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살의 나이로 옥사한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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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의 나이로 옥사한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


2017. 3. 24.

1902년 12월 16일 ~ 1920년 9월 28일(향년 17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될 때 찍은 사진. 저 사진은 절대로 유관순 열사의 평소 모습이 아니다. 일본군이 열사가 만세를 부를 때 저지하면서 가혹한 폭행을 했기 때문에 얼굴 전체가 부어 올랐다. 옆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눈과 볼 부분이 심하게 부어 오른걸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어느 곳(현재의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태생. 사실 '柳'이기 때문에 '류관순'이 정확하지만 두음법칙에 의해 대중에게는 유관순으로 알려져 있다.

190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류중권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미국인 여성 선교사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現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입학,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이화학당 고등과에 재학 중이던 1919년에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장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참가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같은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인 류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을 주도한다. 그것이 3.1 운동과 흔히 혼동되는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1919년 4월 1일, 음력 3월 1일).


만세운동 참가의 여파로 유관순의 부모가 살해당하고, 그 자신도 체포되어 공주 지방법원에서 5년을 구형받는다. 재판을 받았던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하는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천벌을 받게 되어서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져서 위협을 했다는 이유로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징역 7년형으로 증형되어 수감되었는데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듬해 4월, 동경 이왕세자(영친왕)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이방자 여사)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월로 감형되었다.


이후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체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교장 룰루 프라이는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러주었다.

최근 밝혀진 바로는 유관순은 일본 헌병들에게 장살(타살) 당했다고 한다. 고문 당한 걸 말하는지 따로 사형을 했다는 건지는 불명.

사망이후 일본이 시신을 반환하기 이전에 일곱 토막을 냈었다는 말도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당대 수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윤봉춘이 해방 직후에 만든 유관순 관련 영화에서 처음 비롯된 말이다. 다만 오늘날과 같이 시체를 냉동했다가 넘겨주거나 방부처리를 하는 시대가 아니라서 일시 가매장 후 넘겼다는 게 정설이다.


결국 1920년 10월에 시신을 반환받아 10월 14일에 장례를 치루게 되는데 유해는 이태원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일본이 그 후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사용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장하기 전에 아무 통보도 없이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바람에 유골이 분실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서 1989년 10월에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를 만들었다. 즉 현재 유관순의 묘는 그냥 텅 빈 봉분뿐이다… 뭐 처음부터 시신 처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서 해방 당시 후일을 기약하며 이름도 없이 허묘만 만들었는데 아직까지도 유해 발견이 되지 않은 경우도 있는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양반이지만.

유관순이 아우내(現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의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을 계획, 지휘하긴 했지만 현재의 유명세는 후세 사람들이 3.1 운동의 아이콘적인 존재로 유관순을 지목, 그 가치를 끌어올린 덕분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당대의 공판 기록을 보면 다른 사람이 실질적인 주동자로 나오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남한의 고위직을 역임하고 야당의 총수가 된 조병옥 선생의 부친이다. 이분의 이름은 조인원.

3.1 운동 당시나 그 이후로도 수십년간 무명이었던 유관순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건 해방 이후의 다음과 같은 과정에 의해서이다.

1946년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과 신봉조는 이화학당을 알릴 인물을 찾는다. 당시 이화학당의 후신인 이화여자중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신봉조가 동문 박인덕에게 "이화학당 출신 중에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박인덕이 3.1 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을 제안하면서 비로소 유관순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유관순을 널리 알리기로 하고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구성한다. 

그런데 많은 항일 학생운동가들 중에서 유독 유관순이 선택된 배경에는 이들이 자신의 친일행위를 덮으려는 목적이었다는 의혹이 있다. 신봉조는 이화학당 출신으로 일제 말기에 전형적인 친일파 노릇을 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간부로 참여하여 한국인을 일제가 벌이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데 앞장섰다. 박인덕도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엘리트였지만 마찬가지였다. 


해방이 된 뒤 그들은 자신들의 수치스런 친일 경력을 가릴 방패막이가 필요하였다.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해 크게 부각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죄과를 덮으려 했고, 그에 딱 알맞은 인물로 유관순이 선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유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 몰두한다. 박인덕도,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도 유관순을 잔 다르크에 비유하였다. 유관순을 조선을 구한 잔 다르크로 표현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인 존재로 승격시켰다. 

