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 최택의 모티브가된 바둑의 신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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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 최택의 모티브가된 바둑의 신 이창호


2017. 1. 3.

"신산(神算)"

대한민국의 프로 바둑기사. 프로 九단이다. 별명은 강태공, 신산, 돌부처. 중국의 언론에서는 '大李(큰 '이' 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작은 '이' 씨, 小李는 이세돌 九단이다.)


90년대 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약 16년간 세계 랭킹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이런 가공할 지배력은 바둑 역사를 통틀어도 유례가 없다. 전세계의 모든 바둑기사들이 그의 기보를 붙잡고 파훼법을 찾아 헤맸지만 그렇게 그는 16년간 세계 정상을 지킨 것이다. 

현시점 이창호는 세계최강의 기사가 아니지만 바둑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끝내기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며 현대바둑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꾼 업적으로는 오청원에 비견되는 선지자였으며, 뛰어난 천재가 쏟아져 나오면서 무수한 연구와 새로운 정석이 난무하던 현대 바둑의 백가쟁명속에서 오로지 그 홀로 최정상에 우뚝 서 있던 십수년간의 전적으로는 사상 최강의 기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평가는 그의 전성기만 국한해서 내린 것은 아니다. 이창호를 정당하게 평가하려면 당대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바둑 역사의 전체를 통시적으로 바라보고 그의 실력과 업적을 견주어봐야만 한다.





"이창호가 역대 최고의 기사라는 주장"

이렇게 바둑 역사의 통시적 업적과 당대의 경기력 양면에서 세계 정상에 오른 기사는 이창호가 유일하다. 이창호의 위명에 견줄만한 기사들은 몇몇 꼽을 수 있겠지만, 그들의 업적은 바둑역사의 분기점 마다 출현하여 바둑문화를 진일보시킨 "역사적 기념비"에 더 가까운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둑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사를 꼽는다면 가장 압도적 지분을 차지할 기사는 이창호 하나 뿐이라는 사실에는 한중일 모두 이의가 없는 상황이다.

만약 20세기 초중반 동아시아 전체의 바둑문화가 지금처럼 균형있게 보급되고 발전되었어도 오청원이 일본 뿐 아니라 한중일을 넘나들며 최강의 전적을 올렸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당시 일본 수준의 바둑문화가 한국과 중국에도 꽃피었다면 한국 중국 역시 오청원과 같은 기재가 나타나 팽팽한 세력 균형을 이룰수도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는 일이기에, 이는 사실 의미없는 보론에 불과하다.


"오청원이 오히려 더 위거나, 적어도 대등하다는 주장"

위의 주장은 한국인의 주관이 다분히 섞여 있는 의견이다. 세계 바둑계에서 오청원의 위명은 이창호보다 높았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 않다. 아무리 이창호의 끝내기가 대단하다 해도 신포석으로 인해 시작된 반상의 혁신과 현대바둑의 출발이란 위업을 넘기는 힘들다. 기력면에서도 오청원이 활동할 당시의 바둑은 수준으로보나 저변으로 보나 일본이 독보적인 최강국이었고, 그 일본의 내노라하는 고수들을 10번기에서 죄다 떡실신 시키며 치수를 고쳐버린 전적은 현대바둑에서 다시 나올 수나 있을까 싶은 엄청난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10번기는 단순히 상금다툼이 아니라, 4승차 이상 패배시 치수가 하향조정되어 "나는 당신보다 하수입니다."를 공식인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프로기사의 명예가 걸린 진검승부였고 승부의 압박감이 여타 다른 대회와 차원이 달랐다.리얼 캐삭빵 오청원은 그런 승부를 무려 15년동안 11차례나 치르며 모두 승리했고, 1939년부터 불의 교통사고를 당한 1956년까지 이창호 못지 않게 오랜 전성기를 보냈다.


"총평"

이창호는 국내를 평정하고 국제대회까지 평정한 현대바둑의 최강자로 보아야 하며, 오청원은 현대바둑기전 시스템이 자리잡기 전 바둑계에 신패러다임을 제시하고 그 패러다임이 실제로 막강함을 실전에서 입증한 선지자로 보면 된다. 물론 십수년을 이론의 여지가 없는 최강자로 군림했다는 것 역시도 동일하다. 둘 중에 누가 더 위대한 기사인가에 대한 논쟁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바둑계에 미친 영향력과 업적에서는 오청원이 조금 더 위라고 볼 수 있지만, 커리어에서는 이창호가 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창호의 생애"

1975년 7월 29일, 아버지 이재룡, 어머니 채수희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현재의 조용하기만 한 이미지와 달리 어릴적의 이창호는 곱게 자란 부자집 도련님에 꽤 고집이 세고 식탐도 있던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의 동생의 인터뷰에 따르면 어릴적 이창호가 문구점에서 장난감을 사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안 사주자 아무말 없이 씩씩거리다가 그대로 문구점 유리에 머리를 박고 기절한 적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물론 그런 고집이 후에 뚝심이 되어 천재라는 속성과 합쳐져 돌부처 바둑신 이창호의 근원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4살때가 되던 해에 할아버지였던 故 이화춘(86년 작고)에게서 바둑을 처음 배운 이창호는 84년 두차례의 시험기를 거치며 이정옥 六단, 전영선 七단을 사사하며 성장해 나간 그는 10살이 되던 해, 그 유명한 조훈현의 내제자로 들어가, 11세에 최연소 기록 2위로 프로에 입단했다. 바둑을 배운 지 4년만에 입단할 정도이니 대단한 기재를 소유한 셈. 그리고 입단 시험도 10살 때 한 번 보고 떨어진 후 다음 해인 11살 때 통과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배운 지 3년만에 연구생 1조까지 올랐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만 조훈현은 이창호의 이런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늦게 입단해서 정말 천재가 맞는가하고 의구심을 가졌다고 술회했다.


