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김재규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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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김재규 재평가


2017. 1. 1.

김재규(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


<10.26 사건 이후 현장검증을 하는 모습>


1943년 안동공립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그 해, 대구농업전문학교 중등교원양성소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하였다. 1945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조선인이 징집 대상이 되었을 때 일본제국 해군의 카미카제 양성을 위한 예과 후보생으로 차출되었으며 카미카제의 생존률이 0%라는것을 감안해보았을때 만약 일본이 빨리 몰락하지 않았다면 김재규는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다. 그러나 복무 중에 군경체육대회 때 미 육군과 충돌을 일으킨 죄로 면관당한 후 잠시 낙향하여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 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복직되어 1952년에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1970년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7년에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낸 후 방첩부대장, 육군보안사령관, 제3군단장을 역임한 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다.

윤필용 전 수도경비사령관과는 악연이 좀 있었다. 윤필용이 1.21사태 때 김신조의 모가지 발언을 여과없이 보내는 바람에 윤필용이 방첩부대(현 국군기무사령부)장에서 경질되고 김재규가 후임 방첩부대장이 되었다. 이후 김재규는 방첩부대를 육군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자신은 육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육군보안사령관이던 1971년 8월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의 전화를 도청하다가 발각되어 제3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

군단장 시절 한계령 도로 건설을 지휘했으며, 이 때문에 한계령에 건설 중 사망한 장병 위령비에 이름이 들어가 있었으나 현재 위령비에는 그 부분이 삭제당했다 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안동댐 건축 기념탑에도 원래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지만 10.26 사건 직후 그 이름 부분이 뜯겨나가 있다. 여담이지만 인트라넷 3군단 역대 군단장과 그가 복무했던 모든 부대에도 김재규 장군은 삭제되어 있다. 한편 이 때 그의 전속부관이었던 박흥주 포병대령은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재규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 되고, 10.26 사건 당시에도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자리에 있었고, 결국 박정희 암살에도 가담한다. 정말로 장래가 촉망받는 엘리트 장교였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우려해서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에는 그저 그런 무난한 인물만 앉혔고, 정말 유능하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육군 장군은 사단장, 군단장 수준에서 전역시켰다고 한다. 김재규도 이런 케이스로, 월남전의 영웅인 채명신 장군 또한 대장을 못 달고 중장에서 전역해야 했다. 이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1976년 12월에 제8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참고로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다가 5.16 쿠데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감금 당했다가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났다. 김재규는 군인은 정치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종찬 장군 계열이었다.

<육군중장 김재규>


1973년 초 3군단장으로 전역 후 박정희의 강권에 의해 제9대 국회에서 유신정우회 1기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12월 이후락의 뒤를 이어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이 될 때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다. 이 때 김재규는 신직수를 매우 껄끄러워했는데 자신이 제5보병사단 참모장일 때 육군 법무소령 신직수가 그 밑에서 법무참모를 지냈기 때문이다.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1977년 박정희에게 직선제를 건의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건의했다가 거절당한 뒤 우회적으로 긴급조치 9호를 완화시킬 목적으로 긴급조치 10호를 건의했다가 반려당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도 과격하기는 마찬가지였던지라 현재까지도 그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다만 김재규는 훗날 법정에서 그 건에 대해 말하길 박정희의 눈을 속이고 긴급조치 9호의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고 해명했다. 김재규는 또한 당시 연금중이던 김대중의 외출을 눈감아주어서 김대중이 김영삼측 단합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해서 김영삼의 전당대회 당선을 도와주기도 했다. 당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던 정국을 순리대로 풀기 위해서 나름대로 방법을 모색한 것. (물론 결과적으로는 남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박정희에게는 소귀의 경읽기였다)

결국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를 살해하였고, 재판에서 내란목적 살인,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80년 5월 24일 교수형을 당해 만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의 삼성공원묘지에 있다.



