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오찬호, 2013, 개마고원)
본문 바로가기

[도서]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오찬호, 2013, 개마고원)


2014. 2. 2.

[도서]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오찬호, 2013, 개마고원)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아니 우리는 '정의로운' 차별에 찬성합니다

0. 들어가며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오찬호, 2013, 개마고원)은 제목과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고 나서, 바로 읽어보기로 결정한 책이다. 내가 책을 읽기 전에 이해한 이 책의 내용은 20대가 치열한 경쟁에 내몰려 있고, 이를 위해서 자신이 '우위'에 서있는 것. 이를테면 학벌, 성, 지역 등에 이르는 수많은 '스펙'들을 통해서 다른 이들을 차별한다는 내용이다. 즉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무기를 가지고 다른 이들을 내려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살아남기 위한' '추락하지 않기 위한' 절망적인 감정들이 뒤섞여 있다. 나는 이런 내용을 다루는 책일 것으로 예상하고 읽게 되었다.

책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먼저 20대들은 자기계발의 논리를 내면화 하고 있다. 자신을 희생하며,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노력한 만큼 그만한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를 통해서 20대들은 여러가지 요인(책에서는 주로 '학벌'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을 통해서 사람을 평가한다. 이러한 단순한 평가는 집단에 대한 편견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는 '차별'을 옹호하는 사회를 강화하고, 무한경쟁을 지속시킨다. 20대는 이처럼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특별한 대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문재인 후보의 선거 슬로건을 인용해, 이 사회의 '기회가 균등하지 않으며' '과정은 공정하지 않고' '결과 또한 정의롭지 않다'는 점을 밝히며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함을 역설한다.


어떠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러한 시도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대게 "이 사회가 공정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완벽한 '평등'은 아닐지언정, 저마다가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는 정도의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 시간들은 오히려 자신이 이뤄낼 성취들을 더 '빛나게' 할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의 내용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는데, 나 또한 이러한 생각을 하며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에서 다룬 내용, 즉 기회가 균등하지 않고, 과정은 공정하지 않으며, 결과 또한 정의롭지 않다는 점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으며' 지난 날 내가 가졌던 생각, 나의 독서실 책상 앞에 항상 붙어있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포스트잇을 뜯어 내고 "더 나은 사회가 필요하다"는 문구를 가슴에 새겼기에 책에 애틋한(?) 감정마저 갖게 되었다.

이미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이러한 책의 마무리가 아쉬울 지언정, 저자의 말대로 이 사회가 공정하다고 믿고 결과가 정의롭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책의 구성이 꽤나 도전적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책이 쉬운 말투로, 실제 20대들의 경험과 이야기들을 통해서 "맞아! 그렇지." 라는 생각을 유도하며 흥미롭게 읽어갈 수 있게 쓰여져 있기에 읽는 데에도 크게 부담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괴로운' 점이 있다면 자신의 모습을 계속해서 되돌아 보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그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1.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아니, 우리는 '정의로운' 차별에 찬성합니다.

나는 지금의 20대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아니, 우리는 '정의로운' 차별에 찬성합니다." 물론 최근에는 일간베스트 처럼 노골적으로 '차별'과 '혐오'를 이야기하는 집단도 등장했으나 이들도 기본적으로 모든 차별에 찬성하지는 않는다. "요즘의 20대에게는 '정의'도 '의로움'도 없다."고 질타하는 기성세대의 생각과는 달리 20대는 기본적으로 '정의'에 목말라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야기하는 정의는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오히려 20대는 차별에 찬성한다. 아니, '정의로운' 차별에 찬성한다.

이러한 현상은 책의 내용에서 나타난 'KTX 승무원 파업'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KTX 승무원 파업은 비정규직으로 입사했던 승무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던 사건으로서 결국 대법원 까지 가는 법정 싸움에서 승무원들이 승소하여 정규직으로 전환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아니, 비정규직인거 알고 들어왔으면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건 억지이며, '부정의'아니냐." 저자가 지적하듯이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며 촛불을 들었던 이들도, 대기업의 횡포를 지적하던 이들도 KTX 승무원들에 대해서는 같은 반응을 쏟아낸다. 우리 사회의 정의는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 것'이며 '비정규직으로 입사했다는 건 열심히 노력하지 않닸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출발선과 과정의 불공정성을 이야기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다. 이미 어려운 형편에서 일하며 성공한 사례들을 널려 있으며 그런 사례들은 다른 '패배자'들을 공격한다. "너희들의 실패는 너희들의 잘못이라고." "지금의 시대는 노력만 하면 노력한 대로 거둘 수 있는 세상"이라고. 나는 이러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이 공정하다'는 인식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세상이 공정하다는 의미는 대기업의 비리나 정치인들의 권력 남용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윗대가리'들을 제외한 세상은 공정하며 노력한만큼 어느정도 얻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에 '어느정도' 수긍한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인식을 갖게 된 것에는 사회적 배경이 있다. 실제 고도 성장을 계속하던 산업화 시기에는 어느정도 '자수성가'가 가능했다. 물론 당시에도 사회가 '공정'하지는 않았으나 지금 기성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원인으로 존재한다. 사회의 부가 급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분배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지금의 사회도 그럴까? 지금의 사회는 구조적으로 장기불황에 빠져있으며 지속적으로 실업이 증가하고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소위 1%의 부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뚫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이러한 현상은 대학생인 내가 실제 주변의 선배들을 보며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가 지적하듯이 수많은 연구자료들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렇게 구조는 달라졌지만 시대적 '인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산업화 시대의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계발의 논리'가 등장한다. "네가 더 노력하지 않아서" 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사회 구조를 보지 못하고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로 돌린다. 결국 정의는, '개인의 노력'에 달려있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결과'에 의해서만 '과정'은 평가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 의해서 '결과'는 정당화 된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만,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


 

2. "쟤네 사회 나가면 공부만 한 학생들에게 짜장면 배달이나 할 것이다."