더군다나 해방 이후 미국화된 대한민국의 경우는 미국 쪽 개신교 인사로 분류된 유관순에 대해서 구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비해서도 더욱더 숭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윤봉춘의 영화에서 괜히 "일본이 시체를 넘겨주지 않으면 미 의회에 호소해서 세계적인 스캔들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는 외국인 선교사가 나오는게 아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과대포장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 운동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대략 7천 5백 명이다. 유관순 열사 역시 운동을 이끌다가 옥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유관순 열사의 상징성을 강조하느라 다른 열사들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는 것. 나머지 7,500여명의 열사분들이 희생당했다는 것도 후세에 기억되어야 할 것 이다.

유관순이 1심에서 받은 형량은 3년으로, 민족대표 33인이 받았던 형량과 동일하다는 점도 지적되나, 3.1 운동은 오히려 민족대표 33인보다 당시 현장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 훨씬 높은 형량을 받았었다.

그러나 향토 사학자 임명순 씨는 2014년에 이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임 씨의 주장에 따르면 이화학당 측에서는 오히려 유관순에 대한 관심이 없었는데, 유관순의 조카가 대한민국 최초 국어 교과서를 만든 박창해 씨에게 제보를 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 임 씨의 주장에 따르면 박인덕을 비롯한 이화학당 출신 친일파가 의도적으로 띄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며, 오히려 이들은 유관순을 외면했다가 뒤늦게 숟가락을 얹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보통 어린아이들이 부를때는 동요의 영향으로 뒤에 '언니'나 '누나'가 붙는다. 유관순 언니, 유관순 누나 등등. 그래서 영원한 누나(언니)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무래도 18세의 어린 나이에 순국했다는 것이 큰 영향을 미친 듯. 물론 다른 애국지사들과 마찬가지로 '열사'라고 부르는 것이 바른 호칭이다.
위의 초상화에도 사연이 있는데 원래 정부에서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것은 장우성 화백이 그린 가장 왼쪽의 초상화였다. 유관순이 투옥되었을 때 찍은 사진을 이용해서 그린 초상화인데 문제는 실제인물과 너무 차이 난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투옥 때 촬영된 사진은 감옥 가기 전부터 고문받아서 얼굴이 부었으며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었다.

생존했던 유관순의 이화학당 동창들이 얼굴이 너무 다르다며 지적하자 가운데와 오른쪽의 초상화가 그려진 것이다. 실제 인물은 청초하고 갸름한 얼굴이었다고 하니, 감옥에서 받은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듯 하다.

유관순이 징역 3년이라는 형량을 받으면서 정말 고문을 받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일제의 법령에 따르면 여성은 최고 징역이 7년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유관순은 징역 7년을 받고 들어간 것이었고, 이것은 현대로 따지면 무기징역과 똑같은 의미라고 봐야 한다.

더군다나 당대 일본 제국은 근본적으로 인권을 보장하는 나라가 아니었고, 여성의 경우는 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또한 당대 공판 기록등을 볼때도 사상범 부부가 같이 기소되는 경우 여자는 형 집행 정지로 나오는 경우도 무척 많다. 그렇다고 여성에 대한 처우가 괜찮았다는 건 결코 아니다.

사실 1920년대나 30년대 초반에 신문을 보면 단순한 절도 내지는 참고인 조사과정에서도 나체 고문 내지는 고문치사, 성적인 학대로 인한 자살사례가 보도 될 정도였다. 더군다나 신문에 잘 안나거나 갑자기 사망식으로 은폐된 경우도 많다는 것을 보면, 유관순에 대한 무서운 일은 일반적으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5만원권에 들어갈 여성인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신사임당에게 밀렸다. 유관순 외에도 김구 선생이 들어갈 10만원권은 아예 발행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참고로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도 만세를 불렀다는 건 비중을 별로 두지도 않을 뿐더러,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없다. 안습. 부모가 모두 진압군경의 총칼에 사망했음에도, 잘 다뤄지지 않는다. 아마도 어린 소녀가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상징성 때문이리라 추측된다.[22]