10.26 사건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5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2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3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4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5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5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김재규 최후의 진술 中>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인맥의 영향력이 더 컸다. 박정희와 고향 후배이며 육사 동기라는 2중의 인맥인 김재규는 그야말로 심복이었다. 하지만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을 발터 PPK 권총으로 저격하여 암살했다. 이것이 이른바 10.26 사건이다.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이 경호원들과 함께 현장에 동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저격할 줄 생각 못한 경호팀은 무력했고 그들 모두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제압당한다. 경호실 요원 중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 당시 경호계장이던 박상범이고, 그는 나중에 김영삼 정부에서, 민간인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게 된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경호원들을 다 죽이고 확인사살까지 했으나 박상범은 기적적으로 총알이 치명적 부위를 피해간 데다 부상입고 쓰러지면서 머리를 찧어 기절해 죽은 것처럼 보였고, 식사하던 경호원들을 중정 요원들이 습격하는 과정에서 경호원들과 같이 식사하던 중정 직원들인 운전수와 요리사가 자신들의 총에 다치는 바람에 확인사살에 소극적이어서 죽음을 면했다.


어쨌든 거사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김재규가 이동한 곳은, 엉뚱하게도 중정이 아닌 육군본부였다. 만약 김재규가 거사 후 중앙정보부로 향했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지금까지도 중론이다. 암살장소인 안가는 중앙정보부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었으므로, 부장인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이 박정희를 죽인 사실을 은폐하고 불순세력의 소행으로 몰아가 국무위원과 장성들을 깨끗하게 속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사태 수습을 빌미로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는 시나리오를 써갈 수도 있었다.

특히 박정희를 암살한 장본인이 차지철이었다고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평소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라는 미명으로 온갖 월권행위와 경거망동을 서슴치 않았고, 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주동자 1순위는 단연 차지철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실제로 사건이 터진 후 청와대로 들어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대통령 유고 소식을 들은 김치열 당시 법무장관은 "그 새끼가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군!!" 하고 호통을 쳤는데, 그 새끼는 물론 차지철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재규는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육군본부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체포되면서 사태를 장악하지 못했다. 김재규가 육군본부로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다. 

① 대통령의 그늘 밑에서만 권력을 휘두를 뿐 대통령 사망 후에는 특별한 권한이 없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는 비상계엄 상황에서 특권을 휘두르는 군부의 협조가 절실하므로 이를 얻기 위해 육군본부로 갔을 거라는 설. 특히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는 김재규와 원만한 관계였으므로, 그에게 자신의 박정희 저격을 알리고도 그의 협조를 받아낼 수 있으리라 오판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부는 기본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강력히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박정희 암살자에게 협조하여 그의 정권 획득을 도울 장성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당시 군에 자기 인맥이라고 볼 수 있는 장군을 거의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② 김재규가 박정희를 순전히 우발적으로 저격했으므로 거사 후 사태장악에 대한 아무 계획이 없었다는 설. 사건 수사결과에 의하면 거사 후 김재규는 정승화와 승용차에 동행하여 사건현장을 떠나 이동하던 중,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에게 정보부와 육본 중 어디로 가는게 좋겠느냐고 묻자 정승화가 말을 가로채어 육군본부로 가는게 좋겠다고 제의하였고, 김재규는 아무 생각 없이 운전기사에게 육군본부 행을 지시했다. 이 때 정승화는 안가 본관(연회장은 나동)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사건을 저지른 김재규와 차에 동승한 것이었는데 그땐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였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가 육본으로 갈 때 신발도 신지 못하고 박흥주 대령의 구두를 빌려 신을 정도로 우왕좌왕했던 행동을 볼 때 이 견해도 설득력은 있다.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은 알려진 바와 같이 12.12 군사반란 때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긴급체포하여 군을 장악하게 되었고, 김재규는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었으며 기각 4일 만인 5월 24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대법관들 사이에서는 소수의견으로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내란목적이 아니라 자연인 박정희를 살해한 단순살인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내란 목적이라기에는 암살후 김재규의 움직임이 너무나 어설펐기 때문에 내란을 목적하고 박정희를 죽인게 아니고 그저 우발적으로 죽였다고 본 것. 이러한 해석을 막기 위해 신군부 측에서 대법원을 강하게 압박했는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1980년 5월 17일 쿠데타 당시 전차가 대법원 주차장에까지 밀고 들어갔으며 대법관 1명을 하룻밤 동안 모셔(?)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소수 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탄압을 받았다는 견해가 있다. 결과적으로 판결문이 비공개 처리되어 묻혀버렸다. 이러한 주장은 훗날 판결문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민주화 운동층
민주화 운동 층에서는 평이 서로 상반되게 갈라지는 편이다. 옹호하는 쪽에서는 '유신독재라는 암흑기 속에서 독재자를 몰아낸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대변하는 용어로 요즘 인터넷에 빈번히 보이는 단어가 김재규 열사. 이렇게 영웅으로 치켜 세우진 않더라도 10.26 사건이 독재를 몰아내는데 일정부분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경우도 많다. 유야무야 하면서 유신이 장기화 되었다면 최악의 경우 북한처럼 반대세력이 모두 숙청되거나 정도는 덜해도 독재가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김재규를 긍정하는 사람들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강신옥, 장호권, 이해학 등이 있다. 보면 알겠지만 주로 교계 사람들로, 민주혁신계 중에서도 약간 보수적인 사람들 쪽이다. 함세웅 신부는 김재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효림 스님은 "여러가지 정황 근거로 봤을때 재평가할 가치는 충분하며, 사회 분위기 때문에 좀더 시일을 요구할 뿐 명예 회복은 희망적"이라고 보고 김재규의 행적과 뜻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작업에 매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반면 상대적으로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 또한 과거 유신정권하에서 한자리를 해먹던 중앙정보부장이었으며, 박정희를 암살해 결과적으로는 박정희를 국민의 손으로 정당하게 심판할 기회를 빼앗았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그동안 갖은 압제와 고문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쟁취하려 노력해오던 자신들보다, 단순히 박정희 한 명 암살했다고 김재규가 포커스를 더 받는건 몇십 년을 민주화 투쟁한 사람들 입장에선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재규를 비판하는 재야/민주운동가들은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동기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의한 기여도 및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다. 대표적인 좌파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역시도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진보적 사회운동가 백기완도 “당시는 박정희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한 민중항쟁이 거셌고, 박정희 내부 권력의 모순이 더 격화되어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조그마한 사건일 뿐이며 민주화운동의 본체, 기본적인 흐름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라고 주장하였다.