“바둑은 일단 천재가 나와야 한다. 그 다음, 그 천재가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재목이 보이지 않는다. 이세돌은 천재가 아니라 독특한 기풍을 가진 ‘천재형’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사형 우칭위안(吳淸源·1914∼2014)은 천재이면서도 엄청난 노력가였다. 어린시절 얼마나 바둑책을 한손에 들고 많이 보았으면, 왼손 손가락이 기형으로 굽었겠는가. 한번은 세고에 선생님이 우칭위안을 머리 좀 식히라며 야구장에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우칭위안은 야구장에서 야구는 보지 않고, 고개를 젖혀 하늘만 보더라고 했다. 하늘을 바둑판 삼아 바둑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분은 올해 우리 나이로 백한 살이지만, 지금도 검토실에서 ‘이렇게 둬야지’하며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고 한다. 바둑은 천재가 아니면 아무리 키워봤자 소용없다. 죽어라 공부해도 안되는 게 바둑이다.”


여튼 이창호는 프로기사가 된 후에도 남들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성적을 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13살의 나이에 바둑왕전 타이틀을 따냈다. 아무리 당시 한국기원의 선수층이 얇았다지만 조훈현, 서봉수 다음의 '도전 5강'(서능욱, 강훈, 김수장, 장수영, 백성호)이 10년의 도전 속에서도 단 하나의 타이틀만을 딴 것을 감안한다면 이창호의 13세 우승은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1989년 제18기 KBS 바둑왕전 결승국 실황. 빨간 옷이 이창호, 왼편은 김수장 七단. 


이것은 단순한 이변이 아니었다. 14세 때 타이틀 수를 늘리더니 15세 땐 조훈현과의 번기 대결에서 연이어 승리하여 한국 최고의 다관왕이 된다. 프로기사로 입단해도 빠르다는 소릴 듣는 나이에 이미 한국 프로 기사의 정점에 섰으니 만화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현존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1991년 제22기 명인전의 제3국. 왼쪽이 스승 조훈현이고 오른쪽이 이창호. 이창호는 내리 3판을 이겨 스승을 꺾어버렸다. 조 국수가 심란한지 기이한 자세로 앉아서 긁적인다. 조 국수 뒤의 앙상한 할아버지가 대한민국 유일의 대국수인 조남철. 

이창호가 스승의 타이틀을 계속 빼앗아 오면서 집에 오면서 어색한 시간이 늘어 갔다. 결국 조훈현이 평창동으로 이사를 할 때 분가하게 된다.

“푸하하, 맞아서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제자한테 빼앗기는 게 낫다. 내 시대가 백년 천년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온 것뿐이다. 아내가 가운데서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창호는 원래 말이 없는데다가, 그런 날은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으니…. 보통 천재는 반짝반짝 금방 눈에 띈다. 그런데 창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재’다. 창호는 자기 바둑수순도 잊어 먹는다. 세상에 그런 천재가 어디 있나. 게다가 창호는 당연히 치고나가야 하는 수순인데 갑자기 하수처럼 물러난다. 난 어이가 없어 야단을 친다. 그러면 떠듬떠듬 말한다. ‘그렇게 하면 싸움이 붙고, 그러다가 아차하면 역전 당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물러서면 2, 3집밖에 못 이기겠지만, 결코 지는 일은 없다’고. 맞다. 끝내기는 정상급기사라면 누구나 잘한다. 하지만 창호는 반집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0.7집을 알고 그 수순을 밟아간다. 그래서 결국 한집을 만들어낸다. 평범한 바둑 같은데 볼 건 다 본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한국 바둑의 정점에 서자 일본에서는 '일본기원과 바꾸더라도 이창호를 사고 싶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두각을 나타낸 소년 이창호에 대해 일본 기사들은 강한 호기심을 가졌고, 공교롭게도 린하이펑이라는 거물급 기사와 세계대회(제3회동양증권배) 결승에서 격돌하는데, 이 커다란 승부에서 이창호가 승리하였다(3:2). 그리고 당시 일본의 최강 기사였던 조치훈 九단은 이창호와의 5번기 결승을 앞두고 조훈현에게 "제자한테 너무 무기력하게 지는 것 아닌가? 그래 가지고서 뭘 배웠겠는가"라고 말하고 "그럼 한번 둬 봐"라는 대답을 듣는다. 그 뒤 벌어진 번기에서 초반은 조치훈이 좋았으나 중후반 이창호의 추격에 2, 3국을 반집으로 내주면서 조치훈은 이창호에게 0-3으로 무릎을 꿇게 된다. 이창호는 누구보다도 어린 나이에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