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건에 휘말렸던 심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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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건에 휘말렸던 심수봉


2017. 5. 15.

심수봉은 1950년 8월 24일에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심민경'이었지만 가수로써 성공하려면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권유로 어릴 때 스님이 지어준 법명인 심수봉으로 예명을 정했다.

그녀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음악을 했던 집안이었고, 아버지, 큰아버지, 고모 등도 모두 음악을 했을 정도로 후덜덜한 음악가 집안이었다. 이런 집안의 환경 속에서 그녀도 음악인의 삶을 걷게 된다. 주 전공은 재즈였는데, 최고의 음악가들만 설수있다는 미8군 무대에 로큰롤 밴드 "논스톱"의 드러머로 서기도 했었다. 그녀를 트로트 가수로만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드럼을 치는 모습에 깜놀하기도 했는데 이런 뒷배경이 있었기 때문. '드럼을 치는 여성 보컬리스트'로 카펜터즈의 캐런 카펜터와 함께 이야기되기도 한다.



한편, 심수봉은 당초 서산초등학교를 다녔으나 남편과 사별 후 재혼을 한 그녀의 어머니가 파경을 맞자 어머니를 따라 2학년 때 서울 은로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후, 영등포에 있던 여중에 입학했으나 치료를 위해 또다시 2년 휴학을 했고 뒷날 인천 인화여고에 뒤늦게 입학을 하여 1973년 고교 졸업을 했다. 음악적인 재능이 매우 뛰어나서 여러 악기에 능통했으며 노래를 부를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일을 했는데 이런 심수봉의 재능을 누군가가 눈여겨 보았는지 1975년에 박정희가 청와대 연회에 심수봉을 불러서 노래를 시켰다고 한다. 그 연회에는 당대 최고의 가수 나훈아도 있었는데 심수봉은 나훈아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렀고 여기에 감탄한 나훈아가 주선하여 이듬해에 신세계 레코드로 들어가게 되어 음반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어떤 문제로 인해서 음반작업은 취소되었는데 대학교육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진 심수봉은 같은 해 뒤늦게 대입준비를 하여 숙명여자대학교 작곡과에 응시했으나 낙방의 고배를 들었으며 이런 이유로 후기였던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1978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심수봉은 MBC 대학가요제에 대학생 자격으로 참여했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가요제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의 음악적 성향이 포크 아니면 그룹사운드이던 시절에 심수봉은 자신의 주 전공인 재즈가 아닌 트로트로 도전장을 던졌으나 상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대학가요제에서 부른 노래가 히트하면서 가수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으니 바로 그 노래가 그 유명한 "그때 그 사람"이다. 여담이지만 이때 그녀와 겨뤘던 출연자들이 후덜덜한데 임백천, 노사연, 배철수 등이다. 이들은 대상은 못 탔으나 다들 이후에 가수로 데뷔했다.

어쨌든 그때 그 사람이 히트를 하면서 그녀는 인기 연예인으로 발돋움했고 박정희도 그녀를 좋아해서 궁정동 안가에서 열던 술자리에 그녀를 불렀다.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박 대통령이 심수봉이 못 생겼다며 병풍 뒤에서 노래부르게 했다는 썰. 허나 이후 본인이 90년대 초반 토크쇼에 게스트로 출연했을때 허무맹랑한 소문이라고 직접 해명하였다. 하지만 박정희와 만난 뒤부터, 심수봉은 온갖 시련에 휩싸인다.


운명의 1979년 10월 26일, 심수봉은 모델 신재순과 함께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박정희의 술자리에 불려갔다. 이날도 평소와 별다를게 없었을 술자리였을지도 몰랐으나... 김재규가 차지철과 박정희를 총살하면서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다.
10.26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심수봉(모자를 쓴 여자). 오른쪽은 함께 증인으로 출두한 신재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합동수사본부가 박정희 암살 사건을 강도 높게 조사하면서 그녀도 조사를 받았고 현장에 있던 것뿐이었던지라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시대는 그녀를 파란으로 몰고갔다. 방송활동이 금지되고 정신병원에 강제입원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던 그녀는 잠시 영화배우로 활동해 "아낌없이 바쳤는데"라는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되기도 했지만 가수로서는 활동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와중에 '한도사' 혹은 '심령도사'라고 불리는 한기석과 연인이 되어서 동거하면서 아들을 낳기도 했다. 70년대말 80년대초에 동거에 혼외자였으니 연예계 활동은 거의 못했다고 봐도 된다. 한기석과 이별한 이후에야 밤무대 활동을 재개할 정도의 칩거생활.

1984년이 되어서야 방송활동금지가 풀리면서 그녀의 또 다른 대표곡인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히트치면서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발표한 《무궁화》가 국민을 선동한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방송된지 단 하룻만에 금지곡이 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1987년에는 "사랑밖엔 난 몰라"가 히트했고 이후 꾸준히 콘서트와 음반발매를 하면서 지금까지 가수로서 활동 중이다.


90년대 주병진 쇼에 출연한 영상을 보면, 박정희는 실제로 가까이서 본 사람이었던 탓인지 비교적 좋게 묘사하며 본인이 이래저래 수모를 겪은 시절의 대통령인 전두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언급을 강하게 하는 편이다.

비음을 잘 쓰는 가수로 유명하며 피아노 연주 실력이 상당하며 방송에서도 곧잘 솜씨를 선보이곤 했다. 

트로트 가수이지만 보기 드물게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도 가지고 있는 가수로 그녀의 히트곡들은 거의 대부분 그녀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들이다. 보통 유명한 트로트 가수더라도 자기 스스로가 곡을 써서 부르기 보다는 유명 작곡가의 곡을 받아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심수봉은 상술됐다시피 이미 악기를 다루는 능력부터 먼치킨스러우니 자기 스스로가 곡을 쓸 수 있는 능력이 된다. 그러다보니 심수봉의 곡은 단순 트로트 곡이 아닌 것이다. 여타 트로트 가수를 뛰어넘는 그야말로 '아티스트'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심수봉에 비견할만한 남자 트로트 싱어송라이터로는 설운도가 있다.)

11집에 수록된 '여자라서 웃어요'는 에픽하이와 같이 작업하기도 했다. 심수봉의 노래와 랩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편. 


대표곡으로는 《그때 그 사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사랑밖엔 난 몰라》, 《미워요》, 《비나리》, 《무궁화》 등이 있다. 후배가수들도 심수봉의 곡을 많이 리메이크 하지만, 아무리 다른 가수가 리메이크 해도 심수봉의 원곡을 뛰어넘는것은 무리라는데에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또한 리메이크도 간혹 하는데, 《백만송이 장미》는 러시아 가요를 번안하여 히트를 쳤고, 조성모의 히트곡인 《후회》도 심수봉 특유의 스타일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10.26 사태 때 박정희와 술자리를 가졌던 이유로 80년대 정치적으로 탄압받으면서 그녀의 인생은 파란으로 점철되었고 그런 이유인지 그녀의 노래들은 애절하기 이를데 없는 노래들이 많다. 이런 이유인지 그녀의 애절한 노래들은 나올 때마다 히트하면서 그녀를 국민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불후의 명곡 2 첫방송때 첫번째 전설로 등장했다. 당시 이창민, 종현, 예성, 효린, 양요섭, 아이유가 리메이크에 도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