사실 유관순의 부친인 유중권은 사재를 털어 고향에 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가였다. 일찍 감리교에 입교한 개신교인이기도 해서 마을 유지들과 협력해서 교회도 세워 교육, 계몽 활동에 힘을 기울인 인물이다. 유관순 역시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류중권의 장남이자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1886~1968, 아명인 유관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독립운동가로 동시기 공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역시 투옥되었다가, 공주지방법원 재판에서 유관순과 잠시 해후하기도 하였다. 유관순의 사망 이후에도 유우석은 활발히 항일투쟁을 벌였다. 독립을 본 후인 1968년 5월 28일 향년 82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김완섭은 유관순이 폭력 시위를 계획, 준비하고 주도했다며 여자 깡패라는 비난을 했다. 이에 2003년 재판부는 그가 유관순이 주도한 시위는 폭력적이었다고 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유관순에 대한 판결문 및 번역본 판결문에 의해 당시 시위는 평화 시위였음이 확인되는 바 김완섭의 기술은 허위 사실 적시에 해당되어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700만원 벌금형에 처한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유관순이 여자 깡패라는 김완섭의 표현은 모욕적인 표현에 해당하지만 국내 형법 상 사자 명예훼손죄는 있어도 사자 모욕죄는 없기 때문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김완섭은 이것을 가지고 법원이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했다고 떠들어댔지만, 사자 모욕죄라는 항목이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만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일 뿐이지 그가 유관순에 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해 유관순의 명예를 훼손하고 모욕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유관순 동상건립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실제 스승은 박인덕이다. 이 작자도 3.1 운동 후 여러 가지 활약을 했지만,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당연히 친일의 길에 접어들었고 그것을 별도로 하더라도 고위층과의 연애 플래그나 세계일주 등으로 화제를 일으킨 여성이었다. 유관순이 각광받으면서 유관순의 스승으로 같이 인식된 건, 친일파이던 박인덕이나 여러 작자들이 자신들의 더러운 걸 숨기고 유관순 찬양과 같이 지들을 미화하기 위한 게 컸다. 실제 1990년대 어린이 위인전기에는 아예 박인덕을 주인공으로 한 스토리도 나왔다. 그리고 소설 화수분으로 유명한 소설가 전영택도 친일 행위를 하던 걸 숨기고자 유관순과 알던 사이라는 걸 늘 강조하며 자랑하기도 했다.

한국의 개신교계에선 그녀를 개신교계 영웅으로 생각하나 그에 대한 반론도 있다. 그녀와 룸메이트 친구였지만 뒤에는 불교로 귀의하고 비구니가 된 보각 스님이 회고하길, 알려진 거와 달리 꽤 짓궂은 면이 있었다고 한다. 유관순이 기도할 때 하나님 대신 명태님, 굴비님이라고 붙여 기도하며 킥킥거린다든지 친구들과 모여서 "예수님은 춥겠어. 벌거벗은 채로 늘 매달려 있잖아?" 라는 말에 "뭐 그래야지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 관심을 기울일테니, 춥다고 불쌍히 여길 것은 없어"라는 뭔가 날이 선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각스님의 주장 하나로 그녀가 신앙적이었다 아니다 판단하는 것은 매우 무리이며, 보각스님의 회고는 전혀 교차검증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만 보면, 유관순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그녀의 가족은 모두 개신교인이였고, 천안 병천면 지역의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아버지 유중권은 사재를 털어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또한 그녀는 개신교 학교인 이화학당에 다녔고 서울에선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했으며,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나 잔 다르크를 뽑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정기적인 신앙생활을 한 개신교인이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보각스님의 주장 하나로 그녀가 신앙적이지 않았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 교복이 그녀의 상징으로 굳어져 흔히 유관순 교복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이 한복을 흔히 입는다고. 그러나 북한에서는 유관순 자체를 모른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애초에 해방 이후 유관순이 재조명된 것은 남한에서만 한정된 상황이었기 때문. 참고로 북에서는 3.1 운동이 평양에서 먼저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것으로 설명하며 운동의 불씨를 당긴 장본인을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으로 가르친다. 김형직이 독립운동에 몸을 담은 것 자체는 사실이나 3.1 운동을 주도하였느니 하는 것들은 당연히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다.

국무총리 후보였다가 친일 옹호 발언으로 말썽을 빚어 결국 물러난 문창극을 지지하던 여성들이 모인 유관순 어머니회라는 듣보잡 단체도 있다. 물론 엄청 욕만 처먹었다.

2014년 8월 한국사 교과서에서 유관순이 누락된 것이 발견되었다. 이를 두고, 언론일각에서 국정교과서에 힘을 싣는 여론이 조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역대 고교 국정교과서 모두를 확인해도 그 어느 책에도 유관순이 없었다. 

확인해 본 바에는 6차교육과정에 '각주1 부분에 유관순 열사의 순국' 부분 간략히 기술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두산동아, 금성출판사, 천재교육, 미래앤 4종의 교과서이다.

대한민국 해군은 2015년 3월 1일 손원일급 잠수함 6번함의 함명을 유관순함이라 명명하였다. 여성으로는 최초로 한국 해군함의 함명으로 결정된 것이다.

유관순의 친구로 2010년 4월 3일 106세의 나이로 사망한 故 남동순 할머니가 있는데, 유관순 열사가 사망한 이후 독립단체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1945년 8월 14일에도 작전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고아원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