부정론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킨 것은 결국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권력투쟁' 속에서 벌인것 이라는 해석이 있다. 2004년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도 김재규의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김재규는 자기보다 새파랗게 젊고 군대 계급도 낮은 차지철에게 면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수모를 당했고 이에 대해서 격분했다는 증언이 주변 인물들로부터 흘러나온 바 있다. 이런 점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김재규가 민주화 운운하는 것도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건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그가 차지철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비해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온건성향으로 비쳐질 따름일뿐, 그 역시도 결국 독재정권에 부역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유신정권의 크게 3개의 권력 축인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 국군보안사령부를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차지철, 김재규, 전두환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서로 간에 치열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구도 속에서 파장이 일어난 것이 10.26이라는 것.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 등 공화국시리즈 등에서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특히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대립과 반목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시절에도 이들은 사이가 몹시 좋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무렵에 차지철계로 분류되고 있던 김치열 법무부장관이 차기 중앙정보부장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정희가 야당문제와 부마항쟁 등에 대한 미흡한 대처에 대해서 김재규를 책망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재규 본인도 파워게임에서 밀릴 것이라는 직감을 하게 될 공산이 컸다는 주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쿠데타 당시 보여주었던 일련의 치밀하지 못했던 행동 역시도 결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당시 김재규는 차지철과 박정희를 암살한 후, 자신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이동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수 시간만에 체포되었다. 이는 김재규가 단순히 차지철, 혹은 박정희를 암살한다는 계획만 세웠을 뿐, 그 후 신정부 수립이나 정국 주도에 대해서는 사실상 무계획이나 마찬가지였음을 보여준다.


