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연쇄살인마 유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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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연쇄살인마 유영철


2017. 5. 1.

유영철은 1970년 4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2명과 여동생이 있는데, 여동생은 이란성 쌍둥이라고 한다. 함께 태어난 여동생은 1년 후 출생신고됐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본부인을 버리고 세컨드를 둔 상태에서 생활고 때문에 태어난 유영철을 죽여 버릴 생각까지 했다.



유영철의 아버지는 찢어지게 가난했으며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아버지의 폭력과 외도가 심했다고 한다. 유영철은 6살때부터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계모와 형제들 슬하에서 자랐다. 유영철의 아버지와 계모는 밤만되면 유영철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다녔다. 그 뒤 거주지를 옮겨 어머니와 같이 살게 돼 입학을 다시 하게 된다. 결국 초등학교를 두번 입학한 셈이 되며, 9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서울 공덕동 일대에서 보냈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 무렵 유영철 아버지가 죽고, 유영철과 형제들은 생모와 합쳤다. 유영철의 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로 살림을 꾸렸다. 유영철은 계모 밑에 살던 시절보다 행색이 훨씬 나아 보였다.


중학교 시절에는 그 전보다 생활이 나아졌는지 보통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성장했다. 하지만 미술 실력으로 모 예고에 낙방하자 크게 좌절하였고 그 뒤로는 국제공고에 입학하였지만 학교생활을 적응하지 못해 자퇴하였다. 쌍둥이 여동생은 고등학교 시절 3년 내내 전교 10위권 안에 드는 학생이었고, 학교 졸업 후 대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 동네 주민들은 "유영철은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질 정도로 공부를 못했고, 동생은 공부를 너무 잘했다" 며 "어떻게 쌍둥이 남매가 이렇게 정반대의 인생을 사는지 모르겠다" 고 했다. 이러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유영철은 그 후부터 범죄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20명을 연쇄살인한 범죄자이다(21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20명이다). 참고로 연쇄살인 이전에는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왔다.
유영철의 엽기적인 범죄 행각으로 인해 사이코패스의 개념이 대중에게 알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이코패스 판정 테스트인 PCL-R 검사에서 40점 만점에 34점을 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검사는 대중들에게 잘못 알려진 것처럼 무슨 만능 테스트가 아니다. 그리고 유영철은 사이코패스나 그것과도 구별되는 쾌락살인자라고 보기도 힘들다. 주된 동기에 따라 분류하면 증오범죄라고 봐야 한다.

2003년 9월 11일 전주교도소를 출소한 유영철은 13일 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명예교수 부부를 살해했다. 이 사건 이후 2004년 7월까지 서울 각지에서 주로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마사지사 여성 등 총 20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살인 행각에 빠지기 이전에는 각종 절도나 금품 갈취를 했었는데 그중 한 사건은 위조한 경찰 수첩으로 경찰을 사칭해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업종(위에 말한 출장마사지라든가)의 사람들로부터 금전을 뜯기도 했다. 살인을 본격적으로 저지르기 전에 이러한 각종 절도 전과로 구속된 적이 있었는데, 본인은 한 목사와의 인연으로 십자가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종교에 귀의하려 했으나, 결국 징역 10개월 선고를 받고, 자신의 말로는 선처를 바랬는데 그게 안되자 신도 있는 놈 편이라고 생각해 반종교적으로 돌변했다. 이는 연쇄살인의 전반부인 일련의 부유층 살해사건에서 상당수의 피해자 거주지는 교회 인근에 있었던 곳이었다. 


다음은 그의 범행 일지.

- 2003년 9월 24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S여대 명예교수 이모씨(72세)와 부인 이모씨(67세)를 둔기로 살해

- 2003년 10월 9일, 종로구 구기동에서 주차관리원 고모씨(60세, 남)의 집에 침입해 고씨의 아내(58세, 여) 어머니 강모씨(82세, 여)와 고모씨의 아들(35세, 남)을 둔기로 34회를 강타해 살해.

- 2003년 10월 16일 강남구 삼성동 2층 단독주택에 침입해 최모씨(70세)의 부인 유모씨(69세, 여)를 둔기로 살해

- 2003년 11월 18일 종로구 혜화동의 2층 단독주택에 침입해 집주인 김모씨(87세, 남)와 파출부 배모씨(53세, 여)를 둔기로 살해. 증거 인멸을 위해 금고에 불을 지름. 현장에 태어난지 얼마 안 된 김씨의 증손자가 이불에 둘러 싸여 질식 전까지 갔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 2004년 3월,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마사지 도우미 김모씨(25세, 여)

- 2004년 4월 14일 서울 중구 황학동의 도깨비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던 안모씨(44세,남)를 자신의 베스타 승합차로 유인해 살해. 시신은 월미도에 유기

- 2004년 4월부터 7월까지 마포구 노고산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전화방도우미, 마사지도우미 등 여성 11명을 살해.

