속기사들도 날벼락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재판 과정 김두한의 발언 중 '대통령이 여기에 나왔으면 호되게 한번 따지고 싶지만'은 당연히 매우 심각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여담으로, 사카린은 소화가 되지 않는 물질이라 소화기를 그냥 통과한다. 그래서, 김두한이 준비한 것이 실제로 사카린을 먹은 사람들의 오물(?)이라면 정말로 사카린이 포함되어있었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정일권 총리를 위시한 내각이 총사퇴를 선언했고, 김두한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구속 수감되었다. 

여담이지만, 김두한에 대한 징계 논의 중에 김두한 본인은 재차 발언 기회를 얻게 되어 이를 통해 의원직 사퇴 의사를 밝히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특유의 장광설이 발동하였다. 이번에는 '민주주의의 개념과 현실정치'라는 주제. 이것까지는 좋았지만, 중간부터 어쩐지 군주제와 비교를 시작하더니 곧바로 일본 천황제와 막부의 역사적 관계, 일본의 개항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결국 이에 참다못한 누군가가 "신상발언만 하라고!"라고 소리를 지르는 촌극이 벌어졌다.


어쨌거나 박정희 정권은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여론이 몹시 안 좋았던 상태였기 때문에, 김두한을 극딜하여 여론을 반전시키려고 노력을 했으나 대부분은 "김두한이 깡패는 깡패지만 이번 일 만큼은 정말 잘했다!"정도였으므로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신민당은 쾌재를 부르며 김두한을 옹호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김두한을 자기네 당으로 영입하였다. 덕분에 김두한은 정치 인생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당에서 당적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잠깐 자유당에 있었던 것을 제외한다면, 김두한은 늘 군소정당이나 무소속을 떠돌아 다녔었다.

이후 김두한은 1년 정도 수감되었으며, 수감 중에 할복을 시도하는 소동을 벌였다가 곧 얼마 안되어 고혈압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석방.

그러나... 병보석으로 풀려난지 얼마 안 돼 또다시 선거 연설 도중 (계속 마다 또다시 반 박정희 역할로만 내보인다며) 북한 찬양으로 반공법 위반, 선관위장 폭행 등으로 재수감되고 다시 병보석으로 석방되는 것을 반복. 어쨌든 김두한은 7대 국회의원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

이후, 김두한은 얼마 지나지 않은 1972년에 고혈압으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