국가원수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통해서 급진적 권력 교체를 시도한다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치밀한 계획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10.26이 역사에 긍정적 영향을 주려고 한 계획이었다면, 단순히 박정희를 암살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박정희를 암살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이와 관계된 사람들과 철저하게 입을 맞추었어야 했다. 그리고 난 이후 정권교체 및 민주화까지 질서있고 안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진정으로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중대한 일을 저지르는 입장에서 그는 너무나도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다 보니 10.26으로 박정희의 장기 철권 통치는 끝났을지 몰라도, 이를 대체할 새로운 권력질서가 안정적, 민주적으로 등장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모두가 다 아는 전두환의 신군부 등장과 12.12, 5.18, 그리고 8년 동안의 또 다른 군부 독재였다. 만약 김재규가 좀 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동조자를 늘리는 동시에 신정부 수립에서 정권 이양까지의 과정을 안정적으로, 질서 있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면, 신군부의 폭주를 막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단하게 거사 직후 육군본부로 가지 않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신군부의 폭주를 간단히 막을 수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김재규는 10.26사태 직후 유신의 잔재를 5개월내로 설거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전국으로 비상계엄령확대를 구상했는데, 민주공화당은 이러한 구상안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낮다. 10.26 직후 김종필이 민주공화당의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되었는데, JP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시절 청구동 가택수색과 협박까지 당한터라 김재규에게 호의적이기도 어려웠다. 거기다 10.26 이후 JP는 YS, DJ과 함께 개헌과 민주회복 이행에 공감하고 협조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 역시도 김재규의 구상에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체포되기 전까지 김재규는 박정희 암살 사실을 숨기려고 했고, 박정희 사망 이후 국민들의 박정희에 대한 동정과 추모 분위기 등을 감안해본다면 김재규가 암살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지 않는 한 저항에 직면했을 공산이 크다. 

김재규는 10.26이후 전국비상계엄령 확대 조치를 취하고, 군 지휘관들을 중심으로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육군참모총장이 부위원장을 맡은 뒤 유신의 잔재를 제거하겠다는 방안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대법원 판결에서는 김재규가 계엄군을 장악하여 무력으로 사태를 제압하고,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장악한 이후 대통령 출마까지 계획했다고 판결하였는데, 김재규 본인은 대통령 출마 의사는 없었다고 부인하였다. 그러나 김영삼이나 김대중 등 야당이 과연 김재규의 계획에 동의하거나 협조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계획대로 이루어지기는 거의 어려웠을 것이다.



긍정론
김재규는 정권 내에서 온건파였고, 당시 부마항쟁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박정희는 먼저 이승만과 곽영주 운운하며 총기사용을 지시했고 차지철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거론하며 아부를 하여 무력사용을 부추겼다. 결국 대통령이 직접 유혈진압을 지시한 이상, 김재규가 10.26 사건으로 박정희를 살해하지 않았더라면 부마항쟁때 5.18 민주화운동이나 천안문 6.4 항쟁처럼 사격명령이 동반된 학살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김재규의 항소이유 보충서를 보면 김재규는 부마항쟁에 대해서 대단히 진지하게 반응하고 있었고 자칫하다간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위기라고 판단했다. 또한 박정희와 차지철의 총기사용 및 캄보디아 운운하는 발언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음이 나타난다.

실제로 항쟁 당시 부산과 마산 내의 시민들이 대거 경찰서로 끌려가거나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또 김영삼 당시 신민당총재 외에도 김대중, 이철승 등 호남인사가 신민당에 있었고 여촌야도 현상이 강하여 수도권 민심이 야당에 있었으므로 단순히 부마에만 그치지 않고 호남, 수도권까지 퍼져 전국적으로 경찰, 군인들과 시민들의 대규모 충돌이 생겨 엄청난 희생자가 났을 것이다.

또한 당시 한국과 미국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박정희가 미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경진압을 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서울에도 계엄을 내리고 군을 투입할 계획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유혈사태로 번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김재규 역시 박정희 사망 이후 비상계엄령을 추진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5개월 한정이라는 전재를 달았으며 부마사태때도 유혈 진압을 비판했던 입장이기 때문에 강경한 방식으로 막가파 운영을 했을거라는건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군부의 시각을 돌리기 위해 그럴싸한 핑계를 대려고 했다가 뽀록이 났다는 견해다.