"이 일로 인해 부유층들이 각성했으면 좋겠고 여자들이 함부로 몸을 놀리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위와 발언 때문에 그를 존경시하고 의적 취급하기 시작한 미친 팬덤이 형성되었고 지금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살해한 희생자들은 대부분 금전에 상관없이 그저 그가 죽이기 만만한 사람들이었단 것을 모두들 생각해 봐야 한다. 유영철은 경찰 조사 중 윤락녀처럼 보이는 여성을 주로 노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무고한 사람도 있었고, 오히려 여성의 옷차림이 강간 및 살인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잘못된 통념을 불러오게 되었다. (그리고 진짜 윤락녀여도 그의 죄는 당연히 용서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희생자들한테 미안해서라도 대놓고는 못 말하던 헛소리였지만 이 사건을 기점으로 공적인 자리에서조차 자랑스럽게 이런 말을 지껄이는 공직자들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쭉 읽어보면 알 수 있듯, 그가 살해한 수십 명의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이거나 지체장애인, 힘없는 서민이거나 노인 등 약자였다. 어떤 개똥철학을 늘어놓았듯, 유영철은 쾌락살인자였고 자신이 살해하기 만만한 사람들을 골라서 죽였다. 실제로 키가 170으로 크지 않은 체격이었던 유영철은 '성인 남성'은 건드리지도 못했다. 유영철이 살해한 성인 남성은 2003년 고모씨의 아들(35세)과 2004년 노점상 안모씨(44세)둘 뿐이었는데, 사건의 전말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들은 우연히 말려들었던 것이며 유영철이 의도한 살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범죄와 달리 이 피해자들의 경우 신원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얼굴이 훼손되었는데, 젊은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컸던 것으로 분석한다. 

초기에 저지르는 범죄와 후기에 저지르는 범죄가 어느 정도 차이점을 보이는데, 초기에는 타인의 가택에 불법침입하여 둔기를 휘둘러 살해하는 방식을 사용한 반면에, 후기에는 주로 출장마사지사 여성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곳에 불러들여 살해 후 사체를 훼손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는 주택가 CCTV에 자신의 뒷모습이 완벽히 잡혀서 신고 있던 신발 종류부터 해서 머리에 쓴 모자까지 완벽히 나열된 채로 수배되자 두려움으로 인해 범행에 소극적이 된 것이고 이후 은둔생활을 하다 돈이 궁해진데다 이혼 통보를 한 아내에 대한 원한으로 성매매 여성들을 불러 금전을 빼앗은 뒤 가짜 알리바이까지 만들어 놓고는 손망치로 살해한 것이다.

유영철이 체포된 뒤 경찰에서는 프로파일링의 승리라고 자화자찬을 벌였으나 실제로 유영철을 붙잡은 건 보도방 업주들. 특정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간 여인들이 돌아오지 않자 몇몇 보도방 업주들이 회담을 했고 전화번호를 요주의로 분류하고 그 결과 유영철을 유인해 붙잡았다. 유영철은 꼬리가 밟힐걸 우려해 한번 걸었던 업소 전화번호로는 두번 여자를 부르지 않았지만 그 각기 다른 전화번호들이 최종적으론 한 업소로 수렴된다는 걸 몰랐던 거다. 그 때 경찰은 업주들의 요청에 따라 한 명을 딸려보냈는데 그 때문에 자신들이 체포했다고 광고하고 관계자들을 승진시켰다가 사실이 밝혀지자 중징계를 받았다. 그리고 보도방 업주들은 반년 후 모조리 다 구속. 처벌된다. 이것이 영화 추격자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유영철은 2004년 7월 18일 체포되었는데 현장 검증에서 26명을 살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26명을 살해했다는 주장은 추후에 유영철 본인이 이를 부인하고 정황도 맞지 않아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수사 담당자가 밝히기도 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살해한 희생자는 20명으로 확인이 되었다. 이후 8월 13일 구속 기소 되어 이문동 살인 사건을 제외한 20명에 대한 살인죄의 유죄가 인정되어 2005년 6월 9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현재도 구치소에서 복역 중이다. 

여기서 검찰의 실수를 확인할 수 있다. 유영철이야 어차피 이문동 살인사건이 유죄가 되건 말건 똑같은 사형이지만 희생자 유가족들의 처지가 문제인데, 만약 여기서 이문동 살인사건을 유죄로 판결하면 희생자 가족들은 영영 진범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은 구체적인 증거도 없으면서 상고심까지 끌고 갔고 결국 확정판결 이후인 2006년에야 연쇄살인범 정남규가 이 사건을 저지른 것을 자백하고 조사 결과 사실로 확인됨으로써 뒤늦게 진범이 밝혀졌다. 표창원의 "한국의 연쇄살인(2005)" 에서도 경찰수사방향을 따라 이문동 살인사건을 유영철에 묶어 다뤘지만 당시 여기서도 범죄의 대상과 방식에 명확한 차이가 있다고 밝히면서 의혹을 나타내며 서술해놨다. 물론 이때는 정남규가 잡히지 않았을 때.

유영철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얌전히 있지 않았는데 우선 감방에 들어와서 동료 수감자들을 훑어보더니 이 중에서 조폭 하나와 경제 사범 하나를 죽이겠다고 선포해서 교도소를 발칵 뒤집어놨고 교도소 측은 유영철에게 4, 5명의 교도관을 상시 붙여놨다.2011년에는 교도관들의 목을 조르면서 나 싸이코인거 모르냐! 라고 소리치며 난동을 부렸다가 독방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지금도 구치소에 적응을 못해 교도관들의 가발을 벗겨 망신을 주고 화단을 파괴하는 행위를 자꾸 저지른다고...

유영철에 대한 사형은 아직까지도 집행되지 않아 사형 미결수로 분류되어 있지만 2007년 1월경 법무부에서 유영철에 대한 사형을 추진하다가 노무현 정권 때였던 청와대의 강력한 반대에 막혀 무산된 바 있다.  이 때문에 사형제에 관한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유영철을 이송하던 경찰이 유영철에게 달려들던 피해자 유가족을 발로 걷어차서 논란이 되었다. 논란이 된 형사는 '유족인줄 몰랐으며 달려든 유족이 들고 있던 우산을 순간적으로 흉기로 보았다' 해명했다. 후일 강대원 경정의 말에 따르면 일본 후지TV와 계약한 한국 측 뉴스 공급업체인 모 프로덕션이 피해자 유족을 찾아가 “기자회견장에서 유영철의 모자를 벗기면 사례하겠다”고 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