"쟤네 사회 나가면 공부만 한 학생들에게 짜장면 배달이나 할 것이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본 댓글이다. 학교 폭력에 대한 기사가 나오면 베스트 댓글에는 꼭 이러한 댓글들이 자리 잡는다. 나는 이 댓글들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저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폭력'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그 폭력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다시 '폭력'이 개입한다. 사회의 강자, 즉 돈 많은 자가 돈 없는 자를 괴롭히는, 그러한 폭력이 등장하며 가해자들을 '응징'하는 것이다. 사회의 가해자들은 어느새 정의의 '심판자'가 되어 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논리가 가능한 것인지 항상 궁금했다.

그러나 논리는 단순하다. 짜장면 배달이나 하는, 혹은 비정규직 들은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안하고 놀기만 하던 애들이고 그러한 애들이 자라서 저렇게 되는 것이니 '당해도 싸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정의로운 '인과응보'인가. 이런 식으로 '집단'에 대한 차별은 강화되고 정당화 된다. 그러나 과연 이 땅에 있는 1000만 비정규직은 학교 다닐 때 다른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돈을 빼았던 학생들인가? 그것에 대한 실질적인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그 '정의로운' 차별에는 부정하고 싶겠지만, 또 하나의 폭력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이들이 나의 말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그러한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할 것을 잘 안다. 예를 들어 명문대에 다니는 학생들은 더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하며 지방대에 다니는 학생들은 예의도 없고 성실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주로 '경험'에서 나온다. 자신들이 겪어보니, 학교를 다녀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정말 어떠한 편견도 존재하지 않는가? 명문대에도 게으르고, 예의 없는 학생들은 충분히 많다. "공부 잘해봐야 싸가지도 없고 소용없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는 집단 내 소수의 일탈로 이러한 점들이 치부 된다. 그러나 만약 지방대생이 이러한 행동을 한다면?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탓하거나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번 돌아보자는 것이다. 나 또한 저러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고, 아직까지도 그러한 인식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학벌주의에 반대하지만 페이스북에서 일베충 같은 댓글들 다는 이의 학교를 확인하고는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한 번 돌아보자. 과연 그런가? 실제로 지방대에 다니더라도 성실하며 예의 바르고 창의적인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존재한다. 그저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정말 어떠한 편견도 존재하지 않는가? 내 생각은 정말로 이성적이고 객관적인가?" 라고 말이다.



 

3.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맞다. 혜민 스님의 유명한 '힐링서적'이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가 비판하는 이 책의 제목을 나는 다른 곳에 적용해보고 싶다. 우리가 그토록 당연하게 생각해오던 것들, 정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던 것들은 과연 정의로울까? 당연한 것일까? 이 사회가 더 나아질 가능성 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걸까? 나는 개인적으로 '달리던' 사람이었다. 노력이 모든 것을 보상해준다고 믿었으며 아주 소수의 불행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롭다고 믿었다. 그리고 노력하지 않는 패배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마땅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 201, 썸앤파커스), 이 책을 비롯해 수많은 자기계발서/힐링 서적이 서점가를 휩쓸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과연얼마나 나아졌을까?

그러던 나 또한 멈추어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라서 언급하지는 않겠으나 그 때에 다른 것들이 보였다. 사회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불공정 했고, 불평등 했다. 당장 내일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이 '소설' 속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했고 공부를 하고 싶어도 공부를 할 수 없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저도 총이 아니라 펜을 잡고 싶었습니다."라는 군인의 말에 "그래서요?"라며 웃었던 이에게는 그토록 분노하는 이들이 "저도 편의점 계산대가 아니라 도서관에 있고 싶었습니다."라고 외치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쉽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말한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멈추어, 이 사회에 대해서 한 번 쯤은 진지하게 되돌아보자. 그리고 그 시작을 함께 할 책으로 나는 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추천하고 싶다.

 


 

4. 나아가며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은, 사실 생각보다 마음씨가 나쁘지 않다. 어쩌면 혜민 스님의 말처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정말로 많을 것이다. 그동안 멈추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 지만 생각했다면 한 번 쯤은 이 사회가 무엇이 문제인지를 돌아볼 때가 아닌가 싶다. 취업난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한 선배의 기사가 생각난다.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진학했고 아마 와서도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다. 그리고 그 때에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수많은 20대들은 그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확인할 새도 없이 스펙 쌓기에 몰두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떨며 잠들었을 것이다. 우리 이제 정말로, 멈추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판단은, 당신의 몫이지만.