김재규는 차지철과의 갈등 이전에도 유신의 방향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자주 내비쳤고, 장준하 등의 민주화 운동 인물들을 비밀리에 도우면서 관련 가족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기도 했으며,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에게 박정희를 '환자'로 비유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법정에서도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보이며 사형 선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자세를 보았을때 단순히 차지철과의 갈등으로 인한 우발적인 권력 싸움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결정적으로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결단했던건 부마사태에 대한 대응책 방향이었는데, 박정희와 차지철은 강압적인 진압을 요구했으나 김재규는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결국 이것이 10.26이라는 도화선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이밖에도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의 구속을 반대하는 동시에 김대중의 가택 연금을 일시적으로 해제시키고 김영삼과 만나게 승인했으며, 차지철과의 갈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승진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다가 발생한 갈등이 아니라 국정 방향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갈등이 생겼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조갑제조차도 김재규가 사욕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칼럼을 개시했을 정도였다. 

1970, 80년대에도 국정 방향에 대해서는 뒤에서 박정희에게 실망했다는 의사를 자주 표명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으며, 7대 대선에서 마지막만 하고 다시는 안하시겠다는 약조를 김재규가 청원했다는 증언과 더불어 한때 진지하게 하야를 권고하려 했다는 증언도 있다. 결국 10.26은 박정희에게 오랫동안 직언을 통해 온건한 설득을 하려 했지만, 박정희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차지철을 중용하며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동안 쌓였던 실망감과 울분이 폭발하여 강경한 수를 두었다는 주장이다.


그동안 김재규를 썩 좋게 평가하지 않았던 한홍구도 2013년에는 주장이 달라졌다.

"김재규의 거사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지만, 여성 연예인들이 저런 식으로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큼은 확실히 차단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의 구명을 호소하면서 우리의 민주화가 김재규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민주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그 여성 연예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또다른 10·26사건이 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26일이었다. 70년을 두고 두 개의 10·26사건이 있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군사독재가 왔는데,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토의 제삿날과 군사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제삿날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중략)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덧붙여 한홍구는 "김재규는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해야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최상천 전 교수는 각종 문헌과 증언들을 근거로 김재규의 10.26을 재평가해야한다는 강의를 하기도 했다.

야권의 거물정치인인 천정배 의원도 10.26 희생자 30주기 합동 추모제에 참석하여 "김재규 장군과 의인들이 역사의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태민에 대한 조사, 그리고 경고

"최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최태민의 조사를 지시했고, 10.26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 최태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 이 보고서엔 최태민과 박근혜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최태민의 문란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를 처음 입수한 언론에서 공개한 시점이 2012년 말, 즉 18대 대선 직전 이였기 때문에 당시엔 찌라시 취급을 받으며 묻혀졌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에 주목하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10.26 사태를 결심한 동기 중 하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태민 - 박근혜 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고도 이를 바로잡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항소이유보충서로 남겼다. 즉 김재규는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가 지속될 경우 벌어질 잠재적 위험성을 알고 이를 항소이유보충서로 남기며 최후의 순간까지 경고 했지만, 그의 우려와 경고는 37년 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악의 정치 스캔들이 터지면서 결국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헌정 사상 초유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에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재평가하는 여론이 늘고 그를 반영한 기사 또한 나오고 있다.

인터넷 상에선 김재규 열사, 김재규 의사라고 불리기도 하며 그에 대한 드립과 진지한 논쟁이 지속해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디씨 인사이드 주식 갤러리는 '10·26 의거 명예회복 추진위’라는 조직까지 꾸리고 재평가에 앞장서고 있다.


최후의 진술을 통해 박정희 정권동안 나라에는 많은 쓰레기가 꽉 들어차 있고, 당시까지 정부나 대통령이 순리대로 선출된 적이 없음을 지적하며, 자신이 앞장서서 순리대로 하는 사례를 만들어 보고 싶어 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에게 자유민주주의가 문 앞에 왔으니, 받아들이기를 간청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으로 하여금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한다고 말하였다. 또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20~25년 앞당겨놨다는 자부을 가지며 간다는 말을 남기면서 그 자유민주주의의 만발을 보지못하고 가는게 아쉽다고 하였다. 끝으로 자신을 따라준 부하에 대해 그들은 좋은사람이고 자신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며 선처를 바라면서 극형만은 면해줄